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독고전독서-시카고플랜] 6. 애덤 스미스 - 《국부론》
보이지 않는 손
조르주 바타유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각국의 축제문화는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가 나눔을 누리게 하는 소비의 한 형태였다. 공동체가 지니고 있는 잉여분의 생산물을 축제의 형식으로 소비함으로써, 잉여량으로 인한 가치절하를 예방하고, 짧은 기간이나마 빈민층에게도 분배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잉여분의 생산물은 당연히 부자들의 소유였다.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에 따르면, 부자들은 잉여분을 무상으로 공동체에 제공함으로써 그 경제력에 합당하는 사회적 지위를 공동체로부터 인정받았다. 기부의 능력이 곧 권력으로 이어졌던 셈. 경제와 권력간의 고리일지언정 축제는 그렇듯 복지의 논리로 계승된 전통이다.
애덤 스미스가 견지하고 있던 원칙은, 축제문화의 경우처럼, 경제가 저 스스로 자연과도 같은 전시를 형성한다는 점이다. 당대는 홉스의 사회 계약신이 정치철학의 전제로 인식되던 풍토를 비집고 루소가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부상한 시기이다. 오랫동안 도덕철학 교수를 역임했던 스미스가 분석한 인간의 본성은 홉스와 루소의 절충이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향성으로 끌려가는 이기적 존재이긴 하지만, 공감의 질서를 도덕으로 끌어안는 존재이기도 하다. 때문에 사적 이익을 추구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의 이익과 안전은 증진된다. 이것이 《국부론》에 단 한 번밖에 언급되지 않았다는, '보이지 않는 손의 원리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등장하는 지점은, 천문학에 관한 스미스의 논문에서 우주의 섭리를 주피터의 보이지 않는 손에 비유한 부분이라고 한다. 스미스가 견지했던 신앙관은 다분히 스피노자적이다. 자연 그 자체가 신의 표현이다. 스미스는 경제가 이런 자연의 이치를 따르기 때문에, 정부가 개입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자유야말로 무위자연이라는 식이다. 물론 국가가 나서서 부도덕한 욕망들을 제재할 필요도 있지만 그 효과는 미미하고, 차라리 모든 국민의 부가 증진된 상황에서 범죄율이 더 낮을 것이라는 스미스의 입장이다.
우리가 매일같이 신선한 식재료를 공급받을 수 있고, 친절한 배달서비스를 편히 누릴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보다 많은 이익을 챙기려는 그들의 이기심 덕분이다. 스미스에 따르면, 그 천성에 따라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면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사회의 이익이 증가한다. 부조리에 대한 국민적 성토가 끊이질 않는 기업일지언정, 청년 실업을 위한 정책에 협력하고, 복지의 사각에 놓인 이들을 후원하는 이유는 결국 자신들의 상품을 다 팔기 위함이다.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서라도 도덕은 필수불가결의 요소이다.
케인스와 박제가
정치경제학은 정치가나 입법자의 과학이 한 분야로 간주되는 경우,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국민들에게 풍부한 소득이나 생활 자료를 제공하는 것. 좀 더 정확히 말해서, 국민들로 하여금 스스로 충분한 소득 또는 생활 자료를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공공서비스를 공급하는 데 충분한 세입을 국가에 제공하는 것, 즉 정치경제학은 국민과 국가 모두를 부유하게 하려는 것이다.
오늘날의 경제학 관점에서 《국부론》을 지적한다면, 국민 전체의 부를 증진시킨다는 취지의 초점이 생산에 맞춰져 있다는 사실이다. 스미스에 따르면 자본가의 미덕은 근검절약이다. 저축을 통한 자본의 증대는 생산과 고용의 규모를 확장시킴으로써 사회 전체의 부를 증진시킨다. 이렇듯 '생산'에 초점을 맞춘 경제학에서 상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관건은 그 상품을 만드는 데 들인 노동 시간이다. 설비비와 재료비, 지불된 임금과 자본가의 생활비를 뺀 순이익, 즉 '잉여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은, 임금에 준하는 적정 노동보다 더 많은 생산성을 착취하는 것이다. 이렇듯 절약을 착취로 실현해 내는 자본가 계급의 부조리에 대한 성토가 마르크스에게로 이어진 것이다. 참고로 《자본론》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책이 《국부론》이기도 하며, 관련한 경제 이론은 《자본론》 챕터에서 조금 더 자세하게 다루겠다.
덧대어지는 문제는 시장으로 쏟아져 나온 상품이 모두 팔릴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자본가는 부의 규모를 늘려 가지만, 노동을 착취당하는 다수의 노동자들에게 소비의 여력이 있을 리 없다. 노동자들은 곧 소비자이기도 하다. 노동자들이 소비를 할 수 없는 여건이다 보니, 시장에 나온 상품들이 팔리지 않는다. 재고가 쌓여 가도록 생산만 하고 있을 자본가가 있을까? 생산 규모는 축소되고 고용은 감소한다.
관점을 생산에서 소비로 돌린 경제학자가 바로 케인스이다. 소비를 진작시키면 당연히 생산이 늘어야 하고, 그 여파로 고용이 창출된다. 그런 선순환을 위해서라도 노동자에게 적절한 임금과 여가가 보장되어야 한다. 이는 조선 후기의 중상주의 실학자 박제가가 언급한 '우물의 비유'와도 일치하는 논리이다. 우물은 피낼수록 채워지지만, 오랜 시간 쓰지 않고 방치하면 말라 버리고 만다. 국민들의 근검과 절약만으로 나라가 부강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우물을 아껴 쓰다가는 우물이 마르는 것과 같다는 논리이다. 활발한 소비가 이루어져야 경제도 발전을 꾀할 수 있는 법, 백성들의 소비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착취가 근절되어야 한다. 이것이 케인스보다도 100년을 앞섰던, 애민정신을 기반으로 한 '조선의 마음'이었다.
시카고학파와 신자유주의
수요가 공급을 앞지르게 될 시 물가가 오른다. 물가가 올라도 소비가 줄어들지 않기 때문에, 기업은 설비에 대한 투자를 늘린다. 따라서 고용도 늘어난다. 물가가 계속 오르기만 하면, 어느 시점부터 대중들의 소비심리는 위축되기 마련이다. 서서히 수요는 줄어들고, 재고가 쌓이면서 물가는 다시 낮아진다. 공급이 줄어들고, 고용도 늘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학창시절의 정치, 경제 시간에 배운 지식 안에서 자연스러운 호황과 불황의 사이클이다.
케인스 이론은 호황과 불황 사이의 낙차를 줄이자는 취지이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려 버리면 기업은 대출을 꺼리게 되고, 가계는 소비보다는 저축을 늘린다. 시중의 통화량이 줄어드는 것이다. 통화량이 줄면 통화의 가치가 오르게 된다. 상대적으로 물가는 내려간다. 소비도 줄고 물가도 내려가니, 기업이 더 이상 설비에 투자를 할 이유가 없다. 한창 호황일 때 금리를 올리는 이유는, 불황의 충격량을 미리 낮추는 것으로써 불황을 대비하고자 함이다. 서브프라임 사태는 호황일 때 금리를 도리어 내림으로써 호황을 더 연장하고자 한 욕망에서 비롯된 재앙이었다. 비유하자면 살수대첩의 물막이 공사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신자유주의의 기점인 시카고학파인들 제조국을 작정하고 재앙으로 몰아넣으려 했던 의도였겠는가? 그들이 케인스를 반대하게 된 계기는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현상이다. 수요가 늘어서 물가가 오르는 게 아니라, 생산비용이 올라서 물가가 오르는 경우이다. 가령 제품의 원자재 가격이나 공장을 가동시키는 석유의 가격이 오르면, 경기와 상관없이 물가가 오른다. 베트남전에 과도한 예산을 쏟아부은 미국은 경기침체로 인해 달러의 가치가 하락한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석유파동까지 겪는다. 불황이라 수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물가가 계속 올랐던 것이다. 케인스 이론으로는 불황의 시기엔 세금을 줄여서 자본가들의 투자를 유도해야 한다. 그 결과 고용이 창출되고 차츰 소비가 늘어나면서 경제는 안정을 되찾을 수 있다는 가정이다. 그러나 스태그플레이션의 경우엔 통화량을 늘리자니 물가는 더 올라가고, 그렇다고 통화량을 줄이자니 불황이다. 케인스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부의 통화량 정책이 별 의미가 없다는 시카고학파의 지적은 애덤 스미스의 '작은 정부가 부활하는 신호탄이었다. 《국부론》이 개개인의 경제활동에 자유경쟁을 보장해 주어야 할 중재자로서의 정부를 요청하고 있다면, 신자유주의는 정부를 하나의 이익집단으로 간주한다. 정경유착의 커넥션들을 예로 들더라도 정부가 이익집단의 성격을 갖는다는 사실이 입증되지 않던가. 정부에게 공정성을 기대할 수 없기에, 경제활동에서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원 취지는 참 좋았던 이론이다.
신자유주의를 특징짓는 키워드는 '감세'로, 세금을 줄여 주면 개인의 근로의욕과 자본가들의 사업의욕이 높아지고, 정부는 도리어 더 많은 조세수익을 올릴 수 있을 거란 의도였다. 물론 이 예상에서는 빗겨간 미국의 경제사이다. 세율을 낮추어서 세금이 많이 걷혔느냐? 결코 그렇지 않았다. 또한 '의욕'이 될 수 있을 만큼의 감세효과가 과연 누구에게 해당하는 사안이겠는가를 따져 물어야 한다. 10만원의 세금을 덜 내는 사람과 1000만원의 세금을 덜 내는 사람, 의욕의 차이가 빈부의 차이로 이어지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애덤 스미스는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것이 모든 국민의 부를 증가시키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지적하고 있는 국가란, 항로개척의 시절에 특정 상인과 제조업자에게 혜택을 부여했던 절대왕정이었다. 자유무역을 옹호한 스미스의 근거는, 내수를 보호하기 위한 국가 정책이 독과점의 폐해를 낳고, 그 부당한 피해를 국민들이 고스란히 떠안는 현실이었다. 《국부론》은 자유주의를 표방했지만, 독점과 일부계층에 집중되는 자본을 경계한 경제서이다. 애덤 스미스에 근거했다던 신자유주의에 대한 지적은,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있는 이론과 사례들만을 늘어놓으면서 전 세계를 기만했다는 사실이다. 신자유주의를 강권했던 강대국들도 이젠 다시 보호무역주의로 돌아서고 있는 시절, 더 이상은 주류 경제학으로서의 입지도 아닌 분위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