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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경제의 기틀을 만든 21인
□ 이하에서 일본 경제, 경영의 기틀을 만들어온 주요 인물 21인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선정된 21인은 사카이야 다이치씨가 선정한 대표적 일본인 12인중 6인, 우찌무라 간조가 선정한 대표적 일본인 5인중 2인에 필자가 13인을 추가한 것이다. 1. 쇼토구태자 (聖德太子 573-621) 일본 요메이왕의 둘째 아들로 우마야도 왕자․도요토미미왕자․우에노미야노미코 등으로 불리웠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학문에 능통하였고 불교에 깊이 귀의하였다. 아버지가 죽고 596년 숙모인 스이코왕이 즉위하자 왕세자로 책봉되어 섭정으로 정치를 맡아 과위 12계와 헌법 17조 등을 제정하였다. 595년(고구려 영양왕 5년, 백제 위덕왕 42년) 고구려의 승려 혜자와 백제의 승려 혜총이 일본으로 건너가자, 혜자를 스승으로 삼아 불교를 보급하였다. 596년 완성된 호코사 창건에는 고구려로부터 많은 기술자를 초빙하였고, 607년 호류지(法隆寺)를 창건하는 등 불교의 흥륭에 힘썼다. 호류지에 전해 오던 백제 아좌태자가 그린 쇼토쿠태자 초상은 일본의 제실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저서에 <삼경의소>가 있다. 이질적인 문화를 받아들여 기존의 문화와 다른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고, 다툼의 상대방을 제압하여 기세를 올리는 것 이상으로 상대방과 협상을 통해 양보하면서 타협점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의 이같은 생각의 잔재는 기업들이 시장에서 출혈경쟁에 나서기 보다 담합이나 사전협의를 통해 나눠먹기 함으로써 훨씬 많은 이득을 챙기고 있는 현실에서 부분적으로 읽어볼 수 있다. 2. 오다 노부나가 (織田信長 1534-1582) 일본의 전국시대와 아즈치 시대에 크게 활약한 무장이다. 1549년 아버지 노부히데의 뒤를 이어 오와리국의 다이묘가 되고, 이웃의 여러 지역의 다이묘 들을 제압하여 무명을 떨쳤다. 1562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고, 1568년에는 장군가의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무로마치 막부의 재건을 청해왔으므로 이를 기회삼아 교토에 들어가 막부를 재건하면서 실권을 장악하였다. 1573년에는 아시카가 장군을 교토에서 추방함으로써 무로마치 막부를 멸망시켰다. 그 동안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이를 평정하였는데 교토의 혼노지(本能寺)에서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습격을 받고 자살하였다. 그는 장기간에 걸친 전국전란 시대에 통일의 서광을 비추어 준 무장으로 주목할 만한 여러가지 정책을 과감하게 전개하였다. 구체제․구관습의 타파, 새 인물의 등용, 금은 광산의 경영, 화폐의 주조, 도로․교량의 정비, 관소의 폐지 등 혁신적인 정책으로 새 시대의 도래에 대응하였다. 이것을 기반으로 한 천하통일의 위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계승되었다. ‘천하포무(天下布武)’를 깃치로 내걸고 전투 전문의 용병을 대거 채용하였으며, 농사와 전투를 분리시켜 안정적인 농사를 가능하게 하였고, 사카이(堺) 상인 등 부를 가진 자에게 상업 등의 거래를 안정적으로 보장하는 대신 자금을 지원받아 군비를 확충하는 등 농업 및 상업 종사자와 전투병을 분리시키고 역할의 분화를 통해 경제력과 군비를 강화해 나갔다. 3.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 일본 에도막부를 연 무장으로 초대 장군을 역임하였다. 미카와의 오카자키 성주 마쓰다이라 히로타다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아명은 다케치요였다.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고 그의 힘을 빌려 스루가․도토미․미카와를 영유함으로써 도카이지방에 일대세력을 구축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그의 지지세력을 제거하고 지방 제후를 압도하여 일본전역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같은 해 정이대장군이 되고 에도에 막부를 개설, 패자로서의 지위를 합법화하였다. 1614-1615년 2차례에 걸쳐 오사카 전투를 일으켜 대망의 천하통일을 완성하였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 이어 여러가지 정책을 수행하여 일본 근세 봉건사회를 확립하였다. 산긴고타이(參勤交代) 제도를 도입하여 지방 영주 혹은 이들의 가족을 늘 수도인 에도에 머물게 하고 일정기간별로 이들 에도거주자를 교대케 함으로써 지방영주들의 재정에 부담을 안겨주고, 또 조선통신사를 받아들여 이들이 지나는 지방의 영주들에게 접대에 따른 경제적 부담의 상당부분을 안겨 줌으로써 지방영주들의 부 축적을 방해하였다. 이를 통해 에도막부의 정치적 안정을 꾀할 수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지만 일본국 차원에서 좀더 일찍 부를 축적하여 열강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케 한 것은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4. 이시다 미쓰나리 (石田三成 1560-1600)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 무장으로 무가의 안살림에 출중한 수완을 보였으며 히도요시 사후 서군의 리더로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세키라하라에서 천하쟁패 싸움을 기획한 인물이다. 오미 출생. 1572년 13세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 후에 중용되어 사와야마성 18만 6000석의 영주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오타니 요니쓰구․ 마스다․나가마사와 함께 하여 총수 우키다 히데이에를 도왔다. 이듬해 행주싸움에 출전하여 권율장군에게 대패하고 돌아갔다. 1597년 정유재란에 다시 파견되었는데. 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침략군의 귀국을 알선하였으나, 장수들간의 내분으로 가토 기요마사등에게 탄핵을 받고 물러났다. 160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충성을 다짐하는 모리 데루모토, 우키다 히데이에 등 서국의 다이묘를 한데 묶어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히데요시의 후계자로 옹립하고자 했다. 결국 히데요시 사후 사실상 군사와 행정업무를 총괄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과 세키가하라에서 천하쟁패를 겨루는 전투를 시도하지만 패하여 참수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 가운데 문치파 총수였다. 넓은 토지를 지닌 영주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영주들을 서군이라는 큰 틀아래 묶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과 천하를 쟁패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 세키가하라 전투를 수행했다. 거대한 목표를 가진 이가 지략을 통해 주위의 인재와 재물을 긁어모아 거대한 사업을 추진할 수 있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좋은 사업구상을 지닌 이가 자본상의 후원자 도움을 얻어 우수한 인재를 불러보아 커다란 사업을 추구하는 오늘의 현실에 시사해주는 바가 적지 않다. 5. 이시다 바이간 (石田梅岩 1685-1744) 평민들에게 윤리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신가쿠(心學)라는 도덕교육운동을 창시한 학자이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젊은시절 교토에서 상점의 도제로 일하면서 윤리공부를 했다. 1729년부터 자택에서 강의를 통해 신가쿠 운동을 개시했다. 그는 공자의 가르침을 윤리의 기본으로 삼았지만 도교․불교․신도적인 요소도 통합․흡수했다. 그는 간결한 용어로 도덕교육을 설명했고 많은 우화를 곁들여 민중에게 직접 이야기했다.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며 강의했고 1739년에는 〈도히몬도 都鄙問答〉를 저술했다. 이시다가 죽은 뒤에도 400여 명의 제자들이 신가쿠 운동을 계속했고 정부의 지원에 일부 힘입어 일본 전역에 81개의 학교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교육이 더욱 교조적이고 형식화되어감에 따라 이 운동은 인기를 잃어 도쿠가와(德川) 시대가 끝날 무렵인 1867년에 완전히 기울었다. 그의 다른 저술로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따라 가족정부론을 펼친 〈세이카론 齊家論〉(1744)이 있다. 1806년 그의 제자들이 〈이시다 선생 어록 石田先生語錄〉을 편찬했다. “노느니 무임금으로 일하는 것이 더 낫다” 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일하는 가운데 건전한 정신이 깃드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는 일감에 맞춰 모든 이들이 놀지 않고 일할 것을 권장하였다. 수년에 걸친 가뭄으로 기근이 심해졌을 때 일감을 나눠 보수를 적게 받는 한이 있더라도 노는 이가 없어야 사회가 건강해진다고 판단하였다. 그의 사상과 철학은 일본 각지에서 위기극복책으로 받아들여져 널리 시행되었고 이후 심학으로 발전하면서 놀지 않고 일하는 ‘근면한 일본인’의 원형을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6. 우에스기 요잔(上杉鷹山 1751-1822) 에도 후기의 다이묘로 재정위기에 싸인 번을 행재정개혁을 통해 정상궤도로 올려놓은 인물이다. 휴가(日向)국 다카나베 번주 아키스기 다네토미(秋月種美)의 차남으로 태어나 요네자와 번주인 우에쓰기 시게사다(上衫重定)의 양자로 들어갔다. 요잔은 호이다. 겐부쿠(元服) 이후 10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하루(德川家治)로부터 이름을 하사받아 노리하루(治憲)로 개명하였다. 어려서부터 와라시나 쇼하쿠(藁科松伯) 호소이 헤이슈(細井平洲) 다키 나가야스(瀧長愷)로부터 유학적 교양을 배워 그 영향은 번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1767년에는 요네자와번의 토지를 이어받았는데 이 무렵의 번정은 향보(享保) 이후의 재정위기와 보력(寶曆)의 대기근으로 동요하고 있었다. 번주가 되자 곧바로 번정개혁에 착수하여 다케마타 마사쯔나(竹마타當綱)와 노조기도 요시마사(위戶善政)를 중용하여 번의 경제재건을 목표로 적극적인 식산흥업정책을 시행하였다. 논과 밭을 개간하고 뽕나무, 닥나무, 옻나무 등 상업작물 재배를 장려하고 스스로 농촌을 돌아다니며 지도하였다. 또 목축, 양잠, 제사, 직물, 제염, 제도 등 신산업 개발에도 힘을 쏟았고 특히 제사, 직물 기술은 교토와 에치고에서 전문가를 불러 기술을 도입하고 스스로 선두에 서서 장려에 힘썼다. 이후 번의 사무라이들이 이것을 본받으면서 이른바 가중(家中) 수공업이 일어나 에도에서도 요네자와 직물이 유명해졌다. 한편 농촌을 진흥하기 위해 인구증가를 꾀해 낙태하는 것을 금지하고 에치고로부터 여성을 이주시켜 결혼을 장려하면서 빈곤한 가족에게는 생계수당을 주었다. 그리고 흉작에 대비하여 비황창(備荒倉)을 세워 대비함으로써 천명(天明)의 대기근때 아사자를 내지 않았다. 번의 사무라이들에게는 질소하고 검약한 생활을 스스로 실천해 보임으로써 무술 장려와 더불어 유학을 부흥시켰고 흥양관을 건립했다. 요잔은 관정기(寬政期 1789-1800)에 행해진 각 번의 번정개혁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개혁을 추진한 것으로 높게 평가받고 있다. 근대 일본 행재정개혁의 표본이라고 일컬어지는 요잔의 개혁은 지금 일본에서 진행하고 있는 행재정개혁에 시사해주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일본의 정치가와 유력관료들은 요잔이 보인 것과 같은 과감하고도 솔선수범하는 개혁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7. 니노미야 손토쿠(二宮尊德 1787-1856) 에도 후기의 농정가로 스스로의 농지개간과 농업경영에 대한 경험을 토대로 전국 각지의 농정을 개혁하면서 농민, 노동자들의 정신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실천적 운동가이다. 사가미(相模)국 아시가라 가미고오리(足柄上郡) 가야마(栢山) 촌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긴지로(金次郞)이다. 빈농의 장남으로 태어나 몰락한 가문을 부흥시키기 위해 황무지를 개간, 논 밭을 만들므로써 아시가라 가미고오리에서 첫째가는 지주가 되었다. 농촌 구제에 나섰고 나아가 오다와라 번주 오구보 가의 가로(家老)인 핫도리 가의 가정개혁, 또 오쿠보 분가의 우츠가의 지행지(知行地)시모츠께(下野) 국 사쿠라쵸 토지를 되살려 놓았고 이후 풍부한 농업지식을 바탕으로 관동 각지의 자력갱생에 몸을 바쳤고 만년에는 닛코 신령(神領)의 부흥의 명을 받고 1856년 이 일을 추진하다가 사망했다. 손토쿠는 철저한 합리성에 입각한 농업생산과 농민생활 경험을 중심으로 논어, 대학, 중용과 불교서적, 신도설을 읽고 스스로의 사상을 키워갔다. 그의 독서방법은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독자적인 사고와 자기형성에 도움이 되는 것을 부분적으로 모아 자기의 사유형식을 완성해가는 밑천으로 삼았다. 이같은 실용주의적 사고는 현실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기본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천도와 인도를 분리하여 어디까지나 인도를 작위적인 도로 간주하고 천도는 이치(理)로서 사람의 지혜로 이를 범할 수 없다고 했는데 인도를 선왕(성인)이 작위한 것으로 그 분수를 지키면 인간생활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손토쿠의 사고는 유신후에도 보덕사(報德社)를 통해 큰 영향을 미쳤다. 손토쿠는 일생의 마지막까지 일에만 몰두한 사람이었다. 손토쿠는 먼 장래를 위해 계획을 세워 일했기 때문에 그의 영향은 오늘날까지 우리들 가운데 살아 있다. 손토쿠의 손으로 다시 일어선 많은 마을들의 밝은 모습에서 손토쿠의 지혜와 그의 계획의 영원성이 입증되고 있다. 손토쿠 사후 일본 각지에서는 그의 이름과 가르침을 내세우는 농민단체가 다수 나타나 무기력한 농민과 노동자를 대상으로 손토쿠의 정신을 전하였다. 또 오늘날에도 ‘농업아닌 ‘농(農)’ 속에서 환경친화적인 삶의 형태를 찾아보려는 일본인 다수의 마음속에 그는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는지 모른다. 8. 오쿠보 도시미쓰(大久保利通 1830-1878) 막부말기 메이지 전기의 지도자적인 정치가로 일본에 관료주의 체계의 기틀을 확립한 장본인이다. 사쓰마번인 가고시마에서 출생하였으며 1846년 사쓰마번 기록소에서 조역으로 공무를 시작하였다. 번주인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막정개혁 운동을 일으켜 번내 소장파 번사들사이에 정치운동이 높아지자 같은 문하생인 사이고 다카모리 등과 함께 여기에 참가, 정충조(精忠組)를 결성한 혁신파의 중심이 된다. 나리아키라 사후 번주 시마즈타다요시의 아들인 시마즈히사미쓰 하에 번차원에서 공무합체(公武合體)운동을 추진했다. 사쓰마-영국 전쟁, 시모노세키 포격사건, 막부의 쵸슈정벌, 번내 보수파 대두 등으로부터 막부토벌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교토에 나가 구게(公家) 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 이와구라 도모미에게 접근한다. 1866년에 죠슈번의 기토 다카요시와 손잡고 삿쵸연합을 성립시켜 토막파의 중심인물이 된다. 이후 도막밀칙을 받아내고 왕정을 복고하는 과정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맡는다. 1869년 참의가 되어 기토 등과 판적봉환을 실현시키고 1871년에는 폐번치현을 성공시킨다. 같은해 대장경(지금의 재무대신)이 되어 지조개정 등의 건의를 행하고 이와쿠라사절단의 부사(副使)로서 구미를 돌아다니고 1873년에 귀국한다. 정한론에 반대하였으며 정한파 퇴진후에 내무경이 되어 지조개정, 식산흥업 등에 의한 자본주의 육성정책을 추진하는 등 내정을 확립시킨다. 1877년 세이난(西南) 전쟁이라는 메이지 정부 최대의 위기를 극복하고 1878년 지방관회의를 개최하여 군구정촌(郡區町村)편성법, 부현회(府縣會) 규칙, 지방세규칙의 3신법의 제정을 꾀했는데 5월, 이시카와현 사족인 시마다에 의해 도쿄 기오이사카에서 암살된다. 세계적으로 효율성 높고 탄탄한 조직으로 인정받은 일본 정부의 관료조직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라는 점을 평가할 수 있다. 1990년 이후 거품경제 붕괴와 이후의 장기불황을 거치면서 일본의 관료가 과거에 안주, 발상과 자세를 바꾸는데 실패하여 장기불황을 가져왔다는 비난이 없지 않지만, 수준 높지 않은 기업가정신과 후진적인 정치에도 불구하고 현재와 같은 경제규모를 가꿔온 이면에는 관료의 공로가 적지 않았음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9. 후쿠자와 유키치 (福澤諭吉 1835-1901) 일본 메이지(明治) 시대의 계몽사상가이자 교육자, 출판가이다. 1868년 도쿠가와 막부의 지배를 종식시킨 메이지 유신(維新) 때 정부 요인이 아닌 민간인으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서구사상의 도입을 위해 앞장섰고 그가 거듭 표현한 대로 일본의 '힘과 독립'을 증진시키는 데 기여했다. 가난한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2세 때 아버지와 사별하는 등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그는 나가사키(長崎)로 가 학교에서 소위 '란가쿠(蘭學)‘라는 새로운 학문을 공부했다. 1854년 매슈 페리 제독에 의해 개항되기 전까지는 네덜란드인들이 일본에서 유일한 서양인들이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서양의 지식과 과학을 표현하는 용어로 '란가쿠'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1860년 함장의 종복으로 배를 타고 미국으로 갔으며, 1862년 막부(幕府) 사절단에 끼어 프랑스․영국․네덜란드․독일․러시아․포르투갈을 다녀왔다. 그는 돌아온 뒤 〈서양 사정 西洋事情〉을 썼는데, 이 책은 서양의 정치․경제․문화 제도를 명확하면서도 쉽게 묘사했기 때문에 곧 널리 읽혔다. 이후 서양문물을 도입하려는 노력을 계속했으며, 쉬운 문체를 개발해내고 대중강연과 대중토론을 처음으로 시도하기도 했다. 세계 표준이 무엇인가를 일찍이 간파하여 학습대상을 화란에서 미국, 영국 권으로 바꿀 것을 주창하면서 스스로 실현한 미래를 내다본 인물이다. 오늘날 일본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이유의 하나가 자국제품을 세계 표준으로 만드는데 실패한데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후쿠자와의 선견이 얼마나 훌륭한 판단이었고 이 것이 이후의 일본국 발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를 알 수 있다. 해당 분야에서 세계표준이 어떤 것이 될지, 어떻게 하면 세계표준으로 만들 수 있을 지에 대해 혜안을 가지고 개방적 전략을 펼치지 못한 여러 분야의 현대 일본인들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큰 인물이다. 10. 시부사와 에이치(澁澤榮一 1840-1931) 사이타마현 후카야시에서 상공업을 영위하는 부농의 아들로 출생한 기업가(起業家)이다. 청년시절에는 양이론자를 편들어 운동한 국수주의자였다. 히도쓰바시 요시노부가 장군으로 추대되면서 막부의 중신으로 등용되어 27세이던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 관람하였고 명치유신후 시즈오카로 내려가 정부로부터 빌린 오십만량의 태정관찰(太政官札)로 일본 최초의 주식회사인 ‘상법회소(商法會所)‘를 설립하였다. 이후 먼저 은행을 설립하였다. 은행 창설을 신호탄으로 일본의 금융제도를 설계하였으며 이후 수많은 기업들을 만들어 일본의 재계를 만들어 나갔다. 그가 기업을 만드는 방식은 모두가 사이좋게 협력하는 “일본적 합본주의(合本主義)“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훗날 일본사회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담합체질의 원형이 되었다. 그는 기업을 만드는 과정에 관여할 뿐 만들어진 기업의 최고 경영층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그의 지론인 합본주의는 훗날 담합 체질의 원형외에도 업계별 호송선단방식의 운영 철학으로 바뀌어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다. 그의 덕분에 수많은 기업군이 탄생하면서 일본식 출세 계단인 원형이 된 회사인→경영인→재계인의 틀이 갖추어 졌다. 엘리트 기업인의 탄생 코스가 그에 의해 확립된 셈이다. 11.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 1862-1933) 일본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의 대표적인 자유주의의 사상가이자 농정학자이며 교육자이다. 도쿄 영어학교를 거쳐 16세 때 삿포로 농학교에 들어가 W. 클라크로부터 감화를 받고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이때 일본의 대표적 그리스도교 지도자인 우치무라 간조와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1884-91년까지 유럽과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삿포로 농학교의 교수로서 농정학․농학사․경제학을 강의했다. 그러나 병으로 사직하고 요양을 겸해 1898-1901년 유럽과 미국을 여행했으며 그사이 영문으로 〈Bushido:The Spirit of Japan〉(무사도)를 집필해 1900년 미국에서 출판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후 타이완 총독부를 거쳐 1903년 교토제국대학 법과대학의 교수에 취임하여 이 때부터 학자이자 교수로서의 생애를 시작했다. 1906년에는 제1고등학교 교장이 되어 도쿄제국대학 교수를 겸임했다. 1913년에는 도쿄제국대학의 전임교수로서 식민정책 강구하였다. 영어와 영어 문화권의 영향력을 강조하면서 이들을 배울 것을 권면한 선각자이다. 오늘날 일본인들이 영어에 약해 추가적인 도약을 이루지 못하는 분야가 하나 둘 뿐이겠는가. 일찍이 유럽과 미국에서 수학한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일본국이 좀더 일찍 국제화에 나섰다면 태평양 전쟁은 발발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일본인들이 뒤늦게 그의 선구자적 식견을 높이 평가하여 5천원권 지폐의 인물로 그를 택한 것을 보면 그들이 국제화에 뒤진 것을 얼마나 아쉬워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12. 이시자카 다이조(石坂泰三 1886-1975) 고도성장기에 경단련(우리의 전경련) 회장을 역임하면서 ‘각론 반대'로 말썽을 피우는 산업계를 총론으로 묶어두는 강한 지도력을 발휘한 인물로 곧잘 ‘재계총리'로 불리웠다. 오늘날에는 이미 죽은 말이 된 것같은 느낌이 드는 ‘재계총리’라는 말이 꼭 들어맞는 이가 바로 그다. 1886년 6월 도쿄 시다야(현재의 다이토구)에서 출생하여 제일중학과 구제 일고,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체신성에 입성한다. 1915년에 다이이찌(第一)생명에 비서역으로 입사, 다이이찌 생명 사장(1938-46년), 도시바 사장(1949년), 경단련 회장(1956년), 도시바 회장(1957년)을 거쳐 오사카 만국박람회 회장(1965년)을 맡았고 1968년에 경단련 회장에서 물러났다. 요즘은 유력한 정치 지도자도 찾기 힘들지만 경제 지도자도 찾기 힘들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이시자카같은 앞날에 대한 확실한 비전을 가진 기골있는 지도자를 찾는 목소리가 강하다. “요즘 정치가 최악이다" “외국인이 40억, 50억엔의 주식을 갖더라도 큰 문제가 아니다. 제한을 없애 당당하게 대응해야" “경제도의의 고양, 이것이 오늘의 일본재계에 가장 부족한 것이다" 라는 식으로 솔직하게 털어놓는 그의 말은 오늘의 시대를 내다보고 장래에 대한 신선한 경종으로 울려 퍼진다. 이시자카의 경제인으로의 개화는 빨랐지만 절정기는 인생의 후반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일본 기업인의 사회적 지위를 한단계 높여 놓은 인물이다. 일본에서는 정계, 관계, 재계, 노동계 등의 인사가 함께 모여 논의하는 위원회 모임이 만들어지면 대개는 재계출신의 원로급 인사가 위원장의 책임자급에 앉는다. 그만큼 기업인들에 대한 비중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관행은 과거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시자카가 경단련 회장으로 있으면서 만들어 놓은 비교적 최근에 정착한 관행이다. 21세기에 접어든 지금도 일본에서는 각종 위원회의 책임자를 대부분 원로 기업인이 맡고 있는데 이시자카가 만들어 놓은 관행이 50년 가깝게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3.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1889-1949) 야마가타현 쓰루오카시 히요시쵸에서 태어나 일본제국주의 확장기에 아이디어를 제공한 군사책략가이다. 1907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고 33세이던 1922년 독일에 유학하여 나폴레옹과 모르토케 등의 군사사상과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양상을 연구하였다. 1928년에 관동군 작전주임참모로 임명되자 만주사변을 주도하였고, 마침내 중국을 지배하는 거점으로 ‘만주국‘ 건설을 추진하였다. 1936년의 2.26 사건 이후 재정 운영의 실권을 거머쥔 육군은 거액의 군비 예산안을 편성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밖에 이시하라는 ‘이시하라 구상(혹은 쇼와(昭和)유신론)‘이라고 불려지는 중공업 육성 정책을 통한 군비 증강 플랜을 실천에 옮겼다. 그의 5개년 계획을 입안한 사람은 만주사변 이래의 맹우였던 만주철도조사회의 마야자키 마사요시(宮崎正義)였다. 이시하라는 만주국을 모델로 5개년 계획안을 정치기구 개혁안과 패키지로 만들어 당시의 정재계의 거두들에게 보이고 이를 실천에 옮기도록 강요하였다. 관동군 참모부장으로 근무할 때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육군대신과 대립하면서 1941년 전역하여 예비역이 된다. 이후 동아연맹을 조직하여 전중, 전후 우익 진영에서 큰 지위를 차지하였다. 이시하라는 만주국 설립의 기본 아이디어를 작성, 실현한 인물로 이후 만주사변, 중일전쟁 발발 이후 미국과의 전운이 감돌 때 일본제국의 인적, 물적, 지적 자원을 총동원한 ‘총동원체제’를 확립하여 미일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그가 제시한 총동원체제는 일명 ‘1940년체제’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는데 기업들이 치열하게 벌이던 경쟁을 중지하고 정부의 지도하에 서로 협력하면서 모두가 함께 사는 길을 모색하면서 정부재정을 지원하는 형태를 가리킨다. 태평양 전쟁 종료에 따른 GHQ(연합군사령부) 지배가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종식되자 일본의 관료들과 기업인들의 필요에 따라 다시 부활하여 1980년대까지 지속한 이른바 일본의 정치경제적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이시하라는 경쟁보다 담합과 협조에 따른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안을 모색, 실현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국민 즉 소비자들의 이익이 손상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14.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 1894-1989) 일본형 기업경영시스템의 원형을 창립한 기업가 겸 경영철학자이다. 1894년 11월 와카야마시에서 출생한 그는 16세이던 1910년, 오사카 전등(현재의 간사이전력)의 견습공으로 들어가 23세이던 1917년, 독립하여 두 전등용 개량 소켓을 고안하였고, 1918년 마쓰시타 전기기구 제작소를 창설하였다. 아이디어 상품인 ‘쌍가지 소켓‘을 창안하여 대힛트하였다. 그는 전후 다른 기업인이나 창업자들이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것과 정반대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기업인 영웅이 되었다. 61세이던 1955년, 국세청이 그를 소득 순위 제1위로 공표하여 국민을 놀라게 하였다. 그가 정부 도움없이 자력으로 기업을 일으켰고, 그것도 국민들이 좋아하는 소비재를 만들어 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마쓰시타를 보면서 국민들은 “자신도 노력하면 마쓰시타처럼 성공할 수 있다“는 꿈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주력 상품인 가전제품의 판매를 위한 대리점 구축 과정에서 대리점 종업원을 가족과 같이 여기면서 본사 직원 못지 않게 고용 안정을 보장해주고 이를 토대로 종업원이 전력을 다해 대리점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가족주의에 입각한 ‘마쓰시타 이즘‘을 폭넓게 일본사회에 보급시켰다. 전후 일본 기업사회의 대표적인 특징의 하나로 지칭되어온 종신고용에 의한 ‘일본적 경영‘을 창시한 인물로 일생 동안 기술자에서 경영자로 또 철학자로 변신해가면서 일본의 기업사회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번영을 통한 평화와 행복“을 추구하겠다는 자신의 철학을 반영한 PHP 운동을 제안하여 실시하였고 이를 위해 PHP 연구소를 세워 출판사업에도 착수하였다. 전후 일본경제 성장의 신화를 기업 측면에서 대변하는 인물이다. 종신고용, 연공형 임금체제, 기업내 노조, 그룹기업내 주식의 상호보유, 기업종사자의 가족취급, 주주보다 종업원 중시 경영, 사외이사보다 사내이사 중시 경영, 대리점 중시 경영 등 일본형 경영시스템으로 일컬어지는 경영체계를 확립한 장본인이다. 1990년 이후 창업한 마쓰시타 전기그룹의 경영악화를 계기로 종신고용으로 대표되는 일본형 경영시스템에 대한 의문의 목소리가 크게 제기되고 있다. 일본의 주식시장에서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직원을 마구 잘라내는 기업의 주가가 오르는 현상이 나타나는가 하면 초우량기업인 도요타자동차와 GE 등이 종신고용 방침을 천명하는 등 혼란된 정황이 전개되고 있다. 마쓰시타고노스케가 제기한 기업경영시스템에 대해서는 한동안 시간이 경과해야 올바른 평가가 내려질 것으로 전망된다. 15. 도코 도시오(土光敏夫 1896-1988) 소와(昭和) 시대의 실업가로 재계의 ‘무서운 중(荒法師)이라고 불렸다. 오카야마현 출생. 도쿄고등공업학교(현 도쿄대학 공학부)을 졸업하고 유럽에 유학한 다음 1920년 도쿄이시카와지마 조선소에 들어간다. 1936년 이시카와지마 시바우라터빈으로 옮겨 1946년에 이 회사 사장이 된다. 1950년에 이시카와지마 중공업 사장이 되어 합리화에 의한 기업재건을 꾀했고 1960년 하리마조선과 합병하여 이시카와지마하리마중공업(IHI)을 설립하면서 사장으로 취임한다. 이 때의 합병이 산업계에 대형합병의 첫 모형이 되었다. 1964-72년에 걸쳐 이 회사의 회장을 역임하고 1972년 이후 도시바 회장에 취임. 1968년 경단련 부회장, 1974년 우에무라 회장 용퇴후 경단련 제 4대 회장에 취임하여 일본재계의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1981년 제2차 임시행정조사회장으로 취임하여 1980년대의 일본 행재정개혁을 이끈 인물이 되었다. 1973년의 석유위기 이후 경제운영방식의 전환과 “증세없는 재정재건”을 국가재건의 기치로 내세웠다. 말린 정어리와 국 한그릇 나물 하나의 식사를 즐기는 검소한 생활을 보낸 것으로 유명하다. 기업인으로 일본사회에 강하게 영인된 마지막 거물이라는 지적이 있을 만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 크게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이시자카 이후 경단련 회장으로 큰 정치적 역량을 발휘한 인물이며, 일찍이 과감한 M&A를 통해 일본 산업계 재편의 모형을 제시하였고, 임시행정조사회 회장으로서 일본사회 개혁의 최전방에 서서 초보수적인 일본사회곳곳에 메스를 들이댄 인물이다. 아직 개혁이 미진한 일본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지만 일본이 바뀌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고 강한 톤으로 주장한 몇 안되는 현대판 선각자이다. 16. 이케다 하야토 (池田勇人 1899-1965) 경제통의 정치가로 1960년 7월부터 1964년 10월까지 총리를 지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경제성장을 이루는 데 이바지했다. 양조업자 집안에서 태어나 1925년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법학부를 졸업하고 대장성에 들어갔다. 대장성 차관까지 승진한 뒤 1949년 총선에서 중의원 의석을 얻어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내각의 대장상이 되었다. 얼마 후 그는 나중에 그를 이어 총리가 된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와 함께 요시다파의 대표적 인물로서 보수적 정치가의 전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미국정부는 점령국 일본의 경제적 어려움을 조사하라고 디트로이트의 은행가 조지프 도지를 파견했다. 도지는 강력한 통화긴축정책을 제안했으며 이에 따라 이케다는 통화팽창과 물가인상으로 고통받고 있는 일본 경제를 통화긴축정책으로 안정시키려고 애썼다. 이케다가 추진한 '균형재정'은 1950년부터 6․25전쟁과 관련된 군사 계약에서 비롯된 점이 많다. 또한 요시다 내각에서 미․일 평화조약 협상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52년 10월에 통산대신이 되었고, 그후 1950년대말까지 대장대신․통산대신․무임소장관을 지냈다. 자유당(나중의 자유민주당) 간사장과 정무조사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고도성장 정책을 추구하여 일본인의 소득수준을 크게 끌어올린 이른바 ‘소득배가운동’ 시기의 정치가이다. 빠른 경제력 성장을 바탕으로 올림픽을 개최하였고 아울러 각종 사회보장정책의 기초를 닦아 성장하에 소득분배가 악화하는 것을 방지하였다. 그 덕분에 일본은 세계의 주요 선진국중 소득분배가 가장 공평한 나라의 하나가 될 수 있었다. 17. 야마구치 구미(山口組) 다오카 가즈오(1912-1981) 일본 최대의 폭력단 조직으로 다오카 가즈오 (田岡一雄 1912-1981)가 초창기 우두머리(오야붕親分)였다. 그의 별칭은 곰(熊)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세력이 크게 확대되었으며 고베(神戶)에 본부를 두고 일본 전역에 지부와 동맹조직을 가지고 있었으며, 500개 이상의 그룹으로 나뉜 1만 명 이상의 회원 곧 야쿠자로 구성되어 있다. 시코쿠(四國)의 한 마을에서 가난한 집안의 유복자로 태어났으며 4세 때 어머니까지 잃었다. 친척의 손에서 양육되었으나 10대 초반에 학교를 그만둔 뒤, 1929년부터 고베의 야쿠자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1930년대초에 야마구치구미의 견습생이 되었다가 뒤에 정식 회원이 되었다. 이 조직은 전쟁 기간에 붕괴되었지만 다오카가 전후에 조직을 복구하고 대연합조직으로 만들어 강도․노동갈취․도박․매춘․고리대금업․밀수․흥행업 등과 그밖에 합법․비합법적인 사업들을 했다. 그는 이데올로기적으로는 극우파이자 극단적인 국수주의자였다. 1963년 경찰에서 야마구치구미를 단속하기 시작해 그는 1966년 공갈 등 5개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장기간에 걸친 재판 끝에 고베 지방법원으로부터 형을 선고받기 1개월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들 폭력단 조직은 지금도 합법적이거나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상당한 경제적 부를 축적하고 있으며, 지금도 이들 폭력단 중심의 비즈니스가 별도로 있을 정도이다. 일본 밤거리 노점의 명물인 다코야키(문어구이)와 오코노미야키(빈대떡)는 거의 폭력단 계열에서 운영하고 있고, 바, 스넥 등의 밤업소와 관련 비즈니스에도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이들이 투자한 자본 역시 거품붕괴로 상당한 손실을 보았지만 금융기관은 이들이 협박, 공갈을 가하면서 자신들의 투자금에 대한 특혜적 처리를 요구하고 나와 다른 투자자의 그것과 동일하게 채권채무를 정리하지 못해 기관 운영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8. 가네마루 신 (金丸信 1914-1996) 일본의 킹메이커형 정치가로 각료를 3번 역임했으며 1986-87년 부총리까지 지냈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힘은 막후에서 행사되었다. 그는 적어도 총리 4명을 손수 고른 막후 실력자였으며 뇌물수수와 탈세혐의로 정계에서 은퇴할 때까지 수십 년 동안 일본 정계의 '대부'로 알려져 있다. 가네마루는 도쿄대학 농학부를 졸업했고, 1958년 야마나시 현에서 자유민주당(약칭 자민당) 대표로 중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대부분의 미국 정책을 확고하게 지지한 가네마루는 1960년 미국과의 안보조약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본회의장 출입구를 봉쇄했을 때 일본 중의원 의장직을 맡고 있었다. 그는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 및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었다. 가네마루는 또한 자민당의 여러 파벌을 결속시키는 데 큰 성공을 거두었고, 자기 지역구를 위해 정부의 프로젝트와 재정지원을 확보하는 솜씨도 뛰어났다. 가네마루는 1980년대에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1992년에 400만 달러가 넘는 돈을 뇌물로 받은 사실이 폭로되면서 중의원을 사임하고 자민당 부총재 자리도 내놓아야 했다. 그의 가택과 사무실을 수색한 경찰은 막대한 액수의 유가증권과 현금 및 금괴를 발견했다. 그는 이듬해 탈세혐의로 기소되었지만, 건강이 나빠져서 재판은 연기되었다. 가네마루는 그 직후세상을 떠났다. 다나카 가쿠에이에 이어 금권정치를 완성시킨 정치인이다. 그가 정착화한 정경유착 풍토로 인해 일본사회에서 진정한 경쟁을 통한 승자를 찾아보기가 어려워 졌다. 많은 국내 기업들은 시장 경쟁력보다 정치가, 관료와의 유착 경쟁을 통해 기업 규모를 늘리고 수익을 창출하려는 변칙적인 모습을 보였다. 특히 가네마루는 정치가와 야쿠자를 교묘하게 연계시켜 정치안정을 꾀하면서 야쿠자의 경제적 부 창출을 묵인하는 정책을 측면에서 지원함으로써, 시장에서의 경쟁을 통해 자원이 배분되는 것을 방해하였다. 19. 다나카 가쿠에이 (田中角榮 1918-1993) 니가타 현 출신의 입신양명형 정치가이다. 15세에 학교를 중퇴한 후 실업계에 투신하였다. 1947년 총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중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하였다. 1957년 기시 노부스케 내각의 우정상, 아케다 하야토 및 사토 에이사쿠 내각의 대장상 등을 역임한 후 1965년이래 자유민주당 간사장직을 여러 차례 맡았다. 1972년 7월 사토 내각이 총사직한 뒤, 수상에 취임하여 만 2년 4개월 동안 재직하였다. 1972년 9월 베이징에서 당시 자유중국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중공과 수교하기 위한 일본-중공 공동성명에 조인하였다. 1974년 7월 참의원 선거에서의 참패와 금력선거에 불안을 품은 후쿠다 다케오, 오히라 마사요시 양파의 이반․정치적 치부설에 대한 국민과 당내의 비판에 쫓겨 12월 2일 수상직에서 물러났다. 1976년 대규모 정치스켄들인 ‘록히드사건’으로 기소되어 1983년 유죄판결을 받고 벌금과 4년의 징역령을 선고받았으나 실제로 복역하지는 않았다. 정경유착을 통한 금권정치로 자민당 장기집권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건설업계를 통해 조달한 자금으로 자민당내 최대파벌을 유지하면서 한편으로 족(族)의원 중심의 의회정치라는 부처이기주의 중심의 정치유형을 만들었다. 아울러 효율성을 고려하지 않은 정치적 결정으로 신간선, 고속도로, 항만, 공항 등의 SOC시설을 크게 확대하여 일본정부의 재정에 막대한 부담을 안겨주었고, 이후로도 한동안 “건설업계 지원에 의한 경기부양” 이라는 재정정책상의 한 패러다임을 형성하였다. 20.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 1921-1999) 일본인 기업인중 서구인들이 가장 친밀하게 느끼고 또 존경하는 기업인이다. 그는 아이치현의 주조장 ‘고노히마쓰(子の日松)’에서 모리타 규자에몬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44년 오사카대 이학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1945년 해군 기술중위로 임관하였다가 같은해 10월 제대한 다음 도쿄공업대학 전문부 강사가 되었다. 1946년 5월 (주)도쿄통신공업을 설립하여 이사로 취임한다. 1950년 전무이사로 승진하고 일본의 최초녹음기인 G형을 발매하였다. 1953년부터 트랜지스터 연구를 개시하여 1954년 미 웨스턴 일렉트릭사로부터 트랜지스터 기술을 도입한다. 1955년 2월 제품에 SONY 마크를 처음 사용하고 8월에 일본 최초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발매한다. 1957년에는 세계최초의 포켓형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발매하고 1958년 1월 회사명을 (주)소니로 변경한다. 1961년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하고 1961년 미국에서 ADR을 발행하여 자본금을 크게 늘리고 1965년 10월에는 미 IBM사와 기술원조 및 기술제휴 계약을 체결한다. 1970년 소니 주식이 뉴욕, 런던,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에, 1971년에는 홍콩 1972년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뒤셀도르프 증권거래소에 상장되었고 소니기술연구소가 개설되었다. 1979년에는 워크맨을 발매하고 1986년에는 베스트셀러 ‘메이드인저팬’이 17개국에서 출간되고 1988년에는 CBS 레코드, 1989년에는 미 콜럼비아 영화사를 매수한다. 1990년 9월 미․일․유럽의 11개국 브랜드 조사에서 소니가 ‘신뢰도 넘버 원’으로 선정되었고 1999년, 타임지에 의해 20세기를 빛낸 20명의 기업인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일본인답지 않게 미국에서 승부를 건 최초의 기업인이다. 기술자 출신이면서 일찍이 영업책임자를 자청하고 나서, 거소를 미국으로 옮긴 후 미국에서의 판매에 승부를 걸었다. 일본인 기준으로 볼 때 턱없이 큰 주택을 사들여 미국인을 초청, 수시로 연회를 개최하는 등 폭넓은 교제를 통해 미국사회에 본격적으로 파고들었다. 한편으로 소니의 일본 본사에서 신제품을 개발하고 이를 모리시타가 미국시장에서 먼저 선보이는 영업전략이 맞아 떨어지면서 미국내 시판 성공, 이후 일본 시장 진출의 형식을 확립해 나갔다. 이같은 방식을 통해 선발 기업인 마쓰시타, 도시바, 빅터, 히타찌, 미쓰비시, NEC 등의 두터운 벽을 허물어 나갈 수 있었다. 일본인이면서 미국인의 사고를 이해하고 이를 토대로 비즈니스를 전개하면서 일본 기업 특유의 발상과 자세에 대한 이해를 구할 수 있었던 몇 안되는 깨인 일본인이었다. 미국인이 가장 터놓고 얘기할 수 있었다고 하는 그였지만, 그는 이시하라신타로와 더불어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인’을 쓰기도 하였다. 미국인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 그가 일본과 일본지도자들의 미국과 미국지도자를 대하는 자세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21. 나카무라 슈지(中村修二 1955- ) 형광체 메이커인 중소기업 니치아(日亞)화학공업에서 근무하다가 청색발광 다이오드(LED)와 보라색 레이저를 발명한 후 미 캘리포니아 산타바러라 대학에서 연구활동을 계속하는 연구자. 청색 LED는 신호기에 사용되기 시작, 야구장의 대형 디스플레이 등 차세대 조명용 광원체로 각광받고 있으며 보라색 LED는 현재 쓰이고 있는 적색 LED에 비해 기억용량이 비약적으로 늘어나 디지털 정보를 기록하는 DVD에의 응용이 기대되고 있다. 묵묵히 일하던 그가 2000년 초 미국 캘리포니아 샌타바버라 대학 교수로 떠나면서 그의 사건은 두뇌유출의 대표적인 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창의성을 막는 일본식 사회는 쇠퇴한다면서 일본을 떠났다. 회사는 그의 개발로 100여건의 특허와 연간 수백억 엔의 이익을 벌고 있지만 그에게 돌아온 보상은 과장 승진과 특별수당 2만엔(약 20만원)뿐이었다. 이를 두고 미국 학자들은슬레이브 나카무라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고 한다. 그는 미국 과학잡지 사이언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에서는 기술자가 프로야구선수처럼 성과를 올리면 막대한 급료를 지불하거나 활약할 수 있는 장(場)을 마련해준다. 이에 비해 일본의 기술자 환경은 초라하기만 하다고 말하고 있다. 2001년 8월 23일 도쿄 지방법원에 과거 근무처인 니치아를 상대로 LED에 대한 특허권 확인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기술자가 개발한 특허는 소속 기업에 귀속하는 것으로 여겨왔던 일본인 만큼, 이례적 소송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 지 주목을 끌고 있다. 나카무라씨는 니치아에 귀속한 특허권을 자신이 되찾고 LED 개발로 니치아가 번 수익중 20억엔을 정당한 보수로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후 히타치에서도 유사한 소송이 제기되는 등 연구자들의반란이 계속되면서 팀플레이를 강조하던 일본기업들이 개인보상 제도를 만들고 있다. 소니와 일본빅터 등은 특허를 따면 목돈을 지급하는 제도를 도입했고, 한 제약회사는 최고 1억엔 까지 주겠다고 약속하고 나섰다. “일본은 연구자의 의욕과 창의성을 샘솟게 만드는 곳이 아니다. 1993년 청색 LED를 발명, 회사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주었을 때도 나에겐 돌아온 것은 별 것이 없었다....억만장자 꿈꺾는 사회는 망한다....미국 연구자들은 정말 무섭게 파고드는데 이에 비하면 일본은 어린애 수준이다....일본식 평등주의 밑에선 연구자의 의욕이 살아날 수 없다고 말하는 나카무라 슈지, 현대 일본기업이 안고 있는 문제점의 하나를 여실히 입증해 보여주고 있다. 한편으로 이처럼 이타적이고 헌신적인 근로자들 덕분에 그동안 일본기업들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22. 소고신지(十河信二 1884 -1981) 일본의 자랑인 신칸센(新幹線)을 선두에 서서 추진한 사람이 바로 소고신지다. 그는 세간에서 ‘신칸센 3인방’이라고 일컫는 소고신지(十河信二), 시마히데오(島秀雄), 오이시시게나리(大石重成)의 대표인물이다. 그는 일본국유철도의 제4대 총재로서 1955년 5월부터 1963년까지 2기에 걸쳐 총재를 맡아 일하는 동안 시마를 필두로 하는 기술진과 오이시를 필두로 하는 토지구입 등 사업추진팀과 함께 “불가능하다” “3대바보 구축물같은 또하나의 무모한 짓이다” 고 갖은 악평을 받던 초고속열차 신칸센 구상을 실제 운송수단으로 실현시킨 인물이다. 1950년대 초반, 잇다른 철도사고가 발생, 국민들의 신뢰가 땅에 떨어진 당시 국철의 명맥을 되살리고 나아가 일본 철도 부흥의 실마리가 된 신칸센을 구상하고 반대자들을 정치적으로 납득시키고 자금조달면을 해결하여 사업에 추진동력을 부여, 완수되게 한 장본인이 소고총재다. 1884년 4월14일생인 메이지사내 소고는 에히메(愛媛)현 니이하마(新居浜)시 출신으로 제1고와 도쿄대학을 나와 철도원에 들어갔다. 철도원 근무시절 고토신페이(後等新平) 총재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본 전국에 깔린 협궤를 광궤(표준궤도)로 바꿔야 한다고 하는 얘기를 듣다가 총재부임후 시마 등과 함께 그 구상을 신칸센 사업의 형태로 실현시켰다. 국철에서 근무하다 나온후 관동대지진 피해지역 부흥사업에 참여한 후 남만주철도 이사로 근무하다가 패전후에는 에히메현 사이조(西條)시 시장으로 한 때 근무했다. 하지맍 자신의 뜻을 제대로 이룬 것이 거의 없다고 느끼던 차에 그가 승부수를 둔 것이 바로 신칸센 프로젝트였다. 71세이던 1955년에 국철총재에 임명되자 이를 “마지막봉사기회”로 판단, 함께 일할 사람을 찾아나섰다. 과거 국철에서 명기관차 설계와 탄환열차 구상작업으로 이름을 떨친 후 4년전에 차량국장으로 일하다 국철을 떠나 스미토모금속공업㈜ 이사로 있던 시마히데오였다. 그는 시마를 찾아가 자신의 오른팔이 되어 신칸센 개발 등 국철의 리뉴얼작업을 함께 추진하자고 부탁, 이후 8년을 함께 일하면서 국철 내외에서 반대가 거셌던 광궤방식의 도카이도선(도쿄-오사카간) 신선부설과 초고속열차 개발사업을 마침내 성공시킨다. 소고는 늘 자신이 총재에서 물러날 경우에도 신칸센사업이 국철 아니 일본국의 국가적 프로젝트로 인정받아 계속 추진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일본정부 보증하에 세계은행으로부터 융자를 받아냈고 이때 1964년 10월의 올림픽이전에 완성시킨다는 부대조건을 덧붙였다. 사실 이 아이디어는 국철출신으로 당시 대장대신이던 사토 에이사쿠 전 수상이 제시한 것이다. 그는 의원들의 반대가 심해 정부(대장성, 현 재무성) 차원에서 돈을 지원해주기는 어렵지만 사업을 기한내에 확실히 완성시킬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준 셈이었다. 이러한 소고였지만 1964년 10월1일에 열린 도카이도신칸센 개통식에는 최대의 공로자라고 할 수 있는 소고 전총재와 시마히데오 전 기사장(이사)은 정치적인 이유로 초대받지 못했다. 그는 시마와 마찬가지로 집에서 TV로 개통식을 지켜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는 1981년 10월 3일 9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23. 시마히데오(島秀雄 1901-1998) 시마히데오는 1901년 5월 20일 오사카시에서 태어났다. 소고와 마찬가지로 제1고를 나와 도쿄대 공학부기계공학과에 진학, 졸업 후 1925년 철도성에 들어가 설계분야에서 일하면서 일본을 대표하는 ‘D51형’ ‘B20형’ 등의 유명 증기기관차 설계를 직접 맡아 수행했고, 나중에는 전기동력방식에 의한 탄환열차 구상을 가시화한 천재기술자로 전전부터 이름이 높았다. 1948년에는 운수성 철도국 공작국장, 1951년에는 차량국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1951년, 철도사고가 잇따르는 가운데 사쿠라기쵸에서 대형 철도사고가 발생하면서 책임을 지고 철도국(국철)을 떠났다. 이후 당시 철도차량대차를 제작하던 스모토모금속공업에서 이사로 근무했다. 소고에 의해 파트너로 지목되면서 4년만에 국철에 되돌아온 시마는 부총재급 이사(기사장) 보직을 맡아 신칸센 개발 등 기술업무를 총괄하게 된다. 그는 동력근대화 추진에 착수하고 순국산기술에 의한 고속철도 즉 신칸센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훗날 사람들은 일본의 신칸센이 소고와 시마 두 사람의 2인3각에 의해 실현되었다고들 말하고 있지만 두 사람 모두 개통 무렵과 신칸센 운행초기 무렵에는 한동안 잊혀진(?) 존재로 보내야 했다. 이들에 대한 분을 삭히지 못하고 있던 자민당 국회의원과 이들과 선이 닿은 일부 관료들의 이지메때문이다. 두 사람에게 책임이 있는 신칸센 예산초과 사태가 필요 이상으로 과장되면서 신칸센 개통의 최대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주역은 1964년 10월1일의 개통식에 초대받지 못했다. 사실 1950년대 중반, 두 사람은 국철외부는 물론 내부에서도 신칸센 구상을 터놓고 얘기하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그 무렵에는 바야흐로 자동차와 고속도로, 항공기 시대의 도래가 진지하게 거론되던 시기라서 고속철도 얘기를 꺼내면 "왠 때아닌 철도 얘기? " 하는 식으로 치부되고 말았다. "고속철도라니…..이제와서 무슨 아날로그니즘을 논하는 것이냐" 는 식이었다. 당시 한창 잘 나가던 작가 아가와히로유키는 “신칸센은 세계3대바보 구축물의 재판”이라고 까지 혹평했다. 만리장성, 피라미드, 전함야마토 처럼 쓸데없는 큰 덩치의 구축물이 된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시마는 1963년 소고와 함께 국철을 떠났다. 그렇지만 신칸센 개통을 보지 못하고 국철을 떠나는 시마는 국철의 철도기술연구소 후배 직원들에게 일일이 남은 과제를 안겨주었다. 국철을 떠난지 6년이 경과할 무렵인 1969년, 당시의 사토에이사쿠 수상의 천거로 새로 발족하는 우주개발사업단 초대 이사장으로 부임, 1977년까지 근무한다. 우주개발사업단은 미국에서 배운 기술을 토대로 일본이 자랑하는 H1로켓을 만들었고 이를 지속적으로 개량하여 미국, 러시아, 유럽, 중국 등에 뒤지지 않는 로켓발사기술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는 일본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기술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전기기관차 방식의 열차로는 속도와 수송력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 일찍이 차륜에 모터를 붙여 속도한계를 돌파하는 장거리고속 전차시스템을 실현했다. 구미에 없는 이 같은 “동력분산방식” 은 신칸센(shinkansen)이라는 용어로 세계로 확산되었다. 그는 이 기술그룹의 대표로 1965년 아사히상, 1967년에 운수기술 혁신자에게 수여하는 미국의 스레비상을 받아 항공기의 더글러스, 자동차의 포르쉐 등의 저명한 수상자에 버금가는 평가를 받았다. 1969년 기계공학 공적자에게 2년에 한번씩 수여하는 기술계의 노벨상격인 영국의 제임스와트 상을 구미이외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수상했다. 1971년에는 도카이도신칸센 건설의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공로자로 현창되었고 1995년에는 철도관계자로는 처음으로 문화훈장을 수장하였다. 1998년 향년 96세로 세상을 떴다. 2000년 2월 9일, 도쿄 고쿠분지시에 위치하는 철도종합연구소에 시마의 장서와 유품을 전시하는 시마문고가 오픈했다. 24. 나가모리시게노부(永守重信 1944- ) 나가모리는 국내에 널리 소개된 일본기업인이 아니다. 국내에는 마쓰시타 고노스케(마쓰시타전기), 모리타아키오(소니), 혼다소이치로(혼다), 도요다소이치로(도요타자동차), 카를로스 곤(닛산자동차), 이나모리 가즈오(교세라), 손정의(소프트뱅크) 등의 일본기업인이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를 굳이 소개하는 것은 그가 우리의 60, 70년대 불도저 기업인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으며, 앞으로 우리도 나가모리같은 경영철학을 지닌 기업인을 많이 배출해야 실업문제를 덜 걱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가모리는 PC 하드디스크 구동 소형정밀모터에 특화한 니온덴산(日本電産)의 창업 사장이다. 니온덴산은 이 분야 세계 수요의 7할 정도를 공급할 정도의 독점적 지위를 누리면서 불황속에서도 꾸준히 돈을 번 기업으로 유명하다. 장기불황중에 매출과 고용이 5배 이상 늘었고 지금도 놀라운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1968년 오사카, 교토증권 거래소에 상장한 후 "돌고 움직이는 모든 것'에 도전하면서 강력한 기업매수 전략을 펼쳤다. 지금까지 23개 기업을 매수, 재생시키는데 성공했다. 교토출생인 그는 고향에서 공고를 나온 다음 23세이던 1967년 티악(TEAC)에 입사한 후 3년만에 야나시나(山科)정밀기기로 옮긴다. 3년후인 1973년 7월에는 후배 셋과 니온덴산을 창업하였다. 이 후 많은 부실기업의 인수, 재생에 성공한 후 지금은 그룹내 23개 상장기업의 사장을 겸하면서 니온덴산 그룹을 이끌고 있다. 매년 빠른 속도로 매출과 종업원수가 증가하고 있다. 지금의 주력상품인 하드디스크용 모터는 선발기업들이 만들기 꺼려하는 제품이었다. 1978년경, 처음 접한 이 하드디스크 모터가 이후 나가모리와 니혼덴산을 크게 바꿔 놓았다. 이 때의 고생과 고전이 밑거름이 되어 니혼덴산은 전세계 IT산업을 떠받치는 소형정밀모터의 총본산이 되었다. 그가 주목받는 이유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우선 인수한 부실기업 22개 모두를재생시키는데 성공했고 그 과정에서 기존 종업원의 고용은 물론 신규고용까지 창출해 왔다는 점이다. 둘째, 모기업인 니혼덴산을 불황기에도 꾸준한 성장시켜 일본제조업의 부활과 재도약을 상징적으로 예고해 주고 있는 점이다. 셋째는 '소수 천재' 의존 경영대신 '노력형 범재' 의존 경영을 고집하면서 "한 사람의 100보 전진보다 백사람의 1보 전진"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점이다. 자신에 엄한 나가모리는 남에 대해서도 엄한 잣대를 적용한다. 직원 선발시 꿈과 목표를 가진 자를 찾아내, 채용하고 게으른 자를 배제시킨다. 기업 인수시에는 기술이 확실한 기업을 선택하는데 그 이유는 이같은 기업의 경우 창업보다 인수가 득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입사원을 채용하여 기술, 기능을 얻기까지 10년이 걸리는데, 회사를 사들여 1-2년 만에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면 9년의 이익을 얻게 된다. 시간을 사는 셈이다. 우수한 인재를 얻는 데 요즘처럼 좋은 기회는 없다. 50년에 한 번쯤 있는 좋은 기회다." 는 말이 상징적이다. 25. 미키타니 히로시(三木谷浩史 1965- ) 일본의 대표적 인터넷쇼핑몰인 라쿠덴(樂天)의 창립자다. 미키타니 히로시는 1965년 효고현 출신으로 1988년 히도쓰바시(一橋)대학 졸업후 니혼코교은행(日本興業銀行)에 들어간후 1993년 미 하버드대 경영학석사를 따고 귀국했다. 1995년 니혼코교은행을 퇴직, 컨설턴팅업을 창업을 거쳐 1997년 2월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가 열었던 ‘라쿠이치라쿠쟈(樂市樂座)’를 본받아 명명한 ‘낙천시장(樂天市場)’의 대표이사로 취임한다. 창립당시의 회사이름은 엠티엠이었다. 그해 5월에 13개 점포로 시작했는데 1년도 안되어 200개가 넘는 점포가 들어와 일본 최대의 전자상점가로 발전했다. 7주년을 맞은 2004년 기준 점포수는 8천 점포에 달했다. 그는 2003년 9월 2일, 미경제지 포춘지에 의해 5억 7,600만달러의 자산을 보유, 세계 20위 부호에 속하는 것으로 소개되었다. 2004년에는 일본프로야구 신구단, 라쿠덴(樂天)이글즈를 창립, 출범시키면서 국민적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기업계의 새로운 별로써 자리매김되고 있다. 미키타니는 말한다. “ 저는 곧잘 리스크테이커(즉 위험애호가)로 불리우는데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유한한 인생을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할 따름입니다. 하고싶은 제대로 못해 나이들어 인생을 후회할 수 있다는 가장 큰 리스크를 회피하고 있을 뿐입니다. 새로운 돌파구를 열기 위해서는 100%의 힘만으로는 안되고 120%의 힘을 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를 해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차이는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또 머리를 써가면서 성공할 때까지 계속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에너지수준과 목표에 대한 집착심이 필요합니다. 다른 하나는 일하면서 불가능하다는 이유를 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목표에 도달할까를 생각하기 보다 불가능한 이유를 드는 쪽이 훨씬 간단하기 때문입니다”. 2000년에 검색사이트인 인포식크를 매수하는 등 흡수합병에 적극 나서 2003년 9월에는 대형 인터넷여행업체로서 제법 큰 ‘여행창구旅の窓口’를 운영하는 나의 여행 네트, 11월에는 인터넷전업 대형증권사인 ‘DLJ디렉트SFG증권‘을 잇달아 매수하여 업태를 여행업, 증권업 등으로 급속히 확대하고 있다. 처음 2명으로 시작했던 라쿠덴, 지금은 관련 기업체 종사원수가 1천명 정도에 달하는 기업으로 발전했다. 라쿠덴의 목표는 ‘세계제1의 인터넷 및 관련 서비스기업’ 이며 라쿠덴의 5대 컨셉은 ‘항상 개선, 상시 전진’ ‘프로의식 철저’, ‘가설, 실험, 검증, 프레임짜기’, ‘고객만족도 최고’, ‘스피드 또 스피드’인데 이는 당초 사원의 행동규범으로 규정하기 위하여 생각해 낸 것으로 지금부터 약 5년전 즉 사원이 3, 40명 이던 무렵에 고안했으며 이후 전 사원에게 철저히 지키도록 교육하고 있다. 이제 40대에 갓 접어든 미키다니가 앞으로 어떠한 비즈니스 모델을 보여줄 지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고 있다. 2005년 시즌부터 출장하는 라쿠덴이글스의 활약과 달라진 프로구단 운영 모습, 이와 관련한 미키다니 사장의 대응방식 등을 통해 일본인들은 미래의 일본과 일본경제, 일본적경영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미키다니의 일거수 일투족에 일본 비즈니스계는 물론 전체 일본인의 눈길이 집중되고 있는 요즘이다.
☞ 출처 : 한신대학교 < http://www.hanshin.ac.kr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