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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믿음} 정이철 <노승수, 정이철-서철원을 안셈과 피스카토에 비유하였다.>
※. 편의상 아래 본문에서 <이단 박윤선과 개혁신학자 안셀무스와 피스카토르>로 적는다.
{바른 믿음} 정이철 <그리스도의 인성이 연단되어 완전한 구세주가 되셨고 십자가만으로 영생불가>
※. 아래 본문에서 <이단 박형룡>으로 적는다.
{바른 믿음} 정이철 <이단의 본질은 말씀을 혼잡하게 만들어 믿음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 아래 본문에서 <이단 이승구>로 적는다.
여호와시여,
제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제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제가 큰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 131:1)
‘박윤선 {개혁주의 교리학} (수원: 영음사 2003)’ 295쪽~296쪽에 적힌 개혁 교회 정통 교리, ‘그리스도 온전한 순종으로서 능동 순종과 수동 순종 교리’, 그 가르침이 적혀 있는 <이단 박윤선과 개혁신학자 안셀무스와 피스카토르>에서 Wolf이철은 ‘노승수 목사님이 서철원 속죄론을 안셀무스와 피스카토르 속죄론에 비유해 이단시한 일이 없으셨음’에도 섣부르게 노승수 목사님 명예를 훼손했다. 그래서 이를 사과하는 글1)을 {바른 믿음}에 올린 적이 있었다. 거짓증거의 달인 Wolf이철은 이 일에서만큼은 화인 맞은 양심을 회복했던 것이다.
Wolf이철은 이때처럼 화인 맞은 양심을 회복해 이쯤이면 ㅡ내가 지은 제목 <이단 박윤선과 개혁신학자 안셀무스와 피스카토르>가 뜻하는 대로ㅡ “{성경}을 충실히 따지 않고 그리스도 능동 순종이라는 사변 신학을 했던 박윤선은 반기독교적 이단이고, 중세 천주교 안셀무스와 후기 종교개혁 시대 피스카토르는 그리스도 수동 순종만을 가르치는 {성경}을 충실히 따른 개혁신학자다. 또한 그리스도 수동 순종만을 가르치는 {성경}을 충실히 따른 개혁신학자 톰 라이트, 그리스도 능동 순종을 부정한 새관점 대표 신학자 톰 라이트와 똑같이 그리스도 능동 순종을 부정하신 서철원 목사님 역시 {성경}을 충실히 따른 개혁신학자다.”고 선언해야 하지 않겠는가. 싫은가? 그렇다면….
‘율법의 축복’은 모르고 ‘율법의 저주’만 아는 나머지 ‘율법의 축복과 얽힌 그리스도 능동(율법준수) 순종, 그 의義의 전가’를 부정하면, 어떤 신학으로 귀결하는가? 당연히 “구원에서 탈락”을 주장하는 알미니안 신학이나 이른바 “유보 칭의론”을 주장하는 새관점 신학으로 귀결한다. 그런데 ‘서철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에서 서철원 목사님은 “구원에서 탈락”을 주장하신다. ㅠㅠ. 아래 링크 글을 보라.
https://cafe.daum.net/reformedvillage/D3ML/196
위 링크 글에 등장하는 ‘서철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서울: 쿰란출판사, 2019)’은 내게 있는 책으로, 전종득 목사님이 가지고 계시는 책은 내가 보내드린 책이다. “서철원 박사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가운데 의에 관해서 율법주의 색채가 있는 부분들을 해설하면서 신약의 가르침대로 시정했다. 또 성경과 상충하는 부분들과 신앙의 3 요소 문답도 성경대로 수정 보완했다. 성령을 기도와 간구로 받는다는 제사, 믿음의 생활의 법도 신약의 가르침대로 수정 보완했다.”는 이 책, 허리도 안 좋은 내 주제에 697 쪽인 이 책을 모두 살펴볼 수 없는 처지, 나 홀로 감당할 수 없는 처지에서 ‘틈나는 대로 살펴봐 주십시오.’ 하는 마음으로 두 권을 구매해 한 권을 보내드렸던 것이다.
스승 서철원 목사님 가르침대로 ‘율법의 축복’은 부정하고 ‘율법의 저주’만을 끈질기게 주장하는 Wolf이철은 <이단 박형룡>에서 {박형룡 박사 저작 전집 제4권: 기독론} 352쪽 “또 최종으로 그리스도가 만일 사람에게 부과된 형벌을 받으셨을 뿐이면 그분 사역의 열매를 분참分參한 자들은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있던 바로 그곳에 남아있게 됐을 것이다.”를 두고 “박형룡 박사님의 위 말씀은 하나님이 흙으로 만드신 아담에게 베푸신 은혜를 곡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십자가의 은혜만으로는 우리가 참된 영생을 누리지 못하고 단지 가변적이고 불안정한 영적 상태로 상승할 뿐이라는 매우 잘못된 주장입니다.”고 주장한다. “이단 사상”이라거나 “사탄 신학”이라 하지 않고, “곡해”, “매우 잘못된 주장”이라 하니, 어조가 부드럽게 느껴져 좋기는 하다.
박형룡 목사님께서는 {박형룡 박사 저작 전집 제4권: 기독론} 351쪽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은혜롭게도 그를 특별한 언약 아래 두기를 기뻐하셨다. 그 언약은 특별한 시련과 적당한 정상情狀 아래서 제한된 기간에 완전히 순종함을 조건으로 해 인류에게 결점 없는 거룩한 성격과 하늘 위의 영원한 기업基業을 포함하는 ‘영생’을 부여하기로 약속하심이었다.”고 ‘개혁 교회 행위(생명)언약’을 설명하셨다. 다음은 {서철원 박사 교의신학 제4권: 그리스도론} 264쪽~265쪽에서 옮기는 글이다. 배경색은 내가 칠한다. 밑줄도 한가지다.
선악과 계명은 생명과 사망을 결정하는 법이어서 지키면 살고 범하면 죽게 됐다. 곧 하나님을 섬기면 생명에 이르고 섬김을 거부하면 죽게 정해졌다. 그런데 인류가 하나님의 백성 되는 것을 거부하므로 죽음에 이르게 됐다 (롬 6:23).
…(중략)…
반역한 인류가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반역과 그 후의 죄를 속량해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죄과를 무화無化하고 속량하는 길은 생명에 의한 속죄 곧 피흘림뿐이다 (레 17:11).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어린양이 피 흘려 죄를 속량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죄가 제거된다. 따라서 인류의 반역이 무효가 돼 처음 아담의 신분에 도달한다.
박형룡 목사님 제자이자 Wolf이철 스승이신 서철원 목사님은 {서철원 박사 교의신학 제3권: 인간론} 198쪽에서 비록 “아담은 처음 창조 시에 원시 의를 받았으므로 영생을 요청할2) 권리를 받은 것이 아닌가? 처음 받은 원시 의보다 더 높은 의가 있는가? 계명을 지켜야 얻을 수 있는 의는 어떤 종류이고 어떤 수준인가? 이미 의의 상태에 있는 아담이 또 다른 의를 얻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논리, 말도 안 되는 무지몽매한 논리를 펴셨지만, “처음 아담의 신분”은 어떤 신분이었는가? {서철원 박사 교의신학 제4권: 그리스도론} 226쪽에 적힌 “피조물이 이를 수 있는 최상의 단계”, 이 단계를 누리고 있는 신분이었는가? ‘의義의 완전한 모범인 하나님의 율법을 어겨 죄를 지을 수 없는 영화榮化(glorification)’를 누리고 있는 신분이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섬기면 생명(영생, 영화)에 이르고 섬김을 거부하면 죽게 정해졌”던 가변의 신분이었는가? 바꿔 말하면, {서철원 박사 교의신학 제3권: 인간론} 91쪽 “아담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수행하는 일에서 원하면 죄짓지 않을 수 있음(posse non peccare si vellet)을 가졌다. 즉 죄짓는 것을 원하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도 가졌다.”는 서술대로 가변의 신분이 아니었는가?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 말씀대로 아담과 맺으신 “첫 언약에서 영원한 기업은 (아담이) 장차 얻어야 할 것이었다.” 이 말씀을 서철원 목사님 말씀으로 바꾸면, “하나님을 섬기면 생명에 이르고”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능동(율법준수) 순종으로 얻으신 의義’를 인정했으나 ‘그 의義의 전가’는 부정한 알미니안 신학이 ‘그 의義의 전가’를 부정한 까닭은 무엇인가? 서철원 목사님은 새관점 신학 대표 신학자 톰 라이트와 똑같이 ‘그리스도께서 능동(율법준수) 순종으로 얻으신 의義’마저 부정하셨는데, 율법주의 알미니안 신학 아류로서 새관점 신학이 ‘그리스도께서 능동(율법준수) 순종으로 얻으신 의義’마저 부정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가변의 신분을 누렸던 “처음 아담”으로 되돌려 율법주의 행위 구원론을 주장하기 위함이 아닌가!
개혁(칼빈) 신학을 알미우스 신학과 웨슬리 신학보다 낫게 여기는 교만으로 “그 외에도 그리스도 능동 순종의 전가를 정확히 말씀하는 구절이 없음을 인정하는 개혁주의 신학자들 이름은 많이 댈 수 있습니다. 모두가 성경적으로 명확히 근거를 댈 수는 없지만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인정할 뿐입니다.”는 내용을 담은 글, 알미우스주의 웨슬리안 장기영 목사 {페북} 담벼락 글 ‘<개혁주의 형제들께 ②>(2019년 2월 4일)’에 내가 올렸던 반론 댓글3) 첫 문단 “우리가 시험에 넘어질 때 하늘에 계신 대제사장 주님께서는 성부 하나님께 중보 기도를 하십니다. 그러면 성부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얼굴만 보실까요? 아니면, 사탄의 시험을 이기신 주님 얼굴도 보실까요?”대로 ‘성부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시면서까지 율법의 대강령인 하나님과 이웃(형제) 사랑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능동 순종의 의義, 그 극치로서 그리스도 십자가’를 보시는 성 삼위 성부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시험을 이기심으로 이루신 그리스도 의義’도 보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시험을 이기신 일’을 “신자의 모범”으로만 주장하는 신학은 어떤 신학인가? 아니, ‘그리스도 능동(율법준수) 순종, 그 의義의 전가’를 부정함으로써 그리스도 영광을 강탈해 그리스도 구속 사역을 반쪽짜리로 만든 날강도들은 누구인가? {기독교 강요}에 적힌 칼빈 선생님 신학을 왜곡하며 ‘그리스도 수동 순종의 의義, 그 의義의 전가’만을 주장했던 알미니안 신학자 피스카토르와 똑같이 {기독교 강요}에 적힌 칼빈 선생님 신학을 왜곡하며 ‘그리스도 수동 순종의 의義, 그 의義의 전가’만을 주장한 예장 합동 내內 서철원파 목사들이 아닌가! 신대원에서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나 같은 신자들, 이른바 “평신도”들4)을 감당하지 못한 채 ‘생명의 길인 여호와의 율법, 의義의 완전한 모범인 율법의 축복’을 부정하고 오직 ‘율법의 저주’만을 아는 신학, 반쪽짜리 좌충우돌 혼란스러운 신학을 하는 예장 합동 내內 꼴뚜기파 목사들이 아닌가! 이 점에서 “첫 언약에서 영원한 기업은 (아담이) 장차 얻어야 할 것이었다.”는 말씀이 적힌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 글을 링크한다.
https://cafe.daum.net/reformedcafe/jMaU/62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義로움이니라 할지니라.
(신 6:25)
하나님께서 그분을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분이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다윗이 그분을 가리켜 이르되 “제가 항상 제 앞에 계신 주를 뵀음이여, 저로 요동하지 않게 하시려고 주께서 제 우편에 계시도다. 그러므로 제 마음이 기뻐했고 제 혀도 즐거워했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제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제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제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해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돼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행 2:24~29)
<이단 이승구>에 적힌 Wolf이철 주장, “‘모든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신’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리스도가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하나님께 반역한 죄인에게는 죽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끝없이 지적하고 정죄하는 율법의 냉혹한 요구를 무죄하고 의로우신 그리스도가 대신 받고 죽으셨다는 뜻입니다.”는 주장에서 보는 대로 ‘율법의 저주’만을 아는 Wolf이철과 Wolf창모 같은 예장 합동 내內 꼴뚜기파 목사, 그들은 ‘생명(영생)의 길로서 여호와의 율법’을 말씀하신 주님(마 19:17. 눅 10:28. 눅 18:18), 주님 말씀까지 왜곡하는 불경을 저지르는 병신 꼴값 짓도 마다하지 않으며 ‘흠 하나 없이 지켰을 때 영생을 주는 율법의 의義, 생명(영생)의 길(道)로서 율법’을 줄기차게 부정했다. “거짓의 아비 사탄을 닮은 이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저주를 받아야 마땅한, 이 병신 꼴값 불경죄 책임은 그들에게만 있는가? 그들이 저지른 이 불경죄에 그들 스승 서철원 목사님 책임은 없는가?
그들 스승 서철원 목사님께서는 그나마 총기를 잃지 않은 젊은 시절에는, ‘개혁 교회 정통 교리 그리스도 능동 순종’을 가르치셨던 초기에는 ‘서철원 {로마서 강해설교 ②: 복음의 권세}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9)’에서 ‘생명의 길로서 여호와의 율법, 행위(생명)언약’과 함께 ‘행위언약의 율법을 지키심으로 의義를 이뤄 영생을 얻으신 그리스도’를 설교하셨다.5) 그러셨던 서철원 목사님이 젊은 시절 총기를 회복해, ‘총기를 잃어 스승 박형룡 목사님께서 가르치신 그리스도 능동 순종 교리를 이단시했던 일’을 회개하시며 “다윗 왕 예에서 보는 대로, 생명의 길인 여호와의 율법을 흠 하나 없이 지켜 우리 의義로움이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역사상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죄 가운데 잉태해 태어난 사람들인 까닭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 뱃속에 잉태해 거룩하셨던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 이 세상에 거룩하게 성육하셔서 생명의 길인 여호와의 율법을 흠 하나 없이 지키신 그리스도 한 분만이, 흠 하나 없는 어린양 그리스도만이 내 의義로움이니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죄 없이 성육하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흠 하나 찾을 수 없는 경건한 생활을 하셨던 그리스도, 그분께서 이 땅 위 모든 생애에서 흠 하나 없이 이루신 온전한 의로움 때문에 행위언약의 약속(축복)대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영생)을 얻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는 설교를 하시는 날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알미니안 신학자들과 새관점 신학자들과 똑같이 그리스도 영광을 강탈해 그리스도 구속 사역을 반쪽짜리로 만들어 그리스도 온전한 구속 사역을 허문 일’을 회개하시는 날을 기대할 수 있을까?
‘생명의 길인 여호와의 율법, 율법의 축복’을 모르는 Wolf이철은 그동안 수차례 여호와의 율법을 모독함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불경, 신성모독을 마다하지 않는 병신 꼴값을 떨었는데, 다음은 칼빈 선생님 <로마서 8장 3절 주석>에서 옮기는 글이다. 즉, ‘{칼빈 주석: 로마서} 박문재 역 (고양: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13)’ 225쪽~226쪽에서 옮기는 글이다. 배경색은 내가 칠한다.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해: 앞에서 바울은 자기가 불경스럽게도 율법을 연약하다거나 율법은 의식들을 지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폄하하고 있다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그러한 결함이 율법에 어떤 흠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육신의 부패 때문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했었다. 왜냐하면, 만일 누가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충족하게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라 인정받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온전한 의의 규범을 담고 있기에, 가르침에 관한 한 우리를 의롭게 하는 일에 충분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육신은 율법의 의에 도달할 수 없기에 율법의 그런 능력은 별 소용이 없게 돼 버린다. …(중략)… 하나님의 법은 우리 본성의 부패(corruptio) 때문에 우리에게 무익한 것이 돼 버린다. 왜냐하면, 율법은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보여주긴 하지만, 사망으로 치닫고 있는 우리를 돌이켜서 살게 해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롬 2:13)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분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딤전 3:16 상)
Soli Deo Gloria!!!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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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른 믿음} 정이철 <부정확한 제보로 말미암은 기사로 인해 노승수 목사께 사과드립니다.>
2) “영생을 요청할 권리”를 문해력이 뒤떨어지는 난독증 환자 Wolf이철은 ‘아담은 영생을 요청해 그 권리를 누리고 있었다.’고 독해하겠지만, 아무튼 “요청할”이 뜻하는 것은 ‘아담은 피조물이 이를 수 있는 최상의 단계로서 영생의 상태로 지음을 받지 않은 신분, 순종 여부에 따라 율법의 축복을 받을 수도 있고 율법의 저주를 받을 수도 있는 처지에 있었다. 가변의 신분을 누리고 있었다.’는 뜻이다.
3) 다음은 개혁신앙인들을 낮게 여긴, 교만한 장기영 목사에게 내가 남긴 반론 댓글 전문全文이다.
우리가 시험에 넘어질 때 하늘에 계신 대제사장 주님께서는 성부 하나님께 중보 기도를 하십니다. 그러면 성부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얼굴만 보실까요? 아니면, 사탄의 시험을 이기신 주님 얼굴도 보실까요?
그리스도 십자가만이 구원의 길로서 중요하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할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물론, 그리스도 부활이 없는 그리스도 십자가는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활이 없는 십자가를 믿는 것은 헛된 믿음입니다.
또한 그리스도 십자가만이 구원의 길로서 중요하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분 전 생애에 걸친 이른바 “능동적 순종” 없이 십자가로 곧바로 달려가셨을 것입니다. 물론,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무용지물이듯이 그리스도 능동 순종 없는 십자가 역시 무용지물입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 이신칭의와 얽힌 그리스도 능동 순종과 수동 순종’을 분리하는 태도는 그리스도 십자가와 그리스도 부활을 분리한 순천 한마음교회 김성로 목사 태도로 위험한 태도입니다.
그리스도 순종을 굳이 구별ㅡ분리가 아닌 구별ㅡ해 적는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그리스도 수동 순종: 율법 아래 나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죗값은 사망이다.”는 율법의 정죄를 받으심. 즉, 택자들 죗값을 대신 치루심. → 증거 성구: 예수께서는 우리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롬 4:25 상)
② 그리스도 능동 순종: 율법 아래 나셔서 율법을 지키심으로써 “율법을 지키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는 율법의 축복을 얻으심. 즉, 택자들에게 덧입혀 줄 의義(영원한 생명, 부활의 생명)를 얻으심. → 증거 성구: 또한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 (롬 4:25 하)
다음은 제가 ‘위 ②을 증거하는 성경 구절’로 생각하는 말씀입니다. 그분께서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분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고, 그분 경건하심 때문에 들으심을 얻으셨느니라. (히 5:7)
4) 서철원 목사님 제자 김만옥 목사, “웨신서는 영적 쓰레기다.”, “신학적 수준이 안되는 박형룡과 명신홍”이라는 망발을 서슴지 않았던 Wolf만옥이 {페북}에서 “평신도” 운운하며 표적으로 삼았던 ‘고봉현 집사님’과 ‘최주호 선생님’을 뜻한다.
5) https://cafe.daum.net/reformedcafe/jMaU/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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