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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하는 시간
전국에 태풍소식이 있었다. 부산에 도착했을 때도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문수선원에 일찍 오신 스님들은 ‘큰비에 어떻게 오셨는지’ 서로 인사를 나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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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당을 짓고 기둥이 여섯 개라서 어떤 글귀를 주련에 걸어야할지 물어오시는 스님이 계셨다.
“앞에다가 나무대방광불화엄경 하고
아름다워라, 세상이여!
환희로워라, 인생이여!
아, 이대로가 화장장엄세계요,
이대로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인 것을!
이게 화엄경 4구게라. 그리고 나무대방광불화엄경 그럼 딱 맞지” 하고 큰스님이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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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1월초에 북인도로 스님들이 성지순례를 계획하고 계셔서 여행개요를 설명하러 여행사 사장님이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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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호원에서 오신 스님에게 큰스님은 “복숭 잘 받았어요.”하고 인사를 하셨다. 문득 궁금해서 사전에서 찾아봤더니 복숭은 복숭아의 방언이다.
‘처음 딴 복숭아예요’하고 첫물 복숭아를 들고 오신 때가 바로 전이었는데 이번 달이 아마 복숭아 끝물이 될 것같다.
추석에 신도분들에게 법공양할 책을 가져간다고 하시자 큰스님이 흔쾌하게 지금 내려가서 실으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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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들과 함께 법화경을 공부하고 계시다는 비구니스님이 오셔서 ‘이것이 법화경이다’ 교재구입을 문의하셨다.
큰스님이 기뻐하시며 말씀하셨다.
“경전들, 법화경이나 화엄경을 가지고 법회를 하면 책임질 일도 없고 바닥도 안나지.”
그런데 교재를 문의하신 스님은 법화경 강의가 어렵다고 하셨다.
“내일이 초하루면 오늘은 토씨까지 보이는데 그전엔 안보이거든요.” 하고 어떤 강의들을 참고 할지 물으셨다.
“살다보면 다 해결될 때가 있어. 첫째 이 경전을 많이 읽고 열심히 쓰고 사경을 해요.”
하고 큰스님이 조언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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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오시던 담당 피디는 둘째 아기를 얻어서 다른 피디가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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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회전에 큰스님은 ‘스님들 누가누가 오셨는지’ 일일이 물으시다가
“성엽스님 안오면 하나도 안온거지.”하셨다.
염화실지 표지를 보시고는
“아이고 선재동자 어떻게나 이쁜지” 하셨다.
66권째 공양하시는 화엄경 강설책을 내년이면 다 공양 마칠 수 있다고 헤아려 보셨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본강의에 들어가기 전에 대방광불화엄경 강설 제66권 점안을 하고 강의에 들어가도록 하겠다.
서문을 읽겠다.
서문
저 모든 보살마하살은 높은 일산이 되나니,
자비한 마음으로 모든 중생을 두루 그늘 지어
덮어 주는 연고입니다.
저 모든 보살마하살은 행을 닦음[修行]이 되나니,
하품과 중품과 상품의 행을 평등하게 행하는 연고입니다.
저 모든 보살마하살은 큰 땅덩이가 되나니,
능히 자비한 마음으로
일체 모든 중생을 맡아 지니는 연고입니다.
저 모든 보살마하살은 보름달이 되나니,
복덕의 광명이 세간에 평등하게 나타나는 연고입니다.
저 모든 보살마하살은 청정한 해가 되나니,
지혜의 빛으로 모든 알아야 할 경계를 비추는 연고입니다.
저 모든 보살마하살은 밝은 등불이 되나니,
일체 중생의 마음속 모든 어두움을 깨뜨리는 연고입니다.
저 모든 보살마하살은 물을 맑히는 구슬[水淨珠]이 되나니,
일체 중생의 마음 가운데
속이고 아첨하는 혼탁함을 맑히는 연고입니다.
저 모든 보살마하살은 여의주가 되나니,
일체 중생의 소원을 다 만족하게 하는 연고입니다.
저 모든 보살마하살은 큰 바람이 되나니,
중생들로 하여금 빨리 삼매를 닦아서
일체 지혜의 큰 성중(城中)에 들어가게 하는 연고입니다.
2017년 8월 1일
신라 화엄종찰 금정산 범어사
如天 無比
이 세상에서 보살같이 좋은 소임자가 없다. 우리 모두는 보살이 되어야 한다.
보살마하살은 여의주가 된다. 또 수청주(水淸珠)가 된다.
아무리 혼탁한 세상이라도 진정한 보살이 한 사람이라도 그 가운데 있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정직하고 밝고 맑고 육바라밀을 실천하고 사섭법과 사무량심을 펼치는 바이러스를 곳곳에 퍼트려서 점차적으로 세상을 깨끗하게 한다. 혼탁한 물에 수청주라는 구슬을 하나 넣어 놓으면 차츰차츰 그 물이 깨끗하게 맑아지는 것과 같다.
보살마하살 역시 그가 있는 곳에 흐린 세상이 맑아진다.
이런 표현이 기가 막히다.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러한 부처님 말씀을 접하다 보면 우리 마음이라도 그렇게 맑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三十六
十地品 第二十六之三
十, 第四焰慧地
5. 三十七助道品
오늘은 십지품 429쪽(화엄경 제2권 민족사刊) 사신족(四神足) 할 차례다.
십지품은 화엄경의 일반품과 비교해 볼 때 약간 독특한 점을 가지고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37조도품은 상좌부 불교에서 수행하는 수행법이다. 이것을 낱낱이 점검하고 대승의 관점에서 회통하고 지나가는 내용들이 십지품에 들어있다.
반야심경에는 ‘무무명(無無明) 역무무명진(亦無無明盡) 내지(乃至) 무노사(無老死)’ 라고 하면서 ‘12인연은 없다. 완전히 없다’고 해서 12인연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런데 부파불교에서는 12인연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긴다. 십지품에도 12인연을 하나하나 점검하고 또 화엄의 이치로써 다시 그것을 회통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십지품은 화엄에서 보는 불교학개론이라고 할까 그런 형식을 취하고 있다. 글이 조금 까다롭고 내용도 까다롭고 무슨 말인지 명확하게 알 수도 없는 입장이지만 이 십지품에서 소승불교 교리를 한 번씩 싹 점검하고 넘어가듯이 우리도 이 기회에 ‘아 상좌부 불교 내지 소승불교에서는 이러한 교리, 이러한 수행법으로써 수행을 삼는구나’ 하는 것을 참고하고 넘어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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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은 사념처로 가장 근본인데 신(身) 수(受) 심(心) 법(法)이다.
사정근은 번뇌를 끊는다고 하는 내용이다. 사신족은 사여의족(四如意足)이라고도 하는데 이것 역시 결국은 번뇌를 끊는 내용이다.
대개 대승불교의 보살은 번뇌로써 놀이터를 삼고 번뇌로써 하나의 무기를 삼지만 소승불교에서는 번뇌를 다 끊어야 된다고 본다. 그런 점이 다른 점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번뇌가 있어야 되고 번뇌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고 보는 반면에 소승불교에서는 번뇌를 끊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3) 四神足
復次此菩薩이 修行欲定에 斷行하야 成就神足하야 依止厭하며 依止離하며 依止滅하며 廻向於捨하고 修行精進定과 心定과 觀定에 斷行하야 成就神足하야 依止厭하며 依止離하며 依止滅하며 廻向於捨니라
“다시 또 이 보살이 하려는 정력[欲定]으로 끊는 행을 수행하여 신족통(神足通)을 성취하고, 싫어함을 의지하고 떠남을 의지하고 멸함을 의지하여 버리는 데로 회향하느니라. 정진하는 정력과 마음의 정력과 관하는 정력으로 끊는 행을 수행하여 신족통을 성취하고, 싫어함을 의지하고 떠남을 의지하고 멸함을 의지하여 버리는 데로 회향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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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족(四神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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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차차보살(復次此菩薩) : 다음에 또 이 보살이
수행욕정(修行欲定)에 : 하고자 하는 정력 선정으로
단행(斷行)하야 : 끊는 행을 수행한다. 하고자 하는 정력으로 끊는 행을 수행해서
성취신족(成就神足)하야 : 신족을 성취한다. 그래서 무엇을 하는고 하면
의지염(依止厭)하며 : 의지염, 번뇌를 싫어한다는 것을 의지하고
의지리(依止離)하며 : 의지리 번뇌를 떠나는 것을 의지하고
의지멸(依止滅)하며 : 번뇌를 소멸하는 것을 의지하고
회향어사(廻向於捨)하고 : 그래서 버리는 데까지 회향한다. 이런 형식이 뒤에도 쭉 이어진다. 욕정 다음에 두 번째가
수행정진정(修行精進定)과 : 정진정이다. 욕정을 그런 식으로 하고 정진정과
심정(心定)과 : 심정과
관정(觀定)에 : 관정으로
단행(斷行)하야 : 끊는 행을 수행해서, 글을 그렇게 해석한다. 정진정과 심정과 관정으로 끊는 행을 수행해서
성취신족(成就神足)하야 : 신족을 성취하고
의지염(依止厭)하며 : 염을 의지하고
의지리(依止離)하며: 떠남을 의지하고
의지멸(依止滅)하며: 소멸을 의지하고
회향어사(廻向於捨)니라 : 그래서 결국 버리는 데로 회향한다. 형식은 똑같다. 욕정이라고 하는 것과 정진정 심정 관정 이것이 사신족 사정근이다.
(4) 五根
復次此菩薩이 修行信根하야 依止厭하며 依止離하며 依止滅하며 廻向於捨하고 修行精進根과 念根과 定根과 慧根하야 依止厭하며 依止離하며 依止滅하며 廻向於捨니라
“다시 또 이 보살이 믿는 근(根)을 수행하되, 싫어함을 의지하고 떠남을 의지하고 멸함을 의지하여 버리는 데로 회향하느니라. 정진하는 근과 생각하는 근과 선정의 근과 지혜의 근을 수행하되, 싫어함을 의지하고 떠남을 의지하고 멸함을 의지하여 버리는 데로 회향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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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근(五根) : 다섯가지 근본
*
오근이라고 하는 이러한 다섯가지 근본을 닦으면 밑에 바로 오력이 나온다. 다섯가지 힘이 생긴다.
오근과 뒤에 나오는 오력은 똑같은데 근본이라고 하는 근(根)과 힘 력(力)이라는 것의 이름만 차이만 있다.
*
부차차보살(復次此菩薩)이 : 다음에 또 이 보살이
수행신근(修行信根)하야 : 신근을 정진해서 수행해서, 신근은 믿는 뿌리다. 이것을 수행해서
의지염(依止厭)하며 : 싫어하는 것을 의지하고
의지리(依止離)하며 : 떠나는 것을 의지하고
의지멸(依止滅)하며 : 멸하는 것을 의지하고
회향어사(廻向於捨)하고: 그래서 버리는 데까지 회향한다. 그다음에
수행정진근(修行精進根)과 : 정진근, 신근과 정진근
염근(念根)과: 염근
정근(定根)과: 정근
혜근(慧根)하야 : 혜근 이것이 오근이다. 그래서 정진근과 염근과 정근과 혜근 네 가지는 앞에서 신근을 이야기 했듯이 한꺼번에 이야기한다. 그것을 수행해서
의지염(依止厭)하며 : 염을 싫어하는 것을 의지하고
의지리(依止離)하며 : 떠나는 것을 의지하고
의지멸(依止滅)하며 :소멸하는 것을 의지하고
회향어사(廻向於捨)니라 :그리고 결국은 버리는 데로 회향한다. 번뇌를 버리는 것이다.
그 과정을 지나면 그다음에 오력 힘이 생긴다는 것이다.
(5) 五力
復次此菩薩이 修行信力하야 依止厭하며 依止離하며 依止滅하며 廻向於捨하고 修行精進力과 念力과 定力과 慧力하야 依止厭하며 依止離하며 依止滅하며廻向於捨니라
“다시 또 이 보살이 믿는 힘을 수행하되, 싫어함을 의지하고 떠남을 의지하고 멸함을 의지하여 버리는 데로 회향하느니라. 정진하는 힘과 생각하는 힘과 선정의 힘과 지혜의 힘을 수행하되, 싫어함을 의지하고 떠남을 의지하고 멸함을 의지하여 버리는 데로 회향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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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력(五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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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차차보살(復次此菩薩)이 : 다음에 또 이 보살이
수행신력(修行信力)하야 : 신력을 위에는 신근이라고 했는데 근과 력이 다를 뿐이다. 신력을 수행해서
의지염(依止厭)하며 : 의지염
의지리(依止離)하며 : 의지리
의지멸(依止滅)하며 : 의지멸
회향어사(廻向於捨)하고 : 버리는 데까지 회향하고
수행정진력(修行精進力)과 : 수행 정진력
염력(念力)과: 염력
정력(定力)과: 정력
혜력(慧力)하야 : 혜력을 수행해서
의지염(依止厭)하며 : 염을 의지하고
의지리(依止離)하며 : 떠나는 것을 의지하고
의지멸(依止滅)하며 : 멸을 의지하고
회향어사(廻向於捨)니라 : 버리는 데로 회향한다. 이렇게까지 되었다. 사념처는 특별하니까 그렇고 사정근 사신족 오근 오력까지 점차적으로 수행이 깊어간다.
그렇게 해서 칠각지로 넘어왔다.
(6) 七覺支
復次此菩薩이 修行念覺分하야 依止厭하며 依止離하며 依止滅하며 廻向於捨하고 修行擇法覺分과 精進覺分과 喜覺分과 猗覺分과 定覺分과 捨覺分하야依止厭하며 依止離하며 依止滅하며 廻向於捨니라
“다시 이 보살이 생각하는 각의 부분[念覺分]을 수행하되, 싫어함을 의지하고 떠남을 의지하고 멸함을 의지하여 버리는 데로 회향하느니라. 법을 선택하는[擇法] 각의 부분과 정진하는 각의 부분과 기뻐하는 각의 부분과 가뿐한[猗] 각의 부분과 선정인 각의 부분과 버리는[捨] 각의 부분을 수행하되, 싫어함을 의지하고 떠남을 의지하고 멸함을 의지하여 버리는 데로 회향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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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각지(七覺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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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각분이라고도 하고 칠각지라고도 하는데 각(覺)이라고 하는 것은 보리 깨달음이다. 깨달음에 대한 한 부분을 일곱 가지로 나눠서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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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차차보살(復次此菩薩)이 : 다음에 또 이 보살이
수행염각분(修行念覺分)하야 : 염각분을 수행해서
의지염(依止厭)하며 : 의지염
의지리(依止離)하며 : 의지리
의지멸(依止滅)하며 : 의지멸하며
회향어사(廻向於捨)하고 :회향어사하고, 앞에서 쓴 형식과 똑같다. 사에 회향하고
수행택법각분(修行擇法覺分)과 : 수행택법각분과
정진각분(精進覺分)과 : 정진각분과
희각분(喜覺分)과: 희각분과
의각분(猗覺分)과: 의각분과
정각분(定覺分)과: 정각분과
사각분(捨覺分)하야 : 사각분을 수행해서 그러면 일곱 개가 된다. 거기까지를 수행해서
의지염(依止厭)하며 : 의지염
의지리(依止離)하며: 의지리
의지멸(依止滅)하며 : 의지멸
회향어사(廻向於捨)니라 : 회향어사한다. 요렇게 딱 형식을 똑같이 해놓았다.
(7) 八正道
復次此菩薩이 修行正見하야 依止厭하며 依止離하며 依止滅하며 廻向於捨하고 修行正思惟와 正語와 正業과 正命과 正精進과 正念과 正定하야 依止厭하며 依止離하며 依止滅하며 廻向於捨니라
“다시 또 이 보살이 바른 소견[正見]을 수행하되, 싫어함을 의지하고 떠남을 의지하고 멸함을 의지하여 버리는 데로 회향하느니라. 바르게 생각함[正思惟]와 바른 말[正語]과 바른 업[正業]과 바른 생명[正命]과 바른 정진[ 正精進]과 바른 생각[正念]과 바른 선정[正定]을 수행하되, 싫어함을 의지하고 떠남을 의지하고 멸함을 의지하여 버리는 데로 회향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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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정도(八正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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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조도품중에서 팔정도가 나왔다.
우리는 팔정도를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설명을 많이 한다. 곳곳에 팔정도 도표도 그려져 있고 법륜 마크를 할 때도 팔각으로 해서 팔정도를 상징하기도 한다.
근본불교의 수행에서는 37조도품중에서 사념처가 상당히 중요한 수행법이다.
예를 들어서 사람에 대해서 자꾸 관심이 많이 가고 애착이 많이 가면 송장으로 관하면 아주 쉽다.
‘저거 뼈만 남았다’ 이렇게 관하는 것이다.
여러분들도 죽은 시체를 더러 접할 기회도 있을 텐데 그런 시체를 떠올려 버리면 금방 정나미가 떨어진다.
어떤 대상을 송장으로 바꿔서 상상해버리면 바로 정나미가 떨어지는 것이다.
송장보다도 그 송장이 한 단계 진화해서 구더기가 버글버글 끓고 새파랗게 썩어서 곪아 터지는 것을 상상하면 더 정나미가 떨어진다.
사실은 우리 모두가 그런 과정을 거친다.
그렇게 관하여 정나미가 떨어지게 하는 것을 상좌부불교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수행의 요체로 삼는데 팔정도에는 그런 것이 없다.
팔정도는 다 잘 아시는 내용인데 대승불교 쪽에서는 사념처보다 팔정도를 또 중요하게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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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차차보살(復次此菩薩)이 :부차차 보살이
수행정견(修行正見)하야: 정견을 수행해서 첫째 정견, 바른 소견이다. 이것에 대한 설명이 많고 말이 많다.
사실 상당히 단순한 내용인데 무엇이 정견이냐? 내 육체를 어떻게 보는 것이 바로 보는 것이냐? 마음을 어떻게 보는 것이 바로 보는 것이냐? 그렇게 따져 들어가면 정견은 참 설명이 구구하다. 그렇게 정견을 수행해서 우리의 번뇌 망상을
의지염(依止厭)하며 : 싫어하고
의지리(依止離)하며 : 떠나고
의지멸(依止滅)하며 : 소멸하는 데까지 의지하고
회향어사(廻向於捨)하고 : 그리고 결국은 회향어사 버리는 데로 회향한다. 결국은 정견 팔정도도 우리 번뇌를 떠나는 것으로 방편을 삼는 것이다. 다른 것이 없다.
이것을 확대해석해서 구구한 설명을 많이 하는 것이 팔정도다.
여러분들은 포교일선에서 팔정도 같은 것은 많이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고 참고서 같은 데도 보면 참 설명이 많다.
수행정사유(修行正思惟)와: 정사유
정어(正語)와
정업(正業)과
정명(正命)과
정정진(正精進)과
정념(正念)과
정정(正定)하야 : 여기까지가 팔정도다.
바르게 사유한다. 바르게 말한다. 바른 업을 짓는다. 정명은 아주 바르게 생명 유지를 한다. 명(命)자는 그런 것이다.
정명 하나만 가지고 이야기한다면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음식을 예를 든다면 채식만 가지고 생명을 유지해야 한다고 구태의연하게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그 외 다른 음식물을 가지고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삿된 생명인 사명이라고 한다.
또 초기불교 같은 경우에는 탁발해서 먹어야지 자기가 농사지어서 먹는 것은 사명(邪命) 삿된 생명 유지 방법이다 라고 한다.
꼭 탁발해서 먹어야지 정명(正命) 내 생명을 바르게 유지하는 방법이다 라고 하는 융통성 없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우리 생명이라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생명 없이는 아무 것도 안된다. 그것만이 정명이라고 하면 우리가 살지 못할 경우가 너무 많다.
그래서 그런 식의 어떤 주장을 따른다고 생명을 함부로 버리면 그것은 또 이치상 맞지 않다.
예를 들어서 육식을 하든지 아니면 훔쳐서 먹든지 그런 것이 원칙적으로 사명(邪命)이지만 그것도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요할 때는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신채(五辛菜)에 관한 이야기나 예를 들어서 육식도 오정육(五淨肉)이니 하는 편법이 아주 많이 발생하게 된다.
생명유지를 위해서 그런 것도 얼마든지 정명에 해당된다 는 것이다.
사실 ‘무엇이 정명이다’라고 딱 못 박아서 말할 수가 없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나치게 남발해서도 안되지만 다른 편법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것이 중도적인 정명이다.
정(正)자는 중도(中道)라는 뜻도 된다.
이러한 것들을 수행해서
의지염(依止厭)하며 : 결국은 의지염 번뇌를 싫어하는 데 의지하고
의지리(依止離)하며 : 떠나는 데 의지하고
의지멸(依止滅)하며 : 멸에 의지하고
회향어사(廻向於捨)니라 : 결국은 버리는 데까지 회향한다. 이렇게 해서 37조도품을 대강 설명을 했는데 그 설명이 사실상 치밀하지가 않다.
이런 것들은 아함부 경전에서 아주 구구하게 설명을 잘 하고 있다. 이런 것을 세밀하게 알려면 인터넷에서 찾아봐도 화엄경보다는 훨씬 세밀하게 나와 있다.
그런데 화엄경에서 그 많은 경전, 80권이나 되는 이 경전을 설하면서 왜 이런 부파불교의 중요한 수행법 서른 일곱 가지를 이렇게 소홀하게 다뤘느냐? 거기에 속셈이 있다. 본래 대승불교에서는 소승불교 교리를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그렇다고 또 모든 사람을 그렇게 차별해서 배척하는 것은 대승불교 정신에 맞지 않다.
그래서 전부 그것을 안고 가고 함께 가기 위해서 이렇게 십지품에서 소승교리의 수행법을 등장시킨 것이다.
나중에 가면 12인연도 나오는데 반야심경에서는 그것이 없다고 무무명 역무무명진 전부 없다라고 하면서 없는 것을 그렇게 자세히 설명할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또 그것을 터치하고 지나간다.
화엄경에서, 큰 바다는 소소한 작은 개울물을 다 감싸주고 다 포용하고 조화를 이루고 융화시켜서 함께 가자고 하는 의미다. 그런 뜻을 가지고 있다.
그것만 놓치지 아니하면 소소한 해석이 바르게 되느냐 바르지 못하게 됐느냐는 크게 중요하게 여길 것이 없다는 것이다.
팔정도 같은 것을 대승불교에서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가. 그런데 설명이 거의 없다.
정견은 무엇이다. 정사유는 무엇이다. 정어는 무엇이다. 정업은 무엇이다. 그런 것이 없다. 전부 설명이 없는 것이다.
그러한 것을 통해서 번뇌를 소멸해서 결국은 버리는 데까지 회향한다. 전부 그렇게 뭉뚱그려서 37조도품을 설명하고 만다.
6, 三十七助道品修行의 十種因由
菩薩이 修行如是功德은 爲不捨一切衆生故며 本願所持故며 大悲爲首故며 大慈成就故며 思念一切智智故며 成就莊嚴佛土故며 成就如來力無所畏와 不共佛法과 相好音聲이 悉具足故며 求於上上殊勝道故며 隨順所聞甚深佛解脫故며 思惟大智善巧方便故니라
“보살이 이와 같은 공덕을 수행함은 일체중생을 버리지 않으려는 연고며, 본래의 서원을 지니려는 연고며, 대비(大悲)가 으뜸이 된 연고며, 대자(大慈)로 성취한 연고며 일체 지혜의 지혜를 생각하는 연고며, 장엄한 불국토를 성취하는 연고이니라.
여래의 힘과 두려움 없음과 함께하지 않는 부처님의 법과 상호와 음성이 다 구족함을 성취하는 연고며, 높고 높은 수승한 도를 구하려는 연고며, 들은 바가 매우 깊은 부처님의 해탈을 따르는 연고며, 큰 지혜와 공교한 방편을 생각하는 연고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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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칠조도품수행(三十七助道品修行)의 십종인유(十種因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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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 37조도품을 닦느냐, 수행하느냐고 하는 까닭을 이야기 한다.
*
보살(菩薩)이 : 보살이
수행여시공덕(修行如是功德)은 : 이와 같은 공덕을 수행하는 것은
위불사일체중생고(爲不捨一切衆生故)며 : 일체중생을 버리지 않는 연고며.
불법을 비난하는 사람까지도 안고 가야되고 함께 가야 되는데 소승불교라고 해서 버리면 그것은 대승정신이 아니고 보살정신이 아니다.
불사일체중생이 이런 뜻이다.
대승불교의 화두는 뭐니뭐니 해도 중생이다.
일체중생이 화두다. 일체중생을 어떻게 하더라도 함께 안고 가고 결국은 큰 지혜를 터득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본원소지고(本願所持故)며 : 본래의 원, 보살의 본래의 서원은 무엇인가? 만중생을 다 제도하자고 하는 것이 본원이다. 본원을 가지는 바 까닭이며
대비위수고(大悲爲首故)며 : 크게 어여삐 여기는 마음이 우두머리가 되고
대자성취고(大慈成就故)며 : 큰 자비 인자함을 성취하는 연고며
사념일체지지고(思念一切智智故)며 : 일체 지혜와 지혜를 생각하는 연고며
성취장엄불토고(成就莊嚴佛土故)며 : 세상을 맑고 아름답게 하자고 하는 까닭이며
*
성취여래력무소외(成就如來力無所畏)와: 여래 십력과 사무소외와
불공불법(不共佛法)과 : 18불공법과
상호음성(相好音聲)이 : 32상과 80종호 그리고 음성까지를 성취해서 다 구족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유가(儒家)에서는 굳이 유가에서는 할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사회에서는 사람이 인품을 갖춰야 하는 것에 대한 조건이 있는데 그것이 신언서판(身言書判)이다.
첫째 생기기를 좀 그래도 괜찮게 생겨야 되고 생긴 것은 타고났다 하더라도 평소에 자기가 하고 다니는 복장을 그래도 품격있게 잘하고 다녀야 된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신(身)이다.
스님 같으면 스님다운 복장으로 그나마 깔끔하게 하고 때가 없게 하고 모든 것이 너무 추레하게 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것이 신에 해당된다.
여기는 상호 32상과 80종호를 갖추어야 하는데 계를 받는 데도 보면 계를 못 받는 조건이 여러 가지 있다.
예를 들어서 문신을 했다든지 밖으로 너무 드러나는 문신이 있으면 요즘은 수계를 못한다.
내가 좋아하는 야구선수가 있는데 팔에 문신을 좀 해서 내게는 점수가 확 깎였다.
남 보기에 좀 그렇잖은가.
몸이라는 것이 타고난 것은 어찌할 수 없어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는 데까지 해야된다. 머리라든지 수염이라든지 이런 것을 깎을 수 있는 데까지 단정하게 잘 깎고 옷도 단정하게 해서 입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상호다.
십력과 사무소외 십팔불공법 이런 것까지는 우리 수행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상호는 그런 것이다.
그다음에 음성이라고 했다.
언(言), 말이 품격이 있어야 된다.
또 익숙한 자리라고 해서 법문하는데 너무 농담 비슷하게 한다든지 실컷 좋은 이야기를 해놓고 희석시키는 경우도 있다. 자기가 잘해 놓고도 잘한 법문을 희석시키는 것도 사실 좀 마음에 유의를 해야 된다.
신언서판 중에 서(書)는 글씨 쓰는 것이다. 요즘은 전부 글씨를 컴퓨터로 쓰고 하지만 노트를 한다든지 칠판에다 판서를 할 때 가능하면 그 글씨가 좀 정중하게 정자(正字)로 남이 알아볼 수 있도록 써야 된다.
내가 몇 번 이야기 했지만 불교티비에도 나와서 판서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도 알아보기 어렵게 찍찍 막 흘려 쓰기로 무성의하게 쓰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신언서판에 대한 낱말조차 모른다.
아예 안쓰든지 글씨를 그렇게 써가지고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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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가 젊은 스님들 두어 스님을 발견했다. 한 오십 전후 되는 스님이 있는데 그 스님은 학교도 좋은 데 나오고 판서도 잘 하는데 글씨도 잘 쓴다.
글씨도 참 모양 좋게 쓰는 것이다.
말도 허튼 말 한마디 농담 한마디 없다.
그다음에 판(判)은 무엇인가?
판은 사상 정신이다. 그 사람의 사상이 어떠냐 그 사람의 생각이 어떠냐, 그 사람의 정신은 어떠냐 하는 것, 판단력이다. 판단력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사상에서 나오는 것이고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다.
신언서판 이 네 가지는 옛날 당나라 때 나온 것인데 지금도 유효하고 반드시 우리는 생각해야 된다.
그런 것들을 우리가 꼭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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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도 불교인이라면 불교의 믿음이 묻어 있는 사상, 그것이 참 중요하다.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묻어 있어야 된다.
우리가 계 받을 때 계체(戒體)라는 말이 있는데 믿음에도 신체(信體)가 있다.
불교를 공부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체가 생긴다. 그것이 신체다. 형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에 대한 체가 생기는 것이다.
불교를 보면 무조건 좋고, 어디 절이 있다 싶으면 그쪽을 향해서 절이라도 하고 싶고, 절이 있는 것이 다르게 보이고 하는데 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신체가 생긴 것이다.
불교법문을 하든지 강의를 하든지 할 때 저절로 그 신체가 묻어 나온다.
또 계체라고 하면 옛날에는 계를 받기 전에는 무심하게 모기도 죽이고 파리도 죽이고 낚시를 한다든지 물고기를 죽이든지 하는 것을 사정없이 했다.
나도 어릴 때 고기를 잡으러 가서 잡은 고기를 그렇게 무심코 패대기를 치고는 하였는데 절에 와서 계를 받고 그런 것을 하면 안된다고 하니까 파리도 함부로 못 죽이고 모기도 함부로 못 죽이는 것이다. 어쩌다가 본능적으로 모기를 딱 때려놓고는 ‘대방광불화엄경’이라도 한 번 부르던지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이라도 한 번 부르던지 해서 ‘이고득락(離苦得樂)하라’고 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런 것이 계체다.
계에 대한 실체가 형상은 없는데 그렇게 저절로 생기는 것이다. 참 신기하다. 여러분도 다 계를 받고 났으니까 그렇게 함부로 못 죽인다.
그렇듯이 믿음에 대한 체 신체가 또 있다. 우리가 불법을 믿게 되면 저절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믿음에 대한 신체가 형성이 되어 간다. 신심이 없는 사람은 그런 것이 해당이 안되지만 믿음있는 사람들은 그렇다.
신언서판이라고 하는 것 중에 판단이라는 것 믿음에 대한 정신이 거기에 표현이 되어져야 된다.
요즘 방송 매체를 통해서 활동하는 스님들은 다 노출이 되니까 우리가 그런 것들을 전부 살펴볼 수 있다.
얼굴이나 말씨 그 사람의 사상도 알 수가 있다.
판서를 하면 판서까지도 봐서 신언서판을 다 알 수가 있지만 판서를 안한다면 서는 몰라도 신언판까지는 알 수가 있다.
여기도 여래력(如來力) 사무소외(四無所畏) 18불공불법(不共佛法)과 32상 80종호 음성(音聲)이런 것 까지
실구족고(悉具足故)며 : 다 구족하는 연고며
구어상상수승도고(求於上上殊勝道故)며: 상상수승의 도를 구하는 연고며. 이런 것들을 갖추기 위해서 37조도품을 수행한다.
다시말해서 신언서판을 갖추기 위해서 37조도품을 수행한다는 뜻이다.
수순소문심심불해탈고(隨順所聞甚深佛解脫故)며 : 또 들은 바 깊고 깊은 부처님의 해탈을 수순하는 연고다.
‘내가 부처님의 해탈까지 이르러 가야지’ 하는 마음으로 37조도품을 수행한다.
정작 37조도품에 대해서는 대충 하고 넘어갔고 설명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회향이 아주 좋다.
소승불교 수행의 목적도 이러한 이유 때문에 37조도품을 수행한다.
사유대지선교방편고(思惟大智善巧方便故)니라 : 그리고 또 큰 지혜 선교 방편을 사유하는 연고이니라.
십종인유를 밝혀 놓았는데 37조도품은 그러한 이유 때문에 닦는다는 것이다.
7, 焰慧地의 功果
(1) 離障礙果
佛子야 菩薩이 住此焰慧地에 所有身見爲首하야 我人衆生壽命과 蘊界處의 所起執着出沒과 思惟와 觀察과 治故와 我所故와 財物故와 着處故인 於如是等에 一切皆離니라 此菩薩이 若見業이 是如來所訶요 煩惱所染인댄 皆悉捨離하며 若見業이 是順菩薩道요 如來所讚인댄 皆悉修行이니라
“불자여, 보살이 이 염혜지에 머물고는 몸이란 소견[身見]이 그 시초가 되어 ‘나[我]’라는 고집 ‘남[人]’이라는 고집, ‘중생(衆生)’이라는 고집, 오래 산다[壽命]는 고집, 오온, 십팔계, 십이처로 일으킨 집착과 태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생각하고 관찰하여 다스리는 연고며, 나의 소유인 연고며, 재물인 연고며, 집착하는 곳인 연고로 이와 같은 모든 것을 다 여의느니라.
이 보살이 만일 업(業)이 여래께서 꾸중하신 것이고 번뇌에 물든 것으로 본다면 모두 떠나고, 만일 업이 보살의 도를 따르는 것이고 여래께서 찬탄하신 것으로 본다면 다 닦아 행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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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혜지(焰慧地)의 공과(功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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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애과(離障礙果) :장애를 떠나는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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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수행을 하는 이유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장성덕(離障成德)이다.
장애를 떠나고 덕을 이루는 것이다.
개인의 입장으로 보면 나한테 온갖 번뇌가 있고 여러가지 부정적인 입장이 있는데 그런 것을 다 떠나고 소멸하고 그리고는 모든 덕을 갖춰가는 것이다. 지식도 쌓고 마음씀씀이도 쌓고 육바라밀 사섭법 사무량심 이런 것을 하나하나 쌓아가는 것이다. 그것을 이장과 성덕 두 가지로 표현할 수가 있고 이장은 단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끊을 단(斷)자 장애 장(障)자 이장이나 단장이나 같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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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菩薩)이 : 보살이
주차염혜지(住此焰慧地)에 : 이 염혜지에 머묾에
소유신견위수(所有身見爲首)하야 : 신견이 우두머리가 되어서 신견(身見) 변견(邊見) 사견(邪見) 견취견(見取見) 계금취견(戒禁取見) 5견이 있다.
이것은 다섯 가지 잘못된 견해인데 몸을 영원하다고 생각하고 몸이 무상하지 않다고 보는 견해가 신견이다. 그것을 위주로 해서
아인중생수명(我人衆生壽命)과 :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 수명견이나 수자견이나 같은 것이다. 금강경에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고 하였다.
온계처(蘊界處)의 : 오온과 십팔계와 십이처의
소기집착출몰(所起執着出沒)과 : 일어난 바 집착이 출몰하는 것과 거기에 대한
사유(思惟)와 : 생각한 것과
관찰(觀察)과 : 관찰과
치고(治故)와 : 다스리는 까닭이다. 그리고
아소고(我所故)와 : 나의 것이라고 하는 연고와
재물고(財物故)와 : 재물에 대한 연고와
착처고(着處故)인 : 집착하는 곳인
어여시등(於如是等)에 : 이와 같은 등의
일체개리(一切皆離)니라 : 일체를 다 떠나는 것이다.
이것을 수행하면 염혜지에서는 이러한 결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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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보살(此菩薩)이 : 이 보살이
약견업(若見業)이 : 약견업이 만약에
시여래소가(是如來所訶)요 : 부처님이 꾸짖는 바라고 본다면 견(見)자를 여기 붙여야 한다.
만약에 자기 업이 여래가 꾸짖는 바고 번뇌에 물들인 바다, 순전히 번뇌로 저런 업이 나타난다, 부처님이 꾸짖는 바다. 라고 본다면
번뇌소염(煩惱所染)인댄 : 번뇌 소염이라고 볼진댄
개실사리(皆悉捨離)하며 : 그것을 다 떠나버리고
약견업(若見業)이 : 업이 그 반대로
시순보살도(是順菩薩道)요 : 보살도를 수순하고
여래소찬(如來所讚)인댄 : 여래께서 찬탄하는 바라고 보는 것이라면
개실수행(皆悉修行)이니라 : 다 수행하는 것이니라. 두 가지 입장이다. 여래가 싫어하든지 아니면 번뇌가 물들인 바이면 그것은 버려야 되고 보살도에 맞고 여래가 찬탄하는 바라면 수용해야 된다.
이것도 사실 37조도품에 대한 넉넉한 설명은 못된다.
(2) 成德果
가, 十種心
佛子야 此菩薩이 隨所起方便慧하야 修集於道와 及助道分하야 如是而得潤澤心과 柔軟心과 調順心과 利益安樂心과 無雜染心과 求上上勝法心과 求殊勝智慧心과 救一切世間心과 恭敬尊德無違敎命心과 隨所聞法皆善修行心이니라 此菩薩이 知恩하며 知報恩하며 心極和善하며 同住安樂하며 質直하며 柔軟하며 無稠林行하며 無有我慢하며 善受敎誨하며 得說者意하나니 此菩薩이 如是忍成就하며 如是調柔成就하며 如是寂滅成就니라
“불자여, 이 보살이 일으킨 방편과 지혜를 따라서 도(道)와 도를 돕는 부분을 닦아 모으고는 이와 같이 윤택한 마음과, 부드럽고 연한 마음과, 조화롭고 순한 마음과, 이익하고 안락케 하는 마음과, 잡되고 물들지 않는 마음과, 높고 높은 수승한 법을 구하는 마음과, 수승한 지혜를 구하는 마음과, 일체 세간을 구호하는 마음과, 높은 덕을 공경하고 가르치는 명령을 어기지 않는 마음과, 들은 법에 따라서 잘 수행하는 마음을 얻느니라.
이 보살이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을 줄을 알며, 마음이 지극히 화평하며, 함께 있으면서 안락하며, 꾸미거나 숨김이 없이 정직하며, 유순하여 빽빽한 숲과 같은 행이 없으며, 아만이 전혀 없고, 가르침을 잘 받아서 말하는 이의 뜻을 얻느니라. 이 보살이 이와 같이 참는 일을 성취하고, 이와 같이 조화롭고 부드러움을 성취하고, 이와 같이 고요함을 성취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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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과(成德果) : 덕을 이룬 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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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종심(十種心) : 열 가지 마음을 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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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차보살(此菩薩)이 : 이 보살이
수소기방편혜(隨所起方便慧)하야 : 이러한 바 방편의 지혜를 따라서
수집어도(修集於道)와 : 도와
급조도분(及助道分)하야 : 조도분을 수집해서
여시이득윤택심(如是而得潤澤心)과 : 이와같이 열 가지 마음을 얻어서 윤택한 마음과
유연심(柔軟心)과 : 유연한 부드러운 마음과
조순심(調順心)과 : 아주 조화롭고 순한 마음과
이익안락심(利益安樂心)과 : 남에게 이익하고 편안하게 하는 마음과
무잡염심(無雜染心)과 : 잡염이 뒤섞인 마음과.
별 소득도 없으면서 온갖 이런저런 생각이 복잡한 사람들이 많다. 그런 잡염이 없는 마음과
구상상승법심(求上上勝法心)과 : 아주 높은 수승한 법을 구하는 마음과
구수승지혜심(求殊勝智慧心)과 : 수승한 지혜를 구하는 마음과
구일체세간심(救一切世間心)과 : 일체 세상 사람들을 전부 구제하는 마음과
공경존덕무위교명심(恭敬尊德無違敎命心)과 : 덕이 높은 분을 공경해서 그 사람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는 마음과
수소문법개선수행심(隨所聞法皆善修行心)이니라: 들은 바 법을 따라서 다 잘 수행하는 마음을 얻느니라. 염혜지에서 얻는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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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보살(此菩薩)이 : 이 보살이
지은(知恩)하며 : 은혜를 알고
지보은(知報恩)하며 : 은혜를 갚을 줄 알며
심극화선(心極和善)하며 : 마음이 지극히 화선하며
동주안락(同住安樂)하며 : 같이 머묾에 안락하고
질직(質直)하며: 아주 순박하고 정직하며
유연(柔軟)하며 : 유연하며 아주 부드러우며
무조림행(無稠林行)하며 : 아주 소견이 빽빽해서. 도대체가 그 사람 고집이 아주 센 사람도 있다. 착한데 융통성도 없고 고집만 센 사람이 있는데 그런 것이 조림행이다.
정직하기도 하고 착하기도 하니까 탓할 것은 없는데 그 사람과 같이 있으면 어딘가 답답하다. 그런 조림행이 없으며
무유아만(無有我慢)하며 : 아만이 없으며
선수교회(善受敎誨)하며 : 교회,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며
득설자의(得說者意)하나니: 말하는 사람의 뜻을 얻나니
차보살(此菩薩)이 : 이 보살이
여시인성취(如是忍成就)하며 : 받아들이는 일이다. 남의 말을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은 참아야 되는 일이다. 참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도 내 마음에는 크게 자연스럽게 용납은 안되지만 그것을 잘 이해하고 참아야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인(忍)은 인수(忍受) 받을 수자하고 연결이 된다. 이와같이 인수함을 성취하며
여시조유성취(如是調柔成就)하며 : 아주 조화롭고 부드러움을 성취하며
여시적멸성취(如是寂滅成就)니라 : 이와같이 적멸함을 성취하느니라. 궁극에 가서는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아서 아주 적정해지는 상태 그것을 성취하느니라.
나, 十種精進
如是忍調柔寂滅成就하야 淨治後地業하야 作意修行時에 得不休息精進과 不雜染精進과 不退轉精進과 廣大精進과 無邊精進과 熾然精進과 無等等精進과 無能壞精進과 成就一切衆生精進과 善分別道非道精進이니라 是菩薩이 心界淸淨하며 深心不失하며 悟解明利하며 善根增長하며 離世垢濁하며 斷諸疑惑하며 明斷具足하며 喜樂充滿하며 佛親護念하며 無量志樂을 皆悉成就니라
“이와 같이 참는 일과 조화롭고 부드럽고 고요함을 성취하여 다음 지위의 업을 깨끗이 다스리고, 마음을 두어 수행할 때에 쉬지 않는 정진과, 섞이고 물들지 않는 정진과, 물러나지 않는 정진과, 광대한 정진과, 끝이 없는 정진과, 치성한 정진과, 같음이 없는 데 같은 정진과, 깨뜨릴 수 없는 정진과, 일체 중생을 성취하는 정진과, 도와 도 아닌 것을 잘 분별하는 정진을 얻느니라.
이 보살이 마음 경계[心界]가 청정하고 깊은 마음을 잃지 아니하여 깨달아 아는 것이 명쾌하고 선근이 증장하며, 세간의 혼탁을 여의고 모든 의혹을 끊었으며, 밝게 판단함이 구족하고 기쁨이 충만하며, 부처님이 친히 호념(護念)하여 한량없이 좋은 뜻을 모두 성취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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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종정진(十種精進) : 열 가지 정진을 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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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인조유적멸성취(如是忍調柔寂滅成就)하야 :이와같이 인조유 그 다음에 적멸 이런 것을 성취해서 인수 조유 적멸 이런 것은 앞에 있었던 이야기 그대로다. 그런 것을 성취해서
정치후지업(淨治後地業)하야 : 다음에 닦을 업을 잘 청정하게 다스려서
작의수행시(作意修行時)에 : 마음을 내서 수행할 때
득불휴식정진(得不休息精進)과 : 십종 정진을 얻는데 불휴식 잡염과
부잡염정진(不雜染精進)과 : 부잡염정진과 뭔가 뒤섞이지 않은, 기도를 하면서도 이것저것 복잡하게 뭘 그렇게 잊어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좌선할 때도 보면 좌선하다가 금방 일어나서 가서 뭘 하고 와서 또 앉아서 좌선하고 또 그리고 나서 조금 있다가 또 나가서 볼일 보고 와서 또 하고 한 시간 좌선하면 한 너댓 번 일어나서 가서 무슨 볼일을 보고 온다.
그렇게 해서 무슨 좌선이 되고 무슨 기도가 되겠는가?
잡염이 없는 정진과
불퇴전정진(不退轉精進)과 :불퇴전 정진과, 퇴전도 참 문제다. 작심 3일이라든지 뭘 좀 한다 하면 꾸준히 해야되는데 퇴전하지 않는 정진과
광대정진(廣大精進)과 : 넓고 큰 정진과
무변정진(無邊精進)과 : 가히 없는 정진과
치연정진(熾然精進)과 : 아주 열심히 하는 정진과
무등등정진(無等等精進)과 : 같을 이 없이 같은 정진과
무능괴정진(無能壞精進)과 : 누구도 그 사람의 정진은 무너뜨릴 수가 없다. 그 사람 정진은 못 말린다.
그것이 무능괴, 능히 파괴할 수 없는 정진이다.
성취일체중생정진(成就一切衆生精進)과 : 일체 중생을 다 이익되게 하고 일체 중생에게 덕이 되고 도움이 되는 정진과
선분별도비도정진(善分別道非道精進)이니라 : 도와 도 아닌 것을 잘 분별하는 정진을 얻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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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보살(是菩薩)이 : 이것이 보살이
심계정청(心界淸淨)하며: 심계가 청정하며
심심부실(深心不失)하며 : 깊은 마음이 잃지 아니하며
오해명리(悟解明利)하며: 깨달아 아는 것이 아주 밝고 날카로우며
선근증장(善根增長)하며 : 선근이 자꾸 자라나며
이세구탁(離世垢濁)하며 : 세상의 때와 더러운 번뇌를 다 떠나며
단제의혹(斷諸疑惑)하며 : 모든 의혹을 다 끊는 것이며
명단구족(明斷具足)하며 : 밝게 판단함이 구족하며, 명단은 아주 명쾌하게 모든 일을 다 판단하는 것이다. 명단이 구족하며
희락충만(喜樂充滿)하며 : 희락이 충만하며
불친호념(佛親護念)하며 : 부처님이 친히 호렴하며
무량지락(無量志樂)을 : 한량없는 뜻과 즐거움을
개실성취(皆悉成就)니라 : 다 성취하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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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부처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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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方廣佛華嚴經 大方廣佛華嚴經 大方廣佛華嚴經...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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