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64) - 벨라스케스의 ‘펠리페 4세’
펠리페 4세의 의전관이고, 권력의 실세인 올리바레스 백작의 고향인 세비야 출신의 벨라스케스를 궁정화가로 앉히려고 힘을 썼다. 올리바데스는 24세의 벨라스케스를 마드리드로 불렀다. 왕을 알현시키고 왕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했다. 24세의 젊은이가 왕의 초상화를 그린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벨라스케스는 자기에게 떨어진 행운을 놓치지 않으려 최선을 다하여 그렸다. 젊은 왕을 그려낸 그림은 왕의 눈에 들었다. 그는 즉시 궁정작가로 채용되었다. 이때 그린 왕의 초상화는 불행하게도 1734년의 왕궁 화재 때 불타버렸다. 이후로 여러 차례 왕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작품도 여러 초상화 중의 한 점이다.
벨라스케스는 올리바데스가 주문하는데로 왕의 초상화를 만들어 냈다. 아렛 입술이 튀어 나오고, 약간 꺼진 눈은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도 위엄과 권위는 특정 왕이 아닌 일반적인 왕의 모습으로 그렸다.
젊은 벨라스케스의 뛰어난 재능 앞에 다른 궁정 화가들은 빛을 잃었다. 봉급도 더 많이 받았고, 대우도 더 높여 주었다. 다른 화가들의 미움을 받으면서 사이는 나빠졌다. 펠리페 4세는 왕궁 안에 벨라스케스의 작업실을 만들어주면서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도록 해주었다. 왕은 많은 그림을 그리도록 요구하지도 않았고, 그림에 이런저런 조건도 달지 않았다. 작업실에는 왕이 앉는 의자도 마련해두었다. 왕은 의자에 앉아서 벨라스케스의 작업을 지켜보기도 했다.
질투에 찬 다른 화가들이 벨라스케스는 머리 밖에 그릴 줄 모른다고 악담을 하고 다녔다. 왕을 통해서 이 말을 전해 들은 벨라스케스는 ‘폐하, 저에게는 영광입니다. 왜냐면 저는 머리를 그릴 줄 아는 사람도 알지 못합니다.’라는 일화도 전해온다.
화가들을 경쟁하도록 해서 우승자로 뽑았는데, 벨라스케스가 뽑혔다. 시상으로 추밀원 안내원이라는 궁중 직책을 주었다. 말단 관리직이지만 화가의 신분으로서는 대 영광이었다고 한다. 이로서 왕궁 사회에서 출세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1628년에는 외교간 자격으로 스페인을 방문한 루벤스도 만나서 왕궁과 미술관에서 안내를 했다. 이로서 벨라스케스는 루벤스를 롤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잠시 스페인의 왕조 역사를 보기로 하자. 카스타냐의 이사벨라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난드 왕이 결혼함으로 스페인 통일을 이루었다. 두 왕은 1492년에 스페인의 남부를 800년이나 지배하던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다. 이때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프랑스(샤를 8세)와 국경을 삼았다. 이사벨라 여왕이 먼저 죽자 페르난드 왕이 단독으로 다스렸다.
1506년에 페르난도 왕은 사위인 펠리페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펠리페는 일 년도 안되어서 죽자 페르난드의 딸이고, 펠리페의 부인인 후아나가 미쳐서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46년을 살았다.
비엔나의 합수부르크 막시밀리안 1세(1493-1519)은 복잡한 혼인 정책으로 손자인 신성로마제국의 카를로스 5세(스페인에서는 칼 1세 제위 1516-1556)가 스페인 왕까지 겸하게 되었다. 카롤로스 5세는 스페인어를 모르는 스페인 왕이었다. 카롤로스 5세는 카톨릭으로 국가를 통합하려는 정책을 폈으므로, 스페인은 카톨릭을 수호하는 입장이 되었다. 카를로스 5세가 죽자 그의 아들에게 스페인을 물려주어서 펠리페 2세가 되었다.
카를로스 5세는 얼굴에 합스부르크 가의 유전인자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턱이 앞으로 튀어나오는 용모이다. 병적으로 튀어나와서 음식을 씹을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젊었을 때부터 수엽을 길렀다. 이러한 얼굴 모습은 후손들에게 유전되었다.
15-6세기의 유럽은 영국, 프랑스, 스페인, 합수부르크 왕가가 결혼으로 아주 복잡하게 얽혀지면서 왕위 다툼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했다.
스페인이 남미의 식민지에서 막대한 은이 유입되면서 유럽 최강의 부유국이 되었다. 대서양 연안의 세비야(벨라스케스의 고향)가 중심 항구로서 번영을 누렸다.
펠리페 2세(재위 1556-1598) 치세에는 스페인은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누렸다. 한편으로 1588년에 무적함대가 영국 해군에게 격파 당하므로 스페인도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신교도의 도전도 만만하지 않았다. 특히 네델란드 지역의 반란이 심했다. 펠리페 2세 시대에 이미 은행이 파산할 정도로 위기에 봉착했다.
1598년에 펠리페 3세, 1621년에 펠리페 4세가 왕위에 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