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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라면 끓이기
인터넷 뉴스를 읽다보니 미국의 ‘스타벅스’ 매장에서 실재 인물인지 파악이 안 되는 ‘샤넬 리버스’라는 여성이 자신이 근무하던 애틀란타 스타벅스 매장에서 손님의 음식에 이물질을 넣은 적이 있었다고 페이스북에 올려 파격적인 조회수를 올리며 말썽이 되었던 모양이다.
황당하게도 커피에 침을 뱉어 손님에게 주었으며 베이글 잼에 피를 섞고, 초콜릿 음료에 개똥을 섞었다고 썼다는 것이다.(2018.01.11자 Insight 기사)
스타벅스사는 즉각‘그런 이름의 직원이 없고, 누군가 악의적으로 만든 가짜 게시물’이라고 발표하고 수습에 노력하고 있지만 소동은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 않고 사실이든 아니든 스타벅스사는 이미지 추락과 함께 큰 손실을 입을 것이 뻔하다.
이 기사를 읽는 순간 떠오르는 김포에서 군대생활 할 때의 이야기가 있어서 써본다.
미군부대 내에는 당연히 미군(GI)이 가장 숫자가 많지만 한국인 수도 엄청나다. 부대의 성격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내 생각이 GI 숫자의 절반이 넘으리라 생각한다. 우선 우리 KATUSA와 민간인으로 SG(Security Guard, 외곽 경비), KSC(Korean Service Corps, 노무대), KP(Kitchen Police, 식당 종업원), House Boy, 타자수, 사무원, Waitress 등등 매우 많다.
내가 쫄병 시절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두가지가 있는데 남이 웃을 얘기이지만 첫째가 잠자리에서 일어나 군화를 신으면 다시 잠자리에 들기전에야 군화를 벗는 것이었다.
나는 사회에서 양말조차 신기를 싫어해서 구두신고 걷는 동안이 아니면 거의 양말을 신지 않고 생활을 했었다.
두번째는 고참들 라면 끓여다 바치는 것이다. 특히 야간근무 마치고(고참들은 야간근무에도 중간중간 요령껏 잠을 잘 수가 있는데 쫄병은 어림없다. 데스크에서 가끔씩 패트롤 타고 나오는데 걸렸다가는 곡소리 난다.) 피곤하여 곯아떨어져 잠자는데 비번인 고참들이 침대를 발로 툭툭차며 ‘야, ㅇㅇ야! 라면 좀 끓여라!’하면 미친다.
하루 세끼 식당에 가면 항상 양식 진수성찬이 산 같이 쌓여 있건만 고참들은 놀다가 식사시간을 놓치거나 밥먹으러 잘 안 가는 사람도 있다.
다행인 것은 수돗물에서 온수가 나오고 전기풍로(Hot Plate)가 있어서 불 피우는 고생은 안한다.
나는 라면도 내 손으로 끓여본 적이 없었는데 처음에 끓여오라고 해서 물을 받는데 물이 부옇게 나온다. 쏟아버리고 다시 받으면 역시 부연 물이 나오고......!
고참이 쫓아왔다. 왜 이리 늦느냐고! 사실대로 말했더니 머리통을 후려 갈기면서
“촌노무 새끼! 임마, 그냥 받아놓으면 저절로 없어져. 이 밥통아!”
난 정말로 수도꼭지에서 더운물이 나올때 부옇게 되는 것이 더러운 물이 나와서 그런 줄 알았다! 수도에서 뜨거운 물이 나오는 것도 생전 처음 보았고! ㅎㅎ
내가 살던 아산군 음봉면도 그렇고 입대 전 내가 근무하던 국민학교에도 수도시설 없이 우물물을 두레박으로 길어 먹었다. 그때는 서울사람(도시사람)과 시골사람을 구별하는 여러가지 말 중 수돗물 먹는 사람과 두레박물 먹는 사람도 그 중 하나였다. 도시생활을 하다 시골에 내려온 사람이 뻐기며 하는 말
"나도 왕년엔 수돗물 좀 빨았었지!"
한번은 전입동기인 박이병과 같이 라면을 끓이게 된 적이 있었다. 둘중 하나는 비번이었고 하나는 밤 근무로 낮잠자고 밤 근무를 나가야 되는데 고참들은 그런 사정 안 봐준다.
비번인 고참은 아예 외박 나가서 3일 후에나 들어올 수도 있지만 쫄병은 비번에도 막사에 대기하고 있다가 고참 시중 들어야 한다.
라면을 다 끓여서 가지고 가는데 몇 젓가락 먹고 가져다 주잔다. 나는 그렇게 못한다고 먹고 싶으면 너나 먹으라고 했더니 ‘참, 군대생활 요령도 모른다’면서 저 혼자 먹고 갖다 줬다. 가끔씩은 고참들이 같이 먹자고 하는 수도 있다.
다음에는 그 친구가 밤근무하고 와서 낮에 잠을 자다가 비번인 나와 같이 라면을 끓이게 되었다.
자다 깬 탓인지 처음부터 짜증을 내며 고참 욕을 해대서 거의 다 나 혼자 끓여서 가지고 가는데 잠간 기다리란다. 또 몇 젓가락 먹으려고 하나 하고 기다렸더니 이리 내라고 한다. 그랬더니 먹지는 않고 라면에다 침을 뱉는다. 내가 깜짝놀라,
“야, 너 그거 다 먹으려고 그러냐?”
“아니!”
“그럼 왜?”
“야, 임마! 너는 화도 안 나냐? 이렇게라도 화풀이를 해야지!”
“야, 아무리 그래도 먹을 것에 더럽게.....!”
“너, 참 군대생활 어렵게 한다!”
어쩌고 실랑이를 하다가 그 친구가 라면을 들고 갔다.
고참 왈!
“수고했다. 나 쫄병 때는 얼마나 라면을 많이 끓이라고 시키는지 정말 지겨워 혼났다. 한번은 하도 지겨워서 라면에다 침을 다 뱉은 적도 있었지. 요즘이야 뭐 어쩌다 한번씩 끓이니 할만 하지!”
속으로 뜨끔하였지만 그때는 무사히 넘어갔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도 있다.
그렇게 군대요령에 통달한 것같은 박이병은 여러 고참들에게 다 미움을 받아서 무슨 하기 싫은 일이나 곤란한 일 같은 것은 콕 집어서 박이병에게 시키고 수시로 얻어맞거나 푸쉬업을 당하기도 한다.
절대 내가 그의 잘못을 말한 적도 없고 그가 들킨 적도 없는데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알았는지 이상도 하다.
결국 나중엔 보따리 싸서 멀리 쫓겨 나고 말았다. 김포공항만 해도 전국의 미군부대에 있는 카투사들 중에 빈자리 생기면 오려고 줄 서 있다.
소령인 파견대장이나 인사계 상사는 가끔씩 부하들이 말썽을 일으켜야 콩고물이 많이 생긴다. 대개 잘 봐 달라고 약을 쓰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또 사고 핑계로 전출 보내면 줄 세워 놓은 사람 중에 입맛에 맞는 사람을 골라 끌어 들일 수가 있다.
중대 내에서도 뜻밖에 빠따가 많은 편인데(미군부대가 편하긴 한데 이것만은 아니다.) 이유는 떨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고 ‘맞을래, 보고하래?’하고 물으면 누구나 맞겠다고 한다. 왜냐하면 사소한 잘못이라도 자꾸 인사과에 보고가 들어가면 나중에 부대가 개편되거나 하여 인원을 줄여야 할때 그런 문제가 누적되어온 사람 있으면 우선 대상이기 때문이다.
군대 얘기를 들어보면 백이면 백 다 공통적인 내용이 있다.
고참들과 자기 밑에 들어온 놈들은 다 나쁜 놈들이다.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쫄병에서 시작하여 고참이되었다가 제대를 하는 것인데 그럴 수는 없다. 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옛날 여자들 시집살이와 똑같다. 시어머니들은 다 못 돼 먹었는데 고생하던 그 며느리도 나중엔 똑같은 시어머니가 된다.
저 위 스타벅스 얘기, 그게 사실이라면 그 ‘샤넬 리버스’라는 여성의 인생도 뻔할 뻔자다. 그런 사람 절대 성공 못한다.
그런 마인드를 가지고선 사회 밑바닥을 기어 다닐 수 밖에 없으며, 그런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가 되어서도 절대 안된다!
그것이 꾸며 낸 이야기라고 해도 그런 이야기를 꾸며 남에게 읽혀 재미로 삼을 만한 인격이라면 그런 사람이 잘 된다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것이지!
(6) SP 해산
남을 때리는 것 보다는 남에게 맞고 나서가 차라리 마음이 편한 몸과 마음이 약한 내 체질에 맞지 않는 헌병대 생활을 불안불안 위태위태하게 하면서 두달 정도가 되었다.
하루는 주간 근무 중인데 윤병장이 자기는 야간 근무이니 근무 마치고 한가할 때 잠시 시간을 내어 자기가 있는 데스크에 들리라고 게이트로 전화가 왔다.
그동안은 몇차례 윤병장과 대화도 있었고 술자리도 같이 하여 처음의 서운했던 감정은 누그러지고 신뢰관계가 상당히 이루어져 있었다. 그는 서산 음암면 사람으로 나와 절친한 친구가 사는 해미면의 바로 이웃 마을 사람이다.
초저녁에는 면회오는 사람이나 클럽 입출입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 비교적 한가한 시간인 밤 10시 쯤 데스크에 올라갔다.
마침 GI Desk Sergeant는 어디가고 혼자 데스크를 지키고 있었다.
일상적인 얘기, 근무 중 애로사항이나 중대 돌아가는 얘기 등을 나누다가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우리 SP 중대가 깨지고 용산 142 헌병대(142nd MP Co)에서 접수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일단 속으로 잘하면 나의 원소속 부대인 ‘304통신대대 본부중대(HHC, 304th Sig Bn)’로 원대복귀할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이 생겨 기뻤다.
그러나 마냥 기뻐만 할 수 없는 것이 거의 전권을 쥐고있는 윤병장의 태도 여하에 따라 나의 운명은 좌우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윤병장의 생각이 어떤지가 궁금했다.
“그럼 우리는 모두 142 헌병대로 소속이 바뀌는 겁니까?”
“그건 아니고 일단 비파인 우리가 원대복귀를 원칙으로 하되 142에서 근무해야할 장소가 늘어나서 병력이 부족해. 그래서 희망하는 대원에 한하여 절반 정도를 잔류시켜 헌병대에 흡수시키고 싶어하는데 최종 결정은 우리가 하지!”
“그럼 윤병장님은요?”
“나야 저쪽에서도 여기 부대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하여 남기를 바라고, 나도 쫄병때부터 이자리에 오기까지 많은 어려움을 견디고 참아 왔는데 미래가 불확실하고 자대에 가면 더러 내가 껄끄러운 사람도 있을테니 남는게 낫지.”
그러면서 나의 의견을 물었다. 나는 무조건 소속 중대로 내려보내 달라고 애걸복걸하였다. 한참 생각하더니 본론을 얘기했다. 나를 오라고 한 것은 나를 설득시켜 같이 잔류를 하고자 한 것이었다.
헌병대가 쫄병때는 무척 힘들고 재미가 없지만 익숙해지고 중고참 이상만 되어도 알게 모르게 생기는 것도 많고 남들에게 대접도 잘 받는다. 그리고 주간 근무 3일 후 하루 쉬고, 야간근무 3일 하고 3일을 쉼으로 따지면 10일 동안에 6일 근무하고 4일을 쉬는 것이니 노는날도 많고 3일 연속 쉬므로 열흘에 한번씩 3일 외박을 신청하여 집에도 다녀올 수 있으며 아주 쫄병때만 아니면 고참들에게 시달릴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노는 날이 많다는 것은 별 메리트가 아니다. 왜냐하면 카투사는 휴일이 무척 많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아마 전 세계 근무자 중 제일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이야 우리나라도 주5일제가 어느정도 자리를 잡았지만 그때는 주6일 근무였는데 미국은 오래전부터 주5일제가 자리 잡아 토, 일요일은 당연히 쉬고 한국 국경일에는 한국사람이니 당연히 쉰다. 그리고 미국 국경일에는 우리는 쉬라는 규정은 없지만 근무장소에 미군들이 문닫고 쉬므로 우리도 덩달아 쉰다. 거기다가 팀스피리트 같은 큰 훈련을 마치면 위로 차원에서 또 쉰다. 이건 분명히 바로 잡아야 할 필요가 있다. 미군부대로 배속되어 미군과 함께 일하는 것이니 미국 국경일에만 쉬는 것이 맞는다.)
고참들에게 시달리지 않는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그의 말로는 아래로 신병이 들어오게 되면 라면 끓일일도 없고 근무 중에는 각자 근무위치가 달라서 마주 칠일이 적으며 야간 근무를 마치고 낮에 잘때에는 쫄병만 면하면 특별한 일이 없는한 깨우지 않으며 주, 야 근무가 끝나고 3일 쉬는 동안에는 고참들이 거의다 외박, 외출을 나가 얼굴 볼일이 적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화의 핵심은 나를 원하는 대로 모든 편의를 다 봐주고 자기의 후계자로 키워줄 테니 자기와 같이 남아서 MP 화이버를 쓰자는 것이었다. 내가 극구 나는 헌병대 체질이 아니어서 헌병대에 남느니 차라리 나까미 가는 것이 낫겠다고 말했다.
윤병장은 잠시 기다렸다가 ‘지금이니까 그렇지 중대에 내려가 봐라 거기도 군대인데 거기라고 맘 편히 있을 것 같냐 여기서 참고 조금만 버티어 고참이 되면 옳은 일은 아니지만 제대할 때 어느 정도 돈도 모아서 제대할 수 있다. 제발 나와 같이 있자’고 설득을 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의 간절한 청을 거절하는 것이 마음이 아팠지만 끝까지 사정하여 결국 나는 원대복귀를 하게 되었다. 전입동기 박이병, 바가지 체질인 정이병 둘은 남아서 MP가 되고 싶어했는데 정이병은 소원대로 MP 화이버를 쓰게 되었으나 박이병은 희망에도 불구하고 김포를 떠나서 멀리 자대 307대대가 있는 원주 Camp Long 으로 가게 되었다.
SP에서 고생 짤짤이 하며 근무하는 동안 좋은 고참도 여러명이 있었는데 그중 전북 출신이며 매끈한 미남인 신남수라는 이름의 상병이 있었다. 신상병은 늘 애로사항을 말하라고 하여 잘 들어주고 해결방법을 알려주었으며 같이 휴무인 날엔 같이 외출하여 촌놈인 나에게 서울 구경도 시켜주고 밥, 술도 사주었다. 내가 미안해서 돈을 내려고 하면 쫄병이 무슨 돈이 있겠느냐면서 자기가 돈을 다 냈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한번 만나보고 싶은 생각 간절하다.
4. Supply Room 근무
헌병대에서 2달이 채 못되게 근무하고 결국은 소원대로 본부중대로 내려가게 되었다.
더플백을 메고 인사과로 갔더니 본부중대 선임하사라는 한창운 병장이 와서 바로 나의 근무처라는 Supply Room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 전에 정문 근무할 때 만났던 김태준 상병을 다시 만났고 셋이는 부대 식당이 아닌 카투사 스낵바에 가서 백반을 먹었다. 나는 아직은 한식보다는 양식을 더 좋아할 때였는데 고참 둘은 양식을 싫어했다.
밥먹고 Barracks에 갔더니 SP Barrcks와 달리 방 하나에 침대가 6개 있는데 내가 쓸 방은 나하나만 카투사이고 나머지는 모두 GI라 한다. 덩치 큰 양놈들 틈에 끼어 혼자 밤을 보낸다 생각하니 은근히 겁이 났다.
(우리들 사이에 통용되는 말로 GI는 ‘양놈’, 한국인은 ‘엽전’, 한국계 미군은 ‘엽전GI 또는 김치GI’양색씨(=양공주)는 ‘공주’이다.)
신고는 어떻게 하느냐 했더니 현재 우리 본부중대에는 카투사가 단 4명이라고 한다. 선임하사 한병장, 김상병, 나까지 세명이니 그외 한명 밖에 더 없는 것이다. 그 나머지 한사람은 최병장이라는 이발병으로 제대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다. 신고는 필요없고 KATUSA Barber Shop(이발소)에 가서 인사만 하고 오라는 것이다. 미군부대에는 카투사 Barber Shop은 있지만 GI Barber Shop은 없다. 한국군은 보수가 없다시피하니 돈 없이 머리를 깎을 수 있게 배려하는 것이고, GI는 보수가 많으니 밖에 나가 돈주고 깎으라는 뜻이다.
한국군이고 미군부대고 이발소의 군기는 알아준다. 사회에서 이발사는 서비스업으로 약자에 속한다고 볼수 있다. 사회에서 남에게 갑질을 많이 당한 을로서 심리적 보상 차원인지 이발병 들은 적지 않은 숫자가 자기 고참보다 더 무서운 경우가 많다!
내가 이발소에 들어가니 여러명이 잡담을 하고 있다가 대환영이다. 무료하던 차에 이등병이 하나 들어왔으니 만만한 사냥감이 제발로 걸어 들어온 것이다.
여기 저기서 이리와 봐라, 저기 가봐라, 신고해봐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허리를 펴고 들어 오느냐 말이 많은데 머리를 깎고 있던 최병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먼저 알아보고
“음, 오늘 신병하나 전입 온다더니 너 였나?”
“네, 이병 김영배!”
“야, 됐어! 여기 있다간 이 늑대들한테 다 뜯어 먹힐테니 빨리 돌아가! 저녁에 막사에서 보자!”
꿈 같은 며칠이 지났다. 정말로 SP 생활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막사의 GI들, 근무처의 GI들도 비교적 무난하고 친절하여 영어에 서툰 내가 재미 있는지 말도 잘 걸고 장난도 잘 쳐 주었다. 젖 떨어지고 어린이방에 처음 들어가 어리버리하다가 친절한 보모 만난 듯 좋다!
여기서는 제일 중요한 임무가 식사시간이 가까워 오면 고참 세사람 막사를 한바퀴 돌며 ‘밥 먹으러 가자’한마디 하는 것이었다.
근무처인 Supply Room에서는 흑인 GI인 ‘Anderson’이라는 점잖고 교양마저 있어보이는 하사(SSG)가 Section Chief으로 있고 그외 사병 4명이 있었는데 참 좋은 사람들이었다. GI 중에는 고약한 사람들도 많은데 참 운이 좋은 것이다. 싸진(Sergeant, 하사관을 모두 그렇게 부른다) 앤더슨은 나중에 클럽에 올라갔다가 만나면 많지는 않지만 맥주 한두 캔은 꼭 사주었으며 내가 영어공부를 한다고 작은 영어회화 핸드북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보고는 그런것 필요 없다고 해도 두터운 ‘Webster Dictionary’를 한권 사다 주기도 했다.
나는 조수이므로 심부름을 하며 서류 작성법, 영문타자 연습 등을 했고 물건을 달라고 오는 GI는 김상병이 주로 상대를 했다.
하는 일은 barracks에서 사용하는 각종 소모품, 신병이 오면 침대, 옷장, Foot Locker, 모포, 시트, 베개 등을 내어 주는 일, 무기고(Arms Room)에 가서 일년에 한번 사격할 때만 쓰는 우리 중대의 M-16 소총과 M-60 경기관총, Protective(=Gas) Mask의 갯수 파악과 청소상태 점검, 전투식량인 C-Ration의 유효날짜를 확인하고 날짜 지난 것 폐기처분하고 새로 신청, 일주일에 한번씩 각 Barracks의 모포와 시트를 하우스 보이들에게 받아 숫자를 파악해 두었다가 용산 세탁공장에 가서 세탁을 맡겼다가 찾아서 나누어 주는 것 등의 일을 한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GI들은 사무실에서 서류를 만지작대는 일(Paper Work)을 대부분 싫어하고 운전이나 작업 등 몸을 움직여서 하는 일을 좋아하였다.(이것은 미군이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바뀌어 미군의 질이 저하된 것과도 연관이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무실에서 사무직은 카투사가 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GI 전입병이 사무실에 오면 카투사가 맞이하여 서류를 작성하여 분류 보관하고(GI가 전출시는 이 서류대로 물품을 회수한다.) GI는 카투사가 알려주는대로 창고에서 물건을 꺼내어 트럭에 싣고 막사로 가서 적재 적소에 배치를 해 주고 온다.
내가 제대할 무렵 피복쿠폰이 많이 남아서 용산 CIF(Central Issue Facility, 중앙보급소)에 필요한 물품을 사러 갔는데 GI 담당자가 서류를 작성하는데 쓸데없이 시간이 많이 걸려서 지루했다. 뭔가 하고 들여다 보았더니 예전 내가 공급계 볼때 많이 작성하던 서류인데 이사람이 맡은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물품과 이름을 매치 시키지 못하고 끙끙거리며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알려주려고 말을 붙이니 말도 못 꺼내게 한다. ‘네까짓 카투사가 뭘 알아?’하는 투로....!
일단 물러 섰다가 잠시 후에 말리거나 말거나 쏘아댔다.
‘~은 ~을 말하는 것이고, ~은 ~을 말하는 것이다. 확인해 봐라!’흘끔 한번 쳐다 보더니 정말이냐? 네가 어떻게 아느냐?’
그래서 내가 다시 말했다.
“I worked at Supply Room for a long time. Before!”
그랬더니 비로서 얼굴이 활짝 펴지며 이것 저것을 물어봐서 한참 무료로 지도를 해주고 온 적이 있다. 엉터리 영어로 얘기해 줬지만, 영어보다 오랜 경험이 훨씬 나은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본부중대(HHC, 304th Sig Bn)에서 공급계를 보고 있는 동안 몇가지 일이 있었다.
첫째, 어느 정도 공급계 일에 익숙해 져서 사수 없이도 내가 일을 볼 수 있게 되자 김상병은 물건을 챙겨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늘어나더니 나중에는 그 일을 나에게 시켰다.
다름이 아니라 돈이 될만한 물건을 빼다가 어디 갖다 주고 돈을 받는 것이다. 사실 그당시미군부대에서는 군인이고 민간인이고 적발되지 않을 만큼 적당히 물건을 빼다 팔아먹는 것L)은 널리 퍼져있는 관행이라는 것을 나도 잘안다. 그런데 그 일을 나에게 시킨다는 것이 문제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챙겨간다’는 정도이면 참을 만 하다. 그런데 나는 만약 문제가 생기면 영창 내지 나까미까지도 생각 안할 수 없다.
그러나 못하겠다는 말도 못했다. 그런 일을 하고 나면 카투사 스낵바에 가서 밥 한 그릇 얻어 먹었다. 후회가 되었다. 차라리 헌병대에 그냥 남아 있을 걸! 거기선 내가 물건을 빼내는 주체가 아니고 남이 물건 빼 내는 것을 봐 주는 책임이 있었다.
지금은 MP가 된 SP 윤병장 얘기가 딱 맞는다. ‘군대는 어디를 가도 군대다!’
둘째, 최병장은 제대가 몇 주일 남지 않았었다. 하루는 나에게 노트 하나를 내밀며 제대 기념으로 글 하나를 써 달라고 한다. 무슨 글을 쓰느냐하니 아무글이나 마음대로 쓰라 한다. 한참을 생각해보다 그 당시 내가 읽던 글 중에 나오는 ‘E. 시뇨레’라는 시인이 쓴 시 중 ‘네 젖가슴의 그늘에 자랑스런 네 마음을 뛰게하라. 물 위에 뜬 달 같은 크나큰 너의 마음을 건지라.’(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나오지 않는다.) 라는 시를 써서 주었다.
이삼일 뒤 김상병이 나를 부르더니 내가 중대로 내려온 후 처음으로 몹씨 화를 내며
“너, 무슨 글을 써 드려서 제대 며칠 남지 않은 최병장을 화나게 만들었어?”
라고 하면서 최병장이 너를 잘 대해주니까 만만하게 보였냐? 너는 최병장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겠지만 이 부대에서 최병장이 무서워 지금도 큰소리로 이름을 부르면 벌벌 떠는 사람이 많다는 둥 얘기를 늘어 놓았다.
나는 왜 화를 냈는지 이해를 못하겠다고 하면서 시의 내용을 사실대로 말해 주었더니 일부는 나의 말을 인정하면서도 ‘최병장은 그래도 네가 사회에서 교사를 하고 왔다고 하니 무슨 좋은 말이나 써 줄까하고 부탁했는데 저질 스러운 글을 써서 나를 놀렸다고 하면서 화를 내면서 울먹이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나, 죽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사람을 말로는 이해시키지 못할 것 같았다. 저질 스럽다니?
아마 ‘네 젖가슴의 그늘에’때문인 것 같은데 도대체 내가 처음에 만들어 낸 말도 아니고 시인의 글인데 어쩌란 말인가? 이젠 내가 화가 났다. 나도 자존심 있는데 이런 문제로 사과할 일이 아니다라고 마음을 굳혔다.
그로부터 김상병을 통하여 내게 떨어진 벌은 밤 2시에 ‘일인 집합’이었다.
김상병은 내게 복장 단정히 하고 구두 깨끗이 닦아놓았다가 정확히 2시에 가서 깨우는데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면 아마 용서가 될 것이다라고 나를 설득했다.
알았다고 대답은 했으나 나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나 사과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빳따 맞을 각오를 단단히 했다.
군대 용어로 집합(Formation)이 무엇을 말하는지 제대한 사람이면 다 알 것이다.
제일 무시무시한 것이 ‘줄빳따’라고 해서 고참 누군가가 기분이 나빠서 바로 밑에 고참에게 ‘야, 오늘 밤 0시에 XXX이하 군번 애들 모두 ㅇㅇ에 집합시켜!’하면 내무반이 뒤집어 진다.
대부분 잘못을 한 병사의 바로 위 군번부터 교육 잘못 시킨 것을 이유로 모두 집합 시키는 것인데 군번 순으로 한줄로 딱 서서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으면 마치 롬멜 대원수처럼 위엄있게 몽둥이 하나 딱 짚고 서서 복장불량부터 시비를 걸기 시작하여 일장 훈시를 늘어놓고 모두 한명씩 불러 엎드려뻗쳐 시켜놓고 몽둥이로 때린다. (‘5파운드 곡괭이 자루’가 가장 악명 높다.) 이 후 다음 군번이 죄도 없이 얻어 맞은 분풀이로 또 때리고 들어가고가 반복되는데 빳따 횟수가 정해진 건 없다. 한대든 두대든 때리사람 마음먹은대로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면 맨 아래 쫄병은 수십대를 맞고 엉덩이가 피투성이가 되는 수도 있다는데 나는 그런 것까지는 보지 못했다. 끝까지 가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이 중간에 천사표가 한사람 쯤은 있어서 모두 중지 시키고 들어가라는 수가 많다.
집합은 꼭 왕고참의 전유물이 아니고 중고참이나 그 이하에서 시키는 수도 있을 수 있고.....!
나는 준비를 끝내고 시계 알람을 맞춰놓고 자다 알람이 울려 일어나서 최병장을 조용히(GI들 몰래) 흔들어 깨웠다.
최병장, 눈은 치켜뜨고 한번 쓰윽 훑어보고 시계를 보더니
“2시 2분, 2분 늦었다. 내일 다시!”
하고는 모포를 뒤집어 썼다.
-우리의 집합이 한국군과 다른 점은 하급자를 괴롭히는 것을(GI들은 같은 사병끼리는 상하급자의 개념이 없다.) GI들이 보게되면 카투사 인사과로 항의하는 일이 일어나거나 심하면 헌병대에서 쫓아와 폭행한 사람을 유치장에 가두기도 한다.-
김상병은 나에게 그거 하나 똑바로 못하고 사과 제대로 못했다고 안달을 하였는데 이 비슷하게 며칠 연기 연기 하더니 제풀에 됐다 그만 하라고 했다.
나는 최병장이 제대하는 날까지 섣부른 변명이 더 기분 나쁠 수 있을거라고 미리 짐작하고 깎듯이 인사만 할 뿐 다른 변명은 하지 않았다. 제대하는 날 악수하면 ‘미안했습니다, 건강하세요!’하고 딱 한마디만 했다. 지금 생각하니 잘잘못을 떠나서 나에게 잘해주었고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서운해 했으니 내가 잘못했다고 계속 용서를 구했어야 했던 것 같다!
셋째, 나와 GI들 사이에 약간의 해프닝이 있었다.
한국 사람이 미군부대에 오게되면 미국인을 좋아하는 마음이 몇번 변하는 것이 보통이다.
처음에는 선진국 국민으로서 먼 남의 나라까지 와서 수고하는 것이 고맙기도 하고 내가 영어와 미국 문화도 배워야 할 형편이니 무조건 좋게 생각한다. 그러다가 좀 지내다 보면 더러 무시 당하기도 하고 작은 실수에도 쏟아지는 많은 비난 등 일상이 소란한 편이며 개인적인 문화로 남 일에 신경 안쓰는 것이 마음에 안 들어 싫어하기도 한다. 또 나중에는 어차피 우리가 신세질 일이 많으므로 다시 가까이 하게되고, 이렇게 마음이 왔다갔다 하다가는 이해하는 마음이 생기고 미국사람도 결국은 사람이다 생각이 들며 그냥 특별한 사람이 아닌 보통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에 따라 미국인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끝까지 가는 사람도 있다. 제대를 하면서 미군부대 3년에 반미주의자가 되었다는 사람도 있다.
나는 미군이 모병제로 바뀌면서 미군의 질이 떨어지므로 문제가 전보다 더 많아질 것으로 생각을 한다. 일반적으로 미국인이 흑백차별을 하는 사람이라면 한국사람은 더 아래 단계로 차별을 받을 것이 뻔하다. 그러나 속으로는 몰라도 겉으로는 대체로 합리적인 사람이 많다.
내가 듣기로 월남 파병당시 한국군인들은 월남 사람들을 제대로 사람 대접을 안 해준 것으로 들었다.
사실 우리 문화는 서열 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 잡았다고 본다.
상대를 만나면 우선 이사람이 나보다 위인가 아래인가를 가늠하게 된다. 직급이 아니면 나이로라도 판단하여 아래라고 생각되면 말투부터 달라진다. 외국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보다 잘 사는 나라이거나 강대국이면 존중해 주고 우리나라보다 못한 나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 하인 대하듯 종복 대하듯 한다.
공단에서 일하는 동남아인, 특히 불법 체류자를 대하는 우리의 국민의식을 생각해 보라!
사람대접을 제대로 해 주는가? 차별은 우리가 훨씬 심한 것 같다.
(반면 호칭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반대이다. 강대국 사람들에게는 ‘놈’자를 붙이고, 약소국 사람들에게는 ‘사람’이나 ‘인’이라고 부른다. 양놈, 미국놈, 쭝국놈, 쏘련놈, 베트남사람, 라오스사람, 인도인, 동남아인 등)
한국사람들에 대한 미국군인들의 태도가 그 당시 월남사람들에 대한 한국군인들의 태도 보다는 훨씬 훌륭할 것으로 생각한다.
앞으로 우리 한국군에서도 ‘전 사병의 동기제’를 도입하여 미군처럼 사병간에는 쫄병, 고참의 차이를 없애 상하급자간의 얼차려, 폭력 등을 없애려고 검토를 한다는데 뿌리 깊은 우리 서열문화에서 그게 실현 가능할까?
우리는 존댓말, 평상어, 하댓말이 있는 언어 자체가 서열문화이다.
미군부대 내에는 ‘Human Relation Office(인간관계사무실)’라는 재미있는 부서도 있어서 대부분 GI 하사관 하나와 카투사가 한명이 일하고 있는 곳이 많다. 거기서 하는 일은 글자 그대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부딪쳐 일어나는 제반 문제를 해결하거나 중재를 해 주는 곳이다. 부대내에 다른 사람으로 부터 부당한 대우나 차별을 당했을 때 찾아가 얘기하면 진술서(Statement)를 받아놓고 해결하여 본인에게 통보를 해준다. 가끔 약자 중심인 근무부서별로 또는 집단별로 모아놓고 와서 집단 상담을 통하여 부대내에 애로사항은 없는지 들어보고 지휘관들을 만나 해결하도록 노력도 한다. 과연 선진국 군대다운 시스템이다.
한번은 카투사들만 모아서 집단상담을 했는데 한국사람은 식사에 김치를 꼭 먹어야 하니식당에 김치를 놓아달라고 했다.
나중에 GI 인사계가 찾아와 그 문제를 얘기하며 양해를 구했다.
식당에 김치를 갖다 놓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절대 다수인 GI들이 김치 냄새를 싫어하여 곤란하고 오히려 Barracks 내에서 카투사들이 라면을 끓여먹을 때 김치를 넣고 끓여서 냄새 때문에 들어온 민원이 더 많다. 미안한 일이지만 좀 자제해 주었으면 좋겠다.
아마도 가끔 식당에서 ‘Korean Night’를 준비할 것이고 그때는 김치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제기한 문제가 오히려 역효과를 내기는 했으나 문제가 상충될 때는 절대 다수를 위하여 움직일 수 밖에 없는 일이겠다. 김포공항에 카투사는 GI의 1/10 정도 밖에 안 된다.
어느날 Supply Room 마당에서 물품을 죽 내놓고 같이 정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날은 무슨 일인지는 기억에 없으나 내가 기분이 조금 안 좋은 상태였다.
흑인 GI하나가 내 이름표(KIM Y. B.)를 보더니 손가락질을 하며 ‘여기 베어’어쩌고 하면서 막 웃으니 옆에 있던 다른 GI들도 자기들끼리 쏼라쏼라 말을 주고 받으며 이따금씩 ‘베어’라는 말을 하며 막 웃었다.
나는 영문은 모르나 ‘베어’가 ‘곰’이라는 것은 알므로 곰이라고 놀리는 것으로 알고 ‘이게 후진국 국민이라고 무시하여 놀리는 차별이로구나’ 생각하고 몹시 화가 났다. 아직 미국 욕을 배우기 전으로 나도 욕을 하고 싶었지만 아는 것이 없어서 한국말로 ‘이새끼들아! 내가 곰이면 너희들은 원숭이야 임마! 한국 땅에 와서 주인노릇 하려다가는 골로가는 수가 있어 이 썅노무 새끼들아!’어쩌고 하면서 나도 막 욕을 해댔다.
그런데 알아듣지를 못한 탓인지 뭐 별 반응이 없이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김상병이 말려서 더 이상 싸움으로 발전하지 않고 그럭저럭 일을 마쳤다.
막사에 돌아와서도 영 기분이 찝찝하다. 저녁을 먹고 침대에 누워 있는데 다른 부서에서 일을 하며 근무 마친 후 Part Time으로 AFKN(주한미군방송)에서 일하여 TV 프로에도 가끔 나와 노래도 부르고 하던 Jim Hubbard라는 옆자리 침대의 GI가 들어왔다.
그래서 물어봤다. ‘여기 베어가 무슨 뜻이냐?’했더니 그 친구 역시 웃기부터 시작한다.
또 살짝 기분이 나빠 지려고 하는데 계속 웃으며 설명을 해줬다.
여기베어는 미국 TV에 나오는 만화영화인데 재미가 있어서 어른이나 어린아이나 다 같이 즐겨 보는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이런 황당!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이거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고 참 미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종이에 써 달라고 했더니 ‘Yogi Bear’라고 써 줬다. 내 이름 이니셜 ‘Y. B.’를 가지고 재미있어 한것인데 내가 난리를 친 해프닝을 벌인 것이다.
이후 GI와의 사이에서 화 나는 일이 있어도 내가 잘 모르는 부분이 있을까봐 화를 안 내게 되었다. ‘Yogi Bear’는 누구에게 물어봐도 웃기 부터 하였다.
그 후 부터는 GI들 사이에서 나의 별명이 ‘Yogi Bear’가 되어 한국주둔 기념 앨범을 만들 때 내 사진 밑에도 그 별명이 들어가 있다.
제대하고 몇년 뒤 부터는 우리나라 TV에서도 ‘Yogi Bear’가 방영이 되었다. 진작 방영을 해 주었으면 내가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지!
넷째, KATUSA Picnic이 있었다.
내가 서플라이 룸에 내려온지 얼마 되지않아 5월이 되었는데 창고를 겸한 사무실 문은 높이가 상당한데다 남서 방향을 하고 있다. 문을 활짝 열어 놓으면 김포공항을 가로질러 달려온 세찬 서풍이 대단하다. 나는 5월까지도 동내의을 입고 있었다.
김포공항 넓은 잔디밭은 세찬 찬바람 때문인지 잔디 돋는 속도가 늦다.
날씨가 따뜻해지자 여기저기서 카투사 피크닉 얘기가 들려온다.
피크닉? 군대에서 무슨 피크닉이지? 하면서도 봄꽃이 피어나는 야외로 피크닉을 나가면 좋기는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날 저녁 상의할 일이 있으니 식사 후 어디 가지말고 선임하사 한병장 방으로 모이라는 연락이 왔다.
모두 모여봐야 한병장, 김상병, 나, 원이병 4명이다.
바로 피크닉 문제로 모이라고 한 것이다. 이곳 김포 ‘304 통신대대’에는 본부중대(HHC), A중대(Alpha Co), C중대(Charlie Co)의 3개 중대와 그리고 전에 근무하던 SP중대, 카투사 인사과가 있다. 그러나 근무체계가 다른 SP는 빠지고 3개 중대와 인사과인데 우리 중대는 카투사가 4명 밖에 없고 다른 중대는 20명 가까이 되므로 모두 사오십여명이 된다. 그중 근무자, 휴가자, 가기 싫은 고참들 빠지고 나면 참가자는 20여명이다.
거기에 때로는 호기심으로 GI 중대장이나 카투사와 밀접한 부서의 GI 등이 서너명 끼는 수가 있다.
준비할 것은 먼저 각 중대 선임하사들이 모여서 소풍지 및 날짜, 일정 등을 정하고 임무 분담을 한다. 임무는 크게 용산 버스 운행사무실에 가서 버스 사용신청서를 내는 것, 식당 사무실(나중에 내가 일하게 된 곳)에 가서 그날 부대 내에서 식사를 못하므로 미리 참석자의 싸인이 들어간 서류를 메스 싸진에게 내고 포장 가능한 햄버거나 샌드위치, 음료, 과일, 후식 등을 상의 하는데 대략 한달전 부터 준비에 들어간다. 이상은 공적인 것이고, 그 외로는 그날의 스케줄, 프로그램 짜기 노래나 게임 등 알아야 할 사항 등을 소 책자로 40부 정도 만든다.
대부분 왕고참들은 결정만 해주고 실무적인 것은 중고참들이 하며 우리 쫄병들에게는 파트너 구하는 임무가 주어진다.
파트너는 각자의 애인이나 여자친구를 불러 들여도 된다. 불러올 사람이 없는 사람이나 엄연히 애인이 있는 고참 중에도 재미로 파트너를 구해 달라는 사람도 있다, 필요한 인원을 사전 파악을 하여 각 중대 쫄병들에게 인원이 배정된다.
대부분 중대별로 해결을 한다. 파트너 특공대는 쫄병으로서 받기 어려운 매주 외출증을 부여 받는다. 아울러 작전비로 교통비, 다방 찻값, 식사비 등이 지급된다. 모든 피크닉 비용은 각 중대 선임하사의 역량으로 만들어 진다. 남을 등치든지 중대원 들에게 걷든지!
대부분 전자, 중대원들에게 걷는 선임하사는 무능하다고 보여져 인식이 좋지 않다.!
파트너 특공대는 대개 2인 1조로 편성되는데 작전지역은 젊은 여자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여자대학교 교문 주변이나 명동, 화장품 회사 앞 등이다. 거리나 공원, 다방등에서 특공대 동지와 앉아서 이리저리 매의 눈을 번득이다가 적당한 상대라 생각되면 접근하여 말을 건다.
유머가 섞인 유창한 말 재주를 겸비한 미남이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어눌한 말투로 군대 졸병의 서러움을 과장하여 파트너 못 구하여 돌아가면 고참들에게 시달린다고 읍소를 하면 더러는 남의 불쌍한 꼴 보고 못 참는 모성애를 발휘하여 쉽게 구해 지는 수도 있다.
이미 파트너를 확보해 놓았으면 입 꾹 다물고 다음 주 부터는 끊어주는 외출증을 가지고 나가서 놀다오면 된다. 교제비는 매일 주는 것이 아니고 한번에 주고 만다.
내가 경험한 피크닉은 2번이었고 내가 고참이 될 무렵에는 그런 분위기 형성이 되지 않았다. 피크닉 장소는 춘천 남이섬과 포천 산정호 였다.
나같은 촌놈은 그런 세상이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나는 남이섬에서 어렵게 구한 파트너와 함께 노젓는 보트를 타던 즐거운 기억이 있다.
나중에 술이 취하면 더러 고참 중에는 피크닉 장소에서 조차 쫄병을 괴롭히려고 하는 수가 있는데 그럴 때는 파트너들이 단체로 강력하게 항의 하던 것이 또 인상깊게 남아있다.
더러 피크닉에서 처음 만나 교제를 하다가 결혼을 하였다는 얘기도 들었다.
다섯째, 최병장 제대를 이주 정도 앞두고 원이병을 신병으로 받아서 조수가 되었다.
이발병은 TO(Tabe of Organization, 정원)가 2명인데 먼저 온 조수 김일병은 이발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었다. 인사과에서 받고 보니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라 GI를 상대하지 않아도 되는 이발소로 무조건 보낸 것이다. 그러나 원이병은 어느 정도 이발을 할 줄 알아서 환영을 받았다. 대부분 고참들은 원이병에게 머리를 깎고, 쫄병들은 김일병에게 머리를 깎았다.
최병장이 제대를 하고 나자 공급계 사수 김상병이 왜 그런지 원이병을 싫어하여 여러번 잔소리를 하였다. 나는 그때는 일병 진급을 하였었는데 원이병이 내 밑에 오게되니 반가워 여러가지로 잘 해 주려고 노력을 했다. 그런데 자꾸 김상병이 싫어하여 말하며 나보고 ‘야, 너 쫄병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야?’하는 소리를 듣게 되니 나도 둘이만 있을 때는 김상병 때문에 죽겠으니 제발 비위 건드리지 말고 잘좀 해줘라라고 말하면 항상‘알아서 할 게요.’ 라고 말을 했다.
그러다가 주말인가 스낵바에 가서 저녁을 먹으며 소주를 몇병 마셨다.
늘 술자리에선 말썽이 생기는 수가 많아 나는 술도 약한 편이어서 고참들과 술마시기가 싫어한다. 그날도 자리가 길어지다 보니 벼라별 얘기가 다 나왔다.
“야, 원이병! 너 나한테 기분 나쁜거 있지?”
하고 김상병이 먼저 시비를 걸자, 그때까지 말 없이 주는대로 소주를 넙죽넙죽 받아먹기만하던 원이병이 느닷없이
“그래, 김상병 너 때문에 군대생활이 더럽다!”
하고 받았다. 김상병이 어이가 없는 웃음을 웃으며 내 얼굴을 바라본다.
네가 좀 어떻게 해보라는 뜻인지?
이어서 김상병이 한마디 하면 원이병은 두마디 세마디 항의를 한다.
늘 김상병이 나보고 쫄병 교육 잘못 시킨다고 말 해왔던 것이 술취한 나에게 자꾸만 충동질 한다. 그래서 드디어 내가 일어서서 한마디 했다.
“야, 원이병, 이새끼! 내가 그러지 말라고 수십 번도 더 얘기했는데 너, 정말 이럴 거야?”
“김일병님에겐 감정 없어요. 가만히 계세요. 오늘은 내가 할 말좀 해야 겠어요! 야, 김상병 너 그러면 안돼. 군대에 와서 같이 고생하면서 왜 쫄병을 괴롭혀! 너 같은 놈만 있다면 나까미가 차라리 낫다!”
“너 정말 그만하지 못해? 나도 더 이상 못 참는다!”
하면서 주먹을 쳐 들었다. 주변에서 같이 술자리를 하고있던 같은 다른 중대 카투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들에게 쏠렸다.
“나도 못 참아요. 김상병 너 이새끼 세상 그렇게 살지 마!”
“마지막 경고다! 원이병 참을 건가 못 참을 건가 한마디만 해!”
“못 참아요! 김상병, 너.....”
그 뒤로는 말을 잊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원이병 멱살을 움켜 쥐고 안면을 향해 주먹을 날렸기 때문이다.
원이병은 앉아있던 탁자와 함께 홀 바닥으로 나를 끌어안고 넘어졌다.
나도 버리적 거리다가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오른 나는 자세를 바로 잡고 원이병을 깔고 앉아 또 때리려고 주먹을 치켜 들었는데 그때까지 구경만 하고 있던 다른 중대의 카투사들이 달려들어 내 손을 잡고 둘을 떼어 놓았다.
원이병 얼굴을 보니 눈가가 찢어져 피가 나고 있었다.
원이병은 그 상태에서도 계속 김상병에 대한 욕을 하고 있었다.
결국 사람들에 끌려 막사로 돌아와 나도 분이 안 풀려 씩씩대고 있는데 한참 후에 선임하사 한병장이 들어왔다.
“야, 어쩌다가 네가 다 사람을 쳤냐? 누가 잘했든 잘못했든 그게 문제가 아니고 원이병이 상처를 입었으니 네가 가서 잘 풀고 와! 인사과로 쫓아가면 일이 어려워진다!”
나는 사고를 치는 일이 거의 없지만 한번 일을 저지르면 일이 잘못 되어가도 후회를 잘 하지 않는 면이 있다.
그리고 이번 일은 오히려 원이병이 나에게 사과를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임하사의 당부에도 그날은 찾아 가지 않았다.
다음 날은 토요일, 김상병은 외출 나가고 나는 못 먹는 술을 많이 마신 탓으로 아침은 일어나지 못하여 건너뛰고 점심 때가 되어서 원이병 생각이 나고 술이 깨니 어제 일이 생각이 S)났다.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 남의 일에 내가 너무 나갔다는 생각이 들며 조금 후회가 되었다.
원이병 막사로 갔다. 원이병은 침대에 걸터 앉아 계란으로 멍이 시퍼렇게 든 눈 주위를 문지르고 있었다.
“원이병, 미안해! 내가 술이 취해 분간 못하고 행동을 했나봐!”
“아니에요. 김일병님! 이해해요. 김태준 새끼가 나쁜 놈이지!”
나는 어제와 오늘의 기분이 다른데 원이병은 자기의 말과 행동이 변함이 없다.
그리고는 한마디 더
“그런데 김일병님, 주먹이 왜 그렇게 세요? 까딱했으면 눈 멀을 뻔 했네!”
참, 대단하다. 그런 지경에서도 농담이 나온다. 내가 걱정되어 밥먹고 병원에라도 가보자. 내가 어떻게 도와줄까 말해도 걱정 말라고 하루 이틀 지나면 다 낫는다 한다.
아침도 굶었지만 이런 상태로는 식당에 가기 어렵다고 하여 내가 가서 밥을 먹고 가져올 수 있는 토스트와 과일, 시리얼 등을 가져다 주었다. 오후에는 나가서 연고와 빵을 사다 주었다.
그 일이 있은 이후는 내 스스로 마음을 정했다. 나와 관계없는 일로 절대 깃발을 들지 말자, 특히 누가 판단해도 명백한 잘못이 있는 일이 아닌 경우에 한하여는 더!
그래서 다음 술자리에서 김상병에게 말했다.
앞으로 신병 교육을 말로는 하겠지만 절대 주먹은 쓰지 않겠다. 신병이 하는 일이 마음에 안들어 화가 나면 차라리 나를 때려라 내가 맞는 한이 있어도 내 밑의 아이들을 내가 때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결국 이 둘이는 계속 사이가 안 좋아 김상병이 원이병을 때려서 이를 부러뜨리는 사고를 냈다. 원이병은 꾸준히 반발하며 치과 치료비와 보철비를 달라고 요구하였다. 결과는 둘 사이의 문제라 잘 모른다. 아마 정황상 주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비용을 안주어 인사과에 사실을 말하면 김상병은 보따리를 싸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일로 보따리를 싸지는 않았지만 얼마 후 공급계 밑에 다시 들어온 유철진(가명) 이병이라는 신병과의 갈등으로 육개월 쯤 후에는 원주에 있는 우리 대대 B중대로 전출되었다.
유이병에게 물건 빼내는 심부름을 시켰는데 말을 듣지 않은 것을 시작으로 사사건건 부딪치다가 또 폭력을 행사하였는데 유이병은 도망 다니다가 한밤중에 인사과 사무실로 뛰어 들어갔다. 깜짝놀란 당직 사령(주로 예하중대 선임하사 돌려가면서 함)이 인사계에게 보고하여 그렇게 된 것이다.(유이병은 우리나라를 위해 멀고 먼 나라에서 와서 고생하는데 우리가 물건까지 빼내면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는 바뀌겠지만!)
원주 B중대에 가서는 또 하필 나의 동기인 김배훈(가명)이라는 사람을 손찌검하여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가만히 보니 김병장은 나 하나를 빼 놓고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문제를 많이 일으켰다. 그렇게 나쁜 사람 같이 보이지는 않았는데 모를 일이다.
여섯째, 내가 Supply Room(공급계)에서 Mess Hall(식당)로 보직이 바뀌었다.
공급계로 6개월 정도 근무를 하여 이제 비정상적인 일 말고 정상 업무로는 모르는 것이 없게 되었다. 어느날 다들 일하러 나가고 나와 유이병이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데 몸집이 나의 2~3배쯤 될 것 같은 육중한 우리 304대대 본부중대 GI First Sergeant(1SG, 인사계, 부인이 한국인임)인 Mullahey가 찾아왔다.
“Good Morning. Sir!”
라고 인사하자 곧바로 인상을 찌푸리며(미군은 장교이상에게만 Sir을 붙인다. 하사관에게 그렇게 말하면 자기를 놀리는 것으로 안다. 하사관에게는 ‘Sergeant’또는 ‘Sarge’라고 한다.)
“Good Morning. But, I’m not Sir!”
라고 하며 우리 사무실 Section Chief인 앤더슨 하사를 찾는데 자리에 없다.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뭐라고 중얼 중얼 거리면서 나를 보고
“Too much KATUSA here.”
‘여기 카투사가 너무 많다’라니 무슨 소린가 하여 쫓아 나가서 안 통하는 영어로 손짓발짓하며 얘기를 나눠보니 지금 GI가 빠져 나가면 신병을 안 보내 준다고 하며 여러 곳에 GI가 부족하여 카투사라도 보내달라고 하니 전국의 다른 부대 모두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카투사들도 대부분 보병 2사단이 있는 동두천으로 보내고 후방에는 잘 안 보내 준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 닉슨 대통령의 ‘닉슨 독트린’정책으로 미군 철수가 이루어져 2년전인 1971년도에는 동두천의 미보병 7사단 2만명 정도가 철수를 했으며 서부전선을 맡고 있던 미보병 2사단이 동두천으로 이동되어 미군이 최전방 방어선에선 모두 빠졌다. 그 영향이 남아서 그런 듯)
GI 부족으로 인한 우리 304대대의 제일 큰 문제는 식당의 사무원이 없는 것이고, Cook을 한명 데려다 쓰고 있는데 서류일도 잘 못하고 Cook도 부족한데 그도 매일 Cook으로 보내달라고 툴툴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조그만 사무실 Supply Room에는 카투사가 3명이나 있지 않느냐 지금도 너 혼자 사무실을 지키고 있어도 될 정도이니(신병은 있으나 마나인 것을 그도 잘 안다.) 2명을 빼가도 되므로 그 문제를 상의 하러 앤더슨을 만나러 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에게 혹시 너는 가고 싶지 않느냐고 물어봤다.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잘 하면 여기서 나가 김상병의 하수인 노릇을 하다가 잘못하여 영창가는 일을 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That is what I want! But ....”
나는 가고 싶지만 내가 가고 싶다고 하면 김상병이 화를 내며 나를 괴롭힐 테니 내가 한 말하지말고 무조건 나를 데려간다고 말하라고 안통하는 말로 장황하게 설명하였다.
그는 부인도 한국사람으로 한국군의 생리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어서 알겠다고 하고 갔다.
나중에 다들 사무실로 돌아와서 내가 앤더슨 하사에게 말했다. 본부중대 GI 1SG가 다녀갔는데 이유는 모른다고 했다.
앤더슨이 물러헤이에게 전화를 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Company Orderly Room (중대본부 사무실)에 갔다 온다고 하고 나갔다 돌아왔다.
얼굴 표정이 기분 나쁜 것이 분명한 채 욕을 잘 하지 않는 그가 ‘Shit!’이니 ‘Fuck!’이니 하는 거친 욕을 하며 책상 앞에 앉아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God Damn!’이라고 욕 한마디를 더 하고 나더러 이리 와보라고 한다.
카투사 한명을 식당으로 보내라고 하는데 나를 보내라고 한다는 것이다.
안된다 유이병을 데려가라하니 너무 신병이어서 타자도 못치고 카투사 사수도 없이 혼자서 일을 배우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려서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상병을 빼가라 하니 또 그는 제대가 얼마 남지 않아 본인도 싫어할 것이고 가르쳐 놓으면 제대를 바로 하여 새로 또 보충을 해 주어야 하니 딱 KIM Y. B.가 적당하다는 것이다.
본부중대에서 오다가 김상병을 만났는데 식당으로 안가겠느냐 물으니 절대 안가겠다고 하더란다. 나는 춤을 추었다, 속으로..... 니나노!!! ♪♪♫♪
나보고 의견을 물어서 나는 앤더슨이 있는 것은 좋은데 내 위로 카투사가 있는 것은 싫다. 그들이 원하면 가고싶다고 했더니 어느 정도 분위기 파악을 하고서는 자기도 보내주기 싫지만 그렇다면 보내주겠다고 한다. 미국은 군인들도 개인의 의견을 전적으로 존중해 준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며칠 후에는 Supply Room에 인사하고 싸진 물러헤이와 함께 식당 사무실로 가게 되었다.
겉으로는 섭섭한 척, 속으로는 노래 부르며..... 사실 마음 속에 제일 섭섭한 것은 싸진 앤더슨과 같이 일하던 대학을 다니다 입대했다는 그림슬리 일병, 그들 둘과 헤어지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우리 부대 대대식당(Battalion Mess Hall이라고도 하고 Battalion Dining Facility라고도 함)에는 민간인 종업원을 제외한 카투사는 쿡조차 한명도 없었다.
나는 다시 한국 사람의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절해의 고도로 보내진 것이다.
식당에 한국사람은 많다. 청소 등 잡일을 하는 KP(Kitchen Police), 식당 홀 한쪽 코너에 Service Area가 있는데 그곳에 식사를 운반해 주고 팁을 받는 웨이트레스 아줌마들, 그러나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하여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일곱째, 보잉747 점보기 취항. 내가 김포공항의 동쪽 철조망 울타리를 같이 쓰고 있는 김포 미제4통신단(4th Sig Gp)에 첫 배치된 때가 1973년 3월 초였다.
그 당시의 우리나라 항공교통은 지금의 저가 항공사 수준만도 못하였다.
우리나라 항공사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면
1948년 국내 최초의 ‘대한국민항공사’(KNA, 민간항공) 출범
1962년 정부에서 인수하여 ‘대한항공공사’로 명칭변경(KAL, 국영항공)
1964년 첫 국제선 취항(일본)
1969년 한진그룹에서 인수 ‘대한항공’으로 명칭 변경(KAL, 민영항공)
당시 제트기 1대, 프로펠러기 7대 보유
1973년 보잉747 점보기 첫 취항, 태평양 횡단 미주노선 첫 취항
1988년 ‘ASIANA항공’(민영항공) 출범으로 복수항공사 경쟁체제 돌입
2001년 인천공항 개항
내가 김포 땅을 밟은 첫해에 김포공항에서는 ‘보잉-747 점보기’가 첫 취항을 하여 군악대와 꽃다발을 든 어린 학생들까지 동원한 성대한 취항식을 가졌다.
나는 철조망 밖 우리부대에서 이런 취항식을 모두 지켜볼 수 있었다.
그때의 느낌은 내가 어렸을 때 작은 그물을 가지고 개울에 가서 물고기를 잡을 때 대부분 작은 물고기인 송사리나 피라미, 붕어 들이 잡혔다. 그런데 장마 후나 큰 비가 오고나면 어쩌다 메기가 한 두마리씩 잡히는 수도 있었다. 이럴 때는 어린 나에게 대단한 기쁨이 찾아온다. 물고기 잡는 그릇은 구멍난 주전자를 보통 가지고 다녔는데 주전자 속을 바라보고 또 바라봐도 작은 송사리, 피라미 무리 속에 커다란 메기 한마리를 볼적마다 웃음이 번지고 신이 났다.
그때 처음 본 보잉-747은 프로펠러 여객기와 작은 제트 여객기 몇대 속에서 주전자 속의 메기처럼 커 보였다. 처음 보는 2층 구조로 머리 부분이 위로 툭 튀어 올라 더욱 커 보이고 위압감을 주었다.
저렇게 비행기가 크면 이륙할 때의 소음이 어마어마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보기가 뜰 때를 예의 주시 했더니 의외로 소음이 요란하지 않았다. 작은 비행기들은 출발선에 서서 활주를 시작함과 동시에 ‘쐐~~액’하는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나는데 점보기는 낮은 음으로 ‘쇄~~앵’하는 소리가 부드럽게 났다.
다른 사람들의 말로는 이착륙 때는 소음 줄이는 장치를 써서 소리가 크지 않지만 고공에 떠서는 엄청나게 큰 소리가 난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지 확인 불가!
곧이어 보잉-747을 비롯하여 보잉-747 보다는 조금 작지만 점보급으로‘에어버스’라는 별명의 ‘A-300’도 여러대 도입되어 취항을 하였다. 산업화와 함께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항공수요가 있어 비행기의 크기와 댓수는 크게 늘었다.
처음에는 김포공항 건물 중간층 앞쪽에 발코니 처럼 앞으로 좀 튀어나와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사람이나 돌아오는 사람을 바라보며 손수건을 흔들 수 있는 송영대(送迎臺)라는 시설도 있었다. 그 이후 너무 많은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고 국내외로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의미가 없어져 자연히 이용하는 사람들이 사라졌다.
여덟째, 제1차 석유 파동(1st Oil Shock)이 있었다.
1973년 10월 6일 이스라엘과 아랍권 국가 간의 제4차 중동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에 따라 1960년 결성된 OPEC(중동의 석유수출국기구)는 이스라엘을 지지, 지원하는 나라 미국, 영국, 캐나다, 일본 등 의 국가를 제재하기 위하여 석유 수출을 금수하는 조치 및 석유 생산량을 감축하고 석유 가격을 대폭 인상하였다.
1973년 10월초에 3달러 였던 석유 가격은 연이은 인상으로 1974년 봄에는 무려 12달러에 육박하는 고가가 되었다. 이것은 세계 정치와 경제에 큰 영향과 충격을 주게되어 이를 제1차 석유 파동이라고 한다.
‘석유자원의 무기화’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되었고 순식간에 4배 정도가 오른 가격이지만 1970년에 비교하면 10배로 치솟은 가격이라 하니 관련국들의 경제에 매우 큰 타격을 입혔다. 산업개발 단계에 들어섰던 개발도상국들에게는 아주 큰 피해를 입혔다 한다.
석유 소비가 많은 집단 중의 하나인 군부대, 특히 석유를 연료로 쓰는 장비가 많은 미군부대에도 비상이 걸렸다. 당장 난방 제한 조치가 떨어졌다.
첫 추위가 밀어닥치는 시기에 전 부대내 군인들에게 닭털 침낭을 하나씩 지급하고 모포도 추가 지급하는 한편 아예 난방을 끊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침낭 속에 들어가 자는데도 방안의 공기가 차가우니 당연히 입과 콧구멍에서는 흰 김이 피어나고 쾌적한 잠을 이루기가 어려웠다.
외출을 못나가는 주말에는 방안 보다 바람 막히고 양지바른 곳이 더 따뜻하여 밖에 나가 햇볕을 쪼이던 기억도 난다.
정확히 기억은 못하겠으나 이런 난방 제한 조치는 1~2개월 정도 계속되었던 것 같다.
내가 제대하고도 몇년 뒤이기는 하였지만 1980년에는 제2차 석유파동이 있었는데, 이미 제1차 석유파동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세계적으로는 1차 파동에 비하여 2차에는 충격파가 적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어느 정도 산업화가 진행되고 있어 석유 소비가 많아진 상태이기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석유는 모든 생산제품의 원료에 해당되어 ‘물자절약’, ‘에너지 절약’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아이디어가 전국적으로 발굴되었는데, 안 쓰는 전기제품 코드 뽑기, 한집 한등 끄기, 자동차 제한속도의 하향조정, 가로등 한등 건너 끄기, 에너지 소비가 많은 유흥가의 영업시간 제한, 물 한방울도 절약, 폐품 재활용 운동, 자동차 운행 요일제 등등이 권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