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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찾는 이의 발길이 줄어든 망월동 옛묘역. 희생자들의 주검은 새묘역으로
옮겨져 현재는 가묘만이 당시의 아픔을 증언하고 있다.)
봄볕이 따갑게 내리는 5월6일 낮 광주시 북구 운정동 산34번지 ‘5·18묘지’(신묘역). 전라남도 여수시 삼일중학교 2학년 학생 1백50여명이 5·18민중항쟁추모탑 앞에 어색하게 머리를 숙였다. 이들은 주로 84, 85년생들로 5·18 때는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이다. 학생들이 머리를 들자 지긋한 교장선생님이 일장훈시를 했다. “에, 민주주의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흘려 싸워 얻어내는 것입니다. 이곳에 안장되신 분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독재권력과 싸우다 산화하신 분들입니다. 앞으로는 여러분들이 민주주의 수호·발전의 주역이 돼야 합니다.…”
그들이 사죄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교장선생님의 훈시가 끝나자 아이들은 재잘대며 긴 줄을 이뤄 5·18희생자들의 무덤가를 돌아본다. “얘들아, 5·18이 뭔지 아니?” “자유와 민주주의를 찾기 위해 싸웠어요” “백성이 주인되는 세상을 만들려고 했어요” “정의를 위해 피를 흘렸어요” 뜻밖의 대답에 놀라며 어디서 그런 얘길 들었냐고 되물었다. “학교에서 배우고 텔레비전에서도 봤어요.” 이름과 나이를 적고 돌아서자 아이들이 한마디 덧붙인다. “제 이름 꼭 넣어주세요.”
(사진/보상을 위한 신체검사를 받고 있는 당시 피해자들. 광주는 책임자들의
단죄를 기다리고 있다.)
다른 한켠에서는 5·18자원봉사자들이 마지막 강좌인 5·18묘지 순례를 하고 있었다. 각 구청을 통해 모인 80명 중 60여명이 5·18을 맞아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설명할 내용을 보고듣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항쟁 당시에 숨진 사람들의 묘구요, 그 다음부터는 부상을 입었다가 뒤에 숨진 사람들의 묘예요.” 5·18기념재단에서 나온 강사의 설명에 따라 22살에서 62살에 이르는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북구청에 자원봉사를 신청한 문란순씨는 친지의 아들이 묻힌 묘를 보며 “나야 피해를 면했지만 당한 사람은 얼마나 억울하고 끔직하겠냐”며 “실제로 와서 무덤들을 보니 당시의 고통이 실감난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 해 이들의 죽음이 더 서럽게 느껴진다”며 “단 한사람이라도 ‘내가 바로 그 학살의 책임자’라고 사죄하는 모습을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5·18묘지에서 서북쪽으로 7백∼8백m 정도 가면 시립 공원묘지가 나온다. 이른바 ‘망월동묘지’(구묘역)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엄연히 신묘역과 같은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이지만 누구나 예전처럼 이곳을 망월동묘지라고 부른다. 공원묘지 입구로 들어가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바로 ‘망월동묘지’의 제3묘원이 나온다. 지난 20여년 가까운 세월 민주주의와 자유·평등을 꿈꾸던 사람들의 피를 끓게 만들었던 바로 그곳이다.
김대중 집권이 5·18 해결의 걸림돌?
구묘역은 신묘역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초라하다. 있는 것이라고는 입구에 깔아 누구나 밟을 수 있게 해놓은 “전두환 대통령” 어쩌구 하는 기념석, 덩그런 “5·18묘지”라는 표석과 제단, 언덕 정상에 휘날리는 태극기가 전부다. 그러나 몇평 되지도 않은 좁은 이 묘역에는 역사와 사람들의 기억이 깊이 배어 있다. 그게 바로 신묘역과 다른 점이다.
항쟁 관련자들의 무덤 앞에는 그들이 언제 태어나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씌어 있다. 빛바랜 흑백 영정이나 꽃이 앞에 놓인 무덤도 많고 가족이나 친구, 선후배들의 편지가 붙어 있기도 하다. 어떤 무덤 앞에는 조그마한 투명 플라스틱통 속에 소지품들이 담겨 있다. 소박한 공간이지만 생전에 가까웠던 이들이나 추모하는 이들의 마음이 듬뿍 담겨 있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항쟁 관련자들의 무덤은 모두 가묘다. 그들의 주검은 지난해 5월 모두 신묘역으로 옮겨졌다. 실제 주검이 안치된 묘는 5·18과 직접 관련없는 이한열, 이철규, 김남주, 강경대 등 민주열사들의 무덤 30여기뿐이다. 5·18묘지 관리사무소의 직원은 “5·18민중항쟁 관련자들의 주검은 모두 신묘역으로 옮겼으나, 구묘역이 갖는 상징성을 고려해 가묘로 보존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곳에 묻힌 민주열사들의 주검을 신묘역으로 옮기는 문제는 아직 논란 속에 있다. 이들의 ‘국가유공’ 정도에 대한 정부의 입장이 서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곳 구묘역을 찾는 사람들은 적다. 이미 한두차례 이곳을 찾았던 이들이 대다수다. 처음 찾는 이들 중에는 항쟁 관련자들의 주검이 신묘역으로 옮겨진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지난해 시위 도중 숨진 류재을씨의 무덤 앞에서 만난 박종효(조선대 유전공학4)씨는 “구묘역부터 찾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5·18민중항쟁도, 그뒤의 기나긴 민주화운동도 알맹이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았다”고 한탄했다. 정권이 교체됐지만 전·노씨가 사면되고 아직도 많은 양심수들이 감옥 안에 있다는 사실이 단적으로 그것을 드러낸다는 것이었다. 또 5·18이 제자리를 찾기 위해서도 광주가 김대중 정부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럴 가능성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바로 이점이 광주 시민들을 착잡하게 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김대중 정부의 집권은 5·18의 근본적 해결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7일 오전 서구 농성동 건강관리협회에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관련자로 보상을 위해 검진받고 있던 오대영씨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김대중 정부가 5·18문제를 건드리는 것은 좋지 않다. 건드리더라도 정치보다는 역사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이를 정치로 풀려 한다면 또다시 지역문제를 일으키고 말 것이다. 5·18은 김대중 정부 이후 다른 정부의 몫이 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한총련 대의원대회를 막아라
5·18기념재단에서 이번 18주년 행사를 준비하는 것을 봐도 그런 경향은 두드러진다. 46개에 이르는 각종 관련 행사 중 정치성을 띤 시위·집회는 거의 없다. 굳이 꼽자면 17일 광주역에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이 주최하는 ‘5·18정신계승국민대회’ 정도가 있을 뿐이다. 나머지 행사들은 거의 문화·학술 행사들이다.
이들의 심정을 잘 보여주는 것은 바로 한총련 집회 논란이다. 새 한총련 지도부는 원래 서울이나 대구쪽에서 대의원 대회를 열기로 했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5·18을 전후로 광주의 전남대나 조선대 중 한 곳에서 이 행사를 열기로 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광주와 기념재단은 발칵 뒤집혔다. 만약 한총련 집회가 광주에서 열린다면 이번 5·18에 찬물을 끼얹으리라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기념재단은 이 집회를 막기 위해 온 신경을 쓰고 있다.
기념재단쪽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기본적인 생각은 김 대통령에게 부담을 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이 이번 기념식 때 광주를 찾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오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또 광주와 5·18에 관련된 많은 문제가 아직 남아 있음에도 집권 동안은 직접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김 대통령과 광주·호남을 위해 바람직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 뒤 광주는 달라졌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대부분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어떻게 달라진 것일까? 한 광주지역 신문기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구체적으로 변한 것은 거의 없으나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쌓였지만 김대중씨의 집권은 심리적으로 그런 것들을 상쇄하고 있다. 광주 사람들은 김 대통령이 광주·호남 대통령이 아닌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기를 진심으로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정치를 잘해야 하고 경제를 살려야 한다. 광주 사람들이 5·18 등의 문제에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것은 김 대통령의 취약한 권력기반을 흔들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광주 시민들의 김 대통령에 대한 높은 기대는 전·노 사면까지도 동의하도록 만들었다. 대통령선거 전 전·노 사면 이야기가 정치권에서 나왔을 때 광주의 5·18관련 단체들은 이를 “반민주적 행태이자 역사적 후퇴”라며 비판했다. 그러나 지난해 12월20일 청와대 회동을 통해 김 대통령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전·노 사면 제의에 동의하자 분위기는 일변했다. 아니, 김 대통령이 전·노 사면 얘기를 동의하기 직전 5·18관련 단체들은 일제히 전·노 사면에 조건없이 동의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김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광주는 김대중으로부터 자유로와야 한다’
이런 광주 시민들의 태도에 대한 의견은 크게 두가지로 갈린다. 소설가이며 5·18연구소장인 전남대 국문학과 송기숙 교수는 전·노 사면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나 5·18의 진실은 상당 부분 밝혀졌다고 말한다. “5·18문제 해결에 관한 한 큰 줄기는 이미 김영삼 정부 시절에 거의 이뤄졌다. 미흡한 점도 있지만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 출신 대통령을 재판정에 세우고 시민군들의 묘지를 새로 꾸미고 5·18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한 일 등은 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제 4·3항쟁이나 대구 10월항쟁 등 현대사의 다른 지점들을 복원하는 게 필요하다. 그것은 5·18의 의미를 광주에 고립시키지 않고 현대사로 끌어올리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매우 비관적이다. 5·18 최후의 수배자로 알려진 민족미래연구소의 윤한봉 소장은 “5·18문제 미봉으로 인해 다시 한번 현대사는 심하게 굴절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정부가 바뀌고 5·18이 국가기념일이 됐지만 5·18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전·노 사면은 해방 후 친일부역자들에 대한 처벌을 하지 못한 것만큼이나 우리의 역사를 그르칠 것이다. 광주가 김대중씨를 위해 전·노 사면에 동의함으로써 광주와 5·18은 다시 한번 김대중씨의 사유물이라는 혐의를 뒤집어쓰게 됐다. 천박한 정치논리에 역사를 팔아넘기고 말았다.”
윤씨는 전·노 사면의 명분인 용서와 화합에 대해서도 일갈했다. “용서니 화합이니 하지만 광주가 진정으로 전·노 일당을 용서했는지 의심스럽다. 가해자들이 전혀 반성하고 사죄하지 않는데 용서가 가능한 일인가. 용서한 뒤에는 더이상 아무런 문제제기를 할 수 없다. 5·18은 이제 끝난 것이다. 화합이라는 것도 서로가 잘잘못을 가리고 이해한 뒤에나 가능한 얘기다. 광주에서 아무리 화합을 외친다 해서 동서화합이 되는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고립에서 벗어나고 싶다
98년 5월 광주는 매우 조용하다. 무엇인가 답답함이 가득하다. 그러나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도청 앞 민주광장과 금남로 주변에 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금남로에서 만난 동신여중 교사 안홍섭씨는 차분해진 5월을 이렇게 설명했다. “5월이 조용해진 것은 무엇보다 김대중 정부의 집권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피해자쪽에서 보면 만족스럽지 않은 것들이 아직도 많다. 그러나 이제 남은 문제들은 사회가 전반적으로 민주화하면서 천천히 풀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제 광주 시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고립이다. 광주인들에게 동서화합은 무엇보다 절실한 것이고 지금이 최선의 기회라고 본다. 단지 김대중 정부를 받쳐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립에서 벗어나고 싶은 갈망으로 침묵한다고 말할 수 있다. 광주 시민들에게는 5·18의 근본적 해결보다 국가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것이 더 중요한 때가 된 것 같다.”
광주=사진 박승화 기자 글 김규원 기자
첫댓글 1998년 5월 한겨레21 기사입니다..김대중 대통령님이 임기를 시작하던 해인 9년 전 기사인데 "...광주 시민들에게는 5·18의 근본적 해결보다 국가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것이 더 중요한 때가 된 것 같다.”라는 마무리 부분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