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불 옥새전각연구소의 민홍규 소장(52세). 대한민국 최초의 옥새를 만든 정기호 선생의 제자다. 정기호 선생은 고종 때 대한제국 옥새를 만든 황소산 선생의 제자. 옥새 만드는 법은 그렇게 제자의 제자를 통해 비전(秘傳)되어 왔다고 한다.
민 소장이 정기호 선생 문하(門下)에 들어간 것은 열여섯 살 때였다. 정기호 선생이 “이제 모든 과정을 마치고 내 전수자가 됐다”고 인정한 것이 마흔여섯 살 때였으니, 꼬박 30년 동안 혹독한 훈련을 거쳤다. 왕이 사라진 시대에, 왕의 상징인 옥새를 붙들고 그 긴 시간을 견뎌낼 수 있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1989년에 돌아가신 스승은 “마흔이 되기까지는 옥새 만든다는 말을 하지 말라. 이로움보다 해로움이 많을 것이다”라고 유언을 했다.

최근에 와서야 그는 옥새 장인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지난해 옥새에 관해 집대성한 책을 냈고, 올해 봄에는 국립 전주박물관에서 대규모 전시회를 연 데 이어 11월 26일까지 일본 도쿄 부근의 이시가와 역사박물관에서 44일간 전시회를 열고 있다. 영화 〈한반도〉 제작에도 참여했다.
그가 처음 정기호 선생을 만난 것은 조부 손에 이끌려서였다. 여섯 살 때부터 민태식 선생으로부터 한학과 서예를 배우며 기초를 닦은 후였다. 선생은 기술보다 학문을 먼저 가르쳤다. 1주일에 50수씩 한시를 외우게 하고, 사서삼경과 주역 등 동양학과 문자학을 가르쳤다. 한번 설명하면 알아들어야지, 못 따라오면 바로 목침이 날아들었다.
“하도 긴장해 10분만 공부해도 손에 땀이 흥건해질 정도였어요. 1년쯤 됐을 때 도망을 쳤죠. 공부하러 간다고 해놓곤 산에 가서 놀았어요. 나중에 할아버지가 아시고 얼마나 화를 내시는지.”

그러다 어느 날 마음을 돌이켰다. 일본에서 스승을 만나러 온 유명한 전각가와 그 제자들이 마당에서 큰절을 하는 것을 보고, ‘나도 열심히 하다보면 저런 존경을 받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20대 초반에는 공부가 다 된 듯 의욕에 넘친 적도 있었다. ‘선생님이나 나나 뭐가 다른가’ 하는 오기가 생겼다. 비슷하게 흉내 내놓은 그의 작품을 보고 선생은 호통을 쳤다.
“그 다음에는 도저히 선생님을 못 쫓아갈 것 같은 절망감이 들었습니다. 선생님 것은 쓱 새긴 것 같은데도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는데 도저히 그렇게 만들 수 없을 것 같았어요.”
옥새를 만드는 데는 서예와 회화, 조각, 전각, 주물, 매듭 등 다양한 분야가 접목된다. 기술을 익혀 비슷하게 만들더라도, 그 가운데 기운이 흐르게 하는 것은 보통 경지가 아니었다. 용, 거북이 등을 새기는 뉴(손잡이) 조각은 가만히 있으면서 살아 움직이는 듯하고, 어리숙한 듯 영묘하고 둔한 듯하면서 엄숙한 분위기가 흘러나와야 한다. 이건 기교를 넘어서는 일. 옥새를 만드는 장인이 학문으로 연마한 인격과 철학을 갖춰야 가능한 일이었다.
“어느 날 선생님이 살아있는 나뭇잎을 새겨보라고 하시더군요. 나뭇잎 모양이야 잘 새길 수 있지만, 어떻게 살아있는 것같이 표현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어느 날 산에 가서 멍하니 앉아 있는데 말라 가면서 끝이 오므라진 나뭇잎이 보였습니다. ‘이 녀석, 마지막 남은 물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저렇게 몸부림하는구나’하고 나뭇잎의 마음이 읽히더라고요. 그걸 표현해 내니 처음으로 선생님이 웃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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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홍규 씨가 재현한 용 모양의 옥새. |
고집불통에 불같은 성격으로 ‘미친 영감’으로 불렸던 스승에게 “왜 그렇게 무섭기만 하시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스승은 “일제시대 때 너무 긴장하고 살아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일본 사람들에게 작품을 만들어 주고 받은 돈을 독립자금으로 댔다는 것. 표구 속에 돈을 집어넣은 후 간도 열차를 타고 나르면서 가슴 졸이고 사셨다고 했다.
조부와 스승이 무서워서 빠져나갈 수 없었던 옥새 만드는 일. 그러나 하면 할수록 그 매력에 차츰 빠져들었다. 그는 “옥새 만드는 일만큼 드라마틱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요즘 그는 각 시대의 옥새를 연구하고 재현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스승이 옥새의 역사와 만드는 법을 정리해서 써놓은 책과 조선의궤 등 자료를 뒤지며 옥새뿐 아니라 옥새를 넣는 함, 옥새함을 올려놓는 상, 옥새와 옥새함을 보관하는 장까지 재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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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새를 만드는 전통 가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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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국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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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이 옥새 제작 방법 등을 정리해 물려준 책. |
수백 년 대를 이어 오는 기술을 현대 과학은 도저히 따라가지 못한다. 1999년 첨단기술의 힘을 빌려 제작한 국새에 균열이 생긴 것이 발견되면서 전통 옥새 장인인 그에게 국새 제작을 맡겨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는 것. 전통 옥새는 밀랍에 조각을 한 후 진흙을 붙여 구워낸 거푸집 안에 쇳물을 부어 만든다. 조각의 디테일까지 잘 살려내고 굽는 동안 금이 가지 않으려면 불에 잘 견디면서 천천히 식는, 내화력과 인장력, 결속력이 좋은 흙이어야 한다. 고령과 강진, 포천, 장호원 흙 등을 적절한 비율로 섞어 쓰는 게 옥새 장인들만의 노하우. 쇳물의 가스가 숨쉬는 진흙을 통해 빠져나가 균열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옥새는 변질이나 마모를 피하기 위해 합금을 사용하는데, 한방에서 탕약을 쓰듯 사용자에 따라 금, 은, 동, 아연, 주석, 니켈 등 들어가는 금속의 비율을 조절한다. 동양철학의 바탕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스승의 생년월일에 맞춰 인장을 만들어 드리면서, 이러이러한 비율로 만들었다고 했더니,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시더니 ‘이 반지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시더군요. 합격이란 뜻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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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족오 모양의 옥새. |
스승마저 세상을 떠난 지금, 그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을 듯했다.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 장천 4리. 그가 옥새를 만들면서 기거하는 곳이다. 원래 있던 황톳집을 여기저기 손봐 그만의 향취가 느껴지는 이곳에는 옥새를 만들 때 쓰는 전통 가마가 놓여 있다. 작업 방에 들어서자 옥새 제작용 작은 망치인 소돌이들이 나무 걸이에 나란히 매달려 있다. 고종 때의 옥새 전각장이었던 전흥길과 황소산, 민상호 등이 대를 이어 쓰던 것으로, 스승인 정기호 선생으로부터 물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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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새장과 상, 함. |
그는 아무리 배워도 끝이 보이지 않고 세상이 알아주지도 않는 이 일을 하면서 20~30대에는 “속에서 불이 났다”고 한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서예의 현대화 운동을 벌여 1990년 현대 서예협회를 창설하고, 서예와 누드화를 결합시키는 실험도 해봤다. 스승 모르게 다른 이름으로 활동했다는 것. 그런데 이제 그는 “배움에 끝이 없더라”면서 제자리로 돌아와 있다. 그의 집 대문 위에는 ‘능진수원(能盡水源)’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살아가는 동안 최선을 다하겠다는 뜻이라고 한다. 삶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대문간에는 명아주들이 놓여 있었는데, “지팡이를 만들어 노인 분들에게 드릴 것”이라고 한다. 가볍고 단단해 예부터 최고의 지팡이 재료로 쓰이던 것으로, 요즘 지팡이와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 그를 보면서 배움이 깊어질수록 자신을 낮추고, 주위를 돌아보게 되는 원리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