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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옥굴 앞에서
2월 22일 화요일.
제 11차 별유풍경(別有風景) 답사는 [조상의 얼이 담긴 유물과 유적이 많은 포천]입니다.
포천(抱川), 하면 ‘으악새 슬피 우는’ 명성산과 산정호수, 백운계곡, 이동갈비와 막걸리, 광릉수목원이 잇달아 떠오르지만,
오늘의 임무는 역사 탐방.
채산사 → 청성사 → 인평대군묘 → (점심 : 모내기식당) → 반월산성 → 포천향교→ 구읍리 석불입상 →
옥병서원 → 창옥병 암각문과 수경대 → 창옥병 터널 → 용연서원
우리들 32명의 발길은 이렇게 역사의 흔적을 따라 과거를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포천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윤영선선생님이 “봄내음 맡으며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여행”이라고 인사말을 해서 웃었습니다.
‘봄냄새‘ 하면 어째 두엄 냄새가 맡아지지만, ’봄내음’ 하니까 냉이 달래 향기 풋풋하게 풍겨와,
우리들이 맡고 싶은 ‘역사의 향기’로 이어지는 것 같아 출발의 전조가 참 좋았습니다.
1. 채산사 [茝山祠]
첫 코스는 고종 때의 충신이며 의병장이었던 면암 최익현(崔益鉉:1833∼1906)을 모신 사당, 채산사입니다.
마을 입구에 차를 세우고 10분 가량 걸어 들어가니,
세 개의 작은 대문과 사각형의 담장이 둘러싸고 있는 사당의 모습이 보입니다.
사우(祠宇)는 옆에서 보면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입니다.
이 곳이 면암이 태어난 고향인 신북면 가채리이며, 사당 뒷산 채산[茝山]의 이름을 따서 채산사입니다.
사우 중앙에는 면암의 위패와 영정이 모셔져 있고,
왼쪽에는 광복운동을 하다 순국한 그의 현손 최면식의 위패가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대원군의 독재를 탄핵하고,
병자수호조약을 반대하여 도끼를 들고 광화문 앞에 엎드려 자신의 목을 베어달라고 상소하고,
을사조약에 항거하여 의병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대마도 경비대 감옥 안에서 단식 으로 맞서다 순국한,
74세의 노익장 ‘무서운 충신’ 최익현.
매천 황현은 최익현의 영정 앞에서 시 한수 지어 그의 우국충정을 기렸습니다.
끓는 충의의 정신 지하에서라도 왜 사라지랴 /
충신의 넋은 땅 속에도 변할 리 없네
2. 청성사 [淸城祠 ]
채산사를 나와 안내인을 따라 채산사 위쪽에 있는 청성사를 참배했습니다.
저 유명한 신라의 문장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모신 사당 청성사.
‘당나라에 유학 가서 18세 때 장원급제한 최치원’, 하면 고교 때 배운 [토황소격문]이 먼저 떠오릅니다.
당나라 말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군 종사관이었던 최치원이 써 보낸 토황소격문을 읽다가,
“황소가 너무 놀라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하는 일화로 문명(文名)을 떨쳤던 최치원.
곰을 잡고 표범을 쫓는 우리 군대가 몰아친다면
큰소리만 치던 너의 오합지졸(嗚合之卒)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도망칠 것이요,
너의 몸은 도끼에 묻은 기름이 될 것이며, 너의 뼈는 전차에 치여 부서진 가루가 될 것이다.
게다가 처자식도 무참히 처형을 당할 것이며, 종족들 또한 죽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솟을삼문을 들어서자,
맞배지붕 아래 정면 3칸, 측면 2칸의 본전 한 가운데 고운(孤雲)의 영정이 약간 비스듬한 자세로 우리들을 맞았습니다. .
“10 년 공부하여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라 하지 말라. 나 역시 아들이 있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부친의 엄명을 실현하려고 어린 유학생 최치원은 “졸음을 쫓기 위해 상투를 매달고 가시로
살을 찌르며, 남이 백을 하는 동안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는 이야기를 나는 제자들에게 자주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그 교훈의 주인공을 맞대면하니 감회가 새로워서 참배의 의미가 남달랐습니다.
다시 채산사 앞을 지나 마을 입구로 되돌아가는데, 오른쪽에 있는 큰 물 웅덩이를 가리키며 오덕만 회장님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풍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채산은 솟아 있는데 물길이 보이지 않아 아까부터 섭섭했는데,
역시 물도 갖춰 있구나 생각하니 물 웅덩이 하나의 가치도 소홀히 지나치면 안 되겠구나 새삼 느꼈습니다.
이번에는 유효득선생님이 나서서 우리들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 한 말씀 들려주었습니다.
“포천 사람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최치원, 최익현, 그리고 천도교의 교주 최제우와 최시형 모두
최치원의 후손이라고 하니 포천에 이렇게 유명한 사람들이 있는 줄 미쳐 몰랐네요. ”
3. 인평대군묘 [麟坪大君墓]
효종의 동생 인평대군묘를 찾아가는 길 입구에는 높이 325cm의 거대한 신도비(神道碑)가 우리를 먼저 맞이합니다.
신도비는 돌아간 사람의 일생을 가장 화려하게 묘사한 장엄한 비석입니다.
귀신(영혼)이 무덤으로 다니는 길 위에 세운 비석을 이렇게 크게 세우고,
거북받침돌(비좌)과 쌍용(이수螭首) 으로 장식한 것을 보니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자 뜻을 같이 했던 동생의 죽음에 대한 효종의 슬픔과 우애가 전해옵니다.
묘역은 1,800평, 신도비처럼 넓고 크며 묘비와 사자상이 받들고 있는 상석 주위로,
향로석과 동자석(童子石)과 장명등(長明燈),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상이 1쌍씩 배치되어 있습니다.
묘역 뒷편에는 산신제를 지내는 석물과 묘역 오른쪽 하단에는 제물을 올릴 때 사용하는 판석이 놓여 있어,
오회장님 해설대로 조선의 모든 사대부들이 부러워할 만큼 웅장한 부인 오씨부인과의 합장묘입니다.
병자호란의 삼전도 굴욕 후 볼모가 되어 청나라로 끌려간 3형제.
수치를 씻고자 북벌정책에 매달렸지만 조선의 국력으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리고 동생 인평대군의 죽음, 효종은 친히 제문을 지어 동생의 제사를 지낸 후 제문(祭文)을 비석에 새겼습니다.
뒤를 이은 숙종과 영조 정조 임금도 친히 붓을 들어,
국치를 씻고자 분투했던 인평대군의 업적을 추모하는 글을 비석에 새겼습니다.
바로 묘역의 오른쪽 비각[碑閣] 안에 모셔져 있는 <인평대군치제문비>의 역사입니다.
4. 점심 : < 모내기 토속촌 >
흥망의 역사는 죽은 사람의 몫, 산 사람은 먹어야 죽은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단체손님은 받지 않는데 특별히 청을 넣어 우리만 손님으로 받아주기로 했다는 쌈밥집 <모내기토속촌>을 찾아갔습니다.
메뉴는 농부가 아닌데도 “모내기정식”,
이윽고 농부들이 먹는 푸짐한 상 차림이 나왔습니다.
싱싱한 쌈야채에다 견과류를 넣고 버무렸다는 쌈장, 붉은고추장 돼지고기 두루치기, 술독에서 갓 퍼온 동동주,
그러나 무엇보다 두부 넣고 끓여낸 검은 된장찌개가 일품입니다.
숟가락 넣자마자 맛 끝내준다며 맛집 카페에 올리겠다고 카메라 꺼내 든 분까지 나왔습니다.
결국 된장찌개 하나 더 추가해 먹고 나서야 겨우 흥분사태가 수습되었습니다. ^^^
5. 반월산성 (半月山城)
점심을 먹자마자 <모내기토속촌> 길 건너에 있는 반월산성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반월산성은 최익현의 동상과 충혼탑이 서 있는 청성공원의 주산(主山) 청성산 위에 있습니다.
높이 283m의 청성산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아서 만든 테뫼식 반월형(半月形) 산성 터이며,
동서길이 490m, 남북길이 150m, 전체 길이는 1,080m입니다.
낮은 산이지만 경사가 심한 곳이 있어 오르기가 힘듭니다.
마음 속에 점 하나 찍는 정도의 간단한 뜻이 점심인데, 쌈밥에 돼지고기볶음이며 된장찌개며 게다가 동동주까지,
잔치 음식처럼 점심을 먹었으니 부른 배에 숨쉬기가 벅차다는 어느 분의 농담에 모두 웃었습 니다.
그래도 배가 든든해야 길 걷기가 쉬운 법,
산성 일주의 기점이 되는 반월각 종각을 지나 허물어진 석축 높은 곳에 올라서니 산성의 실감이 납니다.
“적군의 주공격로에 가장 높은 석축을 쌓는 것이 산성의 기본”이라는 오회장님의 해설에 모두 고개를 끄덕입니다.
멀리 건너편에 우리가 찾았던 채산사와 청성사가 있는 채산이 보입니다.
후삼국시대 궁예(弓裔)가 축성(築城)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마홀(馬忽:고구려 때 포천시의 지명)이라고 적힌 명문기와처럼 출토된 유물을 보면,
고구려 → 신라 → 백제로 4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니,
적군의 동태를 파악하여 제압할 수 있는 요지에 산성을 쌓은 삼국시대 사람들의 슬기가 돋보입니다.
지금은 300m 정도만 남아 있다는 석축을 따라 산성을 한 바퀴 빙 돌았습니다.
문지(門址)도 있고 치성도 있고, 수구지와 장대지 터도 보이고 군사들이 주둔했을 분지(盆地)도 나타나니,
과거의 시대는 사라졌지만 산성의 역사는 곳곳마다 기록으로 남아 사적 제40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6. 포천향교
군내면에 있는 포천향교는 12세기 고려 시대에 세워졌으며,
임진왜란과 6·25전쟁으로 두 차례 파괴된 것을 1962년에 중건한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6호입니다.
안내는 고맙게도 다리가 불편하여 지팡이 짚고 거동하는 한 할아버지가 해 주셨습니다.
바깥의 3문 안에 있는 6칸의 명륜당(明倫堂)에서는 강학(講學)을 하고,
안쪽의 3문 안에 있는 3칸의 대성전에서는 제례를 지내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입니다.
긴 담장이 둘러싸고 있고, 3문 양쪽으로 각각 맞배지붕의 단칸방이 자리 잡고 있고, 동재와 서재가 있습니다.
대성전(大成殿)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정면과 측면에 늘어서서,
21C에 살고 있는 ‘까막눈 후학’인 나를 측은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공자와 맹자, 최치원과 정몽주는 여기저기서 자주 뵈온 구면(舊面)이라 조금은 기댈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7. 구읍리 석불입상 [舊邑里 石佛立像]
향교 바로 뒤 쪽에 있는 석불을 찾아 갔습니다.
불상의 형체가 거의 사라진 화강암 한 덩이가 스텐 철책 안에 갇혀 서 있습니다.
높이 192cm, 몸통 두께 30cm 정도,
허리 아랫부분이 땅속에 매몰되어 있어 불상의 전체적인 모습은 볼 수 없습니다.
문득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等身佛)>이 떠오른 것은,
이쪽은 풍상에 마모된 문드러진 몸에서 나오는 자비와,
저쪽은 몸을 불태우며 중생의 비원(悲願)을 부처님께 우러렀던 불심(佛心)이 같았기 때문이라고 짐작합니다.
나는 온화한 미소를 지닌 금색의 불상보다 풍상에 깎여 나가고 ,
“우는 듯한 찡그린 듯한” 그래서 사람 편에 서 있는 이런 불상에서 더 진한 감동을 받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