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면 굴 맛이 생각나, 남쪽 바다의 겨울 진객珍客을 만나려 형제들과 사천으로 향한다. ‘달빛 같은 흰 피부를 원한다면 굴을 먹으라’라는 속담이 있다. 우리의 생활에서 굴과 함께한 역사는 길다. 선사 시대 사람들의 쓰레기장인 패총에서 굴 껍데기가 출토되었으니 아주 오래전부터 굴을 먹어왔던 것을 알 수 있다.
굴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최고의 해산물로 여겨진다. 조선 시대 왕들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먹는 초조반初朝飯으로, 위에 부담이 되지 않는 죽을 선택했다. 이때 수라상에 같이 올리는 국이 굴국이었다. 굴은 매끈한 윤기, 부드러우면서도 탱글탱글한 식감이 여러 사람에게 좋은 호응을 얻어 왔다. 게다가 서양인들에게는 날로 먹는 유일한 해산물이기도 하다.
조선 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동해안을 제외한 7도의 중요한 토산물로 굴이 기록되어 있다. 1795년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따르면 수라상에 올린 음식으로 ‘석화잡저石花雜菹’라는 게 나오는데 이것은 굴을 넣고 담근 섞박지로 궁중에서도 굴을 넣어 김치를 담갔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지금도 취향은 다르지만, 김장할 때 속에 굴을 넣어 담근다.
남해안에서는 요즘 굴을 꿀이라 부른다. 굴 맛이 달기 때문이다. 입에 넣는 순간 ‘바다의 향기’가 번지며, 짭조름한가 싶더니 달콤하면서 뒷맛은 고소하다. 이맘때 바다 향이 진할 즈음, 제철을 맞은 굴이 제대로 된 꿀맛을 낸다. 인근 청정바다에서 자란 ‘꿀굴’은 명품 굴로 통한다. 적조가 없는 냉수대에 플랑크톤이 많아 맛이 깊고 영양이 풍부하다.
굴을 모려牡蠣, 굴조개, 석굴, 석화 등으로 불렀다. 석화는 돌 ‘석石’자에 꽃 ‘화花’로 바닷가 바윗돌에 꽃이 핀다는 예쁜 뜻을 지니고 있다. 석화는 바닷물에 계속 잠겨있어 플랑크톤을 충분히 먹고 자라, 눌렀을 때 탄력이 있어 식감이 매우 좋다. 돌에 붙은 꽃처럼 생겨 석화라 부르는 굴은 찬 바람이 불어야 맛이 든다. 9월 이후 살이 찌기 시작해 12월에서 이듬해 2월까지 맛이 절정에 다다른다. 보통 설 무렵 굴을 최고로 친다. 이때 부드러운 우유 맛이 나 ‘바다의 우유’라고도 한다.
이렇게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굴을 주목하는 이유는 무얼까. 바로 영양성분 때문이다. 굴 8개만 먹어도 하루 필요한 철분이 충족된다. 굴 2~3개만 먹으면 아연 하루 권장량인 15mg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다. 그래서 비타민과 무기질의 보고라고 불리며, 굴에는 멜라닌 색소를 분해하는 성분이 들어 있어서 피부 탄력을 부여하고 피부를 깨끗하게, 하얗게 만들어준다.
예로부터 ‘배 타는 어부의 딸은 까맣고, 굴 따는 어부의 딸 얼굴은 하얗다.’라는 말이 있다. 굴에는 멜라닌 색소를 분해하는 물질이 있어 미백효과가 탁월하다. ‘동의보감’에서도 굴을 먹으면 향기롭고 유익하며, 피부의 살갗을 가늘게 하고 얼굴색을 아름답게 하니 바닷속에서 가장 귀한 물건이다.라고 소개했다.
굴의 타우닌 성분은 간 기능을 향상하고, 알코올을 해독하는 작용이 뛰어나 피로 해소에 좋다. 굴의 타우닌 성분은 뇌 기능 활성화에 도움을 주며 심혈관질환을 유발하는 콜레스테롤 생성을 억제하고 혈압을 낮추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석화는 영양이 많은 꽃이다. 남해안 일대는 일조량이 많고 갯벌에 미네랄이 풍부해 양질의 굴이 많이 나오는 곳이다.
석화와 관련하여 재밌는 일화가 있다. 조선 시대 진묵대사가 망해사에 있을 때의 일이다. 대사는 배가 고프면 해산물을 채취하여 먹곤 했는데, 하루는 허기를 채우고자 굴을 따서 먹고 있었다. 그런데 행인이 왜 중이 육식을 하느냐고 시비를 거는 게 아닌가. 그러자 이것은 굴이 아니라 석화라고 대답해 위기를 모면했다. 그로부터 굴을 석화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우리가 간 그곳은 종편방송에서 소개한 ‘비토섬’ 바닷가 옆에 있는 비닐하우스 식당 ‘은지네 굴구이’였다. 주인이 직접 자연에서 키워 채취한 싱싱한 굴, 가리비, 전복을 사각 상자 한가득 담긴 굴을 참나무 장작으로 불 피워 석쇠에 올리면 ‘탁탁’ 소리를 내며 껍데기가 벌어진다. 우리들의 입도 덩달아 열리고 있었다. 이 겨울 모여 있는 자체만으로도 힐링을 만끽할 수 있어 발걸음은 가볍다. 몸과 마음 그리고 우애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 쉬어 가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