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궁이란 무엇인가?
사적 제149호 칠궁 이곳은 조선시대 일곱 후궁의 신주를 모신 곳이다. 비록 정실 왕비는 되지 못했지만 자신이 낳은 아들이 왕이 됐던 여인들 그들은 궁녀였다. - 그곳엔 궁녀로서 최고의 위치에 오른 이들이 있다. 서울 궁정동, 청와대 경내 -
평소 굳게 닫혀 있는 이 문을 들어서면 오래된 재실을 볼 수 있다. 이곳엔 7개의 사당이 있는데 후궁이 낳은 왕들이 자신들의 생모를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중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를 제외한나머지 여섯명은 궁녀 출신이다. "후궁 어머니가 꼭 왕비이지 않은 왕들도 상당히 있다. 그런 왕들의 생모는 절대로 종묘에는 들어갈 수 없으나 그렇다고 일반 사당하고 똑같이 모실 수 없기 때문에 격을 높여서 궁자를 붙여서 서울의 여기저기에 그런 사당들을 마련했던 것이다." 그중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는 무수리로 궁녀 중 가장 비천한 신분 이었다. 영조는 무수리 출신의 생모에 대한 효심과 열등의식으로 직위초 부터 숙빈최씨의 묘를 능으로 만들길 원했다. "영조는 자기 어머니 숙빈 최씨의 신분이 미천 하다는데에 대해서 상당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영조는 왕이 되던 그 이듬해 원년에 이곳 사당을 짓고 육상묘라고 하였다. 왕의 사친이지만 바로 궁이라고 붙이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냉천정 사당에는 영조의 어진이 보관돼 있었다. 영조는 그 어떤 곳보다 이곳을 자주 들렀다고 한다. 영조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정이 깃들어 있다.
냉천정(冷泉亭) : 냉천 옆에 지은 건물로, 육상궁(毓祥宮)의 부속 건물이다.
냉천정(冷泉亭) 편액 : 순조의 어필로 추정하고 있다
원래 육상궁을 제외한 나머지 사당은 서울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1908년 각 사당을 이곳에 모아 육궁이라 불렀고 1929년 순헌귀비 엄 씨의 사당이 옮겨 오면서 칠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칠궁에 모셔진 여섯명의 왕의 생모들 그들은 궁녀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었다. 조선전기 임금들은 주로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에서 정사를 보았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소실되자 이후 3백년간은 창덕궁이 나라의 크고 작은 일을 치르는 역사의 주무대가 되었다. 내용출처 : 이 글은 "역사스페셜 카페의 지식카페게시판"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조선시대 7명의 왕 또는 추존왕의 모친을 모신 사당] 궁정동 칠궁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에 있다. 원래 이 자리는 1724년(경종 4) 8월 영조가 왕위에 오른 뒤, 후궁 출신의 빈(嬪)이었기 때문에 국가적인 봉사(奉祀)의 은전을 받지 못한 그의 모친 최숙빈(崔淑嬪)을 추념하여 사당을 짓고 봉사한 육상궁(毓祥宮)이 있던 곳이었다. 그 후 국운이 기울어진 1908년(융희 2), 각 묘전(廟典)의 제전(祭典)을 간소하게 하기 위하여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왕 또는 추존왕의 사친(私親:모친)을 모신 다섯 사당을 이곳에 옮겨 육궁(六宮)이라 하였고, 이후 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 은(垠)의 생모인 순비 엄씨(淳妃嚴氏)의 사당을 이곳에 옮겨 칠궁이라 하였다.
제 1궁 육상궁(毓祥宮) 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사당
1966년 3월 22일 사적 제149호로 지정되었다. 면적 2만 5791㎡인 궁지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宮井洞)에 있다. 1725년(영조 1) 영조가 즉위하면서 생모(生母)를 기리기 위해 묘를 지었는데, 지을 당시에는 숙빈묘라 이름하였다. 1744년(영조 20)에 육상묘로 개칭하였으며, 1753년(영조 29)에는 육상궁으로 승격하였다. 1773년(영조 49)에는 영조의 화상 두 폭을 봉안하였다. 1882년(고종 19) 8월 불이 나서 궁이 소실되자 이듬해 다시 지었다. 지금의 건물은 이때 지어진 것이다. 1908년(융희 2) 7월 23일 예절이 번거로우면 본뜻을 잃는다는 황제의 조칙(詔勅)으로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궁들을 합설(合設)하였다. 이에 따라 원종(元宗)의 어머니 인빈 김씨(仁嬪金氏)의 묘인 저경궁(儲慶宮), 경종(景宗)의 어머니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묘인 대빈궁(大嬪宮), 진종(眞宗)의 어머니 정빈 이씨(靖嬪李氏)의 묘인 연호궁(延祜宮), 장조(莊祖)의 어머니 영빈 이씨(暎嬪李氏)의 묘인 선희궁(宣禧宮), 순조(純祖)의 어머니 수빈 박씨(綏嬪朴氏)의 묘인 경우궁(景祐宮) 등 5궁의 신위(神位)를 육상궁에 함께 봉안(奉安)하면서 육궁(六宮)이라 하였다. 5궁이 육상궁에 합쳐지면서 연우궁을 제외한 4궁의 건물과 토지는 모두 국유(國有)로 되었다. 1929년에 영친왕의 어머니인 순빈 엄씨(淳嬪嚴氏)의 신위를 봉안함에 따라 칠궁(七宮)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현재 육상궁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된 묘우(廟宇)가 있고, 그 앞에는 동서각(東西閣)과 배각(拜閣)이 있으며, 육상궁 왼쪽에는 네 개의 묘우가 독립하여 있다. 육상궁을 비롯한 7궁은 조선 후기 왕실의 후궁들 가운데 왕이나 추존된 왕의 생모의 신위가 봉안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건물이다.
제 2궁 저경궁(儲慶宮) 선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원종(仁祖의 아버지)의 생모 인빈 김씨(仁嬪金氏)의 사당
원래는 조선 제16대 임금 인조(仁祖)의 생부인 추존왕(追尊王) 원종(元宗)의 구저(舊邸)이자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잠저(潛邸)로, 지금의 중구 남대문로 3가에 해당하는 남부 회현방(會賢坊) 송현(松峴)에 있었다. 이름 역시 송현궁(松峴宮)이었는데, 1755년(영조 31) 원종의 생모인 경혜유덕인빈김씨 (敬惠裕德仁嬪金氏)의 위패를 봉안하고 향사(享祀)하면서 저경궁으로 고쳤다. 그러다 1870년(고종 7) 경우궁(景祐宮)의 별묘로 위패를 이안(移安)하였다가, 1886년 경우궁이 옥인동으로 이건되면서 함께 옮겨졌다. 1908년(순종 2) 다시 인빈의 위패를 궁정동에 있는 육상궁(毓祥宮)으로 이안하였는데, 이후 궁의 원래 건물은 1927년까지 남아 있다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지금의 서울대학교 치과대학)를 건축하면서 철거되었다. 당시 궁의 정문과 하마비(下馬碑)는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 뒤뜰에 보존되어 오다가 1933년 정문은 철거되고, 하마비만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으로 옮겨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정면 3칸에 기둥은 네모 기둥이며, 전각의 기둥 위에 덧붙이는 소의 혀 모양의 쇠서받침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1-1번지에 있으며, 조선시대 후궁 7명의 위패를 봉안한 칠궁(七宮)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
제 3궁 대빈궁(大嬪宮) 숙종의 후궁이며 경종(영조의 이복형)의 생모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사당
1722년(경종 2)에 건립되었다. 희빈 장씨는 같은 칠궁(七宮) 안의 육상궁(毓祥宮)에 봉안되어 있는 숙빈 최씨(淑嬪崔氏)와 마찬가지로 숙종의 후궁이자 경종의 어머니이다.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를 폐비시키고, 후궁으로는 유일하게 왕후에까지 올랐다가 5년 만에 다시 폐비가 되어 사약을 받았다. 그후 1722년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되고, 동시에 대빈궁이 세워지면서 이곳에 신주가 봉안되었다. 건립 당시에는 지금의 낙원동에 해당하는 중부(中部) 경행방(慶幸坊)에 있었으나, 1870년(고종 7) 육상궁으로 옮겼다. 이어 1887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렸다가 1908년(순종 2) 다시 육상궁 안으로 옮겼다. 이때까지만 해도 육상궁에는 6명의 후궁 신주만 봉안되어 있어 육궁(六宮)이라고 하다가 1929년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의 덕안궁(德安宮)을 옮겨오면서 지금과 같이 칠궁이라 하게 되었다. 목조건물로, 건축 기법은 칠궁의 다른 건물과 비슷하지만, 기둥이 모두 두리기둥으로 되어 있어 좀더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제 4궁 연호궁(延祜宮)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진종(영조의 첫째 아들)의 생모인 정빈 이씨(靖嬪李氏)의 사당으로 현재 신위는 육상궁에 합사
정빈 이씨는 영조의 후궁으로, 소원(昭媛)이 된 뒤 1719년(숙종 45) 효장세자 (孝章世子)를 낳았는데, 이가 곧 뒷날 왕으로 추존된 진종(眞宗)이다. 1721년(경종 1) 세상을 떠난 뒤 1724년 영조가 즉위하면서 빈(嬪)에 봉해졌다. 연호궁은 바로 이 정빈 이씨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묘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있는 유길원(綏吉園:사적 359)이다. 정조가 즉위한 뒤 진종을 왕으로 추존하면서 위패를 봉안한 궁호(宮號)를 연호궁이라 하고, 1778년(정조 2) 경복궁(景福宮) 북부 순화방(順化坊)에 사당을 세웠다. 이곳은 육상궁(毓祥宮)과 가까운 곳으로, 1870년(고종 7) 육상궁 건물 안에 합사되어 오늘에 이른다. 건축양식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목조건물이며, 겹처마에 맞배지붕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1-1번지 칠궁(七宮) 안에 있으며, 육상궁 건물에 합사되어 있는데, 왼쪽이 육상묘이고, 오른쪽이 연호궁이다.
제 5궁 선희궁(宣禧宮)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장조(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映嬪李氏)의 사당으로 현재 신위는 경우궁에 합사 영빈 이씨가 사망한 해인 1764년(영조 40)에 건립되었다. 원래 영빈 이씨의 시호(諡號)를 따서 의열묘(義烈廟)라 하였다가, 1788년(정조 12)에 선희궁으로 고쳤다. 건립 당시에는 지금의 종로구 신교동(新橋洞)에 해당하는 한성(漢城) 북부 순화방 (順化坊)에 있었다. 이후 1870년(고종 7) 위패를 육상궁(毓祥宮)으로 옮겼다가, 1896년 선희궁으로 되돌린 뒤, 1908년(순종 2) 다시 육상궁으로 옮겼다. 지금까지도 당시의 궁터(서울시유형문화재 32)가 신교동에 남아 있다.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의 칠궁(七宮) 안에 있는데, 경우궁(景祐宮) 묘사(廟祀) 안에 합사되어 있다. 목조건물로, 내부 제단의 투각이 뛰어나며, 제단이 단색 옻칠로 되어 있어 칠궁의 다른 제단에 비해 화려하지 않고 단출한 것이 특징이다.
제 6궁 경우궁(景祐宮)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綏嬪朴氏)의 사당
임금의 생모라도 정실 왕후가 아니기 때문에 위패가 종묘에 들어갈 수 없어 따로 모신 별묘(別廟)로, 1824년(순조 24) 북부 양덕방(陽德坊:桂洞 전 휘문고교 교정)에 사당을 짓고, 그해 12월 궁호(宮號)를 경우궁이라 하여 위패를 모셨다. 1884년(고종 21) 10월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金玉均) 등 개화당(開化黨)에 의하여, 경우궁에 일시 강제로 이어(移御)한 고종은 여기에서 민태호(閔台鎬) 등 척신(戚臣)들이 참살당하는 곤욕을 겪은 후, 이듬해인 1885년 경우궁을 인왕동(현 玉仁洞)에 옮겨 짓도록 명하였고, 국운이 기울어지고 일제의 세력이 궁중에 범람할 무렵인 1908년(융희 2)에는 종로구 궁정동(宮井洞)에 있는 육상궁 (毓祥宮: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사당)에 저경궁(儲慶宮:元宗의 생모궁)· 대빈궁(大嬪宮:景宗의 생모궁)·연호궁(延祜宮:眞宗의 생모궁)·선희궁 (宣禧宮:사도세자의 생모궁)과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위패를 함께 봉향하여 6궁(六宮)이라 하였으며, 1929년 이은(李垠)의 어머니 순비 엄씨(淳妃嚴氏)의 덕안궁(德安宮)을 합하여 7궁이 되었다.
제 7궁 덕안궁(德安宮) 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의 생모인 순비 엄씨의 사당
1903년(고종 40)에 건립되었다. 순헌황귀비는 영친왕 이은(李垠)의 어머니로, 1897년에 영친왕을 낳으면서 귀인으로 책봉된 뒤, 1903년 순헌황귀비 칭호를 받았다. 이 때부터 경운궁(慶運宮) 안의 명례궁(明禮宮) 터에 경선궁(慶善宮)을 세우고 이 곳에서 살다가 1911년 7월 사망한 뒤 이름을 덕안궁으로 고쳤다. 이후 1913년 지금의 태평로1가에 새로 궁을 짓고, 엄비의 묘우(廟宇)라 하여 궁 이름을 덕안궁이라 하였다. 1929년 7월 덕안궁을 육상궁(毓祥宮)으로 옮겨 현재는 종로구 궁정동의 칠궁(七宮) 안에 있는데, 이전까지만 해도 육궁(六宮)이라 하다가 이 덕안궁이 옮겨오면서 비로소 칠궁이라 하게 되었다. 정면 3칸의 목조건물로, 앞 툇간이 틔어 있으며, 네모 기둥에 초익공 (初翼工) 형태를 취하고 있다. 중앙에 화려한 무늬로 투각된 제단과 위패가 놓여 있고, 측면은 중방 아래까지만 벽돌을 쌓았으며, 뒷면은 상방까지 벽돌을 둘러 쌓았다. 사당 앞 서쪽에 남북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이안청(移安廳)으로 쓰이는 부속건물이 있다. 1968년 1·21사태 이후 경비상의 이유로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으나, 2001년 11월 24일부터 다시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
출처: 한겨레 역사문학 연구회 http://cafe.daum.net/gangseomunhyup/1zv3/1843?q=%EC%B9%A0%EA%B6%8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