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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한 영혼의 가치를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16:26). 박윤선 목사님은 “여기 목숨이란 말은 영혼을 의미하는데 영혼의 가치는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이 이 귀절의 의미”라고 설명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잃은 양 한 마리를 귀하게 여기시면서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이곳 저곳으로 다니는 목자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으면 하늘에 기쁨이 넘치게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7). 그래서 오늘 아침 이 두 곳 말씀을 중심으로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 사람들은 세상의 부귀영화를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지만 하나님과 예수님께서는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수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며 수량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만 하나님과 예수님께서는 한 영혼 한 영혼을 상대하시며 한 영혼 한 영혼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는 엄청난 일을 하시면서 12명의 제자들을 택하셨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군사들을 300명으로 제한시키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소수주의를 주장하시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다수주의를 주장하시지도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한 영혼 한 영혼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넓은 문을 선호하시기 보다는 좁은 문을 선호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 그러면 이제부터 예수님께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실 때에 누구에게 관심을 두시고 전하셨는지 에 대해서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마태복음이 기록한 예수님의 한 영혼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의 행적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서 제자들에게 산상 설교를 하신 다음 산에서 내려 오시면서 제일 먼저 만나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사람이 그 당시 저주 받은 사람이라고 간주하던 나병 환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만나서 은혜를 베푸신 사람은 그 당시 유대인의 증오의 대상이었던 로마 백부장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만나서 은혜를 베푸신 사람은 열병으로 앓아 누어있던 베드로의 장모 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녁이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데려온 귀신들린 사람들을 만나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 이야기가 마태복음 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본 동네에 가서 침상에 들려온 중풍병자 한 사람을 만나셨고 그 중풍병자와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만나주시고 은혜를 베푸신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던 세리 마태 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마9:9).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 한 사람을 만나시고 부르시고 그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므로 그의 인생이 변화되었습니다. 세리 마태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 되었고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생생하게 기록한 마태복음의 저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 한 사람을 만나신 다음에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다른 세리들과 다른 죄인들을 만나주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직원 한 사람을 만나주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열 두 해 혈루증으로 앓던 여자 한 사람을 만나주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소경 두 사람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거기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마태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9:35,36). 예수님께서는 죄와 질병과 불행에 처해있던 한 영혼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시고 그들 모두에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신 주님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게 됩니다. 마태는 마태복음을 마무리하면서 예수님의 복음전파 사역의 관심이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머물지 않고 이 세상 곳곳에 흩어져 있는 모든 족속의 잃은 양들 한 마리 한 마리에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며 주님의 마지막 분부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곳곳에 흩어져 있는 한 영혼 한 영혼에게 깊은 관심을 두시고 한 영혼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시며 그들 모두에게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둘째로, 요한복음이 기록한 예수님의 한 영혼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의 행적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세례 요한의 간증을 기록한 다음 제일 먼저 예수님께서 자기와 안드레를 만나주시고 자기와 안드레를 제자로 삼으신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 시쯤 되었더라”(요1:39). 그 다음 예수님께서는 안드레의 형제 베드로를 만나주셨고 그 다음에는 빌립을 만나주셨고 그 다음에는 나다나엘을 만나주신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요1:4,43). 요한복음 2장은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 잔치 집에 청함을 받아 그곳에 가서 거기 모였던 사람들을 만나주신 일을 기록했고 요한복음 3장은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라고 하는 바리새인 한 사람을 만나 그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도리를 가르치신 일을 기록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등지고 불행하게 살아가던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일부러 사마리아의 수가 성에 찾아가서 그 여인과 친밀한 대화를 나눈 일을 기록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셨고 구원의 축복과 기쁨을 부어주셨습니다. 삶이 변화된 수가성 여인은 수가성으로 달려가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요4:28-30). 예수님께서는 수가성 여인을 사마리아 복음화의 선구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요4:39). 한 영혼의 귀중함이 얼마나 큰 지를 보여주신 놀라운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5장은 예수님께서38년 된 병자 한 사람을 만나주시고 그에게 치유와 구원의 복음을 전하신 이야기와 그가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치신 예수님을 전한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께서 5천 여명을 먹이실 때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바친 어린 아이 하나를 사용하신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떡을 먹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요6:51).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어린 아이 하나가 얼마나 귀한 역할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 어린 아이는 평생 어딜 가든지 자기가 바친 오병 이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을 전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은 예수님께서 간음 현장에서 잡힌 여자 한 사람을 만나주시고 그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모두가 돌을 들어 자기를 쳐 죽이려고 하는데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베푸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 여자의 몸과 마음과 영혼은 놀라움과 떨림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분노에 가득 찬 군중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 이 말씀을 듣고 하나씩, 하나씩 모두 물러갔을 때 예수님께서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 여자를 향해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요8:10). 그 여자는 너무너무 놀랐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인간 쓰레기로 멸시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욕을 했는데 자기를 한 인간으로 보아주시면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주님” 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주여, 없나이다”(요8:11). 저는 며칠 전에 그 여자의 고백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쓰레기 같은 한 인간의 영혼을 그렇게도 귀중하게 여기셨는지!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생각은 우리 인간들의 생각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너무나 높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 지옥 밑 바닥으로 내어 던짐을 받아야 마땅한 인간 쓰레기 같은 한 사람 한 사람을 귀중하게 보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는 무릎을 꿇고 감사와 회개의 기도를 드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간음 현장에서 잡혀서 돌에 맞아 죽을 뻔 했던 그 여자의 삶은 180도로 바뀌어졌을 것입니다. 그 여자는 한 평생 가는 곳마다 그 현장에 대해서 간증하면서 눈물로 주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증거하고 또 증거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은 예수님께서 배신자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베드로와 다른 여섯 제자들의 배신의 죄를 용서하시고 잃어버렸던 믿음과 사랑과 소명을 회복시켜주신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 사건 바로 전에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며 배신했고 부활의 주님을 세 번씩이나 만난 후에도 주님을 배신하며 고기 잡으러 디베랴 바다 아니 세상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신자들의 영혼도 내어버리시지 않고 귀하게 여기시면서 베드로와 여섯 제자들을 찾아와서 그들을 부드럽게 만나주셨습니다. 괘씸한 배신자들이라고 욕을 하시는 대신 말 안 듣고 나가서 놀다가 넘어진 아이들을 부르시는 엄마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저들을 부르셨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요21:5). 저들에게는 고기도 없었고 믿음도 사랑도 소명도 아무것도 없는 것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 부드럽게 물으셨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요21:5). 그리고 계속해서 여섯 마디를 하셨습니다. 저는 이 일곱 마디를 가리켜 ‘해변 칠언’이라고 부릅니다. 일곱 마디 말씀 가운데는 배신자들을 향하신 주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 가득, 가득 나타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결국 통곡을 하면서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요21:17). 베드로와 여섯 제자들은 새로 태어났습니다. 모두 순교의 길까지 달려가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배신자들의 영혼도 내어 버리시지 않고 귀하게 여기시면서 만나주셨습니다. 죄 사함의 은혜를 부어주셨고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새로 부어주셨습니다. 재 헌신의 축복과 순교의 길까지 걸어갈 수 있는 놀라운 축복까지 부어주셨습니다.
셋째로, 사도행전이 기록한 예수님의 한 영혼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의 행적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시간이 많이 갔기 때문에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건들 몇 가지만 간추려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사도행전 9장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핍박자 사울을 만나서 그에게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고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는 사울을 몽둥이로 쳐서 죽이는 대신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셨다고 기록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9:4). 사울이 너무 놀라서 “주여 뉘시오니이까”라고 물었을 때 주님께서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행9:5,6). 사울은 무릎을 꿇고 항복했습니다. 사울의 삶은 180도로 바뀌어졌습니다. 교만하던 사람이 겸손하게 되었고 분노의 사람이 긍휼의 사람이 되었고 정죄의 사람이 용서의 사람이 되었고 증오의 사람이 사랑의 사람이 되었고 이기적인 사람이 희생의 사람이 되었고 세상에 미쳤던 사람이 예수에 미친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아주, 아주 못쓰게 된 사울의 영혼을 너무나, 너무나 귀하게 여겨주셨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의 축복을 받은 사울 한 사람의 영혼을 통해 소 아시아와 마게도냐와 로마의 운명이 바뀌어지는 놀라운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사울 한 사람의 영혼의 변화는 후에 어거스틴의 영혼을 변화시켰고 루터의 영혼을 변화시켰고 수 많은 죄인들의 영혼을 변화시켰습니다. 그 영혼들 가운데는 길선주 도사의 영혼과 이기풍 깡패의 영혼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더 귀중함을 우리는 사도 바울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그리고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도 생생하게 보게 됩니다. 사도행전 10장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욥바에서 기도하는 베드로에게 나타나서 가이사랴에 가서 백부장 고넬료를 만나라고 분부하신 일을 기록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서 마게도냐로 가라고 지시했고 그리고 빌립보 강변에서 기도하고 있던 루디아를 만나게 하신 일을 기록했습니다. 결국 고넬료 한 사람을 통해서 가이사랴의 복음화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루디아 한 사람을 통해서 빌립보와 마게도냐의 복음화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마지막 부분은 부활의 주님께서 사도 바울 한 사람을 로마로 가게 하신 일을 기록했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행23:11). 사도행전 28장은 결국 부활의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을 기어코 로마로 가게 하셨고 사도 바울 한 사람을 통해서 로마의 복음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일을 기록했습니다. 사도행전은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 합니다. 사도 바울의 순교의 이야기를 기록하지는 못했습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행28:30,31).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한 영혼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 영혼 한 영혼을 너무 귀하게 사용하신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대중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귀하게 보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한 영혼 한 영혼에 의해서 이루어져 온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소수주의에 빠질 필요는 없습니다. 3천 명이 회개하는 회개와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수량에 너무 신경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너무 크고 부요한 교회를 추구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들 중에서 가장 칭찬을 받은 교회였던 서머나 교회의 특징은 부하지도 않았고 강하지도 않았고 크지도 않았고 태평하지도 않았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특징은 ‘환난’과 ‘궁핍’ 두 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가장 크게 칭찬하셨고 가장 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계2:9).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약한 자 가난한 자 병든 자 천한 자 무식한 자 멸시를 받는 자들을 부르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귀하게 사용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정치 문화 경제적 잣대로 사람들을 판단 할 필요도 없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께서 보시는 영적 잣대로 사람들을 바라보며 쓸모 없어 보이는 한 영혼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면서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섬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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