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4:1-5 판단 2005. 4. 17
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3 너희에게나 1)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여러분이 오늘 이곳에 오시면서 제일 많이 신경 쓰신 부분이 어떤 부분입니까? 예배를 잘 드리기 위하여 마음에 준비를 하면서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그렇게 오셨습니까? 아니면 입고갈 옷 걱정을 제일 많이 하셨습니까?
우리가 어떤 모임에 가더라도 제일 많이 신경 쓰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평소에 집안에 있을 때는 화장도하지 않고 운동복을 입고 있더라도 어디에 간다하면 제일 많이 시간을 들이고 신경을 쓰는 것이 자기를 치장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남의 눈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그런 노래가 있습니다. 그런 노래를 복음성가라고 하던데 그게 과연 복음성가입니까? 복음은 세상 사람들이 미련하고 어리석다고 배척하는 것인데 그 노래는 교회 다니는 사람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좋다고 핸드폰 벨소리에 일 순위까지 차지하였던 적이 있지요!
사람들은 남에게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행동이란 남의 욕망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를 신경 쓰면서 사는 것입니다. 평생 열심히 산다고 살았지만 모두 남의 눈을 의식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문화라든지, 체면이라든지, 교양이라든지, 윤리나 도덕이라든지, 법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지만 실상은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왕따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왕따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도 집단의 문화 속에 동화되어야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는 하기 싫어도 남의눈을 의식해서 하는 행동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모두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지난주에 결혼식이 있었는데 남자 분들이 다 양복을 입고 오셨습니다. 주일예배시간에는 잠바를 입고 오시면서 왜 결혼식에는 양복을 입고 왔을까요? 신랑 신부를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까? 신랑 신부를 위한다면 조금 못하게 나오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보다 결혼식을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이 아닙니까? 하면서 호통을 쳐야하는 시간이지요!
그러나 교회는 자신이 못난 자임을 아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자기의 못남을 자랑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에 모이면서도 사람들은 서로 자기 자랑하기 위하여 모인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를 하는데 그것이 자기가 인정받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경쟁을 시키고 이기는 구역이나 기관에 상을 주고하면 더 열심히 잘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싸움은 사람 앞에서 할 것인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할 것인가의 싸움입니다. 사람들이 알아주고 칭찬해주면 잘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아니하면 평소에 잘 하던 것도 하지 않게 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위하여 한 것이 아니고 자기를 위하여 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그렇고 또한 우리 교회가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파당이 생기고 다른 파를 헐뜯고 깎아내리는 것입니다. 심지어 바울사도를 사도가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3절을 봅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을 일이라고 합니다. 바울사도가 고린도 교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바울 파에서는 인정을 받았지만 아볼로 파나 베드로 파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얼굴이 못 생겼다고, 말을 더듬는다고, 육신의 질병이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그러한 평가와 판단에 대하여 자유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남이 조금만 나쁘게 말해도 그것으로 죽느니 사느니, 죽이느니 살리느니 하지 않습니까? 남이 나를 어떻게 판단하는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얼마나 자유하게 된 사람입니까? 남의 판단에서 자유로운 사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까?
시편 3편을 봅니다. “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2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1)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셀라) 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4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셀라) 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6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8 2)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셀라)”
이 시편에 대한 설명이 붙어있습니다.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대적이 얼마나 많은지 천만인이 자기를 둘러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놀렸겠습니까?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아들이 반역을 해서 맨발로 도망갔으니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그런데도 자기는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누워 자고 깨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붙들어 주셨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구원이 여호와께 있기에 그렇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부끄러워서 자살하지 않겠습니까? 자살은 무서우니 교회를 옮기든지 다른 사람들이 모르도록 숨기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주변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나를 모함하고 욕하면 견디지를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다윗과 바울 같은 경우에 그러한 것들은 매우 작은 일로 여긴 것입니다. 그것은 진리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주님을 알았기에 천만인이 나를 대적하여도 매우 작은 일로 여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판단은 중요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4절입니다. 사람의 판단을 매우 작은 일로 여길 뿐만 아니라 자기도 자기를 판단하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스스로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아! 나는 왜 이럴까! 나의 꿈은 이렇지 않았는데 지금 내 신세는 왜 이렇게 비참한가 하면서 자기를 스스로 판단하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바울사도는 자기를 판단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바울사도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완벽하게 주님의 뜻대로 살아서 자책할 것이 없다고 하였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사도도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자기를 자책할 것이 없다고 하였겠습니까? 자기의 잘못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자책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의롭다고 판단하실 이가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자기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기에 자기의 행위를 가지고 자책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의 판단도 매우 작은 일로 여기고, 자기 스스로도 자책하지 아니하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산다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로 판단하실 분이 주님이심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남의 판단이나 나의 판단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즉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까지는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주님께서 오시면 어두움에 감춰진 것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실 것인데 그때에 각 사람에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사람의 판단이나 칭찬이란 중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해가 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의 판단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만물을 벌거벗은 듯이 드러내시는 주님의 판단만이 진실하고 참되신 판단이십니다. 그런데 왜 바울사도는 자기를 인정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까?
1절을 봅니다. 사람의 판단은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서 왜 바울사도는 자기들을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기라고 하는 것입니까? 알아주든지 아니 하든지 간에 그리스도의 일군노릇만 하면 되지 않습니까? 여기서 자기를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알아달라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어떻게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자기가 전하는 하나님의 비밀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유대인들이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의 출신이나 배경이나 학력을 보건데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기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를 믿지 못할 것 같으면 내가 행한 일을 보고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바울사도의 심정이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자기를 여러 가지 외모로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판단하지 말고 내가 전하는 복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믿지 아니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2절을 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는 충성할 뿐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직분 자를 세울 때에 맡은 자가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사로 성가대로 집사로서 충성하라고 합니다. 그러한 충성들을 잘하면 이 땅에서도 복을 받고 하늘에서도 상급이 크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직 충성을 외쳤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가 충성한다고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싫어하고 꺼려하고 미련하다고 여기는 내용입니다. 그러니 사람의 판단에 휘둘리지 말고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모든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소식입니다. 사람들을 좋게 하려면 사람들의 판단을 듣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면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1:18절에서 바울을 괴롭게 하려고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을 보고서 그렇게 전하여져도 그리스도가 전하여 지니 자신은 기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종의 자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신앙생활하고 있습니까? 남의 판단 때문에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자기 양심을 기준으로 신앙생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내 양심에 바르게 하였다고 판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무리 자기 양심에 옳은 대로 하였다고 해도 그것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모든 감추어져 있던 것들이 주님께서 오시는 그 날에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판단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판단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나를 판단하실 주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살아서 일하고 계시고, 다시 오셔서 온 세상을 판단하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http://www.evergreen17.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