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찔레꽃
사랑한다는 것은 속을 비워 내는 일 이맘때면 간다 하고 말만 하는 친구에게 수녀원 울담을 넘는 찔레향기 보냈다
얼마나 닦고 닦아야 하늘빛을 담을까 갓 마른 미사보 쓰고 묵상기도 드리는 동안 누군가 창밖을 지켜 오래오래 서 있다
♧ 매화꽃 아버지
1 끝내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우고야 마는 고고한 그 성품도 급하긴 했나 보네 퇴임식 며칠 앞두고 뒤뜰 활짝 밝히다
2 한 생각 쏟아 놓고 묵향으로 번지다가 메마른 혈관 속에 수혈하는 봄비처럼 옹이진 목청을 높여 환히 웃는 아버지
♧ 자목련이 가는 길
봄철 산란기엔 대지도 아파온다
며칠째 배란통에 탱탱한 봉오리들
진보라 새틴스티치 손끝에서 아리다
눈 감고도 길을 찾는 엄마의 직감 따라
눈뜨면 잠옷차림 아이자랑 쏟아놓던
늦도록 아파트 공원에 그 친구가 서 있다
뜬금없이 왔다가 소리 없이 뜨는 친구
목젖이 보이도록 호탕하게 웃는 저기,
미안해, 어깨 툭 치며 자목련이 지고 있다
♧ 절물 복수초
노보살 조반 같은 진눈깨비 내리던 날 돌에도 꽃을 피우는 중덕해안 발파소식에
화들짝 놀란 꽃망울 염주알을 굴린다
작은 키 더 낮추고 마음까지 땅에 대고 불길 솟듯 깃발 드는 산등성 나비 떼들
펼쳐라 장엄한 몸짓, 함성보다 더 크다
♧ 서귀포 이야기 · 8
서귀포에 핀 꽃에선 꽃술마다 파도가 친다
여태껏 입술이 푸른 더 아파라, 해녀의 바다
어젯밤 눈물 다 씻고 달개비꽃 피었다.
♧ 봄날, 무등이왓
길 위를 헤매다가 걸어 찾은 발자국에 두리번거리는 내 눈빛에 댓잎들 수런수런 천진이 광대나물은 곁눈질만 하는데
파편처럼 새겨 놓은 마을표석 없더라도 화전민 아버지의 또 아버지가 살았음직 그 겨울 아픔이 인다 태워서 더 짙은 자리
발자국 감춰 주던 눈발도 핏빛이었을, 육십여 년 대숲에다 봄 햇살이 자맥질하면 대 이을 씨감자 같은 또 한 뼘의 발을 뻗고
헛묘 위 까마귀가 길놀이 펼치는 곳 살아서 못 부른 배 죽어서 원을 푸나 팽나무 움트는 소리도 빈 들길에 요동쳐……
♧ 어머니의 초파일
더딘 발걸음에 긴 겨울을 보내고서도
올 따라 먼 길 도는 봄기운이 차디차
칠순의 관절마디마디 꽃망울이 저리다
부처님 오신 날엔 꽃들도 등을 단다
연꽃등 팔각등 골 깊은 주름등까지
까칠한 찔레송이도 절 앞까지 내려와
엎드린 자리에서 엎드린 채 불을 켜며
올레길 전 구간에 한 올 한 올 떨치고 온
냉이꽃 하얀 족적이 말씀처럼 찍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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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김창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