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1일 (롬13 주님 안에서).hwp
2019년 12월 1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대림절 1주 * 홍지훈 목사
로마서 13:11-13
주님 안에서
오늘은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待臨은 기다릴 대, 임할 임자를 써서.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을 기다린다는 의미입니다. 전에는 대강절(기다릴 대, 강림할 강) 또는 강림절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주후 5세기경에 확정된 절기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인 성탄이 다가온다는 의미로 adventus라고 부릅니다. 이 라틴어에서 영어의 advent가 되었습니다. 도래한다는 의미입니다.
대림절에 한 주일에 하나씩 촛불을 켜서 넷째 주에는 4개를 켜는 전통은 19세기 개신교의 전통이기도 합니다. 첫 주에는 짙은 보라색 초로 시작합니다. 보라색은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의 참회를 상징합니다. 보통은 진보라, 연보라, 분홍, 흰색의 초를 사용하는데, 우리교회에서는 천연벌집으로 만든 초를 사용하기에 모두가 다 자연 황금색입니다. 좁은 공간에서 화학약품 섞인 초를 사용할 수 없어서 색깔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대신에 성탄절에는 초를 하나 더 준비해서 5개의 초에 불을 밝히도록 하였습니다. 다섯 개의 초를 보며 예수의 탄생을 깊이 기억하자는 의미입니다.
전통에 따르면 처음에 대림절을 지킬 때에는 말 그대로 탄생을 기다리는 기쁨의 절기였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어두움 속에 오시는 빛이요, 역경을 이기게 하는 희망이요, 절망과 죽음의 그늘에 오시는 구원자의 발걸음 소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세가 되면서 그 의미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강조하고, 교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닥칠 화와 징벌을 내세우다보니, 대림절에 기다려야하는 그리스도는 심판과 징벌을 선포하시는 무서운 분으로 각인되었습니다. 그래서 중세의 대림절은 사순절과 똑같이 참회의 시간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다시금 성탄의 밝은 의미로 대림절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은 것이 종교개혁자들의 수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4주간 보내게 될 대림절을 기쁨으로 준비하여야합니다. 지금 다가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은, 나의 역경과 어려움을 대신 담당하여주실 바로 그분을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절망과 질고 속에 우리를 내버려 두시지 아니하고, 다시 일어나라고 부르며 손잡아 일으켜주시는 그분을 우리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울의 로마서는 그가 쓴 성경가운데 백미라고 부를 만한 성경입니다.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들이 로마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서신은 로마에 생긴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향한 권면을 담은 것인데, 당시 로마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이 공개적으로 모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제국의 중심 로마에 사는 유대인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들과 비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바울은 긴 서신을 통하여 신앙의 지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의 내용은 다양한 신학적 주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13장 11절은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이 왔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뒤를 살펴보면 이 단락은 느닷없이 등장한 생뚱맞은 내용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앞에서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처신해야하는지를 가르치고, 뒷부분에서는 그리스도인 형제들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시간적 종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징조”를 언급하고 그런 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자세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압니다.”라고 말하고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라고 말을 시작하는데, 여기서 <때>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그런데 다른 단어를 사용합니다. 앞의 <때>는 <카이로스>라는 단어를 쓰고, 뒤의 <때>는 <호라>라는 단어를 씁니다. 우리말로는 같은데 두 단어의 의미가 다릅니다. 쉽게 말하면 카이로스는 <시기, 징조>를 의미합니다. <호라>는 단순한 <시간>입니다. 성경은 직역을 하지만, 해석은 의역을 할 수 있으므로 다시 해석하면 이런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시지요? 그러면 지금 당장 정신을 차리십시오.”라고 말입니다.
12절에서 하는 말들은 징조와 시기에 대한 말입니다. 절망이 깊고 더 깊을수록, 그 시간이 더 길면 길수록, 이제는 끝날 때가 되었다는 의미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밤이 깊으면 반드시 아침이 오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그 어두움을 스스로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 눈을 감고 있으면 아침이 와도 우리가 빛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5세기의 신학자인 성 어거스틴이 있습니다. 그는 본래 유명한 수사학자였습니다. 수사학이란 말과 글을 품위 있고 아름답게 표현하는 기법입니다. 그가 밀라노에서 가르칠 때에 번민에 빠졌습니다. 그 당시 그의 종교는 <마니교>였습니다. 매우 유행하던 종교였습니다. 육의 세계는 악하고 영의 세계는 선하다는 이분법의 종교입니다. 어거스틴은 논리적으로 마니교를 받아들였습니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 속의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만들어졌다는 기독교의 주장 보다는, 세상을 선한 신과 악한 신의 대립으로 보는 마니교가 더 논리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자신의 한 몸 안에 선한 생각과 선하지 못한 삶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은 느낄 때마다 괴로웠던 것입니다.
괴로워하던 어느 순간 담장 밖에서 아이들의 노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들고 읽어요, 집어 들고 읽어봐요”(tolle lege, tolle lege) 마침 그때 그의 곁에는 성경이 있었고, 펼친 곳이 바로 오늘 본문이 로마서 13장 11절 이하의 구절이었다고 그는 자기의 <고백록>에 기록하였습니다. 그때 자신이 얼마나 어두움의 삶을 살고 있는지 깊이 깨닫게 되었고, 자신의 방탕한 삶을 회개하고 회심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돌아올 때마다 이렇게 대림절을 설명하곤 합니다. 대림절은 <내 마음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말입니다. “시간(호라)”으로 보면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이미 탄생하셨습니다. 하지만 “징조(카이로스)”로 따지면, 지금이 바로 나에게 주님이 오시는 그 때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성탄절은 12월 25일이라는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라, 성탄의 의미가 나에게 어떤 것인지 새롭게 깨닫게 되는 매우 중요한 “그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2019년 성탄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되어야하는지 말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이 대목을 해석한 학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엔 크리스토>로 살라고 하는 뜻이라고 말입니다. 영어로 in Christ 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번역하면 될 것입니다. 그 방법은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않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욕심에 눈멀어서 정신의 지도에서 이탈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정신과 나의 욕심이 줄다리기 할 때를 깨닫고, 그때에 그리스도의 정신이 이기도록 거들라.”는 뜻입니다.
2019년 한 해의 나 자신과 우리의 주변을 둘러보면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개인적인 경험들, 가족과의 관계들, 일터에서 벌어진 일들은 서로가 공유하기 어려운 문제들이지만, 교회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서는 우리가 경험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작년보다 좀 더 거룩해진 교회모습을 회복하였습니까? 이 사회는 작년보다 더 안전하고 따듯해진 것 같습니까? 좀 더 공정하고 안정된 경제활동이 느껴집니까? 나라를 지도하는 정치가들이 작년보다는 조금이라도 믿음직해보이십니까? 그래서 우리는 작년보다 좀 더 평화로워진 세상에 살고 있습니까?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욕심의 어두운 잠에서 깨어나, 예수의 가르침으로 예수 안에서 살며, 이 세상에 작은 빛이라고 가져다주었습니까?”
저부터도 “예 그렇습니다.”하고 답하기엔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래도 그리스도의 옷을 벗지 않으려는 것만도 어디입니까? 그리스도의 옷은 처음에 입으면 무겁습니다. 아니 무겁다고 느끼는 것이지요. 그것은 제대로 입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의 무게를 지고 살아갑니다. 그것도 무거운데 그리스도의 옷을 더 입으니 더 무거워졌다고 생각하는 분은 옷을 고쳐 입어야합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그 위에 인생의 무거운 옷을 입는 것이지요. 마치 소가 멍에를 먼저 메어야 짐을 더 잘 질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욕심을 내면 낼수록 욕심의 무게가 우리를 짓누릅니다. 그 위에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은 짐에 짐을 더할 뿐이지요. 마치 어거스틴이 괴로워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어거스틴은 북아프리카에서 로마로 그리고 밀라노로 수사학자의 유명세를 따라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들으면서 자신의 삶을 깊이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로마서의 말씀을 만나서 진정한 회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마음에 들어오실 기회는 물리적 “시간”(호라)으로 따지면 대림절 4번 남았습니다. 하지만 “때”(카이로스)로 생각하면 “바로 지금”입니다. 잠에서 깨어나기만 하면 됩니다. 내 스스로 눈을 뜨기만 하면 “바로 지금”입니다. 교회력으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대림절이 시작되었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대림절 4주의 기간은 옛것을 보내고 새것을 맞이하는 긴 묵상의 기간입니다. 그렇게 쉽고 빠르게 과거를 보내고 새것을 받을 수 없기에 우리에게는 시간과 묵상이 필요합니다.
처음 경험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오늘부터 4주 동안 예배 시작하기 전에 약 15분간의 <묵상기도회>를 합니다. 이때 부르는 떼제 찬양은 프랑스 Taize 마을에 있는 떼제 공동체에서 만든 찬양입니다. 생소하면 가톨릭의 것이라고 오해하시는 분이 많은데, 우리교회는 그 역사를 공부했습니다. 2차 대전 중에 평화를 찾아 산골로 떠난 스위스인 개신교 청년 로제가 시작한 수도공동체이고, 지금은 초교파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찬양의 가사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떼제 찬양은 기도찬양입니다. 그 기도를 느끼도록 반복해서 찬양을 합니다. 그러고 나서 말씀을 듣고 침묵으로 묵상하면서 자신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주님이 지금 내게 오시는데, 말씀과 찬양을 통해 나에게 주시는 위로를 느끼고, 내 속에서 나를 어떻게 이끄시는지 느끼는 기도 시간입니다.
오늘 대림절 첫 주일을 보내시면서 내 속에 오실 그리스도가 이제 나를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지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대하고 기다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이 바로 우리 기대의 근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기쁨을 누리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