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파석입니다. 토파석은 산간의 작은 평탄지나 언덕을 닮은 돌로, 평원석보다 평지가 좁고 근경의 경치를 나타내는 수석의 한 유형입니다.
오늘 아침, 진료실에 들어선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탁한 어항 물 속에서 트로페우스들이 죽어 있는 것이었지요. 물은 죽음처럼 정지해 있었습니다. 밤사이 펌프가 멈추며 섬프sump의 순환이 끊겼고, 트로페우스가 헤엄치던 어항은 무덤이 되어 있었습니다. 어제까지 생기로 반짝이던 그들은 차갑게 굳어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지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마치 내 안의 무언가가 함께 멈춘 듯, 숨이 막히고 죄책감이 밀려왔습니다. 나는 그들의 심장이 되어야 했던 펌프가 이렇게 갑자기 고장날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연결된 조절판에는 이상 없이 불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왜 펌프는 멈췄을까요. 그들의 생명을 내가 끊었다는 생각에 손끝이 떨렸습니다.
죽은 물고기들을 건져내며 세 마리만이 살아남아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힘없이 입을 뻐끔거리며 물 표면을 맴돌았습니다. 그 움직임은 생을 붙잡으려는 절박한 몸부림이었지만, 내 눈에는 이미 스러진 생명의 그림자였습니다. 나는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펌프를 고친다 해도, 그들의 시간은 이미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트로페우스는 산소만으로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흐름을 필요로 합니다. 물이 움직여야만 그들의 생명도 흐릅니다. 펌프는 어항이라는 작은 우주에 생명의 리듬을 부여하는 심장이었습니다. 그 심장이 멈춘 순간, 어항은 고요한 죽음의 공간이 된 것입니다.
나는 그전부터 이미 물고기 키우기에 마음이 떠난 상태였습니다. 기회가 되면 물생활을 접으려던 참이었습니다. 그 순간이 이렇게 갑자기 다가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항에는 F1과 F2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탕가니카 호수에서 잡아 순치시켰던 야생의 물고기가 늙어죽을 때까지 이 물생활은 계속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죽을 것이기에 이 취미생활도 천천히 끝날 것이라 여겼습니다.
이제 다시 새 물고기를 들일 마음은 당연히 없습니다. 살아남은 세 마리가 입을 뻐끔거리며 바닥에 가라앉았다 떠오르고 있었는데, 뒷정리를 해야 했으므로 그 물고기들이 숨을 거두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시간은 무겁고도 서늘했습니다. 그 기다림 속에서, 오래전 전공의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20대 젊은 남자였습니다. 도둑질을 하다 들켜 도망치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 머리를 다쳤습니다. 그의 몸은 멀쩡했지만,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이미 눈에는 검은 보름달이 떠 있었습니다. 이는 동공이 완전히 확장되고 불빛에 반응하지 않는 뇌 탈출(brain herniation)의 신호였습니다. 수술실에서 두개골을 열었을 때, 부풀어 오른 뇌가 밖으로 쏟아지듯 나왔습니다. 뇌간이 소뇌 아래로 이미 밀려내려가 소생의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보호자를 찾을 수 없다는 경찰관의 말이 허공에 맴돌았습니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경찰관의 서명으로 수술을 진행했지만, 수술이 끝나고도 보호자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수술실 밖으로 나왔을 때 그는 자가 호흡을 하지 못했습니다. 인공호흡기를 달았습니다. 아침 회진 중 과장님은 뇌사로 판단하고, 호흡기를 떼라고 지시했습니다. 당시에는 뇌사에 대한 엄격한 규정이 없었습니다. 병원은 무연고 환자를 무한정 돌볼 여력이 없었고, 힘든 수련의로서 윤리적 고민은 희미한 그림자처럼 스쳐갔습니다.
나는 담당의로서 그의 사망을 선언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무호흡 상태에서도 그의 심장은 고집스럽게 오래 뛰었지요. EKG 모니터는 생명의 리듬을 보여줬지만, 그것은 이미 의미를 잃은 맥박이었습니다. 몇 시간이 지나고 퇴근 시간도 지났지만, 그의 심장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기다리는 그 시간은 생의 허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사람이 죽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삶의 본질을 묻는 잔인한 질문이었지요. 그의 심장은 생명이었지만, 그 생명은 이미 의미를 잃었습니다. 삶이란 무엇일까요. 심장이 뛰는 것만으로 충분한가요. 아니면 의미가 있어야만 삶이라 불릴 수 있는 걸까요.
오늘, 물고기들이 죽기를 기다리는 이 순간이 그때와 닮아 있었습니다. 나는 아직 미약하게 움직이는 물고기를 비닐에 담았습니다. 그들이 서서히 고통 속에서 꺼져가는 것보다, 차라리 빠르게 끝내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았습니다. 땅 속에 묻히는 물고기들은 마지막으로 파르르 떨었습니다. 나는 그 떨림을 보며 속으로 물고기에게 말했습니다. 고통스러운 연장보다 단호한 끝이 너를 위하는 거라고. 하지만 그 선택도 내 안의 무력감을 덮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가 떠올랐습니다. 치매로 세상과 단절된 어머니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십니다. 2주에 한 번 찾아뵙는 것은 자식으로서의 도리일 뿐, 어머니의 눈에는 내가 낯선 그림자일 뿐입니다. 어머니는 요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건강한 몸은 치매의 감옥을 더 길게 만듭니다. 어쩌면 어머니는 100살 너머까지 사실지도 모릅니다. 어머니는 이제 그곳에서 나오지 못하십니다. 언젠가는 그 방에서 숨을 멈추실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머니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해드릴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죽음이 와야만 끝나는 보살핌, 뒷수습, 그리고 긴 이별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어머니의 삶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기억과 의미는 이미 떠났습니다. 나는 어머니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물고기처럼, 뇌사 환자처럼, 어머니의 생명도 이미 흐름을 잃은 어항 속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고 보니, 우리 모두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삶의 굴곡을 지나며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점차 희미해집니다. 우리는 그저 하루하루를 큰 탈 없이 유지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죽음 앞에서 생의 의미는 허망합니다. 아무리 미화해도, 육체에 갇힌 영혼은 결국 해방을 기다립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한 이가 천당에 가기 위해 삶을 연장할 이유가 있을까요. 의미를 찾으려 애썼던 그 모든 노력은, 결국 허공에 흩어지는 물거품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고여 있는 어항 속에 있는 걸까요. 물고기는 흐름이 멈춘 어항에서 숨을 잃었습니다. 뇌사 환자는 심장이 뛰어도 삶의 의미를 잃었습니다. 치매에 갇힌 어머니는 기억을 잃고 이제 존재의 이유를 모르십니다. 그리고 나는, 삶의 의미를 묻는 스스로에게 답을 찾지 못합니다. 우리는 모두 흐름이 멈춘 어항 속 물고기처럼, 서서히 숨을 잃어가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기다림은 고통스럽지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생의 마지막 은유일 것입니다. 우리는 왜 살아갑니까. 철학자들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 애썼지만, 죽음 앞에서 그 모든 말은 물거품처럼 흩어집니다. 죽음은 모든 책임과 까닭을 지우고,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하지만 그 자유를 위해, 우리는 얼마나 더 이 어항 속에서 숨을 헐떡여야 할까요.
어항 속 물결이 멈춘 순간, 생명은 고요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그 고요는 죽음의 전조이지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마주해야 할 진실입니다. 아침에 마주한 물고기들의 죽음은 내 안의 무언가를 깨웠습니다. 죄책감, 무력감, 그리고 삶의 허무. 우리는 모두 흐름을 잃은 어항 속에서 숨을 헐떡입니다. 죽음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만, 그 자유를 위해 우리는 얼마나 더 이 고요한 물속에서 버텨야 할까요. 삶은 기다림이고, 그 기다림의 끝은 어쩌면 우리가 두려워하던 해방일지도 모르는데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