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생가와 청옥시절 집 기념하고 복원해야
전태일 열사의 고향은 대구다. 대구에 있는 전태일 열사(이하 전태일) 가족이 50년 전에 살았던 집이 지금도 있다. 대구시 중구 남산로 8길에 있는 이 집은 누군가가 안내하지 않으면 찾기 어렵다. 집 어디에도 전태일이 살았던 집이라는 표시가 없다. 한때 도로 부지에 편입될 예정이어서 사라질 위기를 맞기도 했다. 현재 그가 살던 집은 허물어질 듯 위태롭게 서 있다.
대구시 중구 남산로 8길 25-16에 있는 전태일 열사가 살던 집. 대문과 담장은 옛 모습 그대로였으나 많이 닳고 낡았다. ©용석록 기자
대구시 중구 계명오거리에 있는 공원. 전태삼 씨는 할아버지가 살던 집터가 이곳이라며 이곳이 전태일 생가라고 했다. 남산동 50번지로 알려진 곳이다. 길 건너에 이상화 문학관과 계명성당이 있다. ⓒ용석록 기자
지난 5일 전태일의 동생 전태삼 씨와 맹문재 시인, 백무산 시인, 남종덕 전 청계노조 위원장, 고희림 시인 등 문인들이 ‘대구 시절 전태일’을 찾아보려고 답사에 나섰다.
전태삼 씨에 따르면 전태일은 1948년 음력 8월 28일 할아버지 집(등본 주소 : 대구시 중구 동산동 316번지)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전태일을 기록한 일부 책과 인터넷 매체에는 대구시 중구 남산동 50번지 혹은 남산동 184번지에서 태어났다고 돼 있다. <울산저널>이 전태일재단과 전태일 여동생 전순옥 의원실에 확인했지만 전태일이 태어난 집 주소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태어난 장소에 관해서는 좀 더 정확한 조사가 필요하다. 전태일이 청옥고등공민학교에 다니던 시절 살았던 집은 대구시 중구 남산로 8길 25-16이 확실하다.
10월 항쟁 경험 전태일 아버지
아들에게 근로기준법 가르쳐줘
대구는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 등 노동자 민중항쟁이 거세게 일었던 도시다. 전태일은 1948년에 태어났다. 전태일 평전을 보면 전태일 아버지 전상수는 젊은 시절 대구 총파업을 경험한 적이 있어 전태일에게 근로기준법을 알려준다. 전태일이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외친 것은 1940년대 대구 노동자들의 투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전태일의 평화시장 삶 못지않게 대구에서 태어날 당시의 사회상과 전태일 생가를 복원하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전태일 생가 답사에 나선 이들은 "계명오거리에 있는 공원이 전태일의 생가라면 '전태일 생가'라는 표지석을 세우고 가능하다면 '전태일 공원'으로 만드는 노력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했다.
박정희 군사정권 이후 사람들은 대구를 ‘보수’의 대명사처럼 여기지만 대구지역 노동자는 전국노동조합평의회(전평) 결성 때 주요 골간이 됐다.
1946년 전국노동조합평의회(전평) 9월 총파업이 일어나기 전인 8월 23일 대구전매노동자들이 임금지급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해 노동자의 생활을 폭로했다. 9월 23일 대구 철도노동자들은 부산과 동시에 파업을 시작했다. 파업은 9월 26일 대구의 전기, 섬유, 금속 등 모든 산업분야로 확대됐다. 10월 1일 저녁 9.24 총파업을 지지하는 대구 400여개 공장노동자와 학생, 시민 1만여 명이 가두행진을 벌이다 경찰 발포로 사상자가 생겼다. 시위대는 다음날 아침까지 항의시위를 이어나갔고, 이는 10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10월 2일 저녁 6시에 대구지역 일원에는 계엄령 선포됐다. 10월 3일에는 경북 영천, 의성, 군위, 왜관, 선산, 호항, 영일 등지까지 투쟁이 확대됐다. 항쟁은 통영, 창녕, 마산, 울산, 부산 등 경상남도로, 충청, 경기, 황해도와 강원도, 전라도까지 확대돼 1946년 말까지 계속됐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분신과 전태일이 평화시장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했던 역사는 한국 노동운동사에 큰 획을 그었다. 그가 죽은 뒤에 바로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됐고 훗날 이는 전노협과 민주노총 건설의 근간이 됐다.
1984년 전태일기념사업회가 만들어졌고 1985년에는 전태일기념관, 전태일재단이 만들어져 ‘전태일문학상’과 ‘전태일노동상’을 제정했다. 2000년 전태일 분신 30주기를 맞아 평화시장 앞 보행로에 표석을 설치, 2002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전태일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2005년 청계천 복원공사가 끝난 후 청계천 버들다리 가운데에 전태일 기념동상을 세웠다. 서울시는 2014년 연말 전태일 분신 현장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했다.
‘기쁨과 사랑 마음껏 느꼈던’ 대구 청옥 시절
삼총사 추억 깃든 집 있지만 알려지지 않아
전태일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은 그의 삶과 함께 서울 평화시장을 떠올린다. 전태일이 일구어낸 현장이 평화시장이고 전태일 분신 뒤에 어머니 고 이소선 여사는 청계피복노동조합 일을 하면서 그 거리에서 싸웠다.
전태일이 분신하기 전 유서에 썼던 행복했던 유년 시절 삼총사와의 추억은 대구에 있다. 삼총사로 불리는 ‘원섭이와 재철이’는 대구 시절 친구다. 전태일이 좋아했던 여학생 ‘김예옥’도 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에서 같이 공부한 친구다. 전태일은 일기장에 청옥 시절 체육대회를 ‘그늘과 그늘로 옮겨 다니면서 자라온 나는 한없는 행복감과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 서로간의 기쁨과 사랑을 마음껏 느꼈다’고 적었다. 전태일에게 대구 청옥 시절은 ‘내가 살아 있는 인간임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고 진심으로 감사했던 때’였다.
전태일의 동생 전태삼 씨는 이소선 어머니와 같이 대구 남산동에 있는 옛집에 가고 싶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꼭 한 번 그곳에 가자고 했었는데 마침 부산 한진중공업 85크레인에 김진숙 지도위원이 올라갔을 때라 거기 쫓아다니기 바빴다. 결국 어머니는 그 집을 한 번도 다시 찾아가보지 못하고 2011년 7월 18일 병원에 입원, 9월 3일 운명했다.
1962년, 전태일은 대구에서 아버지를 도와 봉제 일을 했다. 집 앞에 도랑이 있었고 도랑 건너엔 배추밭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배추밭을 지나면 지금의 명덕초등학교 안에 청옥고등공민학교가 있었다. 당시 대구 남산동에는 봉제공장이 즐비했다.
전태일 가족이 살던 행랑채는 허물었지만 구들장과 창, 담장은 그대로다. ⓒ용석록 기자
전태일이 살던 집으로 들어갔더니 본채는 남아 있는데 전태일 가족이 살던 행랑채(판잣집)는 허물어졌다. 행랑채가 있던 자리에 구들장이 보이고 담장과 창은 그대로다. 전태일이 살던 집에는 본채에 주인이 살았고, 행랑채에 전태일 가족 여섯 명과 세 들어 사는 두 자매가 살았다. 방 2칸에 부엌 2칸. 각각 따로 셋방을 살았는데 행랑채 면적은 7평 남짓이다.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 주게
원섭이와 재철이 중간이면 더욱 좋겠네"
1963년, 전태일이 원섭과 재철이랑 다니던 야간학교 ‘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는 현 명덕초등학교 안에 있었다.
대구시 중구 남산로2길에 있는 명덕초등학교. 이 곳이 전태일이 다니던 청옥고등공민학교가 있던 곳이다. ⓒ용석록 기자
대구시 중구 남산로 8길 25-16. 전태일이 청옥고등공민학교에 다니던 시절 살던 집. ⓒ용석록 기자
전태일 동생인 전태삼 씨가 대구 남산동에서 형 전태일과 부모님, 순옥, 순덕 여섯 식구가 살았던 집 앞에 섰다.
“어렸을 때 저 대문만 보면 대문 너머에 있는 밥상이 보이는 거예요. 그 당시 먹을 게 없어서 힘들던 때 우리 집 사정을 잘 아는 주인아주머니가 가끔 우리를 불러 밥을 먹이곤 했거든요. 여기가 바로 그 청인데 그때 있던 마루가 지금도 그대로 있네요.”
전태삼 씨가 어린 시절 대구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전태일은 1948년 8월 28일 대구에서 아버지 전상수와 어머니 이소선 사이에 태어났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1950년 6월 28일 부산으로 피난 간다. 전태일의 아버지는 1953년 말까지 부산에서 봉제공장을 하다가 1954년에 여섯 식구가 서울로 간다. 전태일 가족은 서울서 1961년께 다시 대구로 내려온다. 서울서 가출했던 전태일이 대구로 내려온 건 1962년이다.
전태일 어머니는 대구 동산병원에서 구호물자가 나오면 그걸 사다가 면도칼로 헌 옷 박음질한 걸 뜯어 다림질을 했고 전태일과 전태삼도 일을 도왔다. 아버지는 헌 옷을 새 옷처럼 만들었다. 1960년대 남산동 효성여고 주변에는 염색공장이 즐비했다.
전태삼 씨는 “대나무에 염색천이 길게 늘어져 바람 불 때 보기에 좋았는데 동네 아이들은 그곳에 올라가서 놀곤 했다”고 회상했다.
1963년 전태일은 낮에는 아버지를 도와 일하고 밤에는 명덕초등학교 안에 있는 청옥고등공민학교에 다녔다. 그곳에서 전태일이 김재철과 박원섭, 김예옥을 만난다. 고등공민학교는 중학교를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이 다닌 야간학교였다. 이때 전태일 나이 열다섯 살. 전태일은 일기장에 이때를 가장 행복했었다고 회상한다. 전태일은 서울에서 초등학교 4학년까지 공부하고 학교를 못 다녔다.
전태일 집 앞으로는 명덕국민학교가 보였고 뒤로 효성여고가 있었다. 당시 전태일 가족이 살던 판잣집에는 재일이와 재일이 누나가 세 들어 살았다. 재일이는 까만 교복을 입고 중학교에 다녔고, 재일의 누나는 하얀 교복을 입고 여고에 다녔다. 전태일이 낮에 일하면서도 고향에서 버텼던 건 야간학교나마 청옥고등공민학교에 다녔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복한 시간도 잠시, 아버지는 전태일에게 학교를 그만두고 2~3년만 열심히 일해서 공장 만들면 다시 학교에 보내주겠다고 한다.
전태일은 동생 전태삼에게 지금 공부하지 않으면 훗날 공부할 수 없다며 서울로 가자고 한다. 둘은 서울로 갔지만 동생이 크게 앓으면서 엄마를 찾자 전태일은 할 수 없이 동생과 함께 대구로 내려온다. 대구에 온 전태일은 동생 손을 잡고 명덕초등학교 운동장에 서서 청옥고등공민학교를 한참이나 쳐다봤다. 형제는 학교 운동장을 벗어나 배추밭 고랑을 걷다가 집 앞에 이르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서 떨었다. 아버지의 매질도 겁나고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그때 마침 어머니가 나와 세 모자는 한참을 울었다.
1964년, 전태일 어머니는 식모살이를 해서라도 자식들 살리겠다고 서울로 간다. 막내 순덕이가 엄마 찾으며 울자 전태일은 어머니를 찾겠다고 순덕이를 들쳐 업고 서울로 갔다. 전태삼은 순옥이를 아버지한테 맡기고 혼자 서울로 간다. 훗날 아버지도 서울로 올라가 흩어졌던 가족들은 서울에서 다시 모여살기도 한다. 전태일은 1964년 평화시장 봉제공장에 미싱 보조로 들어가서 일한다.
전태일이 청옥고등공민학교에 다니던 시절 살던 집. 주인집이 사는 본채는 아직 사람이 살고 전태일 가족이 살던 판잣집은 너무 낡아서 지금 사는 집 주인이 20년 전에 허물었다고 한다. 대구시 중구 남산로 8길 25-16. ⓒ용석록 기자
대구지역 작가 전태일 기억하며 문학 강연
‘한국문화분권연구소’는 5일 저녁 7시 대구 광개토병원 강당에서 ‘전태일 고향과 문학’ 강연회를 열었다. 강연을 전후해 고희림 시인을 비롯한 대구 지역 문인들은 전태일이 살았던 집을 답사했다.
5일 대구 광개토병원 강당에서 열린 ‘전태일 고향과 문학’ 강연. ⓒ용석록 기자
‘전태일 고향과 문학’ 강연은 맹문재 시인이 대담 형식으로 끌어가고 전태삼 씨가 전태일과 함께 한 대구시절 이야기를 들려줬다.
김용락 대구경북작가회의 회장은 “전태일 고향이 대구임에도 많은 이들이 이를 알지 못하고, 그가 살았던 집을 우리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 있어 부끄럽다”며 주변에 전태일이 살던 집을 알리는 일부터 해나가기로 했다. 그는 전태일문학상 시상식을 서울과 대구에서 번갈아가며 하는 것을 제안한다든가 다방면으로 대구시절 전태일을 기리기 위한 노력을 하겠다고 했다.
전태삼 씨는 “같이 세상을 보자는 형의 생각처럼 여러분도 대구 시절 전태일이 머물렀던 곳에 관심을 가졌으면 하고, 청옥고등공민학교 다니던 시절을 많은 사람들이 함께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강연회에 참여한 이들은 전국노동자문학회가 엮은 전태일열사 30주기 기념시집 <너는 나의 나다>(갈무리, 2000), 백무산.조정환.맹문재 시인이 엮은 전태일 열사 탄생 60주년 기념 시집 <완전에 가까운 결단>(갈무리, 2009)에 있는 시를 읽었다. 강연에는 대구경북작가회의 회원이 다수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