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암 이재(李縡) 撰비문
영원군 묘표(靈原君墓表)
지금 성상 무신년(戊申年,1728, 영조 4) 봄에 종신(宗臣) 가운에 효행이 탁월한 자를 선발하라고 명하였다. 영원군(靈原君) 신(臣) 헌(櫶)은 7세 때 부친 광평군(光平君) 명(溟)의 병이 위중하자 번번이 하늘에 절하면서 수명을 연장해주기를 빌었다.
모친 신씨(申氏)를 섬길 적에는 항상 낯빛과 태도를 유순하게 하였으며,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반드시 여쭙고 감히 사사로이 재물을 소유하지 않았고 뜻을 따르는 데 힘썼다. 모친이 이질(痢疾)을 앓자 옷에서 띠를 풀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변을 맛보았는데 수염과 머리털이 모두 세었다.
상을 당해서는 슬픔에 몸이 많이 손상되었고, 매달 성묘를 갔으니 혹한과 혹서에도 그만두지 않았다. 제사 때마다 직접 제수를 살펴서 그 정성을 지극히 하였으니 늙어서도 더욱 게을리하지 않았다. 종부시에서 이를 아뢰니 성상께서 가상히 여기고 특별히 가덕대부의 품계에 제수하였다. 3년 뒤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62세였다. 성상께서 애도하여 매우 후하게 상례를 돕게 하였다.
공은 자가 문숙(文叔)이니 선조(宣祖) 소경대왕(昭敬大王)의 4세손이다. 광평군의 부친은 해령군(海寧君) 급(伋)이고 조부는 인성군(仁城君) 공(珙)이다. 신씨(申氏)는 계통이 고령(高靈)이니 선교랑 선호(善浩)의 따님이자 참판 유(濡)의 손녀이다.
공은 기유년(己酉年,1669, 현종 10)에 태어났다. 처음에 영원수(靈原守)에 제수되었다가 정(正)에 오르고 또 도정(都正)에 올랐으며 또 군(君)에 올랐다. 별직으로 사옹원 부제조, 도총부 부총관과 도총관을 맡았는데, 종친부 유사당상에 제수된 것은 성상의 특별한 은혜였다.
선조 때 종계(宗系)를 변무(辨誣)한 일로 명(明)나라 사람 마유명(馬維銘)이 축하하는 시를 지었는데, 선묘께서 그 시에 화답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뒤이어 시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공이 그 사본을 얻어 올리니 숙종께서 간행하여 반포하라고 명하였다.
영남의 승려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선조의 생부)의 영정을 절에 보관하고 있다고 스스로 말하였는데, 공이 명을 받들고 가서 살피고는 그것이 가짜임을 밝히고 돌아왔다. 성상께서 공이 술을 잘 마신다고 해서 종친을 궁중에 불러 잔치하는 날에 특별히 공에게 큰 은 술잔을 하사하였다.
공의 아들 익형(益炯)이 신천 군수(信川郡守)가 되어 연회를 베풀 적에 하사받은 은 술잔으로 술을 돌리고 전문(箋文)을 올려 성상께 사례하니 세상 사람들이 영화롭게 여겼다. 공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 익형이 묘에 묘표를 세우려고 하면서 내게 비문을 청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옛날부터 존귀한 집안의 자제들은 대체로 음악과 여색, 명견과 명마를 즐겼는데, 공은 삼가고 신중함으로 스스로를 단속하며 또 효성으로 이름이 나서, 성상의 아름다운 은총을 받들고 우리 성조(聖朝)가 친족을 돈독히 여기고 인륜을 숭상하는 다스림을 빛냈다. 이는 응당 묘도에 드러내어 마멸되지 않게 해야 하니 자잘한 행적은 생략한다.
공은 세 번 장가들어 2남 3녀를 두었다. 익형과 참봉 최성대(崔成大)의 아내는 허씨(許氏) 소생이고, 김성근(金聖根)의 아내는 오씨(吳氏) 소생이며, 익황(益熀)과 남은로(南殷老)의 아내는 정씨(丁氏) 소생이다. 묘는 송경(松京) 남의동(南衣洞)에 있고 허씨와 오씨를 합장하였는데 모두 군부인(郡夫人)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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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영원군 묘표 :
저자가 이헌(李櫶, 1669~1730)을 위해 쓴 묘표이다.
[주02] 선조 …… 변무(辨誣)한 :
선조(宣祖)가 즉위한 뒤에 명(明)나라《태조실록(太祖實錄)》과《대명회전(大明會典)》에 조선 건국 초기 왕실의 종계가 잘못 기
록되어 있는 것을 바로잡아 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하였는데, 결국 명나라가 이를 반영하였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