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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1월 30일 목요일
[(녹) 연중 제3주간 목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가자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확고한 믿음으로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간직하고 서로 자극을 주어 사랑하도록 주의를 기울입시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0,19-25
19 형제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피 덕분에 성소에 들어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20 그분께서는 그 휘장을 관통하는 새롭고도 살아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곧 당신의 몸을 통하여 그리해 주셨습니다.
21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사제가 계십니다.
22 그러니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해졌으며,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말끔히 씻겼습니다.
23 우리가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간직합시다.
약속해 주신 분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24 서로 자극을 주어 사랑과 선행을 하도록 주의를 기울입시다.
25 어떤 이들이 습관적으로 그러듯이
우리의 모임을 소홀히 하지 말고, 서로 격려합시다.
여러분도 보다시피 그날이 가까이 오고 있으니 더욱더 그렇게 합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등불은 등경 위에 놓는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을 것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21-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1 말씀하셨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22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23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24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25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고등부 주일 학교 시절 학생 레지오 회합을 하던 교리실 한쪽 벽면에 이런 글이 붙어 있었습니다. ‘빛이 되지 못하면, 빛을 반사하는 거울이라도 되어라.’ 표현은 정확하지 않지만 핵심 내용은 같습니다. 친구들과 그 글이 매우 인상적이라는 나눔을 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한 친구는 그 말 그대로 자신은 빛은 아니지만, 적어도 빛을 반사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였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마르 4,21)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최고의 등불은 예수님이십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진실과 사랑으로 밝아진 두 눈은 새 삶을 찾아 나아가게 하는 등불이 되겠지요.
오늘 독서는 우리의 등불이신 대사제 그리스도 곁에서 그 빛을 반사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일러 줍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피로 지성소의 휘장을 가르시어 우리가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라 하십니다. 그분의 약속을 믿고 ‘희망’을 굳게 간직하라 하십니다. 우리의 모임(공동체)을 소홀히 하지 말고, 서로 ‘사랑’으로 격려하고 북돋워 주라 하십니다. 우리가 빛은 되지 못하지만, 등불이신 주님께서 건네주신 신망애 삼덕의 선물로 빛을 비추는 거울은 될 수 있겠지요.(김동희 모세 신부)
우리 각자의 얼굴에는 스승 예수님의 얼굴이 반영되어야 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요즘에야 찾아보기가 힘들어 골동품 가게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데,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시절, 중요한 가재도구 중에 하나가 밤을 밝히는 등잔이요 등잔을 얹어두는 등경이었습니다.
제 어린 시절 전기는 들어왔지만, 전력 수급이 여의치 않아 자주 정전이 되었습니다. 그럴 때 마다 선친께서는 다락방에서 등잔을 꺼내 불을 붙이고 높은 곳에 위치한 등경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하필 그럴 때, 라디오에서는 처녀 귀신, 몽달 귀신, 달걀 귀신 등 각종 귀신들이 총 출동하는 전설 따라 삼천리가 흘러나왔는데, 듣지 말아야지 하면서 듣다가 화장실도 못가고 끙끙대던 일이 엊그제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등불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무엇을 강조하고 계시는지, 조금 아리송합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마르 4,21-23)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등불은 다른 무엇에 앞서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당신 존재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따라서 당신께서는 거듭되는 박해와 살해의 위협 앞에서도 당신의 신원을 드러낼 수 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또 다른 그리스도로 살아야 하는 우리도 마찬가지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그분의 가르침으로 인해 어떤 소중한 깨달음이나 깊은 통찰을 얻게 되었다면, 그것은 나만 비밀스럽게 간직해야 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꽁꽁 숨겨 둬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 소중한 은총을 동료 인간들, 그리고 세상과 나누고 공유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께서 선물로 주신 복음, 즉 구원의 기쁜 소식을 자신 안에 붙들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 만민 모두가 아무런 차별없이 골고루 혜택을 받도록 그분의 복음을 적극적으로 전파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비밀리에 가르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회당에서, 광장에서, 공개석상에서, 공적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분 가르침의 진의(眞意)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이 종래의 지도자들과는 달리 판이하게 신선했고 파격적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열두 사도들 가운데서도 최측근 제자들과 아주 소수의 특정인들만 그분의 말씀을 이해했고, 하늘나라의 신비를 정확히 파악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결코 소수의 특정한 사람들만의 것이 절대 아닙니다. 복음은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할 보편적인 가르침입니다. 복음은 모든 인류에게 비춰져야 할 큰 빛입니다.
‘가톨릭’이라는 용어가 지니는 의미는 ‘공번되다.’ ‘보편적이다.’ ‘두루두루 광범위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가톨릭교회 공동체가 지향하는 바는 열린 교회입니다. 너그럽고 관대한 교회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우리끼리, 마음에 드는 소수의 사람들끼리만 비밀리에 운영되는 공동체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거나 파벌을 형성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느님 현존의 구체적인 표지가 되어야 하며,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을 증거해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특별히 불림을 받은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제자 자신들에게 큰 영예고 은총이지만, 그것을 자신들 안에 가둬두고 자신들의 영광으로만 돌린다면, 큰 죄악이 되고 맙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값진 보물입니다. 그러나 그 보물은 인류를 위해 사용하라고 맡겨놓은 보물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깨달음은 공동체와 인류를 위해 봉사하라고 주신 선물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등불 같은 존재여야 마땅합니다. 활활 타올라야 하고, 동료 인간들의 어두운 삶을 환히 비춰줘야 합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스승 예수님의 얼굴이 반영되어 있어야 합니다.
내 안의 작은 불꽃 발견하고 키우는 법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두 주제가 하나로 합쳐진 내용인데, 그 내용 전체의 의미를 올바로 깨닫기는 쉽지 않습니다. 첫 번째 주제는 이것입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두 번째 주제는 이것입니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이 관계 없어 보이는 두 주제를 하나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 안에 분명 작은 빛 하나는 있습니다. 이 빛은 등경 위에 올려지면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능력입니다. 그런데 만약 등경 위에 올려져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불빛은 더 커질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닐까요? 능력이 없어 감추어두면 있는 것마저 꺼져버릴 것이란 말씀이 아닐까요?
요즘 사제가 되지 않으려는 이유 중 첫 번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는 자기 꿈이나 결혼을 위해서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랍니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원치 않아서라고 합니다. 스마트폰만 보며 살던 아이들이 사람들 앞에 나서서 평가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것도 하나의 능력입니다. 그 빛을 감추어두면 어떻게 될까요? 사장됩니다. 마치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벙어리 삼룡이’라고 할 정도로 말을 잘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잘하는 편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꺼내어 등경 위에 두기로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조금씩 더 능력이 커지는 것을 느낍니다. 만약 불빛이 작다고 없는 것처럼 덮어버렸다면 분명 꺼져버렸을 능력입니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주인공 윌 헌팅은 MIT에서 청소부로 일하면서도 비범한 수학적 천재성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탁월한 지능을 숨기고, 무명의 단순한 삶을 선택합니다. 윌이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그의 깊은 감정적 상처와 두려움에 있습니다.
학대적인 환경에서 성장한 윌은 타인에 대한 깊은 불신과 취약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트라우마는 그가 사람들을 밀어내고, 기회를 거부하며,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거나 실패와 거절의 가능성에 직면하는 상황을 피하게 만듭니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심리학자 숀 맥과이어와의 상담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숀은 윌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가 두려움에 직면하도록 도전합니다. 숀은 윌에게 그의 실패와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온전한 삶으로부터 얼마나 막고 있는지 깨닫게 합니다. 특히 숀의 유명한 대사인 “네 잘못이 아니야”(It’s not your fault)는 윌의 방어막을 허물고, 그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내려놓고 자신을 믿기 시작하도록 돕습니다.
우리 각자 안에는 주어진 ‘빛’이 있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쓰라고 주신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어둠을 비추는 빛처럼 자기 안에서 빛을 찾아 등경 위에 놓고 세상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사용해야 더 큰 은총을 받게 됩니다.
영화 ‘헝거 게임’은 디스토피아 세계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로, 이 세계에서 정부인 캐피톨은 ‘헝거 게임’이라는 잔혹한 이벤트를 매년 개최합니다. 이 게임은 각 지역에서 어린 소년소녀들을 ‘조공’으로 선발해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경기장에서 죽음의 전투를 강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잔혹한 이벤트의 목적은 두려움을 심어 캐피톨의 지배를 유지하는 데 있습니다.
주인공인 캐트니스 에버딘은 그녀의 어린 여동생 프림이 조공으로 뽑히자 그녀를 대신해 자원하여 참가합니다. 이로써 캐트니스는 자신을 희생하며 여동생을 보호하려는 사랑과 내면의 강인함을 보여줍니다. 게임에 참가한 캐트니스는 가혹한 상황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는 강한 도덕성을 가지고 경기에 임합니다.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캐트니스는 자주 이타적인 행동을 하며 다른 사람들을 돕습니다. 그녀는 어린 조공인 루와 동맹을 맺고 그녀를 자신의 여동생처럼 보호합니다. 루가 비극적으로 죽은 후, 캐트니스는 그녀의 시신을 꽃으로 장식하며 존경을 표합니다. 이 행동은 캐피톨의 잔혹함에 대한 반항으로 비춰지며, 이를 지켜보는 각 지역의 사람들에게 희망과 저항의 불씨를 심어줍니다.
게임이 계속되면서 캐트니스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고, 캐피톨의 권위에 도전하는 과감한 결정을 내립니다. 마지막 순간, 그녀와 동맹인 피타 멜라크는 서로를 죽이는 대신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위협하며 캐피톨이 그들 둘을 승자로 선언하게 만듭니다. 이는 캐피톨의 조종과 권위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상징적인 행동이 됩니다.
캐트니스의 여정은 여동생을 구하기 위한 이타적인 행동에서 시작되었지만, 그녀는 용기와 연민, 그리고 자신의 도덕적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는 의지를 통해 억압받는 지역들에게 희망과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 잡습니다. 그녀의 작고 선한 행동은 결국 혁명의 불씨를 지피며 거대한 불꽃으로 번져갑니다. 이는 작은 불꽃이라도 목적과 정의라는 연료를 만나면 거대한 화염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주님은 우리 안의 작은 불빛이 이렇게 키우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웃을 위해 무언가라도 도움이 되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안의 빛이 어떤 능력인지를 알아볼 수 있고 그 능력에 집중하여 더 키워나갈 수 있습니다. ‘나는 능력 없는 사람이야.’라는 패배주의에 져서는 안 됩니다. 우린 안에 누구를 막론하고 온 세상을 태울 작은 불씨가 있습니다. 그 불씨는 등경 위에서만 성장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매주 미사에 함께 나오는 부부가 있습니다. 형제님이 2년 전부터 항암 투병을 하고 있었습니다. 작년 1년을 보내면서 조금씩 건강이 나빠졌습니다. 최근에는 휠체어를 타고 미사에 왔는데 1월 첫 주를 지낸 후에는 주일미사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응급실에 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병자성사를 드리기 위해서 병원으로 갔습니다. 항암 과정에서 먹는 약이 내성이 생겨, 약의 용량을 늘렸는데 부작용이 생겨서 병원으로 왔다고 합니다. 형제님을 위해서 기도한 후에 자매님에게 물었습니다. ‘보험은 어찌 됩니까?’ 미국에서는 보험이 없으면 병원비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부부는 우체국에서 함께 근무했다고 합니다. 남편은 건강했지만, 자매님이 당뇨가 있어서 좋은 보험을 들었다고 합니다. 본인 부담 6,000불만 있으면 나머지 병원비용은 보험에서 다 해결해 준다고 합니다.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휴스턴에서 일하던 아들이 재택근무를 허락받아서 집으로 왔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으로 형제님이 일어날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평생 열심히 일했으니, 남은 시간 봉사하며 살고 싶다는 부부의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 미리 준비가 되어 있으면 어려운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저는 뉴욕에 있을 때는 보험을 들지 못했습니다. 매월 내야 하는 보험료를 감당하기에는 신문사의 재정이 여유롭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몸이 크게 아프지 않았고, 교우들이 하는 병원에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달라스에 와서는 보험을 들었습니다. 교구에서 지정해 준 보험사가 있었고, 본당에서 지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치과 치료도 안심하고 받았습니다. 우체국에서 일했던 부부가 만일 보험을 들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긴급한 상황에서 재정적으로도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겁니다. 저도 보험 때문에 도움받은 적이 있습니다. 1995년이니까 30년 전입니다. 교우분의 권유로 우체국 보험에 가입했습니다. 2년이 지난 후에 IMF가 생겼습니다. 형님의 사업도 어려움에 직면했고, 제가 부모님을 모셔야 했습니다. 교구 신협에서 대출받았고, 동창 신부님이 도와주어서 부모님이 머물 집을 마련했습니다. 1년 후에 보험이 만기 되어서 대출금도 갚았고, 동창 신부님이 빌려준 돈도 돌려주었습니다. 그 뒤로 교우들이 권유하는 보험이 있으면 가능하면 가입했고, 시간이 흘러 제게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세상에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희망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보험처럼 돈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길이죠,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겁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아픈 사람을 치유해 주는 겁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마귀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는 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망’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낮기를 원하느냐?, 믿느냐? 구하여라. 얻을 것이다.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찾아라. 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는 찾고 구하는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화답송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 이들이 주님의 얼굴을 찾는 세대이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독서에서 우리가 믿는 신앙이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해졌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간직합시다. 서로 자극을 주어 선행을 하도록 주의를 기울입시다. 우리의 모임을 소홀히 하지 말고, 서로 격려합시다.” 신앙은 결단이고, 신앙은 갈망을 통해서 성장합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 하느님께로 나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성인
성녀 히야친타 마리스코티 (Hyacintha Mariscotti)
활동년도 : 1585-1640년
신분 : 수녀
지역 :
같은 이름 : 마리스코티, 히야낀따, 히야친따, 히야킨따, 히야킨타
이탈리아 비테르보(Viterbo) 인근 비냐렐로(Vignarello)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녀 히야친타 마리스코티(Hyacintha de Mariscottis)는 비테르보의 성 베르나르디누스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았고, 자신과 혼담이 오가던 한 후작이 그녀의 여동생과 결혼하게 된 사건으로 크게 충격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성 베르나르디누스 수녀원에 입회한 그녀는 히야친타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녀는 수도생활 초기 10여 년간 여전히 사치스럽고 개인적 생활로 수녀회에 나쁜 영향을 끼쳤다.
그러다가 어느 날 중병에 걸려 고해성사를 하면서 과거를 참회하고 진정한 수도자의 삶을 살게 되었다.
성녀 히야친타의 가장 큰 덕은 애덕으로 수도원이란 한계를 뛰어넘을 만큼 위대하였다.
그녀는 병자와 노인, 가난한 이들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보였다.
비테르보 지역에 전염병이 돌았을 때 그녀는 병자 간호에 헌신하였고 두 개의 자선 단체도 설립하였다. 그러다가 1640년 1월 30일 비테르보에서 세상을 떠났다.
성녀 히야친타는 1726년 9월 1일 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807년 5월 24일 교황 비오 7세(Pius V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이때 시성 선언문에 이런 말이 나온다.
“그녀의 고행은 자신의 삶 전체가 하나의 지속적인 기적임을 보여주었고, 그녀의 사랑의 사도직은 수많은 설교보다도 영혼들을 하느님께 인도하는데 유익하였다.”
성 무치아노 마리 위오(Mucian Maria Wiaux)
신분 : 수사, 교사
활동연도 : 1841-1917년
같은이름 : 마리아, 메리, 무치아누스, 무키아노, 무키아누스, 미리암
성 무키아누스 마리아 위오(Mucianus Maria Wiaux, 또는 무치아노 마리 위오)는 1841년 벨기에의 멜레(Mellet)에서 신심이 매우 깊은 대장장이와 여인숙 주인이었던 신심 깊은 부인의 여섯 자녀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 15세인 1856년 나무르(Namur)에서 그리스도 교육 수도회에 입회하여 세례명인 루도비쿠스(Ludovicus) 대신 로마 순교자인 무키아누스라는 이름을 수도명으로 받았다. 그는 1858년 히메이(Chimay)와 브뤼셀(Brussel)에 잠시 머물다가 말론(Malonne)의 대학으로 부임하여 58년 동안 헌신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삶의 전부를 보냈다.
그러나 성 무키아누스 마리아 위오 수사에게 이 시간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교육 수도회에 몸담고 있었지만 자신은 재능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번외 과목을 가르치고 특별한 교수 방법이 필요 없는 일들을 소임으로 맡았다. 비록 그는 책에 쓰인 지식을 전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가장 적은 재능을 그 능력의 한계까지 끌어올리는” 은총을 받았다. 각 개인에게 있어 최고의 것을 끌어내는 능력은 성 무키아누스 마리아 위오 수사가 모든 이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이유였다. 그의 삶에 있어서 온화함과 성스러움은 “항상 기도하는 수사”로 인정받는 탁월한 모범이었다.
성 무키아누스 마리아 위오의 묘소를 참배하는 관습은 그의 선종 직후부터 생겼다. 벨기에에서 그는 하느님과의 중재자로 알려져 사후 20년도 지나지 않은 1936년부터 시성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1977년 10월 30일 동료 수사 성 미카엘 페브레스 코르데로(Michael Febres Cordero, 2월 9일)와 함께 교황 복자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89년 12월 10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무키아누스 마리아 위오의 시성식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를 “벨기에의 빛, 그의 수도회의 빛”으로 선포하였다. 벨기에의 주교들은 성 무키아누스 마리아 위오에 대해 그가 어떠한 신학적, 영적 명제도 남기지 않았고, 그의 이름을 떠올릴만한 무엇도 남기지 않았지만, 일상적인 삶 안에서 그는 늘 기도하는 사람으로서 학생들 사이에서 사도였으며, 매일의 업무를 성덕으로 이행하여 누구도 아프지 않게 하며 모든 이를 용서했다고 평했다.
성녀 알데군다(Aldegundis)
활동년도 : 635-684년
신분 : 동정녀
지역 : 모뵈주(Maubeuge)
같은 이름 : 알데군디스
메로빙거 왕족인 성 발베르투스(Walbertus, 5월 11일)와 성녀 베르틸리아(Bertilia, 1월 3일)의 자녀로 태어난 성녀 알데군디스(또는 알데군다)는 벨기에의 에노(Hainaut) 태생이다.
그녀는 양친의 결혼 권유를 뿌리치고 언니인 성녀 발데투르디스(Waldetrudis, 4월 9일)의 수도원으로 가서 살았다.
그 후 그녀는 모뵈주 근교의 어느 은둔소로 들어가서 일생을 기도와 고행 속에서 보냈다.
성녀 알데군디스는 유방암을 앓았는데, 죽을 때까지 하느님께 큰 신뢰심을 보여 그녀의 성덕이 뛰어남을 보여주었다.
성녀 마르티나 (Martina)
활동년도 : +226년?
신분 : 동정 순교자
지역 : 로마(Roma)
같은 이름 : 마르띠나, 말지나
성녀 마르티나의 전기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녀는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222-235년)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 것으로 알려졌다.
1634년 그녀의 유해가 폐허가 된 기념 성당에서 발견되자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는 지하 성당을 겸비한 이 옛 성당을 복구하였다.
성녀 바틸다 (Bathildis)
활동년도 : +680년
신분 : 왕비
지역 :
같은 이름 : 바띨다, 바틸디스
잉글랜드(England) 태생의 성녀 바틸다는 641년에 해적들에게 끌려가서 프랑크의 왕 클로비스 2세(Clovis II)의 궁중 시종장의 하녀로 팔려갔다. 몇 년 후 그녀의 미모와 탁월한 능력이 눈에 띄게 되어 왕이 그녀를 아내로 삼게 되었다. 이때가 649년이다. 그녀는 세 아들을 낳았는데, 그들은 모두 왕이 되어 클로테르 3세(Clotaire III), 칠데릭 2세(Childeric II) 그리고 티에리 3세(Thierry III)가 되었다.
655년에 클로비스 왕이 사망하자 그녀는 섭정이 되어 현명하고도 자비롭게 나라를 다스려 칭송을 받았다. 그녀는 수많은 노예를 해방시켰고, 궁성에서 먼 지역 주민들을 따뜻이 보살폈으며, 생드니(Saint-Denis), 코르비(Corbie), 셸르(Chelles) 등에 수많은 수도원을 세웠다. 그 후 665년에 그녀는 수도원으로 은퇴하였다. 교황 성 니콜라우스 1세(Nicolaus I, 11월 13일)가 그녀를 시성하였다.
복자 세바스티아노 발프레 (Sebastian Valfre)
활동년도 : 1629-1710년
신분 : 신부
지역 : 토리노(Torino)
같은 이름 : 세바스띠아노, 세바스띠아누스, 세바스찬, 세바스챤, 세바스티아누스, 쎄바스띠아노, 쎄바스띠아누스
이탈리아 피에몬테(Piemonte)의 베르두노(Verduno) 태생인 세바스티아누스 발프레(Sebastianus Valfre, 또는 세바스티아노)는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소년 때에 이미 사제가 될 결심을 했고, 남의 책을 베껴가면서 부모 몰래 공부하였다. 그가 토리노로 공부하러 갈 때 집에서 준 것은 조그마한 마차 1대 분의 포도주가 전부였다고 한다.
그는 1651년에 토리노의 설교자회에 입회하여 사제가 되었는데, 첫미사는 그의 부모를 위로하기 위하여 고향 성당에서 지냈다. 그의 첫 임무는 어느 작은 성당의 책임자로서 신심생활을 지도하는 일이었다. 그 후 그는 수련장으로 임명되었고, 40세 때에는 원장직을 역임하였다.
그의 명성은 영혼의 지도에서 얻어졌다. 대부분의 시간을 고해소에서 지낸 그는 자기 공동체 회원들뿐만 아니라 만인의 고해신부였다. 그는 영적인 직관력이 뛰어났고, 남의 마음을 읽었을 뿐만 아니라 불신앙과 무관심을 예리하게 파헤쳤다. 사르데냐(Sardegna)의 왕 빅토르 아마데우스 2세(Victor Amadeus II)는 그에 의하여 회개하였다. 한마디로 그의 생애는 진정한 사목자상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예언한 날에 하느님 품에 안겼다. 그때 그의 나이는 81세였다. 그는 183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에 의해 시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