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高 山 書 院
1. 위 치 : 장성군 진원면 진원리 255, 256, 257, 695번지(고산마을)
2. 문화재 : 고산서원(전라남도 기념물 제63호 1982년 10월 15일 지정)
-고산서원 노사선생 전집 및 답문류편 책판(전남 유형문화재 1999. 7. 15 지정)
- 마을 위치
진원리는 불태산 기슭에 자리한 진원면 북구(상림리, 진원리 선적리) 중 중앙에 위치하며 불태
산이 삼성산으로 이어지면서 형성된 계곡에 자리잡은 고산 연동 묘동 3개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은 불태산(602.4m)을 경계로 장성읍과 인접하고 있으며 서쪽은 삼성산에서 대질봉(竹節峯)을
만들고 산동리까지 뻗어가는 낮은 능선을 경계로 선적리와 동쪽은 불태산 지맥인 안마산(241.0m)
을 만들고 학림리로 뻗어가는 능선을 경계로 상림리와 인접하고 남쪽은 산동리와 접하고 있다. 진
원리는 고산리라고도 부르는데 계곡 중앙 들 가운데에 고산이 그 동쪽 안마산 서쪽 기슭에 연동
이 남쪽에 묘동이 마치 한마을처럼 근접해 있다.
고산은 7개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을 중앙의 냇(川)을 중심으로 동쪽에 중동, 광안(光安)이
서쪽에 창촌, 담대(길 양옆), 직동 그리고 진입로 북쪽에 상고 남쪽에 월송(고산서원), 하고가 자
리하고 있다. 불태산과 삼성산에서 흐르는 물이 진원제로 모였다가 마을을 지나 남쪽으로 흐르고
유황샘의 물과 묘동쪽의 물이 고산마을 뒤을 지나 연동옆에서 합수 산동리로 빠진다. 주변마을을
살펴보면 서쪽 1㎞에 선적리 덕주, 남쪽 1.5㎞에 산동리 작동, 동쪽 안마산 너머 2㎞에 상림, 북
동쪽 2.5㎞에 상림리 학동이 자리하고 있다.
- 연 혁
고산서원은 조선시대 6대 철인중 성리학을 정리하신 노사 기정진선생을 봉향키 위하여 후학들
에 의해서 1924년에 평소 선생이 후학들에게 강학하였던 담대헌 자리에 강당인 고산서원을 중건하
고 사우인 고산사를 창건한 것을 비롯하여 차례로 동재인 거경재와 서재인 집의재 등을 건립하여
1927년 완공을 보게 되었고, 그 후 장서각, 장판각, 고직사, 관리사 등을 건립하였다. 비교적 근
래에 세워진 서원으로 사우에는 노사선생을 주벽으로 북쪽 중앙에, 좌벽에 석전 이최선, 동오 조
의곤, 월고 조성가, 송사 기우만, 일신재 정의림을 우벽에 월고 조성가, 신호 김녹휴, 노백헌 정
재규, 대곡 김석구을 4인씩 배향하였다. 서원의 좌측에 1978년에 건축된 장판각과 장서각에는 노
사집을 비롯하여 서원관련 문적과 노사선생문집 책판 862판이 보관되어 있다.
고산서원은 1982년에 전라남도 기념물 63호로, 노사선생전집 및 답문류편 책판은 1999년에 전라
남도 유형문화재 214호로 지정되었다.
o 1878년(戊辰 고종 15) 담대헌을 토담으로 건축
o 1924년(甲子) 영·호남 유림과 문생의 발의로 중건시작
o 1927년(丁卯) 9월 고산서원으로 준공(中丁부터 享祀)
-문간공 노사 기정진, 월고 조성가, 석전 이최선, 신호 김녹휴, 동오 조의곤, 노백헌 정재규,
송사 기우만
o 1985년 대곡 김석구, 일신재 정의림 추배
- 배향인물
□ 문간공 기정진(1798 정조 22~1879 고종 16)
자는 대중, 아명은 금사, 호는 잠수, 지리수, 공동자, 무명와, 노하병부, 노사, 시호는 문간
공, 본관은 행주, 판중추원사 정무공 건의 후손이며 전북 순창군 구수동(지금의 순창군 복흥면 대
방리) 출신으로 5세때 4월에 천자문, 5월에 동몽선습, 8월에 격몽요결을 마치고 12월에 홍역을 앓
기 시작하여 다음해(1804년) 6월에 천연두에 전염되어 왼쪽 눈을 실명하였다.
그 해 12월부터 사략을 읽기 시작하여 1805년에는 통감을 읽고나서부터 아버지의 도움없이 문리
를 깨달아 통감강목을 6개월만에 마치고 춘추사전과 대학연의을 읽은 후 산방이나 조용한 곳을 찾
아 성리학 연구에 더욱 깊이 전념하였다.
부친의 유언에 따라 1831년(34세) 사마시에 응시하여 장원하여 다음해 강릉참봉, 40세에 사옹원
주부, 45세에 전설사 별제(6일 근무), 45세 평안도사, 61세에 무장현감, 64세에 사헌부장령 등의
벼슬이 주어졌으나 불사하였다. 65세(1862년) 진주민란이 삼남으로 파급되자 그 대책으로 임술의
책을 초하고 70세인 1866년에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두 차례의 병인소(6條疏)를 올려 이것이 위정
척사의 기본논리가 되었다.
병인소로 인하여 그해 8월에 호조참의, 10월에 동지돈녕부사, 11월에 공조참판, 경연특진관에
승속되기도 하였으나 사양하였고, 79세에 호조참판에 주어졌으나 사양하고, 그 다음해에 우로전으
로 가선대부가 주어졌다. 1851년 부인상을 당한 후 1853년 유언에 따라 장성군 황룡면 하사마을
로 이거한 후 많은 문인들을 양성 배출하였다. 1875년 겨울에 서석산에 있는 조상의 묘소가 잘 보
이는 진원면 창리(지금의 고산)로 옮겨 효를 다하였으며 1879년 정월에 타계하였다.
송대의 철학자 주돈이, 장재, 정이, 주희 등의 성리학을 독자적으로 연구함으로써 대성하였다.
유림계에서 성리학으로 화담 서경덕, 퇴계 이황, 율곡 이이, 한주 이진상, 녹문 임성주 등 공과
더불어 6대 철인으로 칭한다. 그리고 선현 학설에 이론을 말하는 학자는 사문란적으로 몰았는데
공은 전래의 정주학설인 주리설을 반복하여 리일리분수설을 主唱한 것이 유명한 기노사의 외필,
답문유취이다.
이에 영남 유림들은 일대반발을 일으키어 전국에 성토문을 돌리고 수백명이 창덕궁 문앞에서 항
소한 일까지 있었으나 40세 이후 공에게 경학을 공부하려는 선비들이 모여들었으며 노사의 학설
을 호남에 뿌리 깊게 박혀 손자인 우만과 많은 제자들에게 전수되어 신진학자들은 위대한 학설로
숭배하여 오고 있다. 저서로는 태극도설 중에 定字에 對한 정자설, 4단7정을 논한 우기, 리기 및
율곡의 리통기국에 관한 리통설, 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납량사의, 외필, 답문유취 6권과 노사문
집 15권이 있으며, 면암 최익현이 신도비명을 지었다. 특히 선생이 저술한 납량사의, 외필, 답문
유취 등은 미국의 에일대· 하바드대, 영국 옥스퍼드대, 중국의 북경대의 철학과에서 교재로 이
용 될 만큼 귀중한 동양철학의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 월고 조성가(1824∼1904)
자는 직교, 호는 월고, 본관은 함안, 하동 출신으로 노사선생의 행장을 지은 수제자이다. 하동
군 회산마을(현재 옥종면 회신리)에서 태어나 옥종면 월횡리에서 살았던 선비로 노사의 학문을 배
우기 위해 300리길을 멀다않고 달려온 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세종 때인 1434년 양정공 하경복
의 아들인 회녕절제사 강장공 하한이 수곡면 사곡에서 이곳으로 이주해와 300여년간 번성하였고,
월고 조성가의 증조인 조경진이 1780년경 들어와 200년동안 문한으로 이름을 드러냈고, 농포 정문
부의 후손인 월포 정광익이 1830년경 들어와 크게 번성했다고 한다. 현재 월횡에는 진양하씨 문중
의 도천서당이 있어 경현사에서 양정공 외 3현을 향사하고 있고, 함안조씨 문중의 월봉서당과 서
강정사 함월정이 있었으나 서당과 정사는 없어지고 함월정(涵月亭)만이 마을 앞 도덕천변에 외로
이 남아 있다.
월횡의 함안조씨 집안의 대표적 인물은 월고 조성가라고 할 수 있는데, 현재 그의 흔적이 아무
데도 남아 있지 않아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옥종면지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돼 있다. 어려서
부터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다. 약관의 나이에 널리 백가의 글을 섭렵하였으며 문장은 간략하고 고
졸하여 유속의 말을 익히지 않았다. 기노사 문간공을 사사하니 노사가 외필을 지어 주었다. 임인
년에 기로사에 들어가서 은전으로 통정의 품계에 오르게 되었다. 월고는 1824년 회산에서 동몽교
관 광식의 아들로 태어났다. 함안 조씨로 인조때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공신록권을 하사받
은 익도의 5세손인 원로가 함안에서 옥종 운곡으로 이주했으며, 얼마 후 그의 아들 경진이 월횡으
로 옮겨왔는데, 이 분이 월고의 증조이다. 조부 때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회신으로 옮겨와 월고가
회신에서 태어난 것이다. 월고는 어려서 자질이 남달라 10세쯤에는 누구에게 배우지 않아도 식견
이 뛰어나 마을 어른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공부를 배울 때는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익혀 학
문에 정진했다. 약관의 나이에 경사백가를 이미 섭렵해 향시에 여러번 합격을 하기도 했다. 이때
마을 사람들이 월고의 높은 식견을 칭찬했으나 “이것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라고 말하며
자신을 일깨워줄 스승을 찾아 나섰다.
전라도 장성땅에 당시 기호학파의 영수인 노사 기정진이 있다는 것을 알고, 28세 때인 1851년
300리 길을 멀다 아니하고 달려가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
노사는 300리길을 달려온 월고를 시험해 보고, 자질과 학식이 특출함을 한 눈에 알아보고 남달
리 아꼈으며 이로 인해 조예가 날로 깊어 동료들이 그의 학식을 인정하면서 명성이 날로 더해갔
다. 1852년 부친을 모시고 회산에서 월횡으로 옮겨와 자식의 예를 다하면서 학문에 더욱 정진했
다. 1859년 스승인 노사 기정진이 월횡의 월고 조성가를 찾아왔다. 이때 월촌 하달홍, 노백헌 정
재규, 계남 최숙민 등 영남 기호학파의 대표적 선비들이 자리를 같이 하여 학문을 강독했다. 1877
년에는 당시 성리학의 한 학파를 형성했다고 할 수 있는 성주에 사는 한주 이진상이 남쪽으로 내
려와 산청 사월리에 이르러 월고를 청해 향음주례를 마련하는 등 강회를 열었다. 이어 월고는 한
주 이진상 등 이때 모인 선비들과 남해 금산에 올라 쌍홍문 등을 감상하고 시를 지어 서로를 격려
했다. 월고와 한주는 비록 당색은 달랐으나 학문적인 깊이를 서로 인정하며 교유를 했던 것이다.
1883년 뛰어난 학문으로 인해 선공감역의 벼슬에 천거됐다. 이때 월고는 벼슬에 뜻을 두기 보다
는, 집안의 자제들과 마을의 학동들을 모어놓고 봄·가을로 향약을 마련하고 강독을 열어 여러 가
지 질문과 답변을 모아 분서강약을 만들었으며, 강회전후에 반드시 예법을 익혔으니 율곡선생의
해서강약을 본받아 완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월고는 사는 곳 인근 시내가 위에 정자를 짓고
취수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일찍이 공자가 냇가에 물을 보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흐르는 것이 학
문을 하는 방법이라고 가르친 것을 본받고자 한 것이다. 1893년에는 진주목사가 월고를 도약장으
로 삼아 향교에서 고을의 자제들에게 향약을 강론토록 해 풍속을 교화시키고자 했다. 월고는 진
주 뿐만 아니라 단성 신안사, 삼가 관선당 등지에서도 강학을 했는데 그 명성이 자자했다. 이후
로 인근 고을 수령들이 부임해 오면 관리를 보내 음식을 내리고 안부를 묻고 뒤에는 수령이 몸소
방문해 고을을 다스리는 덕목 등을 자문했다. 을미년인 1895년 국모가 弑害 당하는 등 변고가 일
어나자 가족을 이끌고 지리산 깊은 골짜기인 중산리로 이주해 은거하면서 평생을 살고자 했다. 월
고가 지리산에 있다는 소문이 나자, 그를 찾아오는 인근의 선비들의 발걸음이 끊어지지 않았다.
월고 역시 이들을 뿌리치지 못하고 교유를 했는데, 면암 최익현, 심석재 송병순, 소아 조성희, 계
남 최숙민, 노백헌 정재규, 송사 기우만 등과 교제가 깊었다. 이들 중 계남, 노백헌, 송사 등은
동문으로 우의가 더욱 돈독했다고 한다.
하지만 배우러 오는 사람은 완곡한 말로서 돌려보내고 자신의 학문정진에 힘을 쏟았다. 월고는
당시 남명선생 문집 중간의 일로 의견이 분분하자 이를 바로 잡는데 앞장섰으며, 우암이 지은 남
명의 신도비를 지역 선비들이 당색을 이유로 세우기를 꺼려하자 이를 주선해 세우도록 했다. 또
환성재 하락의 문집이 간행되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간행해 그의 충절을 세상에 널리 알렸
다. 월고는 79세 때인 1902년 조정에서는 3품인 통정대부의 벼슬을 내렸고, 1904년 6월 향년 81세
로 세상을 떠났다.
□ 석전 이최선(1825∼1883)
호는 석전. 본관은 전주. 노사선생의 문인이다. 1864년(고종 1)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복시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상경하였는데, 74년 이후 낙향하여 학
문에만 전념하였다. 율곡 이이와 노사 기정진 학설의 일치점을 찾아내었고, 노사선생과 함께 상례
를 논하였다. 三政의 문란함을 지적하고, 도학의 논리로 선본후말논을 제시하였다. 저서는 석전집
이 있다.
□ 신호 김녹휴(1827∼1899)
자는 치경, 호는 신호, 본관은 울산으로 장성군 황룡면 신호리 출생으로 河西의 후손인 방묵
의 아들이다. 어려서 둘째형인 경휴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15세부터 노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
다. 노사의 학문을 계승하였고 위정척사에도 충실하였으며 후진양성에 매진하였다.
□ 동오 조의곤(1832∼1893)
자는 사홍, 호는 동오, 본관은 창녕으로 고창군 상하면 검암 출신으로 같은 군의 정면규, 강인
회, 유성열, 안중섭, 정하원, 정관원, 오필환, 정사원, 강준영, 정만원(이상 무장읍), 유준철(공
음), 임노태(고수), 김기풍(대산), 정영원(성송), 이용모(성내) 등과 같이 노사의 문하에서 수학
하였으며 저서로는 동오유고 4권 2책을 남겼다.
□ 노백헌 정재규(1843∼1911)
호는 노백헌·애산, 자는 후윤, 본관은 초계, 합천군 쌍백면 육리에서 방훈의 아들로 태어났
다. 조선왕조 후기에 영남을 대표하는 유학자이고 독립사상가이다. 기호학파 노사 기정진의 문인
중 수제자이다. 스승인 노사는 이항로, 이진상과 함께 조선후기의 3대 주리철학자로 불리어지고
또 중기의 퇴계, 율곡, 화담과 함께 6대가로 불리어지기도 한다. 특히 그가 당대의 유학자로 이름
이 높았고 율곡학설이 강세인 호남에서 그와 대립되는 주리론자로 당대의 최고봉을 이루었다는 것
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노사와 한주는 다같이 주리론자로 그 맥을 같이하고 율곡의 주기론을 반박
하면서 리주기종을 역설하는데 동조하였다.
그는 20전후에 이미 도통의 정맥을 알았고 口耳로 아는것이 아니라 몸으로 증험하여 마음으로 깨
달았고 어렴풋이 아는게 아니라 반드시 그 뿌리까지 파고 들었다. 또 나라가 어려울때는 은일한
산림처사가 아니라 절의지사로 실천궁행한 실학자요 구도자요 곽종석, 이진상과 아들인 이승희 등
과 교유하였다. 1905년(고종 42년) 을사보호조약 소식을 듣고는 포고문을 작성하고 최익현과 함
께 거의코자 하였으나 외부 방해로 실패하였다. 특히 면우 곽종석과는 동시대 사람으로 영남을 대
표하는 유학자요 독립사상가이다. 면우가 한주 이진상의 문인인데 비하여 노백헌은 호남을 대표하
는 노사 기정진의 수제자이다.
1910년 (융희 4) 노백정사를 짓고 강학에 전념하였다. 그는 노사학파의 학풍을 계승하면서도 화
서학파 등과도 성리설이나 의리론에서 폭넓게 교류하였다. 그는 기정진의 입장을 옹호하는데 진
력하였고 당시 분열된 성리설을 타개하려는 의도에서 납량사의기의변, 외필변을 저술하여 전우(간
재)기 기를 理로 인식하는 것에 반대하고 리일분수설에 따른 주리론의 입장을 천명하였다. 또 율
곡 이이에 있어서의 기자이설을 거부하고 모든 기의 작용을 理로부터 명령받는 것임을 강조하였
다. 또 도리는 무궁한 것이고 시비는 지공한 것이라 하여 성리학의 학문적 전개를 선현에 대한 존
모와 분리시켜 객관적인 비판정신을 발현하는 진보적인 생각을 가졌다. 또 남명학을 배워야 한다
고 주장하고 남명의 강학지소인 뇌용정이 폐허가 된것은 우리고장의 수치라고 하며 현감에게 청하
여 깨끗이 복원하고 규약을 만들어 춘추로 강회를 열고 석채례를 행하여 경의학을 강론하니 유풍
이 날로 번성하여 가히 영남유학의 중흥을 이루었다. 당시 영남유학을 말할 때는 으레히 삼가를
첫손으로 꼽았다. 결론적으로 주기론자인 율곡이나 간재와는 견해를 달리하지만 남명이나 화서,
노사, 한주와는 그 맥을 같이 하였다. 당시 삼가현감 申斗善이 그를 예방하고 백성을 다스리고 제
자를 가르치는 도를 물으니 그가 조목별로 열거해 지적하니 현감이 보고 내 일찍이 남방에서 이토
록 체용이 구비한 선비는 처음봤다하고 현학으로 초빙하여 격몽요결 대학, 가례를 차례로 강론
케 한적도 있었다. 의리론에 있어서는 우리나라가 약한 상태에서 일본과 강화하고 외국세력을 끌
여들여 무사하기를 추구하는 것은 일시적인 姑息之計임을 지적하면서 엄정한 위정척사론을 주장하
였다. 지금도 쌍백면 육리에는 노백헌선생을 추모하는 사당 경덕재와 강학소인 노백서사가 있다.
고족으로는 합천의 농산 정면규, 산청의 명호 권운환, 하동의 매산 이택환, 의령의 입암 남정우
외 문인 217인이 있다.
□ 松沙 기우만(1846∼1916)
자는 회일, 호는 송사, 본관은 행주로서 장성 황룡면 아치실에서 태어났다. 조부인 노사의 정
사 담대헌에서 5세때 짭은 문장을 이해할만큼 영특하였으며, 8세때 제갈량의 출사표 같은 어려운
고전을 해득하였고, 13세에 자치통감, 주자강목을, 16세때 예기, 주역, 춘추 등 경사를 두루 탐
독 심취하였다. 25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선비로써 경륜을 쌓았으며, 29세에 동당시에 급제하
였다.
31세에 부친 사망, 34세에 조부 사망으로 충격과 망극지통속에 조부의 위대한 학풍과 사상의 지
표를 전승 발전시킬 의무가 주어짐을 통절하게 깨달아 조부의 유덕과 유업을 정립 계승시킴으로
자신의 학문과 사상의 연원으로 삼았다. 선생은 서세동점의 물결속에 척양 척왜의 기치를 들고 위
정척사를 위시하여 을미년 의병활동에 이르기 까지 주류를 이룬 가운데 항일의사, 열사, 지사를
주창하였다.
1881년 갑신정변, 1885년 천진조약, 1894년 동학란, 1895년 을미사변·단발령, 1896년 아관파
천 등으로 배일 및 친일정권 타도에 분연히 일어서 장성향교에 거점을 두고 각 읍면에 격문을 보
내는 한편 전주영과 경영에 고유문을 연거푸 발송하여 일사불란한 조직강화 전열 정비 위급존망
을 호소하며 수차례의 의병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06년 10월에 체포되어 광주 영광, 목포, 경성 등의 경무서에 전전구금 중 신문을 받으면서도
굽힘없는 의연한 몸가짐과 일본을 철천의 원수로 규탄하고 질책하였다. 그 후 1980년 건국훈장 국
민장이 추서되었고, 저서로는 구유설 송사집 호남의사열전 등이 있으며, 능주 고강사, 화순 구암
사, 무안 평산사·죽림사, 장성 고산서원·서림사, 순창 무양사, 곡성 무산사에 배향되어 있다.
□ 대곡 김석구(1835~1885)
자는 경범, 호는 대곡, 본관은 김해이며, 담양 출신이다. 노사의 문인으로 출사의 뜻이 없고 성
리학에 정진하였으며 후진양성에 매진하였다. 저서로는 대곡유고가 전해오고 있다.
□ 일신재 정의림(1845~1910)
자는 계방, 호는 일신재, 본관은 光州이며 화순군 능주 출신으로 노사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정
진하였으며 화순, 강진 등에 노사의 재전자를 많이 양성하였다.
저서는 일신재집 21권 11책이 있다.
- 건축물
□ 사당(高山祠 6.7x4.9m)
고산사는 詩經 小雅篇 居舝章이 기록하고 있는 높은 산은 우러러 보아야하고 길은 큰길을 가야
한다는 것에서 인용된 명칭(高山仰止 景行行止)인데 선생의 학문을 높은 산에 비유한 것이다. 배
산임수형이 아닌 평탄한곳에 사우를 건립하였는데 전면 3칸 측면 3칸 1고주 5량가 겹처마 맛배지
붕으로 박공면에 풍판을 달았다. 기단은 장대석 2단을 수평으로 쌓고 전면에는 초반과 초석이 맡
붙은 65.1㎝ 높이의 활주에 원주를 후면에는 호박돌 초석에 원주를 나머지는 자연석에 각주를 사
용하였다.
바닥은 우물마루, 천장은 연등, 창호는 3칸 모두 2합문으로 띠살판분합이며, 소로 대신 양쪽으
로는 태극문양을 가운데는 용모양을 조각하여 화반을 끼웠으며, 문짝위로는 양쪽에는 호랑이가 있
는 산신도를 가운데는 공자께서 강학하는 모습과 봉황 1쌍이 벽화로 처리되었다. 고산사 사호는
갈필이며 모루단청으로 마감하였고 각문 앞에는 장대석 석계가 3단으로 놓여져 있다.
□ 내삼문(5.3x1.9m)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장대석 2단을 수평으로 쌓고 신문은 호박돌 초석을 나머지는 자연석 초
석이며 전부 원주를 사용하였고 각칸은 2합문 판장문이며 문마다 중앙으로 태극문양을 그려 놓았
다. 석계는 양쪽으로만 3단을 장대석으로 쌓았다.
□ 강당(담대헌, 고산서원 9.7x4.9㎝)
담대헌은 노사선생이 만년 1878년(무인 고종 15)에 토담으로 담대헌이란 정사를 지은 동기는 현
재 고산서원에서 앞으로 멀리나마 바라 보이는 서석산(무등산)에 선조의 묘소가 있으므로 선산을
바라보고 조석으로 인사를 드리면서 효를 하였다는 뜻에서 담담하게 선조의 묘소를 대한다는 뜻에
서 연유되었다. 정면 4칸 측면 3칸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가운데 2칸은 강당으로 양쪽은 협실로 사
용되고 있다. 강당의 바닥은 우물마루 천장은 연등이며 협실은 온돌방으로 중천이 설치되어 있
다. 전면은 우물마루 양쪽으로 툇마루가 있으며, 기단은 장대석 2단을 수평으로 쌓고 전면에만 호
박돌을 나머지는 자연석 초석에 각주를 세웠으며 소로를 각칸마다 4구씩 끼워 놓았다. 창호는 2합
문 세살창으로 각칸마다 기단 위로 디딤돌이 설치되어 있다.
□ 동재(거경재 9.8x3.7㎝)
논어의 공야장편에 몸가짐을 조심하라(居敬而行簡)는 문구인데 반성하여 잠시도 게을리 하지 아
니하고 기거동작을 삼가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가운데 2칸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양쪽에는 협실로 사용되고 있으며, 전
면 마루는 양쪽으로 조금 높고 가운데가 낮은 형태이며 자연석에 각주를 세운 맛배지붕이다.
□ 서재(집의재 9.8x4.0m)
맹자가 그의 제자 公孫丑과 문답한 호연지기 즉 부동심장에서 인용한 것이다.
전면 4칸 측면 2칸 홑처마 맛배지붕으로 전면은 마루이며 나머지는 온돌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창호는 세살창 2합문이다.
□ 장판·장서각(9.8x4.8㎝)
강당 좌측으로 목판과 장서를 보관하는 곳으로 전면 4칸 측면 2칸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자연석
초석에 각주를 세웠고 각칸마다 2합문 판장문을 달고 측면으로도 각칸마다 2합문 판장문을 양쪽으
로 달아 통풍을 원활히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