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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자신을 시험하라 13:1~7
1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2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3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그는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6 우리가 버림받은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7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림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진리를 추구하라 13:8~13
8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9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넘어뜨리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한을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1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12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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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3장 스스로 시험하라
다른 편지들에 비해 고린도후서의 마지막 인사는 비장함이 흐릅니다. 세 번째 고린도교회를 방문할 것을 이야기하고, 이번에 가면 절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만 두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2절) 왜 굳이 이렇게까지 말해야할까 의아해 보입니다. 그런데 5절에서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라고 말합니다. 이 대답이 왜 나왔을까요?
3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고린도교회의 치명적인 문제는 바로 이곳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지만 사도바울의 사도직은 의심하고 또 의심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바울의 복음 전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 그들이 왜 바울을 의심하는 것일까요? 이 아이러한 일은 결국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안에 심각한 문제가 일어났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줄곧 지금까지 오직 십자가만을 이야기했고, 강조했습니다.
저희들이 고린도전후서는 제대로 읽었다면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바른 복음에 안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끊임없이 바울에게 도전했습니다.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인 것을 우리에게 증명하라”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이상한 일은 그들의 증명해 보이라고 말한 것들은 대체로 방언이나, 환상 등의 것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겪은 몇 가지의 경험들을 말하기는 했지만, 결미에 가서는 이러한 일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표지도 아니라고 선언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5절에서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권고합니다.
“너희들이 정말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너희들 스스로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말합니다. 이 확증에 대해 조석민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이란 성령의 도움으로 그리스도의 존재를 확신하는 것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윤리 도덕적인 삶을 살도록 인도 된다는 뜻이다.”
바울의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
너희들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한다.
내가 사도이고 아니고는 두 번째 문제다.”
우리는 종종 내 자신을 보지 못하면서 타인에대해 너무나 잘 평가하고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보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를 살펴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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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1,2절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단호한 징계가 필요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방문할 때 돌이키지 않는 자를 용서하지 않고, 그들의 무책임하고 무고한 비난에 대해 두세 증인을 세워(참조. 신 19:15) 그들의 거짓을 바로잡겠다고 선언합니다. 공동체의 죄를 가만히 덮어두는 것은 깨진 관계를 방치하여 공동체를 더 병들게 할 것입니다. 당장은 서로 힘들지만, 공식적인 절차를 따라 투명하게 처리하는 것이 가장 바르고 빠른 해결책입니다.
3,4절 그리스도가 세상을 위해 약하게 되신 것처럼, 바울도 고린도 교회를 위해 약한 자가 되어 섬겼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담대하게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위해 약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강한 자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강한 사람만이 지체들을 향해 스스로 낮아질 수 있고, 또 교회를 위협하는 죄에 대해 담대하게 맞설 수 있습니다.
5-6절 증거를 요구하는 이들에게 바울은 믿음이 있는지 자신을 시험하라고 말합니다. 그는 여러 증거로 자신의 사도직과 그가 전한 복음과 그의 행위의 진실성을 입증합니다. 무엇보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고린도 교회가 가장 진실한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바울 안에 있는지 묻기 전에, 그들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만일 그들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들이 버림받은 자가 아니라면, 바울도 버림받은 자가 아님을 볼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고 시험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십시오. 내가 먼저 믿음에 바로 서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온전해지면, 남을 바르게 보는 눈도 생겨날 것입니다.
7-10절 바울이 변명하고 자랑하며 경고하는 모든 것은 그가 옳음을 입증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를 온전케 하려는 뜻입니다. 그가 약하게 된 것도 그들을 강하게 하려는 것이고, 그가 엄하게 경고하는 것도 그들을 진리에 세우려는 것입니다. 지금 편지를 쓰는 것과 후에 그들을 방문하려는 것도 그들을 온전하고 건강한 공동체로 세우려는 뜻입니다. ‘내’가 높아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온전하게 선 것을 기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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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의 편지에는 갈등, 분노, 안타까움, 두려움, 신뢰, 슬픔과 같은 수많은 감정이 뒤섞여 있습니다. 권면하기도 했다가 위로하기도 하고, 부탁하기도 했다가 강력하게 경고하기도 합니다. 자랑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부득이하게 자랑하기도 하고, 엄중한 심판을 결심하면서도 그 심판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바울 사도가 이토록 고린도교회를 향해 간절한 편지를 쓰는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지역으로 가서 1년 6개월을 머물며 복음을 전하고 섬길 이유가 없었습니다. 온갖 고난 가운데에서도 아무 후원이나 대가를 받지 않으면서 그들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바쳐 헌신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의 말을 듣고 그의 권위를 의심하고 불순종한 고린도교회를 위해 많은 동역자들과 편지를 보낼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도 없었고, 그들에게 헌신해야 할 의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간절함으로 기꺼이 이 일들을 감당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바울 사도를 위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창조주이자 주님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불순종한 죄인으로 태어나 그리스도께서 피 값으로 세우신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부르시고 구원하시고 새 언약의 일꾼으로 삼아주신 이해할 수 없는 은혜와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고 복음의 영광과 능력을 알기에, 바울 사도는 모든 고난과 희생을 감수하고 값없이 복음을 전하고 사랑으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한 믿음이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복음을 더 분명하고 풍성하게 알고 확신할 뿐 아니라, 그 복음을 위해 삶을 던지고 주님의 거룩한 교회를 섬기고 세우는 일에 기쁨으로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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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거룩함을 지켜내는 삶❞
❚ 각자의 믿음을 점검하여 진리 안에서 교회 공동체의 거룩함을 지켜내야 합니다.
✔ 온전한 거룩함에 이르기 위한 노력은 무엇입니까?
➲ 죄를 거부하고 치리하는 교회여야 합니다(1~4절).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가지고 섬겼지만, 교회에서 분란을 일으켰음에도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 치리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2절).. 바울이 이렇게 단호하게 처리하겠다고 밝힌 이유는 교회를 혼란에 빠뜨린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바울 안에 말씀하시는 것인지 의구심을 제기하며 그 증거를 요구했기 때문(3절)입니다. ‘...그는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강하시니라...’(3절b)..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강하게 다루실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비록 자신들의 모습이 약해 보일지라도, 결국 하나님의 능력으로 교회를 굳건히 세울 것(4절)이라는 강한 의지를 표명합니다.
교회는 성령의 거룩한 전이며, 거룩하신 주님의 몸입니다. 그 어떤 죄도 교회 안에 허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영적 순결을 지켜내기 위해서 반드시 치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는 치리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죄인 줄 알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회개토록 가르치고 권면 했음에도 불구하고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교회는 성경대로 그러한 자들을 치리할 수 있어야 더 큰 문제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물론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엄청난 파장이 예고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야만 그 영혼을 구원할 수 있고, 교회의 거룩함도 지킬 수 있습니다. 무작정 덮어 준다고 해서 능사가 아닙니다. 썩어 있는 살을 도려내는 아픔과 고통은 겪어야 하겠지만, 잠시의 아픔과 고통이 영원한 기쁨과 거룩함을 가져올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어느 교회이건 공동체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더 큰 혼란으로 빠뜨리기 전에 잘 가르치고, 권면하는 영적 민감함과 용기와 담대함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또한 죄가 교회 안에 들어와 교회 전체에 퍼지기 전에 그 싹을 잘라낼 수 있는 결단력도 있어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가르치는 리더십을 신뢰하고, 그 가르침에 잘 순응 할 수 있도록 영적인 성품을 잘 갖추어 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 참된 믿음인지 점검하는 교회여야 합니다(5~6절).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들이 믿음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시험해 보고, 스스로 검증해 보라..’(5절,새번역)고 강하게 명령합니다. 그들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버림 받은 자가 된다고 선언합니다. ‘버림받은 자’는 ‘인정받지 못한 자, 실격자’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과 그의 일행들이 버림 받은 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들이 알기를 바란다고 고백합니다.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도들의 믿음을 확인해야 합니다. 주일 성수나 헌금 생활과 같은 단편적인 종교 행위로 성도들의 믿음을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 성도들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살아가고 있는지, 무늬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율법을 듣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오직 율법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의롭게 된다...’(롬 2:13)는 말씀을 내 마음에 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무엇보다 나는 과연 어떤 믿음인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는가? 스스로 돌아보며, 점검해 봅니다. 타인의 믿음을 판단하고 정죄하기에 앞서 먼저 내 자신을 점검하여 내 자신이 진정 참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 살펴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진짜 성도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선을 행하도록 서로돕는 교회여야 합니다(7~13절).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비록 자신들이 버림 받은 자 같이 될지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한 뿐...’(8절)이라고 말하는데, 고린도 교회에 가면 진리를 따라 교회 문제들을 다룰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궁극적인 소망은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요... 너희를 넘어뜨리려 하지 않고, 영적 권세를 가지고 교회를 세우려 한 것...’(9~10절)입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기뻐하라...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 것을 당부하고,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것(11절)이라고 축복합니다. 또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11~12절)하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13절)라는 기원과 함께 고린도 후서를 마무리 합니다.
교회가 온전해 지고, 거룩함을 지켜낼 때, 성도들의 위로와 기쁨 그리고 평강의 복이 넘쳐흐르게 됩니다. 교회는 이 마지막 때에 진정한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코로나 이후 한국교회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적당한 때에 한국교회가 정신을 바짝 차리도록 채찍을 드셨다고 여겨집니다. 다시금 정신을 차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으로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새롭게 거듭나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교회는 거룩함을 회복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세상 가운데 선을 행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성도들 또한 서로서로 선을 행하도록 도와 세상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참 빛을 비추는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의 강력한 유혹과 도전 앞에서 교회가 참된 소망이요, 안식처인 것을 모두가 깨달아 더욱 교회를 사랑하며 온전히 세워갈 뿐만 아니라 거룩함을 지켜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건강하고 거룩한 교회 공동체를 위해 내 자신이 먼저 약한 자로 영혼을 돌보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진리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공동체로 만들어갈 수 있기를(고후 13:1~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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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권면과 끝인사 (13:1~13)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복종하고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내기 위해 스스로 약해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마침내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런 역설적 원리에 따라 사도직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고린도 성도들은 사도직의 확실한 증거를 보여 달라며 그를 시험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시험하고 검증해 봐야 할 것은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을 자기 안에서 발견하지 못하면 그 믿음은 헛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주님의 능력으로 약한 데서 강해지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온전한 신앙인이 되길 바라며 간구합니다. 모든 성도가 함께 기뻐하며, 서로에게 위로받고,
한마음 되어 평안을 누리는 온전한 교회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있을 때 이루어집니다
-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무엇을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하나요?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서도록 내가 기도하고, 지지해 주어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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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13 십자가 정신으로 살라.
세상 사람들이 다 구하는 그런 복이 복인가?
그럼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자들이 구하는 복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며 너가 축복의 통로이라고 아멘.
믿음이 있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신 줄을 스스로 안다면(5)
내가 복의 근원이며 내가 축복의 통로이질 않는가?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는 자이다. 아멘.
주 안에서 죽는 자가 복이 있다. 아멘.
그럼 복이 무엇인가?
주안에서 죽는 것이 축복이다.
그럼 죽는 것도 축복이요 사는 것도 축복이다.
그럼 죽음이란 무엇인가?
믿음 안에서 주 안에서 죽음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바울이 고백했듯이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것
이것이 믿음 안에서 사는 삶이 아닌가?
그런데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는가?
암에 걸렸다면 두려워 하지 않는가?
사업이 망했다면 두려워 하지 않는가?
그럼 믿음은 무엇이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고 하면서
당장 내일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현실의 사람이
믿음의 사람인가?
남의 이야기 할 것 없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믿음의 사람인가?
하나님 아버지
마지막 날에 너가 믿음에 있는가?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 하셨는데
정말 믿음 안에 있기를 소원합니다.
참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는 영적인 시각을 열어 주셔서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 보는 눈을 주시옵소서.
말씀을 분별하는 지혜를 열어 주셔서
나 자신을, 죄성을, 바라보는 눈이 밝아 지게 하옵소서.
남의 눈의 티글보다 내 눈의 들보를 보게 하옵소서.
아버지 믿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있게 하옵소서.
말씀으로 세상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옵소서.
말씀으로 한 영혼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을 부어주옵소서.
무엇보다 내가 말씀 안에 굳게 서게 하옵소서.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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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능력은 길을 비출 때 실현됩니다(1~4).
“모든 소송 사건은 두세 증인의 말을 근거로 하여 결정지어야 합니다.”(1절) 세 번째 방문 가운데 혹여라도 발생할 불미스러운 일을 앞두고 바울은 사도로서의 권위를 내세웁니다. 두 번째 방문 중에 극도로 근심하며 슬퍼하게 만든 교인들이 여전히 죄에서 벗어나지 못했거나(12:21), ‘남은 모든 사람’이 거짓 사도들의 가르침에 경도되어 올바른 복음을 분별하지 못하는 상황을 고려한 것입니다. 공동체가 위협받는 순간이 늘 상존한다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지만, 공동체가 와해되는 문제 앞에서는 일말의 고민 없이 단호하게 대응하는 리더십도 눈여겨봐야 합니다. “내가 이번에 다시 가면, 그러한 사람들을 그냥 두지 않겠습니다.”(2절) 그동안 바울은 몸에 지닌 가시도, 수없이 고난당하는 삶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는 능력이 된다고 고백해 왔습니다. 이렇듯 약한 그때를 자랑삼았지만 성도가 복음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에서는 사도로서의 권위를 가감 없이 드러내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 참된 권세를 보여줍니다(3~4절).
바울이 스스로를 믿음의 심판대 위에 세우기를 권면합니다(5~7).
거짓 사도들이 불어넣은 혼란에 갈피를 잡지 못하던 성도들이 뻔뻔스런 요구마저 내놓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증거를 구하고 있으니 말입니다.”(13:3)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세워진 고린도 교회이지만 이제 와서 사도가 맞는지 증명해 보이라는 고집이었습니다. 여기에 바울은 참으로 현명하게 대응합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시험해 보고, 스스로 검증해 보십시오.”(5절) 그들이 이전에 꼭 붙들렸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온전하게 서 있는지, 과연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사람들이 예수를 발견하는지 돌아보며 먼저는 스스로를 심판대 위에 세우기를 촉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책임을 회피하지는 않았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사도권을 인정하며 전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서 있기를 누구보다 원했지만(6절), 그럼에도 문제를 성급하게 해결하기보다 참 사랑을 보이고자 합니다. “우리는 실격자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여러분만은 옳은 일을 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7절)
오직 진리를 위해서 살아가십시오!(8~10)
믿음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은 실격할지언정 고린도 교인은 통과하기를 바라는 바울의 고백은 그가 얼마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교회를 사랑했는지 주목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사도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그는 입증되었고, 사도권 자체만으로도 특별함을 증명하는데는 충분했습니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약한 자에 비유하며 성도가 강해지는 것, 즉 그리스도안에 거하며 그들 안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살아 계신 영을 따라 각자의 은사대로 교회를 세워 가는 일에 든든해지기를 소망할 뿐입니다(9절). 이것이 바울 그가 진리를 거슬러 살아가지 않으면서 동시에 진리를 위해서라면 모든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8절). 진리를 따르는 삶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신 몸 된 교회를 견고하게 세우는 일입니다(10절). 이 일을 위해 바울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며 그들의 터가 되시는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기를 힘주어 강조합니다.
교회는 사랑의 능력입니다(11~12).
고린도 교회 안에는 거짓 사도들의 횡포 외에도 수많은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명예를 추구하는 도시의 문화가 확장되면서 우열을 가리는 신앙생활이 피어나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하나님이 주신 은사는 믿음의 서열을 가리는 일에 사용되었습니다. 갖가지 문제들로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던 고린도 교회를 향해 바울이 마지막 인사를 건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온전하게 되기를 힘쓰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 화평하게 지내십시오.”(11절)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질서정연해지고 서로를 비교 대상으로 삼기보다 함께하는 동역자로서 인식하게 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게 느껴집니다. 놀랍게도 바울은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를 환영하라는 파격적인 인사말을 보태며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모두가 하나 된 형제자매라는 사실을 일깨
웁니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에 보여 줄 참된 모습이자 교회 안에서, 교회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오늘도 세상과 교제하십니다(13).
11~12절이 성도의 교제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한다면 13절에서는 하나 되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전해집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이제껏 바울은 사도로서 부름받은 사건으로부터 고난에 참여하며 가난에도 처했던 모든 행보가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은혜로 ‘말미암아’ 일어났다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에는 몸을 입고 성육신하셔서 이 땅의 모든 현실을 감내하셨던 예수님의 역사가 선행합니다. 말 그대로 은혜가 은혜로서 나타나 빛을 비추었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바울은 자신을 내세우며 자랑삼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은혜이신 그리스도가 은혜로서 나타난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바로 그 사랑이 세상의 핵심이요, 지금도 하나님은 살아 계신 성령 안에서 한 영혼 한 영혼을 부르시고 만나 주십니다. 이렇듯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하나 됨을 이루시며 사랑을 증거하시니 그분을 닮은 그리스도인 모두 한마음을 품으며 사랑을 증거함이 마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