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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성파일 -전주유닛 조띠 낭독.
<수행의 필요성>
“영적인 길에는 수많은 장애물이 도사리고 있다.”라는 말이 있다. 위대한 일을 하려면 수많은 장애물을 극복해야 한다. 위대한 일일수록 장애물의 힘도 거세다. 그러므로 위대한 일을 하려는 사람은 시작부터 장애물에 부딪친다. 준비가 덜된 사람들은 휘청거리기 시작하고 굴복해 버리고 만다.
윤리학에 정통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거나 칭찬하게 두어라. 부富의 여신이 다행스럽게도 나의 집에 머물 수도 있고, 또는 자신이 좋아하는 곳으로 떠날 수도 있다. 오늘 죽음의 신이 방문할 수도 있고, 또는 자신이 좋아하는 곳으로 떠날 수도 있다. 오늘 죽음의 신이 방문할 수도 아니면 몇십년 뒤에 올 수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현명한 자들은 자신이 선택한 정의의 길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영적인 영역에서의 행위는 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나는 어떠한 물질적-세속적 굴레에 무관심하다. 장애물과 방해물을 발밑의 조약돌처럼 밟으면서 승리를 향하여 전진할 것이다. 어떠한 마음의 혼란에도 빠지지 않을 것이다. 내 안의 온갖 부정적 성향들을 산산조각을 내버리면서 지고목적을 향하여 혜성처럼 달려갈 것이다. 장애물이 히말라야 산처럼 높더라도 웃으면서 헤쳐 나가고, 언덕과 같다면 쉽게 뛰어넘을 것이다. 영적영역에서는 웅덩이처럼 도처에 널려 있는 도그마의 함정들을 뛰어넘어 지고의 신성과 하나 될 것이다.”
나무를 쳐다보면서 잘 익은 망고가 입안으로 떨어지고, 자동적으로 껍질이 벗겨지고, 씨앗은 튀어나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영원토록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할지 모르나 현실세계에서는 불가능하다. 현실세계에서는 스스로 나무 위로 올라가 과일을 따고, 껍질을 벗기고, 씨앗을 발라서 먹어야 한다.
“나는 지적 발달을 반드시 이룰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영원히 앉아 있다면 머나먼 미래에는 소원이 성취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대신 실질적인 지식, 진보의 길을 걷는 것이 보다 더 현명하지 아니한가?
“지고의식은 가장 사랑스러운 나의 님이다. 그분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분을 깨닫고 싶다. 내 모든 것을 다하여 그분을 깨닫고 싶다.” 그렇게만 생각하고 멍청하게 앉아만 있다면 지고의식은 멀리멀리 있을 것이다. 영적인 소망을 다하면서 체계적인 방법으로 헌신한다면 지고의 깨달음이 멀리 있겠는가?
이 체계적인 노력Parishrama은 일상적인 성공, 정신적인 발달, 정신적. 영적인 발달, 그리고 영적인 완성을 위한 처음이자 마지막 길이다. 빠리슈라마에 대한 혐오는 인간생활에 있어서 크고 작은 성공 앞에 가로놓여 있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쉬바는 다음처럼 분명하게 이르고 있다. 체계적인 노력 없이 성공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하급 사람은 예상되는 반대 때문에 어떤 위대한 일도 시작하지 못한다. 중간급 사람은 시작은 하지만 중간에 반대에 부딪치면 일을 마무리도 짓지 않고 포기한다. 최상급 사람은 시작한 일은 반드시 끝마무리를 짓는다. 어떤 어려움을 겪더라도 일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기 전에는 포기하지 않는다.
모든 정신적 성향과 사념의 진동을 지고존재에 집중할 때 비로소 해탈 할 수 있다. 역동적인 마음의 흐름이 지고존재라는 한 점에 집중되어 지고존재와 하나 될 때 모든 굴레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유한한 소우주는 대우주와 하나가 되고, 조그만 ‘나’는 무한한 대양에 합일된다. 사실상 이 조그만 ‘나’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그만 ‘나’가 위대한 ‘나’가 된다. 지고존재는 개인적인 ‘나’를 완전히 흡수하고, 개인적 존재의 완전한 귀의는 완전한 성취를 의미한다. 그러한 상태에서 수백만 개인들은 바다와도 같은 브라마의 소우주적인 파편에 불과하고, 바다에서 이는 물거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이 ‘나’는 지고의식이다. 또는 나는 브라마Brahma'smi라는 경지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다나를 통하여 모든 것을 지고존재에게 바칠 수 있으며, 몸을 갖고서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외적 세계를 비추는 분이 모든 항성과 행성도 또한 비춘다. 지고의식을 제외한 다른 어떤 것도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한다. 다른 모든 것들의 빛은 단지 그분의 빛의 반영일 따름이다. 태양빛에 비할 때 달빛이 그러하듯이 그분의 빛에 비할 때 태양빛은 어둠일 뿐이다. 빛나는 태양도 무색해지는데 하물며 불빛이야 말해 무엇하리요! 모든 것이 그분의 빛으로 인하여 빛난다. 그분의 빛으로 다른 것들이 빛나고, 그분의 광채로 다른 존재들이 축복받는다. 이 지고존재, 지고의식에게 있어서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한 존재는 없다. 그분은 모든 존재의 중심이다. 그분은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빛나는 존재이다. 사랑스러운 자식들과 즐겁게 춤추고 놀기 위하여 그분은 사랑하는 어린 자식들과 숨바꼭질을 하신다.
그분을 찾기 위하여 세상을 헤맬 필요는 없다. 그분은 모든 것들의 존재의식 안에 숨어 계신다. 단지 시선을 안으로 돌리기만 하면 그분이 거기 계신다. 내면세계의 가장 빛나는 보석을 버려두고 밖의 세계에서 빛의 근원을 찾으려 쓸데없이 헤매는 것은 시간낭비일 뿐이다. 쉬바Shiva가 말씀하시길 왜 사람들은 쓸데없이 이런 식으로 시간을 낭비하는가? 왜 사람들은 손 안의 음식을 버리고 문전걸식하는가? 쉬바는 다음처럼 충고한다.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라. 깊게, 더 깊게, 더 깊게, 안으로 들어가라.
모든 존재는 지고존재로부터 와서, 각자의 리듬과 업장Samskara에 따라 지고존재의 둘레를 돌다가, 마침내 자신이 온 그곳으로 되돌아간다.
이것은 연을 날리는 소년과도 같다. 처음에는 기름을 잘 먹인 연줄을 물레에서 풀어주었다가 온갖 기교로 하늘 높이 연을 날린다. 연은 생각하기를 “나는 자유롭다. 아무도 나를 멈추지 못한다. 내가 원하는 데로 날개를 펴면 원하는 어느 곳이든 저 푸른 창공을 날아갈 수 있다.” 그러나 갑자기 줄이 당겨지는 것을 느끼고 연은 곧 물레로 되돌아온다.
쉬바는 다음처럼 말씀하셨다. “모든 존재들은 세속의 활동을 다 마친 뒤에는 나에게서 가져간 생명력을 다하여 고향인 나에게로 되돌아와 나와 하나가 된다. 그러면 이원성의 감정은 사라지고 그들은 마침내 지복으로 충만한 지고의식과 하나가 된다.” 지고의식의 화신인 쉬바는 말한다. “모든 생명체의 창조, 모든 피조물들의 달콤한 존재, 그들의 활력에 찬 행동들, 그들의 바쁜 활동, 그리고 궁극의 행복스럽고 고요한 휴식, 이 모든 것들은 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유일무이한 존재인 브라마이다.”
어떤 것을 담기 위해서는 그릇이 필요한다. 여기 그대들은 아테네라는 도시에 서 있다. 아테네가 그대들을 담는 그릇이다. 아테네는 그리스라는 나라에 담겨있다. 그리스는 아테네가 담겨질 수 있는 그릇이다. 그리스는 이 지구라는 행성에 담겨 있다. 이 행성은 태양계-태양, 달, 그리고 행성들-에 담겨있다. 그리고 이 태양계는 지고의식, 지고존재에 담겨있다.
그리하여 인간과 모든 존재는 지고의식에서 왔으며, 지고의식에 머무르고 있으며, 마침내 이세계를 떠나서 지고의식에게 되돌아 갈 것이다. 세상에 태어난 것은 -인간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모두 죽는다. 이 세계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운동은 우주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움직인다. 지구도, 태양도, 이와 함께 전 우주가 움직인다. 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세계에서 서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도 지구의 운동에 따라 움직인다. 그러면 어디로 가는 운동인가? 그들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그들이 온 지고의식에게 되돌아가야한다. 그리하여 그분은 출발점이며, 모든 존재의 궁극의 목적점이다.
따라서 모든 존재들 사이에는 내재적인 통일성이 있다. 그대들 모두는 영적 구도자들이다. 그대들 모두는 헌신자들이다. 그대들 모두는 창조주와 하나가 될 것이다. 그대들은 이 본래적인 인간 통일성을 기억해야 한다. 그대들은 할 수 있는 한 다른 사람들을 도와라. 왜냐하면 지고의 존재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최대한 서로 협력하여 자신에게로 오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들이 보편인간의 정신으로 정의의 길을 걷는다면 승리는 그대의 것이다. 지고의식의 축복이 그대들과 함께 할 것이다.
태양이 태양계의 중심이듯이 지고의식Prus'ottama는 우주의 핵, 즉 우주의 중심이다. 뿌루쇼타마는 전 우주의 중심이다. 많은 행성들이 태양의 둘레를 돌듯이 수많은 생명체들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지고의식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 그들은 돌아야 한다. 다른 대안이 없다. 그분에 대하여 명상하는 사람, 사다나의 길을 것는 사람의 경우에는 지고존재와의 거리가 계속 줄어든다. 수행하는 사람은 중심으로 나아가고, 물질주의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은 중심으로부터 멀어져 간다. 그러나 수행을 하게 되면 중심과 하나가 된다. 수행자는 그분과 하나가 된다. 하지만 비록 타락하고 천박한 사람이더라도 사다나를 하고, 명상을 하고, 깨끗한 삶을 살아가면 지고의식과의 거리가 줄어들게 되어 반경이 0이 되는 날이 올 것이고 지고의식과 하나가 된다. 이것이 인생의 목적이다.
그대들은 지고의식의 아들딸이며 그분과 하나가 되는 것은 그대들의 생득권임을 명심하라. 그분의 무릎에 앉는 것은 그대들의 천부권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그대들은 그분에게로 나아가 그분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인간의 길이며, 이것이 동물과 인간을 구분 짓는다.
사다나를 수행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신으로부터 멀어질 것이다. 지고의식으로부터 점점 멀어질 것이다. 그대들은 인간을 동물로 전락시키는 어떠한 철학이나 이데올로기도 지지해서는 안 된다. 그대의 길은 영성의 길이다. 일단 인간의 몸을 받아서 태어났다면 지고의식과의 거리를 줄이는 길을 걸어야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분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죽은 뒤에 불타는 지옥으로 가지 않는다. 아난다마르가철학에 의하면 지옥이나 천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에게는 정의를 가르쳐주고 다른 사람에게는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것은 부당하다. 만약 그러한 이유로 어떤 사람은 천국에 가고 어떤 사람은 지옥에 간다면 그것이 정당한가? 그것 또한 편애다. 이러한 천국. 지옥의 관념 자체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이는 잘못된 접근법이다. 무지하기 때문에 또는 올바른 철학이 없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발달된 현대사회는 이러한 사상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지옥. 천국의 사상은 완전히 잘못된 관념이다. 이러한 관념을 권장해서는 안 된다. 천국도 지옥도 없으며, 아무도 죽은 뒤에 영원히 천국이나 지옥에 가지 않을뿐더러, 영원히 무덤에 누워 있는 것도 아니며, 이른바 심판의 날까지 기다려야하는 것도 아니다.
브라마에 대한 줄기찬 생각, 지고존재에 대한 헌신, 끝없는 봉사를 통하여 업장Samskara을 태워버리고 지고의식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 길을 따르면 영원한 행복을 얻을 것이다. 이것이 올바른 길이다.
모든 것은 지고의식에서 왔다. 수많은 신체적, 정신적, 영적인 변화를 겪은 뒤에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출발점이었던 지고의식에게 되돌아가서 하나가 되려면 앞으로도 수많은 변화를 겪어야 할 것이다. 덜 진화된 동물, 진화된 동물, 소, 물소, 원숭이. 유인원, 원인猿人,오스트랄로피테신(Australopithecus 속의 猿人),자바인, 중국원인猿人,고릴라, 침팬지, 오랑우탄, 피그미, 현대인, 그리고 지고의식과 하나 된 최고의 진화된 인간, 이것이 진화의 순환체계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이 진화의 고리 가운데 어디엔가 위치한다. 우리는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전진한다. 그러므로 나는 진정한 의미의 진보는 물질이나 정신의 세계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한다. 진정한 의미의 진보는 지고의식과의 거리를 줄여서 그분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이것이 진보다.
그러면 요가란 무엇인가? 요가의 어간은 ‘유즈Yunj'로서 더한다는 것이 아니라 통일시킨다는 뜻이다. 물과 설탕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물에 설탕을 타면 어떻게 되는가? 설탕이 물에 녹아서 하나가 될 것이다. 둘이 하나가 된 이후에는 설탕을 달리 찾아볼 수 없다. 개체의식이 지고의식과 하나가 된 뒤에는 개체의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개체가 지고존재와 하나가 된 것이다. 조그만 소년 ’A‘와 조그만 소녀’B‘가 지고의식이 된다. 이것이 하나됨이다.
그대가 지고의식과 하나가 되면 모든 것을 얻으며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라고 하는 조그만 이름만 잃어버린 대신 지고의 ‘나’, 위대한‘나’를 얻는다. 이것이 영적 영역에서의 요가다.
요가는 모든 인간의 발전을 위한 진보의 길이다. 어느 누구도 요가의 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요가는 달마다. 그러므로 개인생활에서는 요가를 해야 할 것이고, 공동생활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요가를 하도록 권장해야 한다. 이는 물질적, 정신적, 영적인 영역에서 만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해결책이다.
그대가 무슨 일을 하든지 지고존재로부터 오는 생명력에 의지하여야 한다. 그 생명력은 그대의 것이 아니다. 며칠, 몇 달, 또는 몇 년 동안 음식을 먹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두세 달 동안 단식하면 말할 수도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도 없다. 그대가 가진 힘이 얼마나 하잘 것 없는가. 그대는 오로지 지고존재의 은총에 의지한다. 그러므로 사실상 모든 것의 주인은 지고의식이며, 모든 일을 하시는 분도 그분이시다. 그분은 모든 에너지의 원천이시다.
창조를 하신 뒤에 지고존재는 무엇을 하실까? 그분은 사랑스러운 자녀들과 영원한 놀이를 하신다. 이것이 우주다. 그러므로 누구도 우울증에 빠질 필요가 없다. 우주에서 혼자이며, 외롭고, 희망도 없는 존재는 없다. 어느 누구도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느껴서는 안 된다. 지고의 아버지께서 그대와 함께 하고, 그대가 그분의 마음 안에 있는데 어떤 물질적, 정신적 존재가 두렵단 말인가? 전지전능하신 지고의 아버지보다 강한 자가 있는가?
지고의식이 없는 곳은 없다. 그분은 어디에나 계신다. 개인의 핵이 지고의 핵과 하나가 되면 지고존재와 하나가 된다. 이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마음의 외연을 확장해야 한다. 어떻게 마음의 외연을 확장할 수 있는가? 모든 한계성, 물질적 한계와 정신적 도그마와 투쟁하면서 확장해나가야 한다. 울타리로 경계선을 친 관념을 도그마Dogma라 한다. 도그마는 인간지성의 앞날을 철저히 봉쇄한다. 그러므로 지고존재와 하나가 되려는 영적구도자는 도그마와 투쟁해야 한다. 철학, 경제학, 역사학, 고고학, 사회학, 인문과학 그리고 다른 모든 과학에서 도그마는 위험하다.
그대들 영적 구도자여! 그대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도그마의 제단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도그마는 인간사회에 수많은 분열주의적 성향들을 심어놓았다. 그대들의 슬로건은 “도그마여 이제는 그만! 도그마여 이제는 그만!”이어야 한다. 도그마의 경계선을 넘어선 그곳에 우뚝 서라. 인간영광의 자리에 서라.
궁극의 존재Brahma와 합일되면 조그만‘나’는 지고의식의 위대한‘나’와 하나가 된다. 산골짜기 계곡에서 발원하여 수많은 계곡과 녹색평야와 황금색 들판을 지난 골짜기 물이 마침내 푸르른 바닷물과 하나가 된다. 그 강물이 죽어버렸는가? 아니다. 죽은 것이 아니다. 어떠한 존재도 영원히 죽는 법이 없다. 강물의 달콤한 물결은 광대한 대양의 파도 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잊으려고 한다. 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슬픔에 고뇌한다. 사실상 모든 존재들은 시작도 끝도 없는 지고존재의 거대한 품 안에서 영원을 누린다.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지고존재와 달마에 대한 무지 때문에 인간은 숱한 해를 입었다. 현대사회에서 더 이상 이러한 일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전지전능하고 어디에나 존재하는 브라마를 물질계, 정신계, 영성계의 본질적 중심으로 알고, 모든 즐거움과 즐기는 자의 핵심을 알기 위해서는 모든 생명체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새로이 해야 한다. 이러한 우주이념을 늘 눈앞에 간직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활구조를 완전히 새롭게 해야 한다. 나의 신, 너의 신, 힌두인의 하리, 무슬림의 알라 등과 같은 분열주의적인 관념을 버려야 하며, 모든 사람들의 영원한 보금자리인 불생불멸의 존재에 대한 관념을 발달시켜야 한다. 그분을 하리하고 부를까, 알라라고 부를까 하는 쓸데없는 고민으로 세월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지식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많은 학자들이 자만심으로 부풀어 있다. 허영심으로 들떠있다. 지식을 자랑하는 학자들을 보았는가? 그들이 지고의식과 하나 될 수 있을까? 결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많은 이름과 명예를 추구하느라 마음을 외적인 세계에 쏟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허영의 영역에서 출세하기를 바란다. 지적 허영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결코 그분과 만날 수 없다.
그러나 진정한 헌신자는 말한다. “오 지고의식이여! 수많은 헌신자들이 있는데 저는 단지 평범한 헌신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님이시여, 당신의 위대한 헌신자들은 당신의 마음을 앗아갔습니다. 지고의식께서 마음을 도둑맞았기 때문에 마음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분의 마음을 헌신자들이 훔쳤습니다. ”그러므로 헌신자는 말한다. “오, 님이시여. 당신의 헌신자들이 당신의 마음을 훔쳤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마음이 없습니다. 오, 님이시여 저의 마음을 가져가시옵소서. 그리하여 당신께서는 부족한 것이 없게 되소서. 제가 마음을 드리겠습니다. 부디 받아 주시옵소서.”
헌신자는 매우 현명하다. 지식인보다 더 지혜롭고, 행위자보다도 더 지혜롭다.
발현된 우주의식Saguna Brahma은 우주의 모든 소우주들을 해탈시키기 위한- 대우주처럼 모든 소우주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자비심으로 이 우주를 창조하셨다. 이것이 그분의 소원이므로 조만간 모든 소우주들은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이 깨달음은 사다나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깨달음을 위하여 영성을 수행해야 한다. 현명한 사람들은 지체없이 영적 수행을 시작할 것이다. 왜냐하면 영적 수행을 연기하는 것은 무상無常한 현재의 삶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착각하는 데서 오는 번뇌를 계속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들은 이 무상한 현상계에 대한 집착을 떠나서 확고한 신념으로 영원의 목적을 향하여 나아간다. 모두가 언젠가는 그 목적지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사다나를 수행하여 깨달아야 한다.
지고존재에 대한 사랑없이 사다나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어떤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한 점의 사랑이라도 있게 된다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달마의 영역에서 전문적이고 유능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설사 요가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를 수도 있다. 신성한 지식과 초신성적 지식에 대하여 모를 수도 있다. 만트라 암송Japa의 내적 의미를 모를 수도, 영적인 지식이 없을 수도 있다.
이러한 단계에서는 “어떤 것을 얻기 위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그분을 사랑하는 가운데 기쁨을 얻기 때문에 나는 그분을 사랑한다. 다른 목적은 없다.”라는 말을 하게 된다.
마지막 단계에서 헌신자는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하여 그분을 사랑한다.” 그 사랑은 상호적이 아니라 일방적이다. 상호주의가 있게 되면 헌신은 사라지고 장사-돈을 주고 물건을 사는 관계-만이 있게 된다. 헌신자는 지고존재에게 모든 것을 드리는 대신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다. “ 나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 사랑이 당신에게 행복을 줄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단계에서 헌신자의 유일한 희망은 그분을 행복하게 해드리는 것이다.
기쁨과 슬픔의 짐을 지고 있는 것은 마음이다. 슬픔의 어두운 커튼을 뚫고서 은빛 금빛의 순간적 행복이 찾아오는 곳도 마음이다. 개체 마음 밖에 다른 실체들이 존재하는 한 슬픔, 고통, 욕망, 탐욕 그리고 고뇌가 있게 될 것이다. 밖에 있는 것들과의 물질적 정신적 마찰은 마음 안에 물거품과도 같은 기쁨과 슬픔의 쌍곡선을 만든다.
사다나를 통하여 개체존재가 대우주와 하나가 되면 개체심은 우주심이 되고, 개체존재는 우주존재와 하나가 된다. 그렇게 되면 밖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되면 외부세계와 물질적, 정신적 마찰이 일어날 수 없다. 모든 사물과 관념은 마음에서 일어난다. 이것이 개체존재의 해방, 해탈Liberation 의 경지이다. 세속적인 즐거움과 슬픔을 넘어서는 우주적 즐거움의 경지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분을 즐겁게 해드리고 만족시켜 드려야 한다.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는 유일한 길은 그분의 자녀들을 만족시켜 주는 일이다. 모든 존재들과 전 우주가 그분의 자녀다. 그분은 창조주다. 그러므로 그분을 만족시켜 드리기 위해서는 그분의 자녀들에게 비이기적인 봉사를 해야 한다. 전 우주에 비이기적인 봉사는 하는 것을 세바Seva라고 한다.
그대들도 알다시피 장사는 상호적이다. 어떤 것을 주는 대신 다른 것을 받는 것이 장사다. 돈을 주는 대신 어떤 물건을 받는다. 거래는 상호적이다. 거래는 사업이다. 거래가 일방적일 때, 즉 어떤 것을 주는 대신 아무것도 받지 않는 것을 ‘세바Seva’라고 한다. ‘세바’는 일방적이다.
달리 설명할 수도 있다. 돈을 주고 어떤 것을 취하는 거래를 그대로 두자. 값진 물건을 사게 되면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대가 가장 값진 것을 얻으려 한다면 돈이 아니라 그대에게 가장 소중한 그대 자신을 값으로 치러야 한다.
두 가지 다 ‘세바’라고 할 수 있다.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것도, 그분에게 그대의 모든 것을 드리는 대가로 영적 지식을 얻는 것도‘세바’라고 할 수 있다.
지고의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면도날과 같은 길이라는 말이 있다. 달마의 길을 걷는 것은 면도날 위를 걷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반인들은 무지하기 때문에 어떻게 면도날 위를 걸을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은 길을 찾고 싶어 한다. 그 길이 헌신이다.
헌신으로 일하라, 헌신으로 나아가라. 헌신이 있는 곳에 대우주Paramatman가 있다. 지식인Jina'niis과 논리학자들에게 있어서 달마의 길은 면도날과도 같으나, 수행자Sa'dhakas에게 있어서 달마의 길은 꽃길이다. 우리는 신을 헌신에 의하여서만 깨달을 수 있기에 그분은 그대와 함께 한다. 승리는 그대의 것이다.
방 안에 하나의 빨간 장미와 스무 개의 거울이 있다고 가정해보라. 그러면 하나의 진짜 장미와 거울에 반영된 스무 개의 장미를 볼 것이다. 진짜 장미는 지고의식이고, 반영된 꽃은 개체존재들이다.
거울이 깨끗하면 더 선명히 비칠 것이다. 그대의 거울이 깨끗해지면 Paramatma가 선명하게 반영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마음의 거울을 항상 깨끗이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다나와 봉사로 마음을 깨끗이 하라. 사다나와 봉사는 그대의 마음의 거울을 늘 깨끗하게 유지시켜 주는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도 소수만이 달마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 가운데 또 소수만이 달마 사다나를 수행하려는 마음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 극소수만이 사다나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된다. 사다나를 이해하고, 수행하고, 목적지에 이르는 극소수만이 참으로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완전성을 향한 노력에서 연장자들이나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방해와 핍박을 받더라도 무시해야 한다. 이는 죄가 아니다.
그분을 깨닫는 데는 나이, 성별, 학위 등과 같은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무지한 사람들이 목적을 성취하는 동안 위대한 학자들, 고위층들, 그리고 고상한 지식인들은 뒤쳐질지도 모른다. 나이, 성, 교육 등에 관련하여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대들은 그분의 자녀다. 그대의 신분, 학력정도, 나이 등에 관계없이 그분에게 나아가는 것은 그대의 생득권이다. 이 권리를 올바로 사용하라.
올바른 기억이란 무엇인가? 그대들은 ‘나는 브라마’라는 뜻을 가진 이스타 만트라Ista Mantra를 반복해야 한다. 그대들은 항상 일하면서 이스타 만트라를 암송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이스타만트라를 반복 암송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었기 때문이다. 그대의 기억력은 강하지 못하다. 그래서 잊은 것이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 올바른 기억(正念:Samyak Smrti )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대의 가장 큰 의무가 바로 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스타 만트라의 암송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다나의 첫걸음은 쟈마와 니야마Yama & Niyama이다. 쟈마와 니야마는 영적 수행자의 생활토대로서 마음으로부터 온갖 어둠을 몰아내는, 인생의 항로를 비춰주는 등대이다. 쟈마와 니야마의 10개의 무기는 마음의 온갖 거칠음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구도자에게 영적 힘을 부여한다. 브라마의 성취야말로 그들의 유일한 목적이며, 이 목적을 향한 끝없는 투쟁에서의 무기가 쟈마와 니야마이다.
모든 수행자는 전사다. 그들의 밥은 지혜이며, 그들의 음료수는 행위이고, 헌신은 소금이다. 음식의 맛을 내는 것은 소금이다. 소금 없는 음식은 맛이 없다. 마찬가지로 헌신 없는 지식과 행동은 가치가 없다. 그러므로 수행자여 헌신이 있으면 모든 것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헌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지식이 없어 방황하고, 실천이 없어 무기력하더라고 헌신이 있으면 지고의 영적 경지를 깨달을 수있다.
지고경지는 지식이나 실천만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 그러나 헌신과 지식과 실천의 결합보다 바람직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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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요가란 무엇인가? 요가의 어간은 ‘유즈Yunj'로서 더한다는 것이 아니라 통일시킨다는 뜻이다.>
'Yunj' 를 발음할 때는 n이 발음이 없어서.'유즈'라고 하는게 더 정확하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