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오를 향유해 왔던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우리 음악 생활 속에 카세트가 일상적인 감상 미디어로 자리 잡기 전과 그 이후가 비교적 뚜렷한 경계선을 긋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경계선이란 다름 아닌 레코드 기능이다. 혹은 요즘의 정서에 빗대어 보자면 캡춰 혹은 다운로드 쯤 되는 그런 기능이다. 레코드 기능이 없던 시절, 사람들이 음악을 듣는 방식은 레코드 회사에서 제조한 레코드를 사다가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걍 듣거나 아님 하나의 레코드 트랙이 끝날 때마다 수고롭게 손을 움직여서 자기가 원하는 트랙으로 조심스레 이동시키거나 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라디오에서 디제이가 선곡한 음악을 그냥 흘러나오는 대로 들어주거나 하는 방식도 있었다.
MP3 플레이어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음악만을 골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순서를 배열하여 음악을 즐기는 요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조금 답답할 수도 있는 청취 방식이었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바라보면 취향을 즐기는 방식이 상당히 일방적이고 또 대중의 입장에서 보면 다소 수동적인 처지에서 음악을 들어야 했던 모습이었던 게다. 이러한 상황을 상당히 일소시킨 것이 말하자면 카세트테이프 및 카세트레코더플레이어의 등장이라는 음악적 사건이다.
오디오테이프 기술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마그네틱 원리의 소리 재생기가 처음 등장한 것은 1898년, 그러니까 이제는 100년이 훌쩍 넘어간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전쟁을 제외하고 오디오테이프가 본격적으로 실생활에 응용되기까지는 약 50년, 그리고 대중들의 손아귀에 들어갈 수 있게 되기까지에는 그로부터 또 1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오디오테이프 제조회사로 가장 유명한 암펙스[AMPEX]사(社)의 테이프레코더가 처음으로 방송국의 스튜디오에 진입한 것은 1947년이고 레코드사의 스튜디오에서 레코딩의 신세계를 준비한 것은 또 그 이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고 우리가 오래도록 사용해 왔던 오디오테이프, 정확하게 말해서 필립스의 가 개발된 것은 1963년이다. 물론 그 사이에 짜잘한 오디오테이프 류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대표적으로는 필립스보다 약간 빠른 50년대의 과 그보다 상용화가 약간 늦었던 60년대의 미국식 <카트리지 테이프>가 있었다. 이러한 종류의 오디오테이프는 한국에서도 좀 삭은(--;) 사람들이라면 본 적이 있을 것이며,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일반 가정에서는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지고 말았다.
앞에서 말한...
일부 저장 및 재생 미디어들에 ‘짜잘하다'느니 ‘잠깐'이라느니 하는 수식어가 붙여진 까닭은 물론 필립스의 오디오카세트 때문이었다. 필립스의 카세트는, 그쪽 넘들 표현에 의하면, 아이큐 20~25 정도의 사람도 쉽게 다룰 수 있을 만큼 편리한 인터페이스와 선동렬이 집어던진대도 전혀 재생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 만큼의 튼튼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장점 덕분에 초창기의 아주 저열했던 음질에도 불구하고 발전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렇게 등장한 카세트의 가장 큰 특징은 ‘레코드 기능'이라고 이미 앞에서 이야기했다. 카세트 이전의 오디오 미디어인 SP나 LP의 경우엔 레코딩 기능이 탑재된 플레이어가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카세트테이프는 자신의 등장과 더불어 레코딩 기능이 탑재된 플레이어를 거의 동시에 선보였다. 마찬가지로 SP나 LP의 경우 공(空)미디어가 존재할 리 없었다. 하지만 카세트테이프 중에서도 사람들에게 제일 익숙한 것은 아마 공(空)테이프였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이런 것은 너무나 당연시 하거나 혹은 무관심의 대상이었겠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히 혁명적인 일이었다.
카세트테이프가 본격적으로 대중화에 나서게 되면서 카세트 데크에는 녹음기능과 함께 라디오 기능이 장착되었다. 과거 레코드플레이어에도 라디오는 함께 장착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단지 앰프와 스피커를 공유하는 단순한 기계적 결합이었다. 하지만 카세트레코더와 공테이프 그리고 라디오의 결합은 색다른 효과를 발휘하였다. 카세트 이전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단지 ‘스트리밍'에 불과했 지만 카세트 이후의 라디오 음악은 ‘다운로드'로 변모하였다.
어린 시절 <황인용의 영팝스>,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 <전영혁의 음악세계>로 이어지는 밤 시간대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으며 자란 이들은 아마 이러한 변화를 가장 열정적으로 향유한 이들이었을 게다. 부모님이 큰 맘 먹고 사주신 영어 학습 테이프의 아래편 구멍을 스카치테이프로 막아버리고는 카세트레코더에 집어넣어 공테이프로 ‘재활용'하던 기억, 눈은 책을 보고 있지만 정신은 항상 레코더의 레코드 단추에 집중하던 기억, 노래가 나오던 중간에 갑자기 페이드아웃 되면서 광고가 등장할 때 맛보던 작은 낭패감 등. 이러한 청년 세대들의 공통된 경험은 모두 카세트레코더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풍경이었다.
지금도 음악 파일의 다운로드를 두고 많은 다툼이 있지만, 당시에도 이 카세트테이프, 그 중에서도 공테이프와 카세트레코더를 둘러싸고서 음반 업계와 일반 청중들 사이에 반목과 갈등이 벌어지곤 했다. 카세트레코더라는 ‘가증스런' 플레이어와 공테이프는 음악 산업을 죽이는 불법적 존재라는 것이 바로 음반 업계의 주장이었다. 당시의 모습은 지금과 참 비슷한데, 지난 시대가 보여준 결론은 음반 업계의 관계자들이 머쓱허니 뒤통수를 긁게 만드는 그런 것이었다.
사실 당시는...
오일쇼크로 인해서 음반 판매뿐 아니라 모든 소비 수준이 위축되던 시기였다. 또한 경기의 회복과 워크맨, CD 등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이 잇따르면서 음악 시장은 다시 급격한 성장을 지속하였다. 카세트레코더의 활용도 더욱 적극적으로 확산되었고 많은 카세트 데크들은 ‘더블'의 형태로 그 활용의 가속도를 더욱 높여주었다. 사람들이 음악을 많이 들으면 들을수록 음반 업계는 더 호황을 경험하였다. 음반 업계한테는 이래저래 머쓱했지만 상당히 실속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음악을 많이 들으면 들을수록 음악 산업의 관계자들이 더 많은 돈을 벌게 된다는 것은 요즘 사람들에게도 예외가 될 수 없는 기억해 둘 만한 원칙이다. 레코드가 등장할 때 많은 흥행업자들과 가수들은 녹음 자체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이들의 주요 수입원은 극장에서의 흥행이었는데 레코드가 대중화되면 사람들은 음악을 들으러 극장에 오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레코드가 대중화되자 로컬에 머물렀던 그들의 손님들은 글로벌로 확장되었고 음반 판매 수익은 더욱 커다란 황금알을 가져다주었다. 라디오가 등장할 때도 그랬다. 라디오에 대해 음반업계에서는 음악 시장을 죽인다고 비난을 가했으나 라디오를 통한 더 커다란 청중의 확보는 얼마 지나지 않아 팝 시장의 태평성대를 가져다주었고 뮤지션들은 억만장자의 반열에 올라서기 시작했다.
MP3폰을 둘러싼 소비자와 음반 업계 사이의 갈등, MP3파일을 둘러싼 청중들과 음반 업계 사이의 갈등이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한창 진행 중이다. 며칠 전 소리바다에 대한 또 하나의 판결이 있었고 미국에서는 카자[KaZaA]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졌다. 무엇이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이미 MP3 파일은 생활이 되었고 간편한 MP3 플레이어는 음악적 일상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 상황을 바라보는 여러 가지 시각이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합리적인 시각은 누가 뭐래도 이거다. “그래서 결국 음악을 듣는 사람이 많아졌는가요?” 하는 거 말이다. 음반 판매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이미 음악 창작자들의 저작권 수입은 급속도로 상승하고 있는 중이다. 사람들이 음악을 많이 들으면 음악 산업의 관계자들은 더 많은 돈을 벌게 된다는 원칙이 여전히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누구나 집에서 수행할 수 있는 간편한 레코딩 기능은 사실 LP같은 디스크 형 레코드 시스템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디스크 시스템에서의 레코딩 설비는 비용도 많이 들고 기술적으로 상당히 까다로운 것이었다. 하지만 카세트레코더라는 신개념 플레이어의 등장과 더불어 보통 사람들의 녹음이 상당히 자유로워짐에 따라 ‘다운로드' 이외에도 주목할 만한 변화들이 곳곳에서 생겨났다.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현상들이 선사했던 의미는 ‘다운로드'의 그것 이상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레코드가 한참 대중들의 사랑을 받던 1930년대 후반의 기록에는 이런 게 있다. 시간이 멀다하고 사무실에 오디션을 받으러 무작정 들이닥치는 가수 지망생들 때문에 레코드사 매니지먼트 담당자들은 정신 및 시간이 없어서 일을 할 틈이 없다는 푸념 아닌 푸념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 세계 어느 나라든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서양에서는 식당과 주점의 익살꾼들, 한국에서는 권번의 기생들이 주로 언더그라운드의 역할을 하였겠지만 제한된 무대에 설 형편은 되지 않으면서 가수의 꿈을 키우던 다른 젊은이들의 경우 음악 세계에 입문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직접 레코드사를 찾아가는 일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레코드를 출시하기 전에는 대중들을 접할 기회도 없어서 기성의 입맛에 의해 그들의 데뷔 여부가 결정되어야 했다.
그러나 카세트레코더와 공테이프의 등장은 이러한 상황을 확 바꿔 버렸다. 음악을 하고 싶었던 청년들, 그리고 그들의 밴드는 직접 고된 발품을 거나 라이브 시스템이라는 조건의 부담도 없이 데모테이프를 통해 유력 레코드회사의 매니지먼트 담당자와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와 달리 지역의 커뮤니티라디오가 발전한 다른 나라에서는 데모테이프가 라디오 DJ들에게도 전해졌다. DJ의 방송을 통해 대중들의 반응이 오면 그들은 로컬의 인기뮤지션이 되었고, 그 평판을 기초로 해서 글로벌 음악시장으로 진출하는 과정을 밟아나갈 수 있었다.
또한 카세트의 대량 복제는 아주 단순한 일이었으므로 젊은 뮤지션들은 데모테이프를 수백 개 혹은 수천 개씩 복제하여 자신의 동네 팬클럽에게 팔았고 거기서 동력을 얻어 기성품 아닌 새로운 음악들을 통해 세상에 당당히 등장할 수 있었다. 팝 시장의 메탈리카, 니르바나, RATM은 물론 우리 가요계의 서태지, 신승훈, 김현철 등이 모두 ‘데모테이프'의 검색과 함께 등장하는 뮤지션들이다. 아니, 사실 뮤지션이라면 그 누구라도 데모테이프의 설레는 추억이 없을 수가 없다. 레코드와 플레이어 버튼을 동시에 누를 때의 그 설레임, 그리고 그렇게 녹음된 데모테이프를 가방에 정성껏 담아 어디론가 향하던 낯선 길 위에서의 설레임.
카세트레코더와 공테이프는 영미의 팝음악이 일방적으로 대중들의 음악적 취향을 잠식해 들어가던 시절 제 3세계의 음악의 막혔던 숨통을 트이게 한 멋진 공로도 갖고 있다. 레코드라는 막강한 음악 인터페이스가 맹위를 떨치던 시절, 레코드 제작의 높은 벽은 제 3세계의 뮤지션들이 쉽게 넘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레코드에 기록되는 음악은 영미를 위시한 서구 부자나라들의 음악이거나 아니면 자국 주류 사회의 주류 뮤지션으로 국한되었다.
그러나 카세트레코더의 등장을 통해서 소멸의 위기에 처했던 로컬의 다양한 음악들이 기록되고 복제되었으며 다수 대중들에게 전파될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이야말로 카세트레코더와 공테이프가 이 세상에 선사한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