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17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목사
영 단번 ( Once of All )
히9:11~14
<깨닫지 못하는 죄>
70대 중반인 한 분을 만났다.
그 분은 어찌하다보니 아내는 서울에, 자기는 광주에 살고 있다. 별거를 한다.
별거한 지가 20년이 넘었다. 자녀들은 다 결혼했는데, 이제는 따로 사는 것이 편하다고 한다.
한 달에 한두 번쯤 만나서 2~3일 같이 있는데, 서로가 불편해서 얼른 되돌아온다고 한다.
그분과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죄’이야기가 나왔다.
“별거하게 되는 과정에서 남편으로서 아내에게 지은 죄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 생각 전혀 안 들었는데, 최근에 와서 아, 내가 아내에게 몹쓸 짓을 많이 했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고 고백 한다.
우리가 깨닫지 못해서 그렇지! 숨 쉬는 것도 죄다! 왜 숨 쉬는 것이 죄냐?
병원에 가면 산소호흡기 달고 있는 중환자가 있다.
그제야 “나는 정상적으로 숨을 쉬고 있구나!”하고 깨닫는다. 그러면 왜 그게 죄냐?
건강하게 숨 쉬는 것에 감사하지 않았다!
건강하게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았다.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 하는데, 안 하면? ··· 그것도 죄다!
물론 한두 번 안한다고 그게 죄가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수십 년 살면서, 내가 건강하게 숨 쉬는 것에 대한 감사를 한 번도 안했다?
이 정도면 심각한 죄다!
겨울철에 간혹 감기에 걸릴 때가 있다.
독감에 걸려 오한하면서 ‘다른 사람은 저렇게 씽씽한데, 왜 하필 내가 감기에 걸렸지?’
이런 생각만 했지, 그동안 감기에 안 걸리고 산 것에 대한 감사가 없었다.
감기에 걸리면 “하나님이 나에게 건강에 대한 감사를 하라고 감기를 주셨구나!”
회개하고 평소의 건강에 감사하라고 하나님이 보내시는 신호인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다! 평생에 살면서 감사하지 않았다! 대단히 심각한 죄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
돌 던진 사람은 자기가 던진 돌에 개구리가 죽은 것 모른다. 평생 모르지만 그건 죄다!
자기 생각만 하고 불쑥불쑥 내뱉는 말들! 상대방의 가슴에 못이 되어 박혔다.
그러면 그건 분명한 죄다! 그런데 말한 사람, 평생 모른다! 그러니 우리 죄가 얼마나 많은가?
현대인들은 감옥에만 안 가면 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감옥에 안 들어갔다고 의인일까?
돈이 많아서 법무법인 유명한 변호사를 사면 무죄 받을 수 있다.
전관예우! 엊그제 퇴직한 부장판사, 부장검사를 변호인으로 선임하면 법망을 빠져 나온다.
그러나 돈 없으면 그렇게 못한다. 옴팡 다 뒤집어 쓰고 감옥살이 해야한다.
감옥 안에 있는 사람이 죄인인가? 밖에서 떵떵거리고 사는 사람이 죄인인가?
내가 지금 감옥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다고 해서 의인으로 착각하면 곤란하다!
“나는 죄인 중에서도 상 죄인이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바울처럼 진심으로 고백하자!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하나님 앞에 설까?>
알든, 모르든, 내 죄가 있다! 이 상태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했는가?
(12절)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 년에 한 번, 대 속죄일 제사가 있다.
그 제사를 통해서 온 국민이 죄 문제 해결을 받았다.
그때는 두 마리의 염소를 잡는다!
두 마리로 속죄 제사를 드림으로써 전 국민이 하나님 앞에서 죄 씻음을 받았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다.
예수님이 염소가 되어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단 한번으로 해결했다.
해마다 염소 두 마리를 잡아서 죄에 대한 형벌을 치렀는다.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영원한 속죄를 단번에!
오늘 설교 제목이 “영 단번”(Once of All) 해마다 하던 것을 단 한번으로!
예수님이 희생제물이 되어 영 단번으로, 시쳇말로 ‘단 한 큐에!’ 해결했다.
이제 해마다 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우리가 예수님만 믿으면 죄 문제가 해결된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오늘날 내가 지은 죄로 인하여 내가 감옥에 가야 되고, 사형언도를 받아 내가 사형수가 되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나 대신, 내 죄를 대신하여 사형 당했다. 그러니 나는 무죄가 되어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었다! 이것이 기독교 교리의 핵심 중 핵심이다!
<2천 년 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내 죄 때문이다?>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사형 당하심으로 나는 지옥에 안 가도 된다!”
그런데, 이 진리가 쉽게 믿어지느냐? 믿는다 하면서도 자꾸 의심이 생긴다. 왜?
“나는 지금 죄를 짓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이천 년 전에 죄 값을 미리 치렀나?”
“나는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고 우리 부모님은 물론 조상님들도 아직 안 태어났다!”
“용서라는 것은 먼저 저지른 잘못을 나중에 용서해 주는 것이지 어떻게 미리 용서하나?”
이래서 자꾸 의심이 생긴다. 믿어지는 듯하다가도 “에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끊임없이 의심이 솟구친다! 그래서 교회 나오다가 중도에 그만두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오늘 예배하는 여러분은 어떤가?
“죄가 먼저 있고 용서가 있는 것이지, 어떻게 용서가 먼저 있고 죄가 나중에 있나?”
더구나 내 죄에 대한 용서가 2천 년 전에 이루어졌다고?
그런데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14절)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 우리에게 이 믿음이 있는가?
“예수님이 영 단번에 우리의 죄를 해결하셨습니다! 아멘!!”
<터툴리안 - 어거스틴 - 계몽주의>
아프리카에 터툴리안이란 분이 있었다.
터툴리안은 주님이 부활하시고 100년이 조금 더 지난 주후 155년에 태어나 230년까지 살았다.
터툴리안이 40세 되었을 때, 195년에, 주님을 영접했다.
당시에는 로마의 기독교 핍박으로 엄청난 순교자가 나오던 시기이다.
목숨을 던지면서까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순교자를 보고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나도 예수님을 믿어보자!”하고 불혹의 나이에 주님을 영접했는데,
오늘날 우리와 똑같은 의문에 부닥쳤다. ‘어? 150년 전에 내 죄가 이미 사함을 받았다고?’
터툴리안은 아무리 해도 이 문제를 풀 수가 없었다.
‘죄가 먼저고 용서가 나중인데…’ 이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한번 믿겠다고 들어섰는데, 되돌아나갈 수도 없고…
고민 끝에 이런 말을 했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
이렇게 고민하면서 믿음을 가졌던 터툴리안이 죽고 100년이 훌쩍 지났다.
주후 354년에 역시 아프리카에서 어거스틴이 태어났다. 그는 430년까지 살았다.
어거스틴도 비슷한 고민을 했다.
어거스틴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하고 묵상하고 기도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
어거스틴이 생각하기에 아무래도 이해가 안되었다.
어떻게 용서가 먼저 있고 나중에 죄가 있단 말이냐?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이 감동을 주시니, “믿자! 믿자! 믿자!” “믿어보면 나중에 알게 될 게 아니냐?”
그래서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을 믿는다는 것!
이거 보통일이 아니다! 보통 사건이 아니다! 인류 역사는 예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할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터툴리안, 어거스틴이 죽은 지 천년이 훌쩍 지났다.
18세기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계몽주의가 꽃을 피웠다.
억눌려 있던 인간의 이성이 개화했다. 계몽주의는 종교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믿기 위해서는 먼저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
“이해가 안 되는 것, 납득이 안 되는 것은 믿을 수 없다!” 이것이 계몽주의다!
이때부터 성경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의 대상으로 재평가되었다.
“믿어야 한다!” 에서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납득이 안 된다고 성경을 자꾸 멀리한다.
“어떻게 용서가 먼저 있고 죄가 나중에 있을 수 있냐?”
“지금 지은 죄를 어떻게 2천 년 전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았다고 고집하냐?”
이제는 터툴리안을 데려와도, 어거스틴을 데려와도 사람들이 거들떠도 안 본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음의 대상이다!” - 터툴리안
“이해하기 위해서 믿어라! 그러면 점차 이해하게 된다!” - 어거스틴
여기에 맞서서 계몽주의 사상을 들이민다. “납득할 수 있어야 믿을 수 있다!”
<용서가 먼저이고 범죄가 나중이 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풀기 어려운 문제에 부딪힌다면, 성경으로 돌아가면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창조하셨는가?
다른 모든 피조물은 ‘종류대로 종류대로’지으셨지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귀중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수십 년, 수백 년, 수천 년 뒤에 지을 인간의 죄를 미리 용서하셨다!
그렇다면 분명히!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의 모습 속에서도 그런 일이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유비(analogy 아날러지, 類比)’라고 한다.
첫 번째 유비 : 포상제도가 있다.
학교에서나 직장에서나 국가에서는 잘하는 사람, 공을 세운 사람에게 훈장, 포장을 한다.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훈장은 ‘국민훈장 무궁화장’이다.
공을 세우고 이런 훈장이나 포장을 받으면, 나중에 죄를 범했을 때, 형벌이 경감된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은 사람이 수십 년 후에 아니면 그의 후손 중에서 중범죄를 저질렀다.’
이때 법원에서는 형벌을 줄여주도록 되어있다.
이것이 ‘나중 범죄를 미리 용서하는 제도’이다.
두 번째 유비 : 부모의 자식에 대한 용서가 있다.
이것이 아마도 결정적인 유비이다.
부모가 자녀를 낳을 때, 태어나는 자녀가 죄를 수도 없이 범할 것이라는 사실 알까 모를까?
자기가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 모를 리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짓기 시작한다.
울고, 보채고, 엄마 젖을 깨물고, 욕심을 부리고, 형제와 싸우고, 친구와 싸우고, 말 안 듣고!
이럴 줄 이미 알고 있다. 또 엄청난 비용을 쏟아 부어야 할 줄도 안다.
그럼에도 자녀를 낳는다!
이것은 자녀가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부모가 자녀의 죄를 용서했기 때문이다!
태어날 자녀의 죄를 미리 용서하지 않는다면, 자녀를 안 낳는다!
“나는 못 키워! 그런 꼴 나는 못 봐!”이런 사람은 자녀를 안 낳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낳을 거야! 그 대신 죄를 덜 짓고 살도록 잘 키워야지!”
나중 죄를 미리 용서한 것이다.
창희 수민이도 재원을 그렇게 미리 용서하고 낳았다.
철연 주영이도 인상이를 그렇게 미리 용서하고 낳았다.
한영 보연이도 유채를 낳기 전에 미리 용서했다. 그리고 지금 키우고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손자 손녀! 그들이 지을 죄, 이미 용서했다.
오! 놀라운 유비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 하나님처럼, 나중 죄를 미리 용서!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어주시는 이유>
하나님이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삼하7:14)”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셨다! 할렐루야!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 하나님!” 이 얼마나 귀한 이름인가?
하나님이 공연히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신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죄를 미리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할렐루야!
<죄는 미리 용서하지 않고는 대책이 없다!>
하나님이 이렇게 섭리하신 근본적 이유가 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그 순간부터 인간은 숨 쉬는 것부터 죄가 되었다.
숨 쉬면서도 감사하지 않는 죄!
미리 용서받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설 수 있는 자가 없다.
이스라엘이 1년에 한 번씩 희생 염소 두 마리로 온 국민의 죄를 해결했다.
이것이 과거의 죄에만 해당된다면, 내년 대 속죄일이 오기 전에 죽은 사람들 여죄!
대 속죄일 속죄제 지난 다음 또 지은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선다!
이 죄는 어떻게 하나? 해결 대책이 없다! 그러니 미리 용서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대 속죄일 제사의 효력은, 내년 대 속죄일 속죄 제사를 지내기까지 효력이 있다.
1년 단위로 먼저 용서를 받는 제도이다! ‘나중 죄를 미리 용서’
<마무리>
제발 2천 년 전 예수님의 보혈로 내 죄를 씻어냈다! 의심하지 말고 믿자!
제발 2천 년 전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의심 없이 믿자!
터툴리안처럼 고민할 필요 없다!
어거스틴처럼 고민할 필요 없다!
계몽주의에 현혹될 필요 없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자녀의 죄를 태어나기도 전에 용서해 주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그렇게 하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의심하는 것은 사탄의 조종에 휘둘린 결과다!
“사탄에 속지 말고, 세상 풍조에 휘둘리지 말고,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보자!”
“예수님은 영 단번으로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셨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