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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은 전통사회에서 나오는 힘으로 가능하다 인세반 박사 특별강연회 둘째 날 기사
통일을 위한 해외동포들의 준비 2/11
에서 인용하되 임의로 조금 축약한 것입니다.
유진 벨 선교사는 1895년 미국남장로교에서 파송받았다 (한국명:배유지).
그는 호남 지역에 여러 학교와 광주기독병원을 세웠다.
그는 호남 지방 선교에 헌신하다가 격무로 건강이 악화되어
1925년 9월 28일 57세로 별세하여 광주 양림동 묘역에 안장되었다.
유진벨은 선교 사역을 하는 도중에 첫 부인 로티 위더스픈(1867-1901)과 아들을 잃기도 하였으나
한국을 떠나지 않고 평생 한국의 복음화에 힘썼다.
로티 위더스픈은 심장병에 걸렸으나 치료도 받지 못하고 고생하다가 남편이 전도 여행하는 중에 홀로 세상을 떠나 양화진에 묻혔다.
유진 벨은 1904년 마가렛 벨(Margarlet W. Bell)과 재혼했으나,
마가렛 벨은 1919년 3월 제암리교회 학살 사건을 조사하고 광주로 돌아오다가
수원 병점역에서 열차와 자동차가 충돌하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마가렛 벨은 양림동 선교사묘역에 유진벨 목사님과 함께 나란히 묻혀 계신다.
유진 벨 선교사는 위더스푼과 사이에서 아들 헨리와 딸 샤롯 이렇게 1남 1녀를 둔다. 이중 샤롯은 당시 군산에서 선교사로 일하던 21살의 젊은 윌리엄 린튼과 결혼한다
윌리엄 린튼은 미국 조지아 주 출신의 선교사로 캔자스 출신이었던 유진 벨과 마찬가지로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송되어 한국에 들어와 군산과 전주를 중심으로 선교 사역을 펼쳤다.
그리고 샤론 벨과 윌리엄 린튼의 결혼으로 두 가문의 연합 사역이 이루어지고 윌리암 린튼은 전주 기전여고와 전주 신흥고에서 교장으로 재직했다. 신흥고에 재직하던 중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미국으로 추방당하기도 하였다.
"1912년 한국에 발을 딛은 윌리엄 린튼은 한국인들에게 인돈 이란 이름으로 불리며 충정·호남지역에서 영어와 성경을 통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윌리엄과 샤론 린튼은 해방 후에 다시 한국에 돌아왔으며,
대전에 한남대학교(HNU) (당시 대전대학, 1956년에 설립)를 세워 해방 후 한국 사회를 이끌어 갈 젊은 기독교 지도자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이 부부는 네 아들을 두게 된다.
이 부부의 네 아들 중
넷째 아들 드와이트(Linton, Thomas Dwight, 한국명: 인도아)는
전주에서 1927년 12월 4일 출생하여 광주에서 교육자 및 순회복음 선교사로
그의 부인 Margie와 함께 1978년 귀국할 때까지 31년간 활동했다.
셋째 아들 휴 M. 린튼 (Linton, Hugh Maclntyre, 한국명: 인휴)은
1926년 군산에서 출생하여 1947년 5월 31일에 베티(Elizabeth Flowers, 일명 Betty)와 결혼했다.
1950년 콜럼비아 신학교를 졸업하고 1953년 프린스턴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부부선교사로 1953년 내한하여 전라남도 순천 주위의 농촌선교사로 활동하였다.
주로 전라남도의 섬 지방과 벽지를 개척하며 많은 교회를 세웠다.
검정 고무신이 그의 별명이 될 정도로 검소하고 소박한 자세로
전라도 주민들을 위해 봉사하였다.
한국에서 31년간 선교사 사역을 담당한던 그는
1984년 4월 10일 자동차 사고로 별세하여 순천에 안장되었다.
휴 린튼의 부인 로이스 린튼은 (위 동영상)
1960년 순천 일대에 큰 수해가 나면서 결핵이 만연해지자,
결핵진료소와 요양원을 세우는 등 결핵 환자들을 위해 평생을 봉사하였다.
이 공로로 1996년에 호암상을 수상하였으며,
이때 받은 상금 5,000만 원으로 북한에 앰뷸런스를 기증하였다.
휴 린튼과 로이스 인튼의 아들 스티브 린튼은 유진벨재단 이사장이 되어
자신의 어머니가 남녘 땅에서 평생을 봉사해왔던 결핵 퇴치 사업을 밑거름으로 하여
현재까지 10여년 동안 북녘의 동포들을 위해 결핵 퇴치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선교사 가계를 간단히 종합하면
1대 유진 벨 선교사: 호남지방 선교와 광주기독병원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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