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이하라 다다오님이 궁금합니다
집회에서 하지 못한 질문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생각하다 오류문고 카페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에만 두고 있다 종로집회에서 오신 분께 입방정을 떤 계기로 이글을 쓰게 됩니다. 감사하게 이 긴 이야기 코너를 발견했습니다. 전 오류동집회에 작년 4월 13일부터 참석한 무교회의 초보자임을 먼저 밝힙니다.
일본 무교회신자들의 글
오류동집회에서 김선생님이 일본 무교회신자의 글을 계속 번역해서 소개해 주셔서 저로서는 미우라 아야꼬 이후 거의 삼십년만에 일본신자들의 글을 접할 기회를 갖는 것 같습니다. 일본 소설가 엔도 슈샤쿠의 작품을 좋아하여 몇 권 읽었지만, 모두 소설이어서 장르가 다릅니다. 후지오 마사히토선생의 ‘할아버지 성서이야기’는 끝부분 일부를 보아서 뭐라 말하기 좀 이르고, 지난 10월 19일 후지오선생의 한국의 기독교(1990년)는 유익하게 잘 읽었습니다. 한국교회를 일본인의 입장에서 비교적 객관적으로 썼다고 봅니다. 특히 기장교회에 대한 평가는 공감이 컸습니다.
반면에 위의 글과 집회에 참석하면서 여러 방면으로 우찌무라선생이나 그 제자분들의 글을 단편적으로 접하게 되면서 뭔가 신앙에서도 아직 일본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무교회가 일본에서 시작하였고 발전하였기에 집회에서 일본 무교회신자들의 글을 소개하는 것이 일견 이해는 가지만, 서구신학을 주로 공부한 목회자들이 사역하는 교회를 오래 다닌 제게는 솔직히 어색함과 반감이 없지 않았습니다.
특히 제가 요즘 우리의 근현대사를 팟캐스트를 통해 듣다보니 일제의 만행에 치가 떨리고, 오늘의 우리 사회의 모순이 다 일제잔재를 다 청산하지 못함에 기인한 것 같아 이런 생각이 더 듭니다. 최근에는 이덕일 선생의 '우리 안의 식민사관'이라는 저자의 강의를 들은 후 더 그렀습니다. 물론 나라를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일제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우리와 조상들이 일차적인 책임이 있겠지만 근현대사의 일본은 참 불편하고, 가깝지만 아주 먼 이웃입니다. 그 일본이 제국주의의 길로 갈 때 우찌무라 선생이 무교회를 시작하셨고, 그 무교회의 명맥이 지금 여기 오류동집회까지 이어져와서 제가 그 모임에 참석하고 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게 생각되기도 합니다. 이런 감정들은 무교회를 찾는 한국의 기독교인이라면 갖을 수 있는 생각아닐지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분명 뜻이 있을 것만 같습니다.
야나이하라의 예레미아?
그런 가운데 김선생님이 번역하신 야나이하라 다다오의 ‘내가 존경하는 인물’(1940년 3월30일 서문)이라는 책의 예레미아 소개는 생각할 거리를 많이 제공하셨습니다. 저는 야나이하라선생을 잘 모릅니다. ‘김교신 거대한 뿌리’라는 책에 몇 번 소개된 것을 읽었습니다. 당시 조선사람들에게 잘해주셨고, 그분이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이고 동경대 총장을 지낸 우찌무라선생의 제자라는 것 정도입니다. 김선생님이 번역한 글을 같이 읽으면서 받은 첫 인상은 강대국에 둘러싸인 약소국 유다백성이고 곧 바빌론 유수의 운명에 처할 민족의 선지자 예레미아와 제국주의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 야나이하라 선생은 제게는 뭔가 구색이 맞지를 않았습니다. 양심적 지인인이라는 말을 제가 납득할 수 없었나 봅니다. 독일의 본회퍼정도는 되어야 양심적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차세계대전과 인종학살의 주범인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시도하다 발각되어 순교를 당한 본회퍼 목사말입니다. 언젠가 집회에서 본회퍼목사님에 대한 공부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야나이하라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싶습니다.
집에 와서 야나이하라가 어떤 저항을 했기에 양심적 지식인이라고들 할까 궁금하여 인터넷을 검색해보았습니다. 식민정책을 공부한 경제학자였다고 합니다. 아래는 다음 백과사전 소개입니다.
1893. 1. 27 이마바리[今治]~ 1961. 12. 25 도쿄[東京].
일본의 경제학자.
1917년 도쿄대학[東京大學]을 졸업한 후 스미토모[住友] 총본사에서 근무하다가 1920년 모교의 경제학부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유럽 유학 후 1923년 교수가 되어 식민정책을 강의했다. 1937년 〈주오코론 中央公論〉에 발표한 논문 〈국가의 이상 國家の理想〉의 내용 중 반군·반전 사상이 문제가 되어 대학에서 물러났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5년 11월 오우치 효에[大內兵衛] 등과 함께 모교에 돌아와 1951~58년 2차례에 걸쳐 도쿄대학 총장을 역임했다. 학생시절부터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가르침을 받아 성서연구회와 잡지 〈가신 嘉信〉 등을 통하여 반전·평화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경제학, 식민정책 분야에서의 우수한 업적과 함께 그리스도교 신앙에 입각한 실천과 많은 저서로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주저로는 〈제국주의하의 타이완 帝國主義下の臺灣〉(1937)·〈남양군도의 연구 南洋群島の硏究〉(1935) 등이 있고, 사후에 전 29권의 〈야나이하라 다다오 전집〉(1963~65)이 간행되었다.
이진구 선생이 엮은 ‘무교회란 무엇이냐?’라는 책자에도 야나이하라의 ‘무교회주의란 무엇이냐?’(가신 56년 6,7,8월) 라는 글이 있어 읽어봅니다. 앞의 한국 무교회신자의 글보다 더 잘 이해가 가는 명쾌한 글이었습니다. 글중에는 예레미아를 모세 이후의 종교개혁가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잘 접해보지 못한 관점이었습니다. 즉 종교개혁가 전통을 모세-예레미아-예수-바울-루터-우찌무라 이런 순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그 종교개혁사의 정점은 물론 예수입니다.
특히 3절의 무교회주의의 원리와 실제 (4)번에서 ‘무교회주의에는 사회의 실제문제에 대한 민감한 비판이 있다’는 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무교회주의의 예언자적인 정신을 말합니다. 우찌무라선생의 제자들 모두가 이에 동의하는 지는 몰라도 야나이하라는 ‘무교회주의는 하나님의 나라를 영적으로 대망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항상 혁신적, 개혁적 편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중략) 사회의 현실상태에 대하여 초월적 태도를 취하고 있으면, 모르는 사이에 보수적인 사상경향을 가지게 되고, 사회에서 박해받을 일도 없습니다. 무교회주의가 생명을 가지는 것은 전시 중에 전쟁정책과 천황숭배의 국가주의에 대한 최대의 저항을 나타냈고, 그 때문에 박해를 받은 자가 무교회안에서 여럿이 나온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최대의 저항을 했다는 표현에 아직 동의할 수는 없지만 저는 야나이하라의 삶과 중앙공론에 발표한 ‘국가의 이상’이란 논문, 식민정책 분야에서의 우수한 업적이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박해 받은 무교회신자가 누구고 어떤 박해를 받았는지 궁금합니다. 이 궁금증을 해소할 기회를 기대합니다.
끝으로 이런 생각과 공부의 기회를 주시고 항상 격려해주시는 김선생님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저는 제 지나친 생각을 순화할 수 있었고,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가해국의 기독인이었다면 뭘 할수 있었을까요?
첫댓글 오래 전에 했던 야나하이하라 다다오의 삶에 관한 공부를 같이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생깁니다. 일본인 무교회신자들의 글에서 현실문제나 상식의 관점에서 종종 차이를 발견하곤 '역시 일본인이구나' 할 때가 있습니다. 그들 역시 일본사회의 일원이기 때문에 일본문화(특히 천황제나 불교문화) 속에 살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사회에서 나라에 반기를 든것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양심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본회퍼처럼 목숨을 버리는 정도는 아니지만, 사회적, 학문적 지위를 모두 박탈당한 것이었으므로 그에 상응한 저항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긴 글로 답할 기회가 있겠지요.
저는 글을 쓰 주신 님과 같이 '미우라 아야꼬' 선생의 책을 수권 읽었던 사람으로 공감이 갑니다.
일본의 신앙의 선인들의 면면을 보면 내촌 제자이면서 야나이하라의 선생은 일본의 최고의 신앙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 자신이 그렇게 보기도 하고요 하여 일본분이라도 우리가 존경해야 할 인물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저는 이마이강 성서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강의 하였던 것을 원어로 상하권을 읽은 일이 있는데, 그 때에 학생들은 얼마나 좋았을까? 할 정도로 깊은 감명을 받은 일들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글을 카페에 올리니 그 책임의 무게가 상당하네요. 제가 봐도 좀 지나친 제 개인적인 생각인것 같아 댓글로 흔적을 남기고 수정합니다. 위글에서 아래 부분은 삭제하였습니다.
"언젠가 집회에서 본회퍼목사님에 대한 공부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당시 일본에서 이런 치열함, 즉 천황이나 제국주의 일본의 지도자를 암살하려하거나 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1932년 이봉창 의사가 일왕을 폭탄으로 암살하려다 실패했습니다.) 이런 점이 일본 무교회의 한계가 아닐까 하는 지나친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일본의 무교회신자들은 안중근의사나 이봉창의사의 사건을 어떤 시각으로 봤을지요?
안중근의사나 이봉창의사의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본 적이 없습니다. 일왕이나 제국주의 지도자를 살해하려는 시도는 아니었지만, 전쟁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시도는 남바라시게루(야나이하라 전기 동경대총장) 등에 의해 진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