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릉과 후릉 사초시 감역관에게 숙마 1필 사급
2. 해제
풍덕도호부사 개탁,
우부승지 조준영
너는 제릉(조선 태조 이성계 제1부인 神懿王后 韓氏 릉), 후릉(제2대왕 定宗과 妃 定安王后 金氏릉) 수개시 감역관을 겸한 풍덕
도호부사의 노고에 대하여 숙마 1필을 사급하며, 이를 승정원 서리에게 지참시켜 전하니 너는 정중히 받아라. 旨(국왕)
동치8년10월초9일(1869년, 고종6년 흥선대원군 섭정시)
3. 유네스코 등재된 陵 40기 및 릉에 얽킨 이야기
조선의왕 27명 중 陵 24기(북한에 있는 정종의 후릉, 연산군 및 광해군묘 제외) 계비 등 단릉 13기, 추존왕 5기(덕종 성종부, 원종
인조부, 진종 정조양부, 익종 헌종부, 장조 정조 생부 고종때 추존) 북한에 있는 제릉과 후릉 2기 포함 총 42기가 있다. 그중 40기만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고, 2기(제릉과 후릉 )는 북한에 있어 유네스코에 등재되지 못하였다.
※ - 齊凌은 이성계 제1부인 한씨가 부군이 왕로 등극하기 1년전에 사망하여 현 개풍군 상도면 풍천리에 안장된 묘를 이성계 등극 후
제릉으로 추존하였다.
- 태조 健元陵은 제3대 태종 8년에 태조가 훙거하여 당연히 부모를 건원릉에 합장 할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그러지 아니하여 태조도,
신의왕후도, 신덕왕후(세자 방석의 母)도 貞陵에 각각 홀로 모셔져 있다. 일설에 의하면 태조의 릉은 당연히 수도 인근으로 모셔야
되고, 母 신의왕후 제릉은 풍수 지리상 명당이라 본인이 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어 천장하지 않았다 한다.
태조는 평소에 본인은 고향인 함흥에 묻치기를 원하여, 태종이 부왕에 대한 효심으로 대신 함흥의 갈대를 가져다 봉분하여 지금도
그 갈대가 봉분에서 이어져 생존하고 있다.
- 정종의 厚陵은 妃 金氏가 태종 8년에 훙거하여 현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에 안장하고, 정종은 세종 1년에 훙거하여 합장한 것이다.
정종은 훙거후 시호를 온인공남순효대왕(溫人恭男順孝大王)으로 정하고 중국으로부터 공정(恭靖)이란 시호를 받았으나 묘호만은
정하지 않아 祖·宗을 사용하지 못하고 공정왕(恭靖王)으로 불렸다. 262년 뒤에 송시열의 주청으로 숙종 7년에 廟號를 정종(定宗),
릉호를 후릉(厚陵)으로 추존하였다.
- 단종은 莊陵(영월)에, 비 정순왕후는 남양주 思陵에 單陵으로 모셔져 있음.
- 예종의 昌陵에 계비 안순왕후가 동원 2강릉으로 안장되어 있고, 원비 한명회의 3녀 장순왕후는 일찍 훙거로 恭陵에 단릉이다.
- 성종의 宣陵에 계비 정현왕후(중종의 母)와 안장되어 있고, 원비 한명회의 4녀 공혜왕후도 일찍 훙거로 順陵에 단릉이며, 선릉은
임진왜란때 왜군이 도굴하고 왕과 왕비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였는지 알수없어(관과 함께 태운것으로 추정) 유골이 없는 릉으로
되어 있다.
- 중종은 靖陵에 홀로 單陵으로 모셔져 있고, 왕비 3명도 각기 단릉이다.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 훙거후 대모산 중턱에 안장 했는데
김안노가 조성 당시 큰 돌이나왔는데 신중히 검토하지 않아다 하여, 중종이 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으로 이장한 禧陵이다, 중종은
훙거 후 禧陵 오른쪽 언덕에 안장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제2계비 문정왕후(명종의 母)가 중종과 합장하기 위해 측근인 승려 보우와
공모하여 그 자리는 불길하다 하여 현재의 강남으로 정릉을 이장했다. 그러나 여름 장마철만 되면 한강물이 릉앞까지 범람하여 합장
을 원치 않아 아들 명종이 泰陵(현 노원구)에 단릉으로 안장 되었다고 한다.
중종의 靖陵도 임진왜란때 왜군에 의해 도굴되어 조사과정에서 중종의 용모와 전혀 다른 시신이 묻쳐있어 그 시신은 다른 곳으로
정중히 묻어 주고, 중종의 龍身도 찾못하여 靖陵도 유골이 없는 陵이다. 문정왕후는 정릉에 합장 안하고 태릉으로 단릉을 써서 변을
면한 셈이 된다.
조선시대는 장마등으로 시신이 유실되면 남자는 밤나무, 여자는 오동나무로 시신을 만들어 안장했다. 기록은 없으나 명분을 중시
하는 유교 이념에 따라 성종 및 정현황후와 중종도 그런 방책으로 시신을 대신하지 않았나 사료된다.
- 영조의 元陵에는 원비 정성왕후가 아닌 계비인 정순왕후가 쌍봉으로 안장되어 있다. 이는 정조 훙거 후 어린 순조때 수렴청정으로
그의 권세가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말해주는듯 하다.
※ 정종과 태종은 동복 친형제로서 우애가 깊은것으로 알려졌으나, 정종 재위시 태종이 世子(왕의 동생이기 때문에 世弟가 되어야 하나
세자로 임명된 것은 부왕 태조로부터 왕위를 계승한다는 뜻이 내포 된 것으로 사료됨)로서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고, 정종은 2년2월만에
세자에게 선위 하였고, 정종이 훙거할 때는 세종 1년으로 태종이 상왕으로 사실상 국정을 관장하고 있을때인데 정종의 묘호를 제정하지
않아 위에서 언급한 바와같이 비로서 숙종 때서야 제정한 것입니다.
이는 조선 초기에 태종이 왕의 정통성 확립을 이유로 두번의 왕자의난을 치르며 집권하였고, 조선의 개국정책인 정도전의 관료중심
정책을 국왕의 중심 정책으로 바꾸고, 서얼의 차별과 왕권강화에 장애가 될만한 모든 것을 제거하여 왕권강화에 성공하므로서 조선의
기틀을 세운 왕이라, 그의 묘호를 太宗으로 정한것입니다.
세종은 부왕의 치세가 실록에 어떻게 기록될지 긍금하던 차에 태종실록이 완성되었다는 실록청총재관 우의정 맹사성(아래 王旨)의
보고를 받고 실록을 열람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맹사성이 실록은 전하께서 열람하실 수 없다며 반대 했다. 세종이 짐이 실록을 보아도
수정하라 하지 않을것이니 어서 가저오라고 몇번을 독촉하였으나, 맹사성은 전하께서 보시게 되면 후대 왕들도 보게 될것이라 사관들
이 두려움을 느껴 올바른 실록을 편찬하기가 어렵씁니다 하여, 수일간 긴장속에서 결국 세종이 열람을 포기하였다고 합니다.
4. 맹사성 우의정 왕지(右議政 孟思誠 王旨) (원본 사진)
4-1. 해제
왕지
맹사성 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
정부 우의정 영집현전경연사 감
춘추관사 겸 판병조사 세자부자.
선덕2년2월16일(1427년 세종9년)
옥새 :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 이는 명나라로 부터 받은 것이고, 세종15년 부터 자체적으로 만든 국왕행보(國王行寶)를
사용했고, 세종25년 부터는 시명지보(施命之寶)를 사용했다. 명나라로 부터 받은 조선국왕지인은 명나라로 보내는 외교
문서에만 사용하였다.
※ 孟字 옆에 점은 세종대왕이 옥새를 안보하기 전에 내용을 확인한 점으로서 이러한 예는 단 한번인 유일본이며, 국정운영에 자신을
갖고 본인의 치세를 여는 효시로 사료됩니다.
원래 왕의 낙점은 이조 및 병조에서 당하관 이하 인사 상황이 발생하면 적임자 3명을 왕에게 계문하여 그중 한명의 성명위에 낙점을
받아 고신(임명장)을 만듭니다.
- 왕지 우측 밑부분과 大字와 議字 옆 검은점 부분은 종이가 달아서 손실되고 구멍이난 부분이며, 종이는 다듬이 장지인 최고 고급품
이나 6백여년 동안 소중히 보관하며 대를 이어 오면서, 수백번 펼처보게 되어 약간 손실된 부분입니다.
4-2. 2019년3월14일 경향신문에 게재된 복사본 사진
※ 복사본을 복사 하니 손실 부분과 구멍난 부분이 노란색으로 나왔으며, 사진 촬영할때 당겨 촬영하여 우측 밑 손실부분이 나오지
않게 하였습니다.
가. 맹사성 정승은 조선 초기 세종을 잘 보필하여 조선을 반석위에 올려놓은 분으로서 청백리(녹미 즉 봉급으로만 먹고 산 공직자),
효자, 음악가(保太平.定大業 제정 책임관), 연시조의 효시(江湖四詩歌)등 으로 유명 할 뿐만 아니라 업무처리에는 냉철하여
모든 관료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었고, 평소에는 겸손하고 소탈하게 생활하여 정승인줄 알아보지 못하여 많은 일화를 남기신
분입니다.
나.직암집에 실린 맹사성 우의정 왕지 내용(직암집 : 숙종~영조때 학자이며 관료인 신경 문집)
신경이 지방 수령으로 있을때 맹사성의 후손 맹숙춘과 맹여화가 찾아와 맹사성 우의정 왕지와 득팔자 친필 시고을 보여주며
한마디 말로 기록하여 달라고 요청하여, 내용을 보고 왕지에 예의를 표하고, 임진.병자 양난의 와중에 남아 300여년 동안 온전
하게 보전된 것은 얼마나 다행 스러운일이냐 면서 첩으로 만들어 잘 보전하라 하였다는 기록의 요약.
다. 본 왕지와 득팔자 시고 영인본 사진을 6년전에 경향신문에 기사화한 적이 있습니다. 원본을 공개시 공기마찰로 인해 변색 될
우려가 있어 위와 같이 복사 후, 원본은 지방에 있는 서고에 잘 보관되어 있습니다.
본 왕지의 연구는 영인본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원본 왕지는 후세들이 앞으로도 600년이상 변색없이 잘 본존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당대에는 공개하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