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선효우비의 문화재 지정등급은 포천시 향토유적(제4호)에 그치지만, “답사여행의 길잡이”에도 소개되어 있을 정도로 나름 유명한 비석이고 나도 그래서 2008년 포천 첫 답사 때 들른 적이 있다. 하지만 사진을 제대로 찍어두지 못해 다시 가보기로 했는데 그때나 이번에나 찾기가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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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의 주소는 자작동 150-2로 나오지만 다음지도에서 확인해 보면 147-1에 가까울 듯하다. 이상하게도 네이버지도에는 이 일대가 모두 수풀인 것처럼 표시되어 있는데 사실은 주변 앞과 오른쪽(동쪽)은 논이고 뒤(북쪽)는 인삼밭이다. 서쪽으로 주택 등 건물이 있는 것은 지도들과 실제가 부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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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찾아갈 때는 자작1통 마을회관을 찾아 회관 마당이나 인근에 주차하고, 회관 오른쪽(동쪽)에 서 있는 [효현산업] 표지석을 따라 효현산업을 우회하면 북쪽으로 논보다 조금 높은 지대에 서 있는 비석을 발견할 수 있다. 마침 겨울이고 논에 잠긴 물이 차가운 날씨에 얼어 있어서 다행이었던 것은 그렇지 않을 때는 비석의 전신을 제대로 찍기조차 어려운 여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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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선(1492-?) 선생은 조선 성종 23년 이곳 자작촌에서 출생했으며 천성이 어질고 착해서 어버이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고, 돌아가신 뒤에도 묘 앞에서 초려를 세워 3년간 시묘했다. 또한 친5형제가 한집에 살면서 형제간의 우애 또한 뛰어나 1549(명종4)년에는 효우정려를 내린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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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우비는 1549(명종 4)년에 건립된 것으로 앞면의 비문은 이의현(李宜顯) 짓고 김상옥(金相玉)이 글씨를 썼으며, 뒷면은 양사언(楊士彦)이 글과 글씨를 함께 짓고 썼다. 특히 뒷면 양사언의 글씨는 狂草로 이름 나 이른 시기부터 집중적인 탁본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이번 재방문의 목적 중 하나가 이 글씨를 자세히 담아보자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리 자세하게 담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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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동 지석묘(포천시 향토유적 제2호. 자작동 251-4)는 43번 국도에서 마을 쪽으로 100여m 들어간 지점 민가 옆에 남아 있다. 내가 어룡동 석불좌상 이후 북에서 남으로 동선을 잡은 것은 이후 들르게 되는 문화재들이 모두 43번 국도의 서쪽에 있기 때문이다. 즉 큰길에서 좌회전이 아닌 우회전으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석묘는 평지에 조성된 탁자형의 북방식 지석묘로서 하부가 약간 매몰되고 단변지석 1석이 없어졌을 뿐 다른 부재는 모두 남아 있다. 각부의 실측치는 장변지석 높이 75cm, 넓이 230cm, 두께35cm, 개석규모 440x430cm, 두께 44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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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묘 인근에는 경기도 기념물 제220호 포천 자작리 유적지(자작동 251-2번지 일원)가 있다. 자작리유적은 1998년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의 포천군 광역지표조사에서 처음으로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성백제시대의 지방거점 마을유적으로, 2001년 발굴결과 주거지 5동과 소형유구 6기, 굴립주 건물지 1동, 구상유구 4기가 발견되었다. 현재는 설명판 하나만 달랑 서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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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의 아버지인 전계대원군묘(향토유적 제1호. 포천시 선단동 산11)를 향해 간다. ‘산’번지 입력 후 제대로 찾지 못할 수도 있어 사전에 조사해보니 묘역 앞에 사당이 있기에 사당 주소(선당동 781-3)를 입력하고 출발했다. 묘역은 앞쪽에 사당과 부속건물, 우측에 신도비각이 있고, 사당 뒤로 전계대원묘가 있다. 전계대원군묘는 완양부대부인 전주최씨와의 합장묘이며, 이 묘 오른쪽 조금 낮은 곳에는 철종의 생모인 용성부대부인의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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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3년(1779) 아버지 은언군이 홍국영과 함께 모역을 꾀했다는 벽파의 무고로 강화도로 유배되자 아버지와 함께 가서 빈농으로 일생을 보냈다. 전계군에 봉해졌다가 아들인 원범이 철종으로 즉위하자 대원군에 추봉되었다. 전계군은 1841년(헌종 7)에 58세로 별세하여 양주에 안장하였다가 후에 포천의 왕방산으로 이장하였다. 신도비는 전자로 '유명조선국전계대원군신도비명병서'로 되어 있고 '숭정기원후사신해팔월일'인 1851년(철종2)에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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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묘나 용성부대부인의 묘의 석물은 그리 볼만한 게 없어 보이지만 장명등의 문양은 독특해 보인다. 그런데 대원군 묘의 장명등은 근래에 다시 만든 것일 수도 있겠다. 용성부대부인묘의 문인석은 희화화되어 있고, 전계대원군묘의 문인석은 표정을 읽기 어려울 정도로 흑화현상이 진행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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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기념물 제35호 서성선생묘(徐省先生墓)는 포천시 설운동 산 1-14번지에 있다. 인근에 재실로 보이는 건물도 있었다. 묘소는 마을 낮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좌우와 뒤쪽으로 담장을 둘렀다. 전면 우측에는 무척 규모가 큰 신도비가 좁은 비각 안에 갇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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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약봉(藥峰) 서성(1588∼1631) 선생의 어머니는 장님이었는데 약현(藥峴)이란 곳에서 술과 약과를 팔아 아들을 공부시켰다고 전해지며, 서성의 호를 약봉이라고 한 것도 약현이라는 지명에서 따 온 것이라고 하며 오늘날의 약주, 약과라는 이름도 이 때 비롯된 것이라 한다. 이 ‘약현(藥峴)’이란 ‘약전현’이라고도 부르는데 오늘날 서울 중구 만리동과 충정로 사이의 고개를 말한다.(하지만, 이 이야기는 왜곡되어 전래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서성의 어머니가 장님이었던 것은 맞지만 그의 외할아버니는 장님인 딸과 결혼한 사위 서해에게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안동소호헌을 지어줄 정도로 재력가였다. 이런 배경으로 미뤄볼 때 서성의 어머니가 약과를 만들어 팔았다는 이야기는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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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는 봉분 아래에 둘레석을 높고 둥글게 둘렀고 봉분 앞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이 있다. 묘역의 담이나 보호석, 봉분 앞의 묘비는 1968년에 후손들이 신축·보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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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시 관내에는 胎室과 관련된 유적이 셋 있다. 그 가운데 송우리 태봉(소흘읍 송우리 산28-3. 향토유적 제18호)은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동선이 맞지 않아 찾지 못했다. 만세교리 태봉(향토유적 제23호)은 주소가 신북면 만세교리 산 8-1이라는 것과 산 47이라는 자료 둘이 보인다. 여러 방법으로 위치를 확인해보려 했으나 어려웠다. 사전에 포천시청에 전화를 걸었고, 담당자가 자세히 일러주었으나 정작 말해준 지형지물이 보이지 않았다. 대략 이 지점쯤일까 라고 생각한 곳은 43번 국도변에 있는 [목포가든] 앞에서 우회전하는 것이었는데 막상 가보니 아닌 것 같다. 다음에 다시 전화해서 알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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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셋 중 마지막인 ‘태봉 석조물’(포천시 영중면 성동리 640-1)만 볼 수 있었다. 이 석조물들은 포천시 향토유적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조선 제23대 순조의 세자였던 익종 이호(1809-1830)가 출생 했을 때 그의 태재를 안치했던 소위 익종 태실의 유물 일부가 주축을 이루고, 또 금주리 태실에서 옮겨온 비대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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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곳에는 왕자의 태실비 비신을 꽂았던 비좌로 보이는 새끼거북 모형의 귀부 1점 등 10여 점의 석물이 놓여 있다. 그런데 그 지점이 묘하다. 43번 국도변 낮은 언덕 위에 있는 것이다. 사정이 없지 않겠으나 씁쓸한 느낌을 떨치기는 어렵다. 익종(추존)은 세자로서 대리청정 시 조선의 개혁을 이끌 수 있는 역량을 보여주다 아쉽게 왕에 오르기도 전에 죽은 인물이어서 더욱 씁쓸하고, 쓸쓸한 상념이 일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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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지난 포천 답사 때 아쉽게도 찾지 못했던 영중면 성동리 부처골석조여래좌상 찾기에 재도전하려 했었다. 그런데 조금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발이 제법 굵어질 기미가 보인다. ‘더 이상의 답사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집으로 차를 돌렸다. 하지만 너무 늦어버렸다. 이후 귀가 때까지 고생한 것은 필설로 이루 형용할 수 없다.
[인용 설명문 출처: 포천시청,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