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벌써 가을이 되어 가는구나. 이곳 시골에 살고 있는 나는, 곧 다가올 겨울을 대비하기 위한 준비를 하느라고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단다.
친구야, 너는 아직도 지나간 과거에 네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에 대하여 정직하고 신실한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니? 지나간 시절에 범했던 수치스럽고 치졸한 죄들이 너의 영혼을 지금도 아프게 하고 있니? 만일 그렇다면, 주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바라보아야 한단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분의 피는 너의 죄와 죄책감을 깨끗하게 씻어주기에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단다.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 당하는 친구에게
친구야, 과거에 우리가 도덕적으로 무력했던 경험들, 나쁜 습관과 성질을 이기지 못해서 여러번 쓰러졌던 경험들, 하나님 앞에 드렸던 엄숙한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지 못했던 경험들, 그리고 주님의 진리를 비겁하게 거절했던 경험들은 종종 우리를 낙망시켜서 우리의 믿음과 신앙을 의심과 불신의 늪으로 끌고 가려고 한단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서 더 이상 실망할 필요가 없단다. 과거에 행했던 부끄러운 죄악들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렸던 정직한 고백과 진실한 회개의 기도와 함께 바다 보다 깊은 곳에 이미 수장되어 버렸단다. 구세주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의 죄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눈같이 희게” 되었단다. 비록 너와 나를 아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아직도 과거에 우리가 범했던 죄와 수치를 기억하면서 조롱하고 비웃는다고 할지라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보시고 당신의 깊은 품으로 “가치있는” 우리를 안으신단다. 실망과 낙담만을 가져오는 우리 자신의 감정과 느낌을 떨쳐버리고, 우리의 목적과 계획과 생애 전체를 하나님께 맡김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의 사상과 계획과 정서를 지배하실 수 있도록 하자. 가장 지치고, 어둡고, 낙망되고, 슬프고, 괴로울 때야말로, 우리가 믿음의 손을 뻗어서 그분의 강하신 팔을 붙잡아야 할 순간이란다.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있는 힘을 다해서 그리스도의 피묻은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할 때란다. 그분의 용서하심과 사랑은 우리의 마음 속에 평화와 조용한 확신을 부식시키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단다.
교회 안에서 고통 당하는 친구에게
친구야, 너는 항상 교회에서 판을 치고 있는 위선과 이기심과 파렴치함 때문에 당하게 되는 고통을 내게 호소했지. 친구야, 너는 돈많은 장로님과 세속적인 집사님들이 세상에서 얻은 명예와 평판을 교회 안까지 가지고 들어와서 세도를 행사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사업을 그들의 이기적인 재치와 수학적인 판단으로 끌고 가는 것을 보면서 내게 한탄했지. 그러나 친구야, 교회는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곳이며, 나처럼 부족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니 어찌 그러한 연약함이 없을 수 있겠니? 인간이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교회 안을 배회할 때, 그들은 그러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단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최선의 행동이요, 계획이요, 판단이기 때문이란다. 친구야, 교회 안에서 거들먹거리는 가라지를 보면서 실망하지 말아라. 또한 알곡처럼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위로를 받으려고 하지도 말아라. 그들은 모두 연약하고, 언제든지 변하기 쉬운 존재들이란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성품과 희생적인 생애를 우리 자신의 생애와 비교해 봄으로써, 위선과 이기심의 가면을 벗어 버리도록 하자. 친구야, 우리가 언제까지 동료 인간들의 연약함을 보면서, 회의와 불신의 늪으로 찾아 가겠니?
진리와 재림을 사모하는 친구에게
친구야, 마지막 시대에 하늘을 위하여 준비하는 자들은 진리 때문에 당하는 고난과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란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에 순종하기를 원하며, 거룩한 생애를 살기 소원하고, 하늘 진주문을 들어가기를 갈망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루 하루를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진리에 순종하는 거룩한 생애를 살기로 선택할 때, 그 댓가로 고난과 희생을 감수해야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란다. 그들은 두려워서 순종하기를 거절하며, 그것이 두려워서 하늘을 포기한단다. 친구야, 그들은 순종의 입구에서 서성거리고, 두리번거리지만, 결코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기로 선택하지는 않는단다. 그 결과로 성령께서 주시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돈과 명예와 사치를 얻거나 유지하기 위해서 성령의 음성을 외면한단다. 그들은 순종의 뒤에 따라올 수 있는 희생을 너무나 두려워 하기 때문에, 순종의 결과로 찾아오는 하늘의 평화와 구원의 확신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한단다.
친구야, “주를 향하여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한단다(요일 3:3).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마다 세상과 세속을 무가치한 것으로 던져버리고, 진리 앞으로 더욱 더 가깝게 나간단다. 재물과 명예와 인기와 평판과 같은 것들이 무가치하고 순간적인 것들로 보일 때까지,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기쁨과 평화를 이해할 수 없단다. 친구야, 우리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재 강림에 대한 소망이 식어질 때, 우리는 뜨뜻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인이 될 수 밖에 없단다. 곧 오시는 주님의 재림을 선포하는 생활을 살지 않을 때, 너와 나는 육체적 본능이 요구하는 정욕과 탐욕에 굴복하여 살아가는 비참한 종살이를 살게 될거야. 그 때, 사단은 우리 곁에 와서, “너는 불쌍한 위선자야!” 라고 속삭임으로써, 우리를 깊은 절망의 절벽 아래로 떨어뜨릴거야. 친구야, 예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우리의 두 발이 지구의 표면에서 떨어져서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할 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지나간 생애 동안에 하늘을 사모하며 진리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았었다는 사실이 증명될거야. 그 때까지는 인내와 봉사와 희생의 잔들을 마시면서, 좁은 길을 걸어야 한단다.
그러나 우리는 장차 하늘 진주문을 손으로 만지고, 영원한 생명수로 목을 축이면서, 과거에 세상에서 드렸던 우리의 희생과 헌신에 대해서 부끄럽게 생각하게 될 것이며, 너무나 과분하게 주어진 보상에 대해서 영원토록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란다.
실제적인 승리를 갈망하는 친구에게
친구야,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로 온전히 돌아가는데에는 때때로 특별한 노력과 투쟁이 요구된단다. 매일의 생활에서, 우리 앞에 나타나는 십자가를 지지 않고, 어떻게 더욱 더 높고 고상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겠니? 많은 사람들이 장래의 어느날에 기적같이 자신의 신앙이 변화되어서 구원받게 될 것을 희망하지만, 하나님의 기적은 그러한 방법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당신의 역사에 있어서, 우리의 협력과 동의 없이는 구원하시는 기적을 결코 베풀 수 없단다. 죄를 버리고, 악에서 돌아서는 일은 우리 자신이 결정해야 할 의무란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유지하고 향상시키는 일에 있어서, 우리가 해야 할 몫이 있으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몫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인간의 양심 속에 호소하실 때, 인간은 자신의 영혼 속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자신의 뜻과 계획을 굴복하기로 선택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사업에 협조해야 한단다.
그리스도인의 승리는 매우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단다. 배를 타고 가서 전도하고, 비행기를 타고 가서 영혼을 구원하는 “큰 사업”에 대해서는 많은 열심을 내는 사람이 아주 “적고 낮은 일” 에 대해서는 부주의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친구야, 너는 금년에 얼마나 “큰 사업”을 주님을 위하여 계획하였니? 네가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위대한 일을 하고 싶거든, 먼저 “지극히 적은 일”에 충성하는 법을 배워야 한단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누가복음 16:10. 우리의 인생을 성공으로 이끄는 비결은 세상에서 “작은 일”이라고 칭하는 것들을 신실하게 실천하는데 있단다. 조그마한 자선, 적은 극기와 인내, 사람의 마음에 신선한 꽃이 피어나게 만드는 친절한 말 한마디, 작고 사소한 죄를 경계하는 것,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 교회가 가지고 있는 참된 신앙의 기초란다. 일상 생활에서 친절하고 예의 있으며, 가정 안에서 관대하고 오래 참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위대한 복음 사업을 위해서 가장 잘 준비된 사람이란다.
가정에서 시작되어야 할 그리스도인의 신앙
한 방울의 비가 땅을 적셔서 다음 빗방울의 자리를 예비해 주는 것처럼, 한가지의 작은 선한 생각이 다음에 이어질 선한 행위의 길을 예비한단다. 그러므로 친구야, 가장 작은 일에서 정직하게 행하고, 날마다 유쾌한 말과 환한 미소를 인생의 길 위에 뿌리면서 살아가자. 칭찬이나 이익을 생각치 말고, 오직 하나님의 진리와 원칙에 의거해서 작은 일들을 하나씩 해결하도록 하자.
친구야,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큰 위선이 무엇인지 아니? 그것은 가정에서 읽지 않는 성경을 교회에서 크게 읽는 것이며, 가정에서 나눠주지 않는 미소를 교회에서 마구 흘리며 다니는 것이고, 가정에서 보여주지 않는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교회의 모든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것이지. 가정에서는 자기 멋대로 하고, 고집세며, 무뚝뚝하고, 냉정하고, 교만하면서도, 교회에서는 가장 젊잖고 유머있으며 관대한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하기가 얼마나 쉬운가! 친구야 율법의 완성은 사랑인데, 그 사랑이 가정 먼저 실행되어야 할 곳은 가정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리스도인에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분명히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성품과 생애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다음과 같은 말씀은 너와 내가 부족한 면을 지적해 주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니? “’나는 하나님을 믿으며 계명을 지킵니다’ 라고 그대가 말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그대는 자신의 가정과 가족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계명이 요구하는 원칙들을 잘 이행하고 있는가? 만일 그대가 가족들에게 무례하거나, 불친절한 말을 하거나, 무례하게 대한다면, 그대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지라도, 그대는 그분의 사랑의 계명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다른 사람에게 아무리 사랑과 계명을 강조하는 설교를 한다고 할지라도, 그대의 가정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계명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율법을 범하는 자이다.” Maranatha.
친구야,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 우리가 어떻게 감사함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비이기적인 생애를 살 수 있을까?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육체는 하나님의 진리를 거절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단다. 어떻게 우리가 거룩한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늘을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셨던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사랑과 봉사의 생애를 명상하는 사람마다, 자신이 한 모든 선한 행위를 부끄럽게 여기게 되며, 오히려 자신의 게으름과 이기심을 채찍질하게 되고, 그분의 아름다운 성품과 생애가 자신의 삶 속에서 재현되기를 소원하게 될 것이다. 친구야, 끝으로 너와 나를 위한 특별한 글을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그리스도의 진리와 성령의 감동하심이 너의 생애 속에 깊이 깊이 새겨지기를 기도하마.
“교회와는 연합하였지만, 그리스도와는 연합하지 않는 자들이 교회 안에 너무나 많이 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베드로가 자신의 모든 애정이 담겨져 있던 그물을 버리고 따라갔듯이, 주님을 따라야 한다. 때로는 세상에 속한 옛 친구와의 우정도 끊어야 하며, 일생의 포부와 계획을 포기해야 하고, 세상에 남아 있는 소망도 버려야 한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길은 교만한 어깨를 펴고, 자신만만하게 팔을 흔들면서 걷기에는 너무나 좁고 험한 길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베드로에게 그물을 버리도록 요구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피로 얼룩진 은혜가 오늘도 그대와 나에게 세상과 자아를 버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오늘, 그대와 내가 하는 말, 행동, 계획, 그리고 생각은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과 죽음을 반사하고 있는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치루어졌다는 진리가 그대와 나의 마음에 새겨진다면, 우리의 말과 행동은 전혀 새로운 것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바라볼 때에 변화되는 우리의 생애와 품성.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그대는 지금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에 거하고 있는가?” God Taught Love
친구야,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성품과 생애의 모본이 우리를 붙잡고 있는 모든 인간적인 사상과 철학을 송두리채 뿌리 뽑을 때까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자. 안녕!
시골에서 친구가
편지, 친구, 고통, 죄, 교회, 재림, 이기심, 위선, 세속, 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