•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해달별사랑
 
 
 
카페 게시글
한국문화유산자료 스크랩 사랑 병산10경 이야기
으뜸빛 추천 0 조회 81 11.10.21 07:4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병산10경(屛山十景)
소재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면 병산리

경관연혁
- 권구와 병산십경
병산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병산서원(屛山書院)의 앞에 있는 산 이름이다. 이 병산리 일대는 산은 가파르고 넓은 들이 없어서 사대부들의 주거지로는 적합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렇지만 경치가 아름답고 조용한 곳이기에 하회마을에 있던 풍락서당(豊樂書堂)을 이곳으로 옮기고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과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 1598~1678)를 제향(祭享)하는 병산서원으로 승격시켰다.

이 병산서원은 도산서원(陶山書院), 호계서원(虎溪書院)과 함께 퇴계 학파의 3대 서원 가운데 하나이며, 특히 풍산, 예천, 문경, 상주 일대에 주로 거주하는 서애 학파의 선비들에게는 성지(聖地)나 다름없는 곳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처럼 병산서원이 옮겨 옴으로써 이름 없는 강마을에서 서애 학파 사대부들의 정신적 고향이 된 병산리 일대에서 특별히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골라 병산십경이라 명명하고 또한 십경시(十景詩)를 지어 이를 널리 알린 사람은 조선 영조 때 학자인 병곡(屛谷) 권구(權?, 1672~1749)이다.

권구는 하회의 이웃 마을인 지곡(枝谷:지금의 풍산면 가일리) 출신이다. 어머니가 류성룡의 손자인 류원지의 딸이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외가인 하회에서 공부하였다. 그런데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의 손녀에게 장가든 것이 계기가 되어 갈암 문하에 출입하여 제자가 되었기 때문에 권구는 서애 학파와 학봉 학파의 학문을 동시에 승계하는 독특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원래 병산서원 일대는 강과 산으로 둘러 싸여 있는데다가 장마가 지면 외부와 단절되는 관계로 어촌 10여 호만 있는 한적한 곳이었다. 권구는 병산서원을 자주 드나들며 이 일대를 유심히 보아 두었다가 1716년 역질이 창궐하자 가족들을 이끌고 이 어촌으로 이주하였다.
그리하여 1723년 지곡 본가로 돌아갈 때까지 8년간 병산서원 서쪽 마을에 살면서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널리 알리는데 가장 크게 기여하였다.

권구가 살던 마을의 원래 이름은 적곡(跡谷) 또는 족적곡(足跡谷)이었는데, 권구는 이를 병곡(屛谷)으로 고쳤다. 권구가 1728년(영조 4)에 지은 「병곡기(屛谷記)」에 의하면 병(屛)자는 평성(平聲)으로 읽으면‘울타리’나‘병풍’이라는 뜻이지만 거성(去聲)으로 읽으면 ‘물리치다’,‘버리다’,‘멀리하다’의 뜻이 된다고 하였다.

물론 병산의 병자는 병풍이란 뜻이지만, 자신이 이름을 고친 병곡은 ‘버리다’, ‘멀리하다’의 뜻을 따라서 병기(屛棄), 병장(屛藏)의 마을이라는 뜻에서 병곡이라고 명명한다고 하였다.

권구는 또한 병곡을 자신의 호로 삼아서 세상을 멀리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고자 하는 자신의 출처관(出處觀)을 나타내었다. 권구는 1724년(경종 4) 또 한편의 「병곡기」를 지었는데 이때는 고향인 지곡으로 돌아와 살고 있을 때임에도 계속 병곡이라는 호를 쓰는데 대하여 어떤 손님이 이의(異議)를 제기하자 이에 대한 답변으로 쓴 것이다. 세상이 자신을 병기하기에 자신은 기꺼이 병퇴(屛退)하였고 또한 병퇴하는 방법으로 자신은 궁곡(窮谷)에 병장함을 달갑게 여긴다고 하였다.


명소
- 병산서원(屛山書院)


관련인물
- 권구(權?, 1672~1749)
권구는 병곡에 살면서 「병산잡록(屛山雜錄)」, 「병산십절(屛山十絶)」, 「병산이십일절(屛山二十一絶)」 같은 많은 시를 남겼다. 이 가운데 『병산잡록』은 「이거(移居)」, 「한거(閒居)」 두 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병곡으로 옮겨 와서 한가롭게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읊은 것이고 「병산이십일절」은 병곡을 떠나 다시 지곡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병산 일대의 아름다운 풍광을 길이 기억하기 위하여 21수의 7언 절구를 지은 것이다. 이처럼 『병산잡록』은 병곡으로 옮긴 직후에, 「병산이십일절」은 병곡을 떠나기 직전에 지은 것인데 비하여 「병산십절」은 병곡에 살던 도중에 병산 일대의 대표적 경승 10곳을 스스로 명명하고 10수의 7언 절구를 지은 것이다.

 

명소 이야기
- 권구의 병산에 대한 사랑
제1경.
덕암(德巖)은 병산서원 근처의 낙동강 가에 있는 커다란 바위로 원래의 이름을 그대로 두었다.

제2경.
영일봉(迎日峯)은 병곡마을의 가장 동쪽에 있는 봉우리로 아침마다 해가 떠오르는 곳이다. 원래 이름이 없었으나 권구가 영일봉이라 명명하였다.

제3경.
한수동(寒水洞)은 강변의 절벽 아래 그늘진 곳에 마치 성(城)처럼 자리 잡은 마을이다. 원래 이름은 한소동[大牛洞:큰 소라는 뜻]인데 한소와 음이 비슷한 한수동(寒水洞)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늘진 곳에 있다고 하여 음동(陰洞)이라고도 하며 기온이 낮아서 봄이 다 간 뒤에야 바위 언덕이 비로소 꽃이 피는 곳이다.

제4경.
초초진(招招津)은 병산서원 만대루(晩對樓) 앞에서 병산으로 건너가는 나루이다. 배는 항상 북쪽 언덕인 만대루 앞 모래톱에 매여 있으며 강 건너 병산 쪽에서 절벽 길을 따라 온 나그네가 강을 건널 때는 강 건너에 있는 사공을 큰 소리로 불러서 건넌다.

제5경.
표은굴(豹隱窟)은 병산의 절벽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표범이 사는 굴이다. 때로는 한 낮에도 표범이 으르렁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제6경.
제공천(梯空遷)은 병산의 절벽 사이를 지나는 비탈길이다. 낭떠러지에 돌로 놓은 잔도를 올라가는 것이 마치 사람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제공천이라 명명하였다. 권구는 이 길을 지나며 읊은 「과병산천로(過屛山遷路)」라는 시에서 “절벽을 감돌아서 오르내리는 산비탈 길, 강 쪽은 천길 절벽 말발굽이 위태롭네.[繞壁高低石路?, 臨江千尺馬蹄危]”라고 읊고 있다.

제7경.
월은담(月隱潭)은 강의 북쪽에 있는 깊은 소이다. 달이 뜨면 병산의 절벽이 강물 속에 거꾸로 비쳐서 아름다운 경치를 만든다.

제8경.
영귀정(詠歸亭)은 강북의 언덕 위에 수목으로 둘러싸인 작은 단(壇)을 쌓고 지은 정자이다. 한가롭게 소요하면서 시를 읊을 만한 곳이다.

제9경.
낙하잠(落霞岑)은 병산의 서쪽 끝에 있는 봉우리로 해가 질 때는 으레 노을이 어리는 곳이다.

제10경.
인곡(仁谷)의 속명은 이금실인데 한문으로는 인곡(仁谷)이라고 쓰는 산 아랫마을이다. 옛 이름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이처럼 권구가 명명한 병산십경은 권구 이후로 찾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권구의 친구인 포헌(逋軒) 권덕수(權德秀, 1672∼1759)가 권구의 십경시에 차운하여 「차병곡병산십절(次屛谷屛山十絶)」을 지었는데 권덕수는 이현일 문하에서 함께 공부한 동문인데다가 나이도 같았기 때문에 일생동안 친밀하게 지낸 사이였다. 그러나 그 이후로 병산십경은 점점 잊혀져간 듯 한데 오늘날에는 병산십경의 정확한 위치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권구 같은 대학자가 명명했음에도 후학들이 병산십경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은 병산 일대의 지리적, 경제적 환경이 아무래도 사대부가 살기에는 부적합했던데 원인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곧 병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알아보려면 권구처럼 병산 옆에 장기간 거주하여야 하는데 그런 기회를 가진 사대부들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병산서원만 하더라도 장기간 거접(居接)하는 유생이 거의 없었기에 병산 일대의 자연을 권구처럼 애호(愛好)한 사람이 뒤를 잇지 못하였던 것이다.

권구의 병산에 대한 사랑은 병산십경시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병산육곡(屛山六曲)이라는 시조(時調)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자연을 벗 삼아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생활을 읊은 이 여섯 곳의 시조는 이현보(李賢輔)·이황(李滉) 이후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영남 학파 사대부들의 활발한 시조 창작 활동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