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브레송 기획 시리즈 2
작은 것들의 위대함_Still Life
The Greatness of Small Things_Still Life
참여 작가: 김경희, 박미정, 윤은숙
정물은 초창기 사진에서 가장 사랑받는 소재였다. 초기 사진술에서 오랜 노출 시간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 정물은 이상적인 오브제였다. 17세기 네덜란드와 플랑드르의 정물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던 초기 정물 사진은 이와 비슷한 구성 방식과 주제를 따랐다. 즉, ‘별것 아닌’ 오브제들이 주목받기 시작한 건 네덜란드에서 비롯된 정물화에서 비롯됐다. 정물화는 과일, 꽃, 음식, 화병, 식기, 낡고 오래된 책과 같은 평범한 일상의 사물이 빛을 발휘하는 장르이다. 일상 사물 중심의 공간이 만들어내는 정물은 ‘정지된 것’이기에 초기 사진가들에게도 당시의 기술적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장르였다. 미술사학자 노만 브라이슨(Norman Bryson)은 정물에서 발견되는 사물의 사소함을 가리켜 "작은 것들의 위대함"이라고 지칭했다. 인물과 사건(event), 서사(narrative)가 배제되고, 일상적인 사물들의 물질성만을 강조하는 정물은 단순히 사물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사물들이 지닌 상징성과 맥락을 통해 더 큰 의미를 전달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이를 통해 사물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의도하지 않은 상호 관계성이 드러나기도 한다.
브라이슨은 정물화를 ‘로포그래피(rhopography)’로 정의하며, 이는 중요성이 없다고 여겨지는 작은 물건들, 즉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을 묘사한 장르로 규정한다. ‘작은 물건들, 하찮은 물건들’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로포스(rhopos)에서 유래한 로포그래피는 역사적 서사나 신화 또는 인간 중심의 위대함을 묘사하는 메가로그래피(megalograph)와 대조되는 개념이다. 정물화에서는 무심코 지나친 평범한 일상의 물건들이 얼마나 풍부하고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단순히 물건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이 지닌 문화적 상징과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예컨대 해골이나 모래시계, 빈 유리잔, 촛대, 음식, 물고기, 비눗방울 등은 삶의 허무와 공허함에 대한 알레고리로서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에 자주 등장한다. 원래 바니타스 정물화는 17세기 네덜란드의 황금기에 중산층에 이르기까지 넘쳐나는 부를 소비하기 위한 욕망의 산물이었다. 개신교인 칼뱅교의 영향으로 종교화 대신 정물화와 풍속화가 유행했고, 가정마다 값비싼 실크, 도자기, 튤립을 그린 정물화가 유행했다. 검소함과 자기 규제를 강조하는 종교적인 영향으로 비록 사치스런 물건들로 화폭을 채우더라도 인생의 교훈적 내용을 표면에 내세웠다. 즉 죽음을 기억하고 겸손해지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인생의 덧없음을 뜻하는 바니타스 같은 교훈을 알레고리로 사용하였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바니타스는 재해석되어 정물 사진에 나타난다.
고도화된 산업 발전에 따른 대량생산과 대량 소비사회의 출현은 수많은 플라스틱, 비닐류 제품뿐만 아니라 타자기, 필름 카메라, 에스프레소 추출기 등과 같이 기술 발전에 따른 생산품 등을 조합하여 우리 시대의 바니타스를 표현하고 있다. 기술의 빠른 발달과 변화의 가속화 속에서 느끼는 불안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소비주의와 과잉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박미정의 <보내야 하는 사물들을 위한 정물, Mourning>을 살펴보자. 집안 인테리어 공사에서 나온 폐자재들인 플라스틱, 스티로폼 등을 겹겹이 쌓아 조형물을 만들고 종이꽃을 장식적인 오브제로 사용하고 있다. 즉, 용도 폐기되어 버려질 물건들을 제물처럼 정성스럽게 마련하여 제단을 꾸미듯 예쁘게 차리고 애도하듯 사진을 찍고 있다. 한때는 곁에 두었던 소중한 물건들이지만 이제는 소비되어 버려지는 것들에 얽힌 과거의 기억을 되새김하고 사라질 것에 대한 죽음을 슬퍼하는, 의인화된 알레고리를 바니타스 정물 사진으로 표현하고 있다. 영원히 지속될 듯한 시간의 무상함과 피할 수 없는 죽음의 허망함의 알레고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음식에 관한 김경희의 <Lying lying Table_누워서 거짓말하는> 정물 작업은 시각적으로 독특하다. 남은 음식이나 고구마, 대파, 감자, 양파와 같이 주변에서 흔히 사용하는 식재료를 사용한 정물 사진이지만 익숙하게 보았던 원근법적 사진에서 한 참 벗어나 있어서 시각적 참신함을 느끼게 한다. 서양미술의 원근법과 구별되는 전통 한국화에서 사용되는 부감법(Bird's-eye view)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사물은 앞에 위치시켜 크게, 멀어질수록 작게 차별적으로 표현하여 화면의 깊이와 입체감을 나타내는 선원근법(Linear perspective)과 달리 부감법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인해 모든 사물이 동등하고 같은 가치를 지닌 동양적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 김경희는 부감법을 사용하여 화면의 확산적 깊이와 공간감을 살리고 서사적 내용을 충실히 담아내고 있다. 더 나아가 작가는 화면 속의 누워있는 병이 마치 세워져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연출하여 착시적 효과도 꾀하고 있다. 김경희 작업은 넘쳐나는 음식물을 통해 과잉 소비주의에 경각심을 환기한다. 직접 수경재배를 하여 잎과 뿌리가 자란 대파마저도 촬영하는 동안에 시들어가는 모습에서 시간의 유한성과 덧없음을 바니타스 정물 사진으로 담아내고 있다.
사진만큼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용하는 매체도 드물다. 최근 AI(인공지능) 시대의 도래는 이미지 제작 방식에 많은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텍스트 기반의 명령어인 프롬프트(prompt)만으로도 이미지 제작이 가능하게 되면서 빛으로 그린 이미지라는 사진 용어 자체도 무색해지고 다른 용어로 대체될지도 모른다. AI 기술이 진일보할수록 기술적 과정보다는 자신만의 독보적 스타일 구축의 필요성이 커질 것이고, 저작권 문제나 진정성, 오리지널리티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부엌도_Plastic Kitchen>으로 주목받았던 윤은숙은 기존 작품을 AI 기술로 재구성한 작업을 선보인다. 이번 작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단순한 기술적 실험을 넘어, 창작의 주체가 인간과 AI 사이에서 어떻게 새롭게 정의될 수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고...(중략)... 인간과 기계가 함께 만들어낸 새로운 정물화”라고 말한다. 생선, 감자, 포도주병, 나이프 등 바니타스 정물화의 소재를 사용하여 AI가 만든 작업은 전통적인 빛의 사용과 구성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다. <부엌도: Still Life Reimagined by AI> 작업을 살펴보면 연기 스모크같은 효과는 오히려 뛰어나다. 이제 미드저니(Midjourney), 달리(DALL-E)와 같은 AI는 사진가의 보조 수단을 넘어서 창작 과정의 중요 파트너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김남진-
김경희, <Lying lying Table_누워서 거짓말하는> 연작
박미정, <보내야 하는 사물들을 위한 정물, Mourning> 연작
윤은숙, <부엌도: Still Life Reimagined by AI> 연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