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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회의 목회와 실제(8)
교회의 직분⑤ : 장로와 목사의 바람직한 관계
장로를 ‘다스리는 장로’와 ‘가르치는 장로’로 구별하는 것은 칼빈의 직분관을 좇는 개혁주의 교회의 일반적 전통이다. 구미의 개혁주의 교회가 전통적으로 목사와 장로의 동등권을 강하게 주장하며 유지해 오고 있는데, 그 근거는 양자가 다 기본적으로 장로라는데 두고 있다.
칼빈의 영향을 받은 개혁자 낙스(John Knox)가 개혁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도 같은 입장을 취한다. 이 교회의 교회정치 중 교회 직분을 설명하는 조항에서 “목회 직임을 행사하지 않는 장로들은 다스리는 장로라 부르게 된다”24) 라고 했다. 그리고 이 교회는 목사와 장로를 동일한 지위에 있는 직분자로 간주하고, 임직 받은 목사가 목회하지 않을 때는 자신이 속한 교회에서 치리장로로 봉사할 수 있다고 했다.25)
개혁교회는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목사, 장로, 집사) 간에 상하의 차별을 부정하고, 교권을 행사하는 것도 경계하기 위해 교회법에 이렇게 명시하고 있다. “어느 교회도 다른 교회들을 지배해서는 안 되며, 어느 직분도 다른 직분자들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26) 이렇듯 목사와 장로의 차별을 부인하고 상호동등권을 강조한다. 개혁주의 교회들은 전통적으로 목사와 장로 사이에 역할은 구별하지만 계급적 차원에서 상하의 차별은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교회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가르치는 장로(목사)는 다스리는 장로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적으로 가르치고 선포하는 직임을 수행함으로써 다스리는 장로보다 더욱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같은 현상이 차츰 상하관계로 고착되어 교회 안에 교권체제가 생기게 되었다.
종교개혁 후 개혁교회는 교권체제를 정죄하고 성경적인 직분체제를 회복했지만 아직도 내부적으로 자만심과 명예를 탐하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자주 노출되어 교권으로 말미암은 충돌과 불화가 종종 일어나고 있다. 교회 안에서 직분과 관련하여 계급적 차원에서 상하를 생각하고 논하는 자체가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본질적으로 위배하는 것이다. 주님은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고 하셨다(마 23:8).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는 목사와 장로 사이에 갈등이 심각하다. 그래서 ‘목사가 죽어야 장로가 산다’, 혹은 ‘장로가 죽어야 목사가 산다’는 논리를 펴는 사람도 있다. 아에 장로교회를 면서도 장로를 안 세우고자 하는 교회도 있다. 목사와 장로 중 한편이라도 자아를 죽이고 낮아져야 갈등을 잠재우고 평화를 회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임시적인 치유책일 뿐이다.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양자가 성경적인 직분관을 바로 이해하고 봉사하는 자세가 새롭게 되어야 한다. 곧 목사와 장로 양자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종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장로가 교회 봉사를 하면서 목사와 바람직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몇 가지 구체적인 길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장로들은 목사를 주의 교회 건설을 위해 함께 부름 받은 동역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목사와 장로 양자가 다 기본적으로 교회의 장로요, 감독자다. 그러므로 양자는 넓은 의미에서 교회 봉사를 위한 동역자다. 사도 베드로도 아시아의 다섯 지방 교회에서 봉사하는 장로들에게 자신을 가리켜 “함께 장로 된 자”라고 함으로써 스스로 교회건설을 위한 동역자라고 주장했다(벧전 5:1). 사도 바울도 하나님이 장로를 세운 목적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하기 위함이라고 했다(행 20:28). 장로들 중에는 목사만 양을 치는 목자요, 장로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장로 직분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잘못된 생각이다. 성경은 양을 치는 일을 위해 장로를 불러 세웠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사도 베드로 역시 장로들에게 이르기를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라고 했다(벧전 5:1-2).
하나님은 양무리를 목사에게만 맡기지 않았다. 목사와 장로 양자가 기본적인 장로와 감독으로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다. 목사는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일에 전무할 수 있도록 양떼를 칠 사명을 받았다. 양무리들의 가정을 심방하여 돌보고, 언약의 자녀들인 교회의 청소년들을 감독하고 지도하는 책임은 장로가 목사와 공유하고 있는 사명이다. 그러므로 장로는 당회에 성실히 참석하는 것으로만 자기 사명을 다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장로는 목사와 함께 주의 교회를 치기 위해 부름을 받은 동역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장로가 교회건설을 위한 목사의 동역자라는 의식을 강하게 갖게 되면 양자 간에 극복하지 못할 일이 없다.
2. 장로는 목사와 아름다운 관계를 교회에 보여야 한다.
성경은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한다(딤전 3:15).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가족집단이다. 동시에 교회는 부모와 언약의 자녀들로 이뤄진 여러 가족들의 공동체다. 한 가정에서 부모가 서로 사랑하며 조화를 이뤄나갈 때 자녀들에게 본이 된다. 장로와 목사는 하나님의 집을 감독하고 다스리는 자들로서 교회에 본을 보여야 한다. 부모가 서로 갈등하는 모습은 가정적으로 수치가 될 수 있는 것처럼 교회에서 목사와 장로가 갈등하며 불화하는 것도 교인들에게 수치가 된다. 장로는 목사와 긴장관계에서 갈등이 생기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해소하도록 해야 한다.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어” 문제를 풀어주며,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하는 능력이 있다(히 4:12; 딤후 3:16).
3. 장로는 교회에서 목사가 비판을 받게 될 때 목사의 편에 굳게 서야 한다.
교인들 중에는 목사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때 장로가 교인들의 비판에 가담하거나 동조해서는 절대 안 된다. 목사가 실수해서 초래한 비판이라 하더라도 교인들 편에 서서 동조해서는 안 된다. 목사에게 실수가 있을 경우에도 당회 밖에서 교인들과 의논해서도 절대 안 된다. 목사는 교회건설을 위한 동역자다. 목사가 혹 실수했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장로들은 당회의 도움을 얻으러 목사가 스스로 나올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어야 한다. 목사도 실수할 수 있는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4. 장로는 성실하게 말씀을 전하는 목사를 보호해야 한다.
말씀에 신실한 목사가 항상 교회에서 환영을 받는다고 할 수는 없다. 목사가 말씀대로 강력하게 설교하면 반대하거나 혹은 비난하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다. 이때 장로는 목사를 도와야 한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요한복음 15:20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고 하셨다. 교인들에게 인기를 끄는 쉽고 재미있는 설교가 언제나 말씀을 올바르게 취급한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중하게 전하는 목사와 그를 지원하는 장로들은 다음과 같은 주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마태복음 5:11-12절을 보면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고 했다. 또 주님께서 마태복음 10:36절에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고 증거 하면 교인들이 싫어할 수 있다. 이 사실을 목사와 장로는 기억해야 하고, 특히 장로는 말씀을 바르고 신실하게 전하는 목사를 보호해야 한다.
5. 장로는 당회에서 다룬 일에 대해 비밀을 지켜야 한다.
장로는 당회에서 논의한 일들 가운데 공식적으로 교회에 알리는 것 외에는 바깥으로 말을 퍼뜨리지 않아야 한다. 당회에서는 직분자들이나 교인들의 신상 문제에 대해 말이 오갈 수 있고, 권징에 관계된 사항도 논의할 수 있다. 장로들은 이런 일에 관해서 당회 밖으로 말을 절대 퍼뜨리지 않아야 한다. 장로는 덕을 위해 당회의 비밀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
혹 목사에 대한 비난이 있을 때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권징의 질서(마 18장)를 지키도록 하고 결코 이를 공론화해서는 안 된다. 목사에 대한 교인들의 불만이나 비난에 대해 당회가 논의할 때는 장로가 이 사실을 결코 밖으로 알려지지 않게 해야 한다.
6. 장로는 목사의 성장을 도와야 한다.
세계는 매일 급속하게 변화하며 발전해 나가고 있다. 이런 세계에서 목사가 말씀을 효과적으로 준비하여 선포하고, 양무리를 잘 치려면 지적으로나 영적인 면에서 계속 발전하고 성장해야 한다. 당회는 이를 뒷받침할 책임이 있다. 장로들은 목사가 충분한 시간을 갖고 연구와 설교 준비를 할 수 있게 하고, 이를 위해 도서와 잡지를 구입할 있도록 경제적으로 잘 살펴야 할 책임이 있다. 목사의 사역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설교이다.
7. 장로와 목사는 서로 충고하며 사명을 다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남의 눈의 티는 잘 보지만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한다. 목사와 장로는 스스로를 살필 뿐 아니라, 서로서로 살피고 충고하며 격려할 필요가 있다. 동역하는 형제들의 충고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릇이 큰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개혁교회에서 당회는 직임 수행과 관련하여 서로 충고하는 것을 의무로 여기고 이를 위한 시간을 매년 몇 차례 당회 회순에 넣고 있다. 빈도는 당회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1년에 4회 정도이다. 이것을 ‘우애적 견책(censura morum=fraternal censure)’이라고 부르며, 교회법 제78조에 이렇게 명시하고 있다;
목사들과 장로들과 집사들은 서로 그리스도인다운 견책을 하고, 직분의 이행에 관하여 친절히 권고하고 충고해야 한다.27)
이때 당회의 사회를 맡은 목사는 당회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우애적 견책에 관하여 할 말이 있는지 물어야 한다. 이때 대부분의 경우 ‘없다’는 대답으로 지나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동역자 중 누구에게 할 말이 있으면 해야 한다. 또한 관련된 동역자는 이를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교회 직분자들은 이런 과정을 공식적으로 거침으로써 자신과 서로를 살피는 기회를 갖게 되며, 한 마음으로 교회 봉사에 임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당회에 이런 과정이 있기 때문에 장로와 목사는 밖에 나가서 동력자에 대해 불만을 터뜨릴 수 없게 되고, 당회원들간의 알력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된다.
한국교회도 당회가 이와 유사한 회칙을 마련하여 실천하게 되면 목사와 장로간에, 장로들 상호간에 화목과 조화를 이뤄 봉사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8. 장로는 교회를 ‘잘 다스리는’ 것으로 목사를 도와야 한다.
장로가 교회를 잘 다스린다는 것은 일반적 뜻으로서 교회의 통치를 의미하지 않고, 양무리를 잘 치는 것을 의미한다. 장로는 자기 구역의 양무리를 잘 살피고, 감독하며, 보호하고, 성실하게 공조함으로써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의 귀한 동역자가 될 수 있다.
마치면서
교회의 직분은 신자들이 교회라는 공동체를 지탱하기 위해 스스로 세운 것이 아니다. 교회의 직분은 교회의 주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위해 친히 세우셨다. 바울은 에베소서 4:11-12절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또한 사도행전 20:28절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 그러므로 장로는 고귀하고 사모할 만한 직분이다(딤전 3:1).
교회의 직분은 교회의 주요,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불러 세우셨기 때문에 그 사명이 크다. 장로는 교회에서 주님의 왕권을 수종 드는 막중한 사명을 받았다. 교회를 다스리고 인도하는 법은 기록된 말씀이다. 그러므로 왕의 뜻을 따라 교회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그의 통치의 법인 ‘말씀’에 익숙해야 한다. 이를 위해 장로는 말씀과 그 진리를 조직적으로 밝힌 장로교회의 신조에 대해 바르고 깊은 지식을 가져야 한다. 특히 장로교 신조(벨직신조,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도르트 신조, 위스터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는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하나의 울타리다. 장로는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지킬 의무가 있다.
오늘날 상당수의 교회 지도자들이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을 직간접으로 받고, 절대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시대조류를 따라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보고 생활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많은 장로교회의 목사와 장로들도 신조와 관계없이 어떤 교회든 가리지 않고 드나들며, 교회의 울타리를 서슴없이 넘나들고 있다. 그러나 장로교회의 장로는 자기 집안의 울타리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 이 울타리를 자유롭게 넘나들거나 그것을 걷어치우게 되면 더 이상 장로교회는 존재하기 어렵다. 내용이 없는 빈 간판만 달고서는 장로교회로 불려 질 수 없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교회를 활성화하고 성장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법과 관련된 세미나가 자주 열리고 있다. 이에 대해 관심 있는 목회자들은 멀고 가까움을 개의치 않고 그곳으로 달려간다. 그 행사를 주최하는 측의 신학이나 신조나 교회체제는 문제를 삼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교회의 활성화와 성장의 방법만 있다면 좋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매우 위험하다.
장로는 자신이 속한 지역에 있는 주님의 교회를 인도하고 보호하고 감독할 책임이 있다. 장로는 말씀의 사역자인 가르치는 장로(목사)와 함께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더라도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수호할 의무가 있다. 각 지역의 장로들은 바울이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남긴 이별사를 이 시대에 다시 한번 기억하고 교회를 위한 진리 수호자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 사도행전 20:28-31절을 보면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했다. 마지막 때에 흉악한 이리들 곧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스승들은 더욱 기승을 부를 것이다(마 24:3, 11). 장로들이 이들로부터 양무리들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이끌며 우리(교회)안에서 안전하게 구원의 은혜를 즐길 수 있도록 사명을 다 하게 되면 목자장이 나타날 때 시들지 아니하는 면류관을 얻게 될 것이다. 베드로전서 5:4절을 보면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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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The Practice of the Free Church of Scotland, 1,1,2: "Those Elders who do not exercise the pastoral office are called Ruling Elders."
25) Ibid 1,1,4.
26) The Church Order of Dort, Art. 74.
27) Ibid 78.
*강의자 : 손재호 교수
*본글은 2024년 8월 16-17일에 부천개혁성경신학교 2024년 봄학기 집중강의 겸 부천개혁교회 제직교육을 '개혁교회의 목회와 실제'란 주제로 실시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