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상관으로서 부하들을 철저히 보호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자기를 믿어주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건다’라는 말도 있지만,
그래야 유사시 나를 믿고 내 명령을 따를 수 있지 않겠는가.
내가 3중대 소대장으로 온 얼마 후 유완식 대대장이 중화기중대의 소대장 보조로
선임하사관을 데리고 왔다. 그는 제주출신의 최태원이라는 일등 상사였다.
그런데 그의 형이 제주 4·3사건 때 참여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 군대 내에서 그런 사건에 연루된 가족이 있는 병사는 자진신고를 하도록 했는데,
최 선임하사관이 신고를 하지 않았다. 결국 신원조회에서 걸려
신고를 기피했다는 것 까지 가중되어 최 선임하사관은 불명예제대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나는 그때 최 선임하사관을 어떻게든지 구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대대 정보장교, 중대장들로부터 최 선임하사의 구명을 청원하는
서명을 받아낸 후 마지막으로 사단장인 이준식(李俊植 1901-1966) 준장을 면담했다.
광복군 출신의 이준식 장군은 당시 나이가 꽤 있으신 분이었다.
읍소하는 내게 이 사단장은 “자네가 신고를 왜 못 받아냈느냐!”며 질책을 했다.
“최태원 본인은 했습니다!”
“그런데 왜 안한 것으로 되어 있나?”
“실은 제가 빼버렸습니다!”
“뭐라고!”
사단장은 놀라며 내 얼굴을 의아스럽게 응시했다.
신고를 했는데 내가 뺐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나는 덧붙였다.
“그는 군에 있으면서 맹활약을 해서 훈장까지 받은 일등상사입니다.
본인이 아닌 형이 4·3사건에 연루된 것을 신고를 안 했다고 해서
불명예제대 시키는 것은 가혹합니다!”
이준식 사단장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떼었다.
“선임하사는 신고를 했는데 자네가 뺐다면 그럼 자네가 처벌을 받아야 되겠군!
자네가 군법회의 가도 좋겠나?”
“네, 가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최태원 하사관은 구제되었다. 물론 나도 군법회의에 회부되지 않았다.
이준식 사단장의 포용력 있는 인품이었다.
부하를 사랑하는 선의를 인정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운명이었다. 6·25 때 인민군 공격을 받고 내가 백척간두의
죽음의 위기를 맞았을 때 나의 목숨을 구해준 게 최 하사관이었으니 말이다.
그 후 그는 또 함경북도 길주에서 전사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6·25 전쟁’ 페이지에 부연하기로 한다.)
사단범위에서 보면 군은 사단장, 연대장,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으로
상하관계를 맺고 있다. 군처럼 상관과 부하관계가 또렷한 조직은 없다.
소대장인 나는 대대장이 직속상관이다. 군 생활에 있어서 상관으로서
부하들도 보호해주어야 하지만 부하로서 상관의 신임을 받는 것 또한 중요하다.
상관의 신임과 보호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술 사주고,
금품 갖다 주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아부는 한두 번은 통할 수 있으나
길게 통하지 않는 법이다.
상관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는 그의 통솔 방침을 잘 알아야 한다.
그것을 연구하고 세부 시행계획을 세워서 뒷받침해주는 부하가 유능한 부하다.
그러면 신임은 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
상관의 통솔 방침을 알아내어 그 시행계획을 세우고 로드맵화해 보고하거나
결재를 받아내어 적극적으로 실행해 나가는 것이 좋다.
그리고 회의를 통해 집행과 실행과정을 보고해나가면 궁금해 하지 않는다.
그 다음부터 무슨 얘기를 하던 상관은 경청해주고 지원도 해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한번은 유완식 대대장으로부터 신임 장교들에게
“사병교육 프로그램 리포트를 써내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다.
그때 막 창설한 공병의 편성이 47명이었다. 나는 여기저기 교본과 자료를 찾아
참조하고 발췌해서 리포트를 작성해서 제출했다.
그 얼마 후 대대장으로부터 신임장교들 집합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다.
그때 한 중대에 세 사람의 신임장교가 있었고, 3개 중대니 9명이었다.
집합을 하니 유완식 대대장이 “최종성 소위가 누구냐?”고 물었다.
내가 손을 들며 “접니다.”라고 하니, 그는 “일보 앞으로 나오라”며
”자네의 교육 프로그램 리포트가 아주 휼륭하다. 자네가 1등이다.“며
나를 7기가 하는 3중대 부중대장 겸 선임소대장으로 임명했다.
계급은 소위지만 중대장 다음의 서열이었다.
그런 것도 상관으로부터 신임을 얻는 기제였는데 당시는 국군,
특히 공병대의 이론적 토대가 완전히 확립되지 않은 개척기였다.
천성적인지, 아버지의 양육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난히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했던 나는 외국자료 등을 연구하며 훈련교육에 응용했고,
보직에서도 동기보다 앞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