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날 답사기를 올립니다.
5월 1일 오전 8시 15분 집을 나섰다.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10시.
벌써 몇몇 분이 와계셨다. 3번째 답사를 함께 한 노수한 선생과 두번째 답사를 함께 하는 김용균 선생이 자진해서 나의 일을 도와주었다. 자료집을 배부하고, 여권을 걷고, 늦게 오는 분들 연락하는 일이 수월하게 마무리되었다. 노동절 연휴라서 공항이 붐빌 것으로 예상했는데, 2터미널이 생긴 탓에 그리 힘들지 않게 수속까지 마무리 될 수 있었다. 2017년 가을 지금 생각해도 끔직한 인파로 인해 비행기 출발 10분 전에 답사 일행 한분이 게이트에 겨우 도착했던 일이 있어서, 이번에도 조금 걱정했지만 별 탈 없이 여유롭게 출국할 수 있었다.
문제는 중국 입국이다. 2003년 함께 고구려 답사단 일원으로 함께 심양공항에서 입국심사를 받던 전문 연구자 한분 이 내 바로 뒤에서 입국 거부를 당해 곧장 한국으로 돌아갔던 일이 있었다. 혹시라도 그런 일이 있을까봐, 늘 입국 심사 때면 긴장한다. 답사단 전원 무사히 입국을 마치고, 류평일 가이드와 만날 수 있었다. 중국 현지시간 2시 14분 위패산성으로 출발해, 4시 8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제는 시간 싸움이다. 답사단 전원이 힘들지 않는 범위에서 최대한 볼 것을 봐야 하고, 그렇다고 너무 시간이 늦어서도 안 된다. 6시를 데드라인으로 생각하고 답사를 시작했다. 위패산성에서 숙소까지 1시간 반이 걸린다는 여행사의 말을 들은 터라, 서둘렀다.
위패산성의 동문은 차량 통행문으로 만들어놓았고, 동문 서쪽에 위치한 청천사로 들어가는 문을 새로 만들어 두었다. 동문은 팔자형 옹성으로 되어 있는데, 현장에서 보니, 동문 동쪽이 약간의 언덕이라 사실상 동문으로 들어오는 길은 차량이 통행하는 일자형 도로에 가깝다. 따라서 옹성의 방어력은 도면으로 볼 때 보다 훨씬 높아 보였다. 현장에 와보니 도면과는 확실히 달랐다.
청천사터는 위패산성 내에서 가장 넓은 곳으로, 과거에는 성의 주요 건물이 있었던 곳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동문 위에 2008년 중국인들이 써놓은 위패산성 연역이 있다. 위패산성이 서기 1세기 후한 광무제 년간에 만들어 졌다는 쓰여 있지만, 하지만 축성 방식으로 볼 때 고구려 전기때가 아니라, 고구려 중후기 때로 판단된다. 위패산성을 당태종과 관련시킨 기록은 너무나 심한 왜곡이다. 당태종은 이곳에 전혀 올 수가 없다.
청천사가 647년 고구려 석성을 침략해온 당나라 장수 우진달이 창건했다는 주장도 전해오지만, 이 역시 엉터리다. 우진달이 석성을 잠시 함락시킨 적은 있어도 곧장 철군했는데, 절을 창건할 시간은 없다. 고구려 성을 답사하다 보면 만나는 성에 대한 중국측 설명에는 일찍부터 이곳은 중국 땅이었다고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 뚜렷한 패턴이 보인다. 하지만 이런 글들을 접할 때마다, 중국인들은 진정 고구려 계승자가 될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고구려를 고구려인의 눈으로 보려고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어떻게 이곳에 성을 건설할 생각을 했는지에 대한 관심이 없어, 그저 역사를 내 것, 네 것으로 구분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으니, 역사 인식이 너무 일차원적이다.
성벽을 오르면서 중국이 최근에 덧쌓은 성벽 아래로, 옛 고구려인이 쌓은 성벽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차츰 더 위쪽으로 오르니 더 확연히 보인다. 위패산성이 고구려 성 가운데 아름다운 성으로 꼽히는 이유를 저절로 알게 된다. 동벽은 옛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다. 동벽 아래 계곡이 보이지만, 이 성을 공격하기는 쉽지 않을 듯했다. 경사가 제법 있었다. 하지만 성벽을 축조해야 방어할 수 있을 경사도였다. 645년 1차 고-당 전쟁에서 실패한 당나라는 고구려의 강력한 요동방어망을 약화시키기 위해, 요동반도 남부 해안가를 습격할 것을 계획하고, 647년과 648년 기습 공격을 감행한다. 그 때 당군이 공격했던 성이 석성, 적리성 등이다. 석성과 적리성은 위패산성과 위패산성 동쪽에 위치한 장하현 성산산성 등으로 비정되고 있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위패산성이 당군의 공격을 받았다면 한다면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 이유는 성을 올라가면서 너무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동쪽 성벽 위에서 남쪽으로 내려다보니 거대한 평야가 보였다. 대련에서 단동을 향해 고속도로를 달릴 때 좌우에 평야가 넓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곳에서 바라보니 그 평야가 실로 광대했다. 이번 답사에서 본 3대 평야 가운데 안시성 북쪽에서 바라본 요동벌판 보다는 작지만, 최진보산성에서 바라본 범하 일대 평야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큰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위패산성은 둘레가 5km나 되는 거대산성이다. 이런 거대산성을 지키려면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살았야 한다. 해안선이 다소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되지만, 고구려 시대에 위패산성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농사와 해양활동을 하며 살았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되었다.
647년과 648년 고구려 해양방어망을 교란시키던 당나라는 649년 대규모로 침략해오려다가, 당태종이 죽음으로써 계획이 무산되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당나라는 사천성을 비롯한 양자강 중류에서 수천척의 배를 663년까지 계속해서 만든다. 그때 만든 배 가운데 1,900척의 배에 13만 명을 태워 660년 7월 백제를 공격해 멸망시켰고, 다시 661년 8월~662년 2월까지 대규모 선단으로 황해를 건너 고구려 평양성을 직접 공격했다가, 또 다시 고구려에게 패배했었다. 고구려군이 당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요인의 하나는 축성술이다. 견고하게 만든 고구려의 성의 모습은 위패산성 북쪽 옹성에서 더 잘 확인할 수 있었다.
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내성은 최근들어 수리한 흔적이 너무 뚜렷하다. 그래서 원형을 많이 잃어버린 모습이라 아쉽지만, 터의 흔적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동북쪽 성벽의 일부도 최근에 복원한 것이 역력하지만, 북쪽 옹성 주변에는 옛 성벽이 아주 잘 남아있다. 서길수 교수가 위패산성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곳에 안 가보았니 하면서 내게 말했던 기억이 생각났다. 오녀산성 동문의 옹성보다 훨씬 견고하다. 문 밖도 옹성이지만, 문 안으로 들어와도 옹성인 2중 구조로 된 옹성이다. 참으로 탁월한 축성법이다. 동북쪽 옹성의 위치가 성의 모서리라는 점이 고려된 때문이라고 하겠다.
자연 암반위에 자연스럽게 바위의 선 위에 맞춰 그렝이 공법으로 축성한 모습이라던가, 들여쌓기, 육합쌓기, 쐐기돌과 마름모꼴돌이 서로 섞여 축성한 모습이 아주 잘 보였다. 바깥쪽을 견고히 쌓은 외축은 보이지만, 지형상 내축 흔적은 여기서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말이 다닐 정도로 성벽은 투텁게 쌓은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북쪽 성벽에서 병풍처럼 휘어지게 쌓은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북쪽 성벽을 통해 성벽 전체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이미 한 분이 내려간 상태이고, 시간이 많지 않은 터라, 북쪽 옹성문에서 다시 내려오게 되었다. 성벽의 일부만을 본 셈이라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위패산성의 아름다움은 충분히 확인했다. 내려오는 시간은 확실히 빨랐다. 조금 일찍 내려왔다는 생각도 들었다. 즉시 위패산성의 저수지를 찾아보고자 했다. 산 정상을 둘러쌓은 성인 퇴뫼식 산성이 아닌, 계곡을 에워싼 포곡식 산성인 만큼, 성 안에 저수지가 있어야 한다. 미리 확인한 도면에는 서문 쪽에 저수지가 있다고 하지만, 동문 쪽 청천사 주변에도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대로 미리 확인한 도면이 좀 잘못된 듯하다. 버스가 정차한 곳에서 조금 위쪽에서 저수지를 찾았다. 그리고 시간이 좀 있겠다 싶어 즉시 저수지 남쪽에 보이는 성벽을 향해 뛰어 올랐다. 불과 수십 미터 앞에서 남벽의 일부를 보았다. 아직 이곳은 복원이 덜 된 탓인지, 마도는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지만, 성벽이 상당히 많이 허물어져 있었다. 그래도 길게 뻗은 남벽도 확인할 수 있었다.
6시 5분 위패산성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1시간 반이 걸린다는 여행사의 예상과 달리, 숙소겸 식당인 와방점시 대련원주대주점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45분. 6시 50분에 숙소에 도착해 버린 것이었다. 아. 이런. 더 보고 올 걸!....
7시 5분부터 저녁식사를 했다. 호텔 3층에서 식사를 하고, 8시경 방에 들어와 씻고 노트북을 켜고 자료를 정리했다. 그런데 8시 50분부터 한두 분씩 내 방으로 찾아왔다. 13분이 오셨다가 두 분은 가시고, 11분과 함께 밤 11시 넘어서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첫날이 지나갔다.
첫댓글 이번에도 좋은 답사였던 것 같군요. 저도 가고 싶었는데 5월달에는 도저히 안되겠더라고요. 답사기를 읽으니 더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