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와 민족 앞에 부끄럼없이…….
증 언 자 : 위성삼(남)
생년월일 : 1954. 8. 23 (당시 나이 26세)
직 업 : 대학생(현재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조사일시 : 1988. 12
개 요
당시 조선대학교 4학년이었던 위성삼씨는 5월 16일 도청 앞 집회를 시발로 5·18 전기간 동안 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 도청에서 경비 총책임자로 활동했다. 계엄군에게 도청을 빼앗긴 27일 상무대로 끌려갔다.
골목 대장
강진군 군동면 쌍덕리는 위씨들이 모여사는 자가일촌이다. 나는 그곳에서 1954년에 5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님은 농사를 지으면서 읍내에서 미싱이나 시계를 파는 가게를 하셨다. 그 시절만 해도 미싱은 여자들 혼수품으로 귀중한 물건이어서 집은 그런대로 부유한 편이었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부모님들 모임이나 계에는 항상 따라다녔고 학춤을 곧잘 추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든든한 뒷배경 때문이었는지 골목대장은 언제나 내 차지였다. 그 시절에 우리들의 놀이란 감으로 물레방아를 만들어 논두렁에서 놀거나 고무신으로 고기를 잡거나 썰매를 타는 것이 고작이었다. 또한 돼지에게 먹일 깔(꼴)을 베러 다니던 일이 내 어린 시절을 매우 정서적이고 낭만적으로 만들어주었다.
국민학교 2학년 때 아버지 미싱가게 때문에 영암으로 이사를 했는데 쉽게 적응했다. 9살짜리 나에게는 영암이나 강진이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나는 원래 선천적으로 낙천적이면서도 의지가 강하여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고 친구들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남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못하고 내가 손해보고 마는 성격이다. 영암 남주중학교를 다닐 때는 학교가 남녀공학이었는데 여자 친구들도 꽤 많았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광주로 올라왔다. 그 당시 시골에서 광주로 고등학교를 오는 것은 무척 드문 일이어서 나는 친구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공부를 별로 잘하지 못했던 나는 조선대부속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공부보다는 스포츠에 취미가 있었다.
대학은 사회계열로 진학을 하고 싶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공대 전자공학과에 진학했다. 과가 적성에 맞지 않아 학교생활에 충실히 할 수가 없었다. 더 이상 공부도 하기 싫어 군에 입대했다. 군대에서도 나는 부대장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모범적으로 생활을 했다.
1978년 9월 2학년 2학기에 복학을 한 후 복학생답게 학교생활을 충실히 했다. 1979년 3학년 때 10.26사건이 터졌는데, 평소에 군인이나 경찰 계통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그때부터 신문 스크랩을 하기 시작했다.
1980년 봄부터 학내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연일 시위가 계속되었다. 고향 후배가 운동권 학생이어서 전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기도 했지만, 나는 사업해서 돈이나 벌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위하는 것을 보면서도 참여는 안 했지만 이왕에 할거라면 크게 한번 싸워야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1980년 들어 들뜨기 시작한 분위기는 운동권 활동도, 조직활동도 안해 본 나를 자연스럽게 시위에 참여하게 했다.'
계엄군의 만행은 시작되고
16일 오후 2시경 학내(조선대)에서 집회를 한 후 가두로 나갔다. 경찰의 제지는 받지 않았다. 나는 선두에 서서 도청을 향해 나아갔다. 도청 앞은 많은 사람들과 시민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전남대학교 학생회 간부인 문석환씨가 도청 앞 집회의 사회를 봤고 총학생회장인 박관현씨가 시국선언문을 낭독했다. 무척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사람들이 박관현 씨를 두고 "저런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시민, 학생들은 질서정연하게 학생회 지도부의 통제를 따라주었다. 경찰은 시민들을 보호하듯이 움직였다. 시민들은 경찰들에게 수고한 다고 박수를 치고 즉석에서 모금을 해 위로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그때 외친 구호는 주로 '계엄철폐', '정치일정 단축', '신현확은 물러나라', '전두환은 물러나라', '군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라' 등이었다. 그 중에서 '계엄해제'라는 구호가 대중적 공감을 가장 많이 받았다.
지도부에서는 횃불행진을 할 때 일반시민들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게 도로를 2차선만 사용하자고 했다. 또한 17일까지 우리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월요일부터 다시 투쟁하자고 했다. 행진대열에서는 교복을 입은 여고생들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시위대열은 질서정연했으며 길거리에 떨어진 휴지를 주워 도로를 깨끗이 청소하기도 했다.
횃불행진은 전남대생과 조선대생들을 중심으로 두 곳으로 나눠졌다. 조선대생은 금남로를 거쳐 유동 삼거리-양동 복개상가-현대극장-금남로를 거쳐 도청 앞으로 다시 돌아왔다.
도청 앞에 재집결한 사람들은 유신체제와 5.16을 응징하는 의미의 화형식을 가졌다. 이때 연단에 어떤 기자와 교수가 올라와서 내용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뭐라고 하자 시민들이 야유를 하면서 죽인다고 아우성을 쳤다. 분위기가 험악해지면서 뭔가가 날아오기도 했다. 그러자 연단 주위에 서 있던 학생들이 그 기자와 교수님을 집회가 끝날 때까지 보호해 주었다. 노래는 주로 선구자, 아리랑, 정의가, 투사의 노래 등을 불렀다. 만약에 휴교령이 내리면 각 소속대학 앞으로 모일 것을 약속하고 집회를 마쳤다. 17일은 시위도 없었고 별다른 일이 없어서 집에서 쉬었다.
18일 아침에 휴교령이 내렸다는 뉴스를 듣고 10시경에 학교로 갔다. 학교에는 이미 계엄군들이 진주하여 '경계총' 자세로 지키고 있었다. 학교 앞에 백여 명의 학생들이 서 있었다. 나는 학교에는 도저히 들어갈 수 없다고 판단하고 지산동 법원 옆에 사는 친구집으로 갔다. 친구집에서 오후까지 있다가 구시청에서 충장로 5가 사이를 돌아다니며 술을 한잔 마시고, 방림동에서 하숙하고 있는 친구집에 가서 잤다.
분노의 폭발
당시 우리 집은 양동에서 숙박업을 하고 있었다. 19일 아침에 친구집에서 나와 집에 가려고 5번 버스를 탔는데 어느만큼 가니 금남로 쪽에서 시위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노동청 앞에서 버스를 내려 MBC 쪽으로 갔다. 청산학원 골목에서 시위대와 만났다. 그 시위대에 합류하여 '계엄군은 물러가라' 등을 외치자 총을 뒤에 메고 손에 곤봉을 든 공수부대들이 쫓아왔다. 붙잡힌 사람들을 공수부대 서너 명이 달려들어 곤봉으로 닥치는 대로 치고 발로 걷어차고, 그것도 부족해 쓰러진 사람들을 군화발로 짓밟기 시작했다. '저럴 수가 있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분노가 치밀어올랐지만 당장은 도망치기에 바빴다.
전남여고 담을 뛰어넘어 동문다리 쪽으로 도망을 가다가 어느 이발소에 들어가 숨었다. 그러다가 집집마다 뒤져서 젊은이들을 잡아간다는 소리를 듣고 계림극장으로 들어갔다. 그 경황중에도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영화관을 나와 집으로 갈까 하다가 겁이 나서 가지 못했다. 계림동 동원예식장 부근에 사는 사촌누나 집으로 가려다 보니 공수부대가 도로에 10미터 간격으로 서서 지키고 있었다. 누나 집에 가는 걸 포기하고 되돌아서 전신전화국 쪽으로 가는데 가톨릭센터 쪽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시위의 규모가 상당히 큰 것 같았다. 전신전화국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때 전신전화국 앞으로 교통순찰차가 지나갔다. 주위에 모였던 사람들이 순찰차를 잡아 차를 불태워버렸다.
시위군중은 MBC방송국을 향하여 진출했다. 그때까지도 언론이 제구실을 못하자 시민들의 분노는 대단했다. MBC방송국 앞에서는 육군 4명이 하사 지휘하에 '경계총' 자세로 지키고 있다가 시위대가 접근하자 셔터문을 내리고 사격자세를 취했다. 이에 시민들이 주춤하고 뒤로 물러섰다. 내가 외쳤다.
"저것은 공포탄이다. 아무 상관 없으니 밀고 나가자!"
시민들이 한꺼번에 돌을 던지면서 밀고나갔으나 군인들은 돌을 수없이 맞으면서도 발포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물러서지도 않았다. 성난 시민들은 군인들을 잡아 구타를 하고 철모와 총을 빼앗았다. 나머지는 도망을 가고 한 군인이 잡혔는데, 일부 시민들이 죽여버리자고 하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수부대가 죄지, 이 군인이야 무슨 죄가 있느냐?"
며 총도 돌려주고 풀어주었다. 군인들이 가고 나서 MBC방송국 차고의 셔터를 올리자 검은 자가용 3대와 이동취재차량 한 대가 있었다. 사람들은 언론이 제구실도 못 하면서 자가용이나 타고 다닌다고 차를 끄집어내 불을 붙였으나 잘 타지 않았다. 내가 갖고 있던 쇠파이프로 연료통 마개를 서너 번 내리치자 불이 활활 타기 시작했다. 자가용이 불타는 것을 보고 이동취재 차량도 불태우려고 했으나 옆 건물의 전자제품 대리점에 피해를 줄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그때 계엄군들이 밀고들어왔다. 시위대는 동원예식장 앞으로 후퇴했다. 그곳에는 장갑차 한 대가 시민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장갑차 앞부분 양옆에 달린 감시경이 파손되어 있었다. 한 시민이 어디서 구했는지 볏짚단을 가져와 불을 붙여 바퀴부분에 던졌으나 불이 붙지 않았다. 나는 군대를 갔다 왔기 때문에 장갑차의 어느 부분이 약한지를 알고 있었다. 내가 볏짚단을 장갑차 뚜껑에 올려놓자 느닷없이 뚜껑이 열리면서 M16 총구가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총구가 불을 뿜었다. 빈 차인 줄 알았다가 갑자기 총소리가 나자 사람들이 당황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위협사격이라고 생각하고 시민들에게 "공포탄이니 도망가지 말자"고 외쳤다. 그런데 어떤 고등학생이 총에 맞아 피를 흘리고 있었다. 학생의 명찰을 보고 조선대부고 야간생이라는 것을 알았다. 눈깜짝 할 사이 장갑차는 총을 겨눈 채 도망가버렸다. 나는 몇 명의 시민들과 함께 그학생을 계림파출소 부근까지 옮겨 놓고 다른 사람들에게 뒷일을 부탁한 다음 시위대에 합류했다.
그 학생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에도 죽은 걸로 되어 있다. 그러나 최근 확인한 바에 의하면 살아있다고 한다.
그날밤을 사촌누나 집에서 자고 20일 구역으로 나가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쪽에서 시민들이 차에 플래카드를 걸고 구호를 외치면서 몽둥이로 차를 두드리며 달려왔다. 서울에서 학생들이 많이 내려왔고 또 내려오고 있다는 말이 퍼지자 시민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나는 사람들과 함께 광주소방서 앞에 있는 주유소에서 화염병을 만들었다. 시민들이 서로 만들려고 하다가 내 옷에 기름을 쏟아버리기도 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때 MBC방송국 쪽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화염병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시위군중을 따라 MBC방송국 앞으로 갔다. 방송국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방송국 옆에는 금성전자대리점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대리점에서 물건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아마도 방송국에 불이 나 무고한 시민들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방송국 옆에 있던 병원의 환자들도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나주로 나주로……. 무기탈취
21일은 시민군들이 타고 다니는 광주고속버스를 타고 양동시장, 산수 오거리 등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양동시장에서는 아주머니들이 김밥이나 음료수, 빵 등을 올려주었다. 그 양이 얼마 많았던지 우리가 다시 길거리에 나와 있는 시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버스의 유리창을 다 깨고 몽둥이로 차체를 두드리면서 '계엄해제', '김대중 석방', '연행학생 석방' 등의 구호를 외쳤다.
한참을 돌아다니다 백운동 부근에서 차가 고장났다. 백운동에 있는 대창버스회사로 가서 차를 바꿔타고 다시 전남방직 앞으로 갔다.
전남방직 앞에서는 아가씨들이 음료수와 약품 등을 제공하고 있었다. 버스에 공장 아가씨 30명 정도를 태우고 시내를 돌며 계속 구호를 외치고 다녔다. 보다 효율적이기 위해서는 차에 마이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이크를 구하려고 시내 중심가 쪽으로 갔다가 차에 타고 있던 사람의 부주의로 머리를 조금 다쳤다. 그사람을 기독교병원에 데려다주었다. 기독교병원에서는 우리를 친절하게 대해 주었으며 구급약품을 올려주었다. 마이크는 구하지 못하고 구호를 외치면서 양동, 백운동, 광주공원 등을 돌아다녔다.
2시 30분쯤 우리가 탄 차는 홍보를 하기 위해 나주로 가기로 했다. 버스가 남평 조금 못 갔을 때 뒤에서 차 경적소리가 들리면서 시위대들이 탄 군인 지프차가 와서 차를 세우라고 했다. 영문도 모른 채 차를 세웠다. 지프차에는 카빈 총을 든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이 공수부대가 1시경에 도청 앞에서 발포를 해서 시민들이 많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들은 우리도 그놈들을 다 죽여야 한다고 흥분해서 말했다. 나도 끓어오르는 분노와 함께 우리에게도 무기가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버스는 곧바로 나주경찰서로 향했다. 경찰서는 텅비어 있었다. 무기고 자물쇠가 잠겨져 있어서 망치로 자물쇠를 내리쳤으나 부서지지 않았다.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레커(차가 사고났을 때 끄집어가는 군대용 차량)로 담을 밀어 무너뜨렸다. 무기고에는 공기총 등이 비닐봉지에 담겨있었다. 총을 끄집어 내고 그 옆담을 밀자 권총과 카빈총이 있었다. 그 총을 시민들에게 나누어줬다. 그때 어떤 사람이 공포탄을 쏘아보자 사람들이 몹시 불안해 하기도 했다. 나주경찰서 무기고에는 총 밖에 없어서 총알을 구하기 위해 나주 금성동 파출소로 갔다. 거기에 탄알과 수류탄이 있었다. 우리는 갖고 있는 총에 따라 총알과 수류탄을 배분했다. 그러고는 각자의 차에 올라탔는데 같이 왔던 방직공장 아가씨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다른 차로 옮긴 것 같았다.
총을 가지고 차에 타니까 오히려 불안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총을 다룰 줄 모르는 것 같았다. 총은 조금만 실수하면 순식간에 사고가 나는 것이기 때문에 여간 조심해야 되는 게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들떠 안전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않는 것 같았다. 우리 차는 총기를 소지한 30명을 싣고 광주로 출발했다. 차 속에서 총기 안전수칙에 대해서 교육을 했는데, 사람들은 말을 안 듣고 총에 탄창을 끼우려고 했다.
나는 시민들이 총을 보면 불안해 할 수도 있으니 총은 차 바닥에 내려놓자고 했으나 아무도 말을 듣지않았다. 사람들은 총을 들고 차 밖을 겨냥해 보기도 했다. 앞좌석에 앉아 있던 나는 뒤에서 누가 조금만 실수를 해도 크게 다칠 것 같은 생각에 깊숙히 앉아서 왔다.
차는 광주공원으로 갔다. 공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총기를 가지고 집결하고 있었다. 총기를 소지한 사람 중에는 중학생, 고등학생들도 있었다. 공원에서는 모인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편제하였다. 한 조당 20명씩 나누고 조장을 뽑았다. 나는 군대에 갔다왔다고 조장으로 뽑혔다. 사람들이 도청 앞에 지뢰가 설치돼 있다면서 학동 쪽으로 가라고 했다. 도보로 하천을 따라 학동으로 갔다. 학동시장 입구에는 사진관 건물이 있었는데, 우리 조원들에게 계엄군이 발포하기 전에는 절대 발포하지 말 것과 잠을 자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는 70명씩 두 조로 나눠서 사진관 건물과 옆 건물로 들어갔다.
오후 7시경에 도청 쪽에서 장갑차가 케리바 50을 쏘면서 다가왔다. 나는 사격 명령을 내리고 총을 쏘기 시작했다. 장갑차가 후퇴했다가 다시 전진해 우리의 사격을 받으면서 화순 쪽으로 달아나버렸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잠이 쏟아졌다. 잠을 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다.
계엄군을 몰아내고
22일 아침에 보니 도로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도청을 시민군이 장악했다고 모두들 기뻐하고 있었다. 한 시민이 고생했다며 자기 집으로 밥을 먹으러 오라고 했다. 그 동네에서는 꽤나 잘사는 집으로 행여나 우리가 해꼬지할까봐 미리 손을 쓰는 것 같았다. 우리 조원들을 확인해 봤더니 언제 빠져 나갔는지 20명 중 3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걸어서 전남대병원으로 갔다. 영안실에서 죽은 사람들을 보자 이 원수를 기필코 갚아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차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녔다. 곳곳에 시민군들이 지키고 있었다. 차가 학동시장에 이르렀을 때 40대의 한 시민이 머리에 빨간띠를 묶고 수류탄을 들고 서 있었다. 나는 그 아저씨를 차에 태웠다. 그 아저씨는 지난밤에 방림동 다리에서 경계근무를 서다가 계엄군과 교전했다면서 죽을 각오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산수동 오거리로 차를 타고 가는데 친구 송인기(현 나주종합고 교사)가 지나갔다. 차에서 내려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19일에 상무대로 끌려가 며칠 살다가 21일에 풀려났다고 했다. 친구와 헤어지고 다시 시민군 차를 탔다. 교도소로 간다고 했다. 그때 생각으로는 도둑놈이나 깡패 등 나쁜 짓거리만 하는 사람만 교도소에 있는 것이라고 알고 있어서 가고 싶지가 않았으나 차를 세울 수가 없어 함께 갔다. 그런데 우습게도 두암동 말바우시장 앞 사거리에서 시민군들이 교도소 쪽을 향해 사격을 하는 것이었다. 교도소는 멀리 떨어져 있어 그곳에서는 총을 쏴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데 말이다. 말바우시장 쪽에서 차를 바꿔탔다. 그 차에는 LMG가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광주역에서 또 차를 바꿔타고 광주공원으로 갔다.
공원에서 총과 실탄을 반납하고 집으로 갔다. 집에서는 내가 들어오지 않아 난리가 나 있었다. 아버님이 노발대발하시면서 야단을 치자 속이 상해서, "4.19 때 잘했으면 우리가 이러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대들었다. 그러고는 옷을 갈아입고 이발을 한 다음 사촌누나 집으로 가 있었다. 23일과 24일은 사촌누나 집에서 밖에 나오지 않고 쉬었다.
도청내 총경비 책임을 맡고
25일 도청 분수대 앞에서 집회가 있었다. 주로 '왜 우리는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해서 토론을 했다. 집회중에 윤강옥(현 5·18 광주민중항쟁동지회 회장) 동지가 시민으로서 발언을 했다. 집회가 끝난 뒤 대학생들은 YWCA로 모이라는 방송을 했다. 내가 YWCA로 가자 머리가 긴 여자(이름 모름)와, 이연이라는 학생이 학생증 제시를 요구했다. 나는 학생증을 보여주었다. 30여 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곱슬머리의 한 청년이 도청으로 들어가자고 제의했다. 대표 다섯 명을 뽑았는데, 나는 대표로 선출돼 도청으로 들어갔다. 도청 2층에서는 수습대책회의를 하고 있었다. 회의 중에 상황실과 조사부 통제가 어렵다고 하여 내가 도청내 총경비책임을 맡기로 했다. 나는 무기를 통제해야 하고 시민군들은 복장을 깨끗이 하여 시민들이 불안해 하지 않도록 해야한다고 말했다.
26일 오전에 도청 앞에서는 시민궐기대회가 있었다. 도청내에는 시민조사반이 있었다. 그곳은 범죄행위를 하거나 시민에게 불안감을 준 사람을 잡아다가 조사를 하는 곳으로 나는 그곳에서 일했다. 풍향동에서 부부싸움 도중 칼을 휘두르다 잡혀온 사람, 양동에서 소매치기를 하다 잡혀온 사람, 자전거를 도둑질하다 잡힌 사람들 등이 있었다.
계엄분소와의 협상이 결렬되면서 오후에 계엄군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고, 도청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도청 안에서도 무기를 반납하자는 측과 절대로 무기를 반납해서는 안 된다는 쪽으로 나뉘어져 대립했다. 한쪽에서는 총기를 반납하자는 방송과 함께 총기를 회수하기 시작했다. 나는 2층으로 올라가 상황실장에게 절대로 무기가 회수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어떻게 해서 장악한 도청이고, 계엄군의 만행에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는데, 우리들의 요구조건이 관철되지 않은 상황에서 총기를 반납해서는 안 됩니다. 전장에서 군인이 총이 없으면 도대체 뭘로 싸우자는 겁니까?"
나는 앞으로 총을 반납하자고 하는 사람은 모두 쏴죽이겠다고 총을 반납하고 싶은 사람은 모두 나가라고 했다.
수습대책 회의실 옆에서는 YWCA에서 80여 명의 학생들이 들어와 지금까지의 상 황에 대해 경과보고를 하고 있었다. 경과보고가 끝난 뒤 조를 편성하여 고 윤상원 동지와 총 쏘는 법을 교육시켰다.
최후의 날은 오고
27일 새벽녘에 얼핏 잠이 들었는데 비상이 걸렸다.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것이었다. 무기고에서 탄약을 배급하고 시민군을 배치시키면서 계엄군이 쏘기 전에는 절대 먼저 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런 뒤에 정문 쪽으로 점검을 하러 갔는데 갑자기 2층에서 총소리가 났다. 나는 우리 편이 잘못 보고 쏘는 줄 알고 쏘지 말라고 소리치면서 상황실로 들어갔다. 상황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그 때 한 시민군이 얼굴에 총을 맞고 피를 흘리면서 들어왔다. 방송하는 여자들과 함께 그 사람을 치료하고 있는데 밖에서 총소리가 났다. 소등을 하고 있자니 잠시 후에 계엄군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 총을 난사했다. 파편이 내 팔에 박혔다. 일촉 즉발의 순간이었다. 숨도 못 쉬고 엎드려 있는데 계엄군은 캄캄해서 우리를 발견하지 못 했는지 그냥 지나갔다. 우리는 옆 사무실로 옮겨 사무실 집기로 방패막을 설치하고 숨어 있었다. 계속해서 총소리가 들렸다. 내가 총을 쏘려고 하자 같이 숨어있던 동신여고생이 외쳤다.
"오빠, 오빠, 쏘지 마!"
그러고는 내 바지 호주머니에 있는 실탄을 가져가버렸다. '나도 이렇게 두려운 데 애들은 얼마나 무서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날만 새면 우리는 산다. 광주시민이 다 일어날 것이다."
라고 안심을 시켰다. 그때는 다 죽고 우리만 살아 있는 줄 알았다. 조금 수그러든 총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날이 새자, "투항하라! 투항하라!"는 소리가 반복해서 들려왔다. 그러잖아도 그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투항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나이 먹은 순으로 한 줄로 서서 웃옷을 벗어 흔들고, "항복이요, 항복이요."하면서 걸어나갔다. 우리가 나가자 계엄군 2명이 엎드리라고 했다. 그들은 다른 쪽을 향해, "김하사, 김하사!"하고 부르면서 작전지휘를 했다. 그러고는, "영화구경 같지."하면서 창문을 열고 다른 쪽을 향해 총을 쏘았다.
한참 후에 계엄군에게 끌려 도청 앞마당에 잡혀 있는 시민군과 합류했다. 계엄군들은 우리를 엎드려놓고 등을 군화발로 지근지근 밟아댔다. 그러고는 내 등에다 '극렬'이라고 매직으로 쓰고는 군용 버스에 실었다. 군인들이 내 허리에 각대를 채우려고 하는 것에 반항하자 사정없이 두들겨맞았다. 버스에는 많은 사람이 타고 있었다. 살그머니 고개를 들고 커튼을 살짝 제쳐봤더니 운동장에서 하얀 소복을 입은 사람들이 분향을 하고 있었다. 버스가 멈춘 곳은 상무대였다.
인간 도살장 상무대 합동수사본부
우리들은 합동수사본부로 이송되었다. 헌병들이 우리들의 옷을 벗기더니 군기를 잡는다고 '앉아 일어서'를 반복시켰다. 그동안 다른 헌병이 조사를 했는데, 내 호주머니에서 실탄이 하나 나왔다. 헌병은 욕을 하면서 내 입에 실탄을 물렸다. 그러더니 실탄을 잡아당겼다. 총알이 입에서 빠지자 사정없이 뺨을 때렸다.
나는 맞지 않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 실탄을 꽉 물었다. 이빨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 외에도 한참을 더 괴롭히고 나서 우리를 조사관에게 넘겼다. 조사는 무엇을 조사한다기보다는 매맞는 일이 더 많았다. 그들은 몽둥이로 두들겨패면서 도청에서 무슨 일을 했느냐고 추궁했다. 1차 조사는 그렇게 끝났다.
곧바로 헌병대 영창 5소대로 수감되었다. 5소대로 끌려간 뒤 우리는 정좌하고 앉아있었다. 거기서도 또 한차례 기합을 받았다. '죽는구나'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위기감 속에서도 잠은 왔다. 어떻게 잠이 든지도 모르게 잠을 잤는데, 새벽에 김영철(기획실장, 현 정신이상) 씨가 화장실벽에 머리를 찧고 있었다. 김영철 씨는 머리에 피를 흘리면서 쓰러졌다. 다른 사람들은 잠이 들어 있어서 빨리 발견하지를 못했다. 헌병들이 들이닥쳐 김영철 씨를 끌고 갔다.
조사에서 구타로 이어지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무조건 두들겨팼다. 나는 25일 도청 앞 궐기대회에 나갔다가 그것이 계기가 되어 도청에 들어가 조사실 조사원으로 일한 것밖에 없다고 버티었다. 무수히 구타를 당하면서도 사실대로 말하면 더 맞을 것이고, 형도 많이 받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25일 전의 상황은 숨겼다.
그들은 우리들을 1부, 2부, 3부로 분류했다. 1부는 재야, 2부는 학생, 3부는 폭도들로서 나는 3부로 분류되었다.
조사는 계속되었다. 총을 쏘았느냐고 물어봤으나 나는 군대를 갔다 왔기 때문에 총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고 총을 들지 않았다고 버텼다. 그들은 또한 나에게 동료들과의 관계를 대라고 추궁했다. 나는 노란색 잠바를 입은 사람을 따라서 혼자 도청에 들어갔으며 조사실에서 치안담당일을 했다고 했다. 그들은 믿지 않았다. 그들이 나에게 거짓말 탐지기를 가져오라고 해서 무슨 소린가 했더니 참나무 몽둥이를 말하는 것이었다. 수사관 3, 4명이 몽둥이를 앞에 두고 말을 할때마다 두들겨팼다. 나는 조사실에 여고생들이 있었고, 그애들이 조사기록을 정리했으니 확인해 보면 알 것이라고 말했으나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처음에는 낮에 조사를 받았는데 열흘 뒤부터는 밤에 조사를 했다. 그래서 밤만 되면 공포감이 생겼다. 밤에 조사를 받으면 12시나 1시경에야 보내주었다.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서 낮에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깜박 잠이 들어도 맞는 꿈만 꾸었다.
조사관들이 계속 총을 쏘았느냐고 추궁했다. 나는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4일 동안 총을 쏘지 않았다고 버텼다. 어찌나 모질게 맞았던지 옷에 생똥을 싸버렸다. 어른들이 생똥을 싼다기에 무슨 소린가 했는데 바로 내가 그 경험을 한 것이다. 그들은 나를 구석에 무릎을 꿇혀놓은 상태에서 등뒤에 의자를 놓고 머리를 뒤로 젖혀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곤봉에 청소걸레를 감아서 입에 집어넣고 물주전자로 코에다 물을 붓는 고문을 3일동안 계속했다. 나는 결국 총을 쏘았다고 인정하고 말았다. 그들은 나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으면서 왼쪽 어깨만을 곤봉으로 계속 때렸다. 맞는 일이 되풀이되니까 나중에는 아픈지 어쩐지 감각이 없어졌다.
그곳에서는 옷도 갈아입을 수가 없었다. 팬티는 수세식 변기의 물을 잡아당겨 놓고 그 물로 빨아 잠을 잘 때 배에다 올려놓아 말려서 입었다.
어느 날 영창에 열을 지어 앉아 있는데 수사관이 한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제발 나하고는 관련이 없는 일이기를 바라면서 앉아 있자니 헌병과 함께 우리를 둘러 본 사람이 나를 가리켰다. 수사관에게 불려간 나는 나주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했는지를 추궁받았다. 나는 그런 일이 없다고 했다. 또다시 구타가 시작되었다. 나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고 강하게 부정했다.
"나는 학생이다. 학생들이 총을 들 수가 있느냐. 일반인들이 총을 들었다."고 계속 버텼다. 그 후에 수사관이 부족했는지 나는 경찰관이 조사를 했다. 합동 수사단 조사를 받을 때마다, "폭도 위성삼 조사받으러 왔습니다."하고 외친 다음 조사를 받았다. 경찰관은 수사관에 비하면 정말 양반이었다.
수사관은 김대중씨에 대해서 추궁을 하면서 김대중 씨를 위해서 싸운 것이 아니냐고 묻기도 했다. 나는 내가 평소의 생각대로 세 김씨 중 김대중씨가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더니 두말없이 두들겨팼다. 그런데 나는 순진하게도 '전라도는 다른 도에 비해 낙후되어 있고 지역적 차별이 심하다'고까지 말했다. 수사관은, "야! 이 새끼야, 느그 집 마당에다 공장 세워라."하면서 구타를 했다. 뿐만 아니라, "김대중이가 시켜준다고 했냐?"고 물었다. 나는 그분을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지만 마음 속으로 '통신부장'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7월 중순까지 조사는 계속되었다. 나는 1심에서 5년 구형에 실형을 2년 6개월 선고받았다. 죄명은 계엄법위반 및 내란 부화수행이었다. 전두환이가 대통령 취임할 때 나는 석방되었다.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했더라면 훨씬 형을 많이 받았을 것이나 결국 내가 몽둥이를 이긴 것이다.
영창 안에서 많은 사람을 알게 됐다. 김윤기, 윤강옥, 안길정, 정해직, 최치수, 김준봉, 허규정 등이 기억에 남는 사람들이다. 영창을 같이 살아보면 그 사람의 인간성을 알 수 있다. 우리들이 폭력 다음으로 참기 어려웠던 것은 배고픔이었다. 늘상 배고픔에 허덕이면서 밥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먹기 위해 서로 싸움을 했다. 식기 하나로 두 사람이 밥을 먹었는데, 서로 많은 쪽을 차지하기 위해 신경전을 벌였다. 나는 지금도 그 사람의 인간성을 알려면 교도소에서 생활을 해보면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도소에서 좋은 사람은 밖에서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교도소 안에서 왜 그렇게 성경책을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교도소로 이감되면 가져가려고까지 했다. 7월이 넘어서면서부터 우리들에게도 시간이 조금씩 생겼다. 그 외에는 주로 소설책을 많이 봤다. 대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현실에는 관심도 별로 없었고 세상물정도 잘 몰랐는데 황석영의 "객지"를 읽고 많은 감명을 받았다. 그 책에는 여러 편의 단편이 있었다. 그런 책을 읽고 보니 비로소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해 눈뜨기 시작했다.
또 어둠의 자식들은 현실을 적나라하게 파헤쳤다. 나는 위정자들이 이런 책들을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이 땅 구석구석에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많으니까 말이다.
상무대 영창 생활에서 제일 크게 느낀 것은 대학생들이 모범적인 태도를 보이기보다는 이기적이고 거만하다는 것이었다. 명노근 교수님이 당부했다.
"나는 기독교인입니다. 그러나 종교 차원을 떠나서 신화를 이야기하겠습니다. 여러분은 곰이 인간이 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참고 견디었는지 잘 알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힘들겠지만 모범을 보여주십시오."
나는 그때 나라를 위해서 부족하지만 조금이나마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말만 앞세우는 학생들보다는 못 배웠지만 우직하고 의리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과 더불어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패배를 딛고 일어서
도청 안에서 온건파와 강건파의 대립이 있었는데, 나는 지금도 온건파는 배신자라고 생각한다. 법정에서 최후진술 때 못 배운 사람들은 대부분 할 말이 없다고 했는데, 학생들은 말을 많이 했다. 그때 느낀 것은 좀 배웠다고 말만 앞세우는 차원이 아니라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석방되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돈을 써서 석방되었다고 생각했다. 내가 한 행동에 비해서 형을 너무 적게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매 한 대 맞을 때마다 매 한 대에 적어도 1년은 형이 감해진다고 생각하고 이겨냈다.
내가 5·18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계엄군들의 잔악한 만행을 보고 나서였다. 나주에서 무기를 탈취한 것도 계엄군들이 무고한 시민들에게 총을 먼저 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같은 생각으로 참여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고등학교 때나 대학교에 다닐 때 사회과학 공부를 했더라면 훨씬 더 확실한 모습으로 운동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지금도 논리적이고 뛰어난 동지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건 운동의 대의에 어긋나지 않게 성실히 최선을 다하면서 사는 것이리라.
내가 석방되었을 때 학교는 이미 제적되어 있었다. 학교에 더 이상의 미련이 없었으므로 별상관이 없었다. 그후로 이우정(아리랑약국을 경영), 임왕택(현대건설 직원) 씨와 함께 장동에서 '깔담사'라는 용역회사를 운영했다. 윤강옥 선배는 교도소에서 알게 된 동지였는데 나를 잘 봤는지 관심을 많이 가져주었다. 동학혁명 연구, 미국 노동운동비사 등의 많은 책을 주었다.
깔담사(시골에서 깔을 베는 것을 연상해서 지은 이름)는 심부름센터와 간판이나 진열대를 짜주는 일을 겸했다. 4개월 정도 운영하다가 허규정, 임왕택, 박선정, 양강섭 등과 교양사를 차렸다. 교양사는 여성잡지(여성동아, 주부생활, 엘레강스, 멋 등)을 한 권당 5백 원씩 받고 빌려주는 곳이었다. 코 닦을 시간도 없이 바쁘게 배달을 하고 다녔으나 6개월 만에 망하고 말았다. 그 시절만 해도 5월 단체들이 없던 때라 밤마다 술을 먹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면서 노래를 불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패배주의에 빠져버렸던 것이다.
그 후 1985년 절에 들어갔던 윤강옥 선배가 절에서 나와 구속자협의회를 구성하면서 나는 '광주구속자협의회' 간사로 일을 했다. 광주구속자협의회는 5·18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안부확인에서부터 시국 돌아가는 이야기, 망년회 등을 하면서 월 한번씩 모임을 가졌다. 또 전남민주주의청년연합에서 정책위원장 대리 역할을 했으며, 윤강옥 선배와 '광주민중항쟁 위령탑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메달을 만들어 판매하기도 했다. 그것 때문에 윤강옥 선배는 1년 동안 도망다니기도 했다.
전국적으로 개헌서명 바람이 거세게 불던 1986년 3월 27일 '전남민주회복국민협의회'를 결성하여 직선제 개헌운동을 전개했다. 3월 30일 신민당 개헌 현판식 때 YWCA에서 행사를 가졌는데, 1980년 5·18 이후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흥분했다. 광주민중항쟁의 상징인 도청 분수대에서 그때 1980년 이후 처음으로 집회를 가졌다. 나는 메가폰을 잡고, "80년 당시 이곳에서 민주화를 외쳤던 고 박관현 동지가 정부에 의해 옥중에서 숨졌습니다. 광주시민은 대동단결하여 군부 독재를 물리칩시다." 라고 외쳤다. 나는 곧바로 형사들에게 잡혀 집시법위반으로 실형 2년을 선고받고 4개월을 살다 집행유예로 나왔다.
1987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면서 지금의 '민주쟁취국민운동 전남본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5·18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확실한 진상이 밝혀져야 한다. 그리고 역사 속에 기록되어 교육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분열을 극복하고 5·18 때 고생했던 사람은 모두 한몸이 되어야 한다. 단, 그 당시 온건파들은 배신자라 싫다. 가끔씩 마음이 흐트러지거나 나약해질 때면 5·18 때도 싸운 사람인데 사소한 일에 흔들릴 수 없다고 반성을 한다.
나는 죽는 날까지 역사와 민족 앞에 부끄럼없이 당당하게 살아갈 것이다.(조사.정리 이현주) [5.187연구소]
첫댓글 맞이하신 7월 사랑과 행복이 함께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