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볼프강 폰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1749~1832)】 괴테의 <색채론>
1970년 미국의 색면추상 화가 마크 로스코가 자살하면서 남긴 유작 <무제>이다. 제자 올리버 스타인데커가 현장에서 발견했는데, 소품처럼 작게 그렸다. 그러나 한 해 전인 1969년 4월, 제인 딜렌버거라는 여성이 그의 죽음을 예견했다. 로스코의 작품을 사려했던 그 여인은 지나치게 밝은 빨강과 노랑으로 칠한 화려한 캔버스를 발견했다. 그림을 보던 여인이 갑자기 몸을 벌벌 떨면서 갤러리 직원에게 말을 건넸다.
“누군가가 그를 잡아줘야만 해요.”
더욱이 그녀는 1967년 11월 올드 파이어 하우스 스튜디오에서 로스코의 그림을 보고 작가 앞에서 눈물을 흘렸던 경험이 있었다. 4.5m 크기의 캔버스에 거의 검은색 표면으로만 그려진 그림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괴테의 색상환(출처: 중앙일보)
회화에서 색채는 기본적으로 감성의 문제다. 마치 음악이 귀에 들리는 소리일 뿐만 아니라 고저장단으로 인해 영혼을 흔드는 감동을 선사하는 것과 흡사하다. 그런데 감성이라고 하면, 개인에 따라 달리 받아들여지는 매우 주관적인 감각처럼 들린다. 그러나 색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보편적이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색과 감정의 관계가 우연이나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일생을 통해 쌓아 가는 일반적인 경험, 어린 시절부터 언어와 사고에 깊이 뿌리내린 경험 산물이다. (에바 헬러, <색의 유혹>) 그러므로 비슷한 환경과 경험을 지닌 사람 사이에서 색에 관한 감성은 얼마든지 공유가 가능하다.
독일의 대문호 요한 볼프강 괴테, 그는 1800년 전후로 20년간 색채를 연구했다. 1810년 <색의 이론>을 저술했는데, 광학 이론만으로 접근하면 안 되고 그 색채가 불러일으키는 효과까지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이론은 19세기 말 형태 심리학과 연결된다. 눈의 차원을 벗어나 뇌에서 어떻게 시각 정보를 인지하여 이미지를 형성하는지를 밝히려는 노력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색상은 단순히 빛의 물리적 특성으로부터 유추할 문제가 아니라 감각이며, 이 감각은 보는 주체와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을 강조했다.
터너의 1843년 작, <그림자와 어둠: 대홍수의 저녁>과 <빛과 색채: 대홍수 이후의 아침, 창세기를 쓰는 모세>
괴테의 이론을 수용한 영국의 낭만주의 화가 윌리엄 터너는 '노란색에 미친 사람'이라는 악평을 들었다. 노란색은 괴테가 ‘빛의 최초의 색’이라고 설명한 바로 그 색이다. 1843년, 그는 괴테의 색채론을 실험한 정사각형의 두 작품 <그림자와 어둠: 대홍수의 저녁>과 <빛과 색채: 대홍수 이후의 아침, 창세기를 쓰는 모세>를 그렸다. <그림자와 어둠>은 성서의 대홍수에 나오는 어두운 하늘과 소용돌이치는 물결을 담았다. 검은색과 짙은 청색의 덩어리가 빙빙 도는 가운데 그 속으로 보색 관계에 있는 노란 빛이 스며들어 세상을 가득 에워쌌다. 인류가 통제할 수 없는 신과 자연의 힘을 상징한다. <빛과 색채>는 괴테가 '양성(陽性)의 색'이라 했던 황색, 적황색, 황적색이 지배적이다. (앨리슨 콜, <색채>) 존 러스킨이 작품의 의미를 묻자 터너는 수수께끼 같은 대답을 했다.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되는 대로 나온 대답이 아니다. 기본색을 이름이며, 괴테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색 분석에 대한 주의 깊은 연구에서 나왔다. (스텔라 폴, <컬러 오브 아트>)
르네 마그리트의 <잘못된 거울 2>
지구 생명체 38억 년 역사에서 보자면, 눈(眼)이 만들어진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5억 4000만 년 전 캄브리아기에 일어난 폭발적 진화 때 일이다. 이전에는 빛이 아니라 눈이 없었기에 암흑천지였다. 피부나 냄새로 세상을 인식했다는 얘기다. 그럼, 처음부터 눈이 사물의 다양한 색을 인식했을까? 아니다. 최초의 눈은 색의 아름다움과 관계없이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는 수준에서 출발했을 거다.
그러던 것이 진화를 거듭했고, 생명체 간 인지할 수 있는 색의 스펙트럼에서 차이가 발생했다. 인간은 빨강-주황-노랑-초록-파랑-보라, 동물은 통상 노랑-초록-파랑-보라-자외선의 스펙트럼을 갖는다. 따라서 인간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빨간 장미가 벌에겐 푸른색이며, 생존을 위한 식량 공급처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동물 중에서도 새들은 빨강을 볼 수 있다.
또한 인간의 눈은 독특하여 빛이 전하는 사물을 최초 보이는 전부를 그대로 뇌로 전달하지 않는다. 망막에서 일차적으로 정보를 조합, 분석하여 1/25초마다 한 장씩 스냅샷처럼 두뇌로 전송한다. 따라서 1/25초 사이에 도달하는 빛은 누가 먼저 도달했는지 알 수 없기에 시간 정보가 완전히 상실된다. 태아의 뇌가 생성될 때 그중 일부가 기다란 섬유 형태로 자라 생긴 것이 망막이며, 두뇌와 비슷한 구조를 갖췄기 때문이다. 그러면 뇌는 이 스냅샷을 연결하여 매끄럽게 이어지는 동영상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시간의 흐름이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생성된다. (프랭크 윌첵의 <뷰티플 퀘스천>) 그리고 아는 사람과 우연히 마주치면, 단순히 색과 형태의 차원을 넘어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볼 수 있는 것도 뇌의 작용이다. 따라서 거꾸로 뇌에 손상이 오면 시야가 좁아지거나, 인식에 장애가 생긴다. 망막에 상이 맺히지만, 뇌가 의식하지 못하면, 안 보인다. 따라서 눈을 너무 신뢰함으로써 안 보였다고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또한, 물리적 현상과는 다르게 노란색을 ‘붉은색이 가미된 초록색’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냥 노란색이다. 같은 색도 서로 다르게 구분하기도 한다. 남자의 8%, 여자의 0.5%가 색맹이다. 이들은 색을 입자가 아닌 선으로, 또 같은 선상의 색을 모두 한 가지 색으로 인식한다. 결정적으로 시신경은 눈에 본 내용을 1/10로 압축하여 선조체로 전달하며, 다시 그 정보의 1/300만 뇌의 다음 정거장 기저핵에 다다른다. (케빈 에슈턴, <창조의 탄생>) 결국, 뇌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하얀색이 붉은색이나 초록색, 또는 푸른색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일종의 심리적인 현상이다. 따라서 ‘본다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은 물리적이기도 하지만, 철학적이기도 하다. 이런 점을 이해하고 작품과 색채를 대한다면, 좀 더 작가의 의식에 가까이 갈 수 있다.
칸딘스키를 화가로 이끈 모네의 건초더미(1890/1891) 연작
모네가 연작을 그리게 되는 동기가 바로 빛의 이러한 신비로운 변화를 추적하기 위해서였다. 계절적 변화는 물론 하루에도 아침, 점심, 저녁에 따라 자연은 그 모습을 달리한다. 광학적이기도 하지만, 바라보는 이의 심리적인 변화도 수반한다. 그래서 모네는 이젤을 여럿 세워놓고 동일한 대상이 각각 어떤 인상으로 다가오는지를 나누어 담았다. 빠른 붓질이 필요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제목 그림은 모네의 <아침의 건초더미(1890~ 18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