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9시 50분 울산역. 부산역에서 KTX를 타고 불과 20분 만에 도착했다. 테이크아웃 커피 한 잔을 들고 버스 승강장으로 나간 10시 5분, 시티투어 버스가 다가왔다.
울산 역사탐방코스. 시티투어 버스가 첫 번째로 안내한 울산 암각화 박물관. 도심에서 멀찍이 떨어진 언양군 두동면 산골에 있는 박물관이었다. 고래를 잡는 배. 고래를 끌고 가는 어부들과 잡은 고래를 해체하는 사람들. 6천~7천 년 전 신석기 시대에 고래를 잡았던 흔적을 중심으로 반구대 암각화를 설명하는 글과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골짜기 휘감은 병풍 같은 절벽 따라
6천~7천 년 전 신석기 삶을 만나고
정몽주 이언적 개혁의 꿈이 서린
황토 돌담길 그림 같은 반고서원
언양읍성·박제상기념관·치산서원…
시티투어버스 타고 떠난 역사탐방 "2005년 국제포경위원회에서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먼저 고래를 잡은 것으로 인정받는데 반구대 암각화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게다가 반구대 암각화는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잠정 등록된 상태입니다."
■가뭄에 모습을 드러낸 암각화 서영애 문화해설사의 설명이다. 그런 영광에도 불구하고 반구대 암각화는 1965년 울산공단에 공업용수를 공급하는 사연댐이 완공되면서 물 아래로 잠기는 비운을 맞았다. 매년 갈수기에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가 비가 오면 다시 수몰되기를 반복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잠정 등록된 문화재가 연중 6개월 이상 물속에 갇혀 있어야 하는 아픔. 반구대 암각화가 안고 있는 현실이다.
"하지만 1962년, 박정희 국가재건위원장이 사연댐 공사를 추진할 때만 해도 식수보다 공업용수를 확보하는 것이 더 시급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대목을 설명하는 순간 서 문화해설사는 잠시 우수에 잠기는 듯 하다 "최근 가뭄으로 오늘 반구대를 찾은 관광객들은 암각화를 만나는 행운을 누리게 됐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활기를 되찾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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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각화가 그려진 절벽. |
반구대 암각화로 가는 길. 연화산 깊은 골짜기를 S자로 휘감아 흐르는 대곡천을 따라 병풍 같은 절벽이 이어진다. 중화학공업이 발달한 산업도시 울산에 이토록 아름다운 숲길이 있었던가.
내딛는 발끝마다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걷기를 10여 분. 황토가 섞인 돌담 위에 정갈하게 지은 기와집이 나온다. 고려말 권문세가들에 맞서 개혁 정치를 주장하다 이곳으로 유배 온 정몽주와 그의 학풍을 이어받은 이언적과 정구의 학덕을 기리는 반고서원이다. 그런 서원이 있었기에 이렇게 화려한 기암괴석이 늘어선 계곡이 차분하게 보존될 수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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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산서원. |
반고서원 앞으로는 냇물이 흐른다. 건너편 절벽에는 시인 묵객들이 새겨 놓은 글씨와 그림들이 남아 있다. 정몽주의 학덕을 기리고자 이곳을 찾은 사대부들이 경치에 취해 남긴 작품이라고 했다.
반고서원에서 계곡을 따라 500여 m가량 내려가면 반구대 암각화가 나온다. 높이 70m에 길이 20m. 병풍처럼 펼쳐진 절벽에 멧돼지와 사슴, 호랑이 등 육지 동물과 고래를 비롯한 바다 고기를 묘사한 암각화가 300여 점 새겨져 있다. 계곡 건너편에서 망원경을 통해 살펴본 암각화이지만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분위기가 확연하다. 사냥과 고래잡이에 나선 사람들의 안녕을 빌면서 풍요로움을 기원하는 뜻에서 새긴 암각화. 이렇게 신성한 마음을 담아 새긴 암각화가 매년 수개월씩 물속에 잠겨 있어야 한다니.
■자연석이 정교한 언양읍성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 하고 찾아간 언양 읍성. 넓은 들판에 자연석으로 정교하게 쌓은 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성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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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고서원. |
수천 년 동안 배를 타고 건너와 노략질을 일삼다 한때는 나라를 통째로 빼앗기까지 했던 왜구의 나라. 일본. 그러고도 한마디 사과조차 않고 말장난을 일삼는 일본 정치 지도자들을 과연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비행기로 불과 1시간이면 닿는 거리에 있는 이웃 나라 일본과의 갈등을 모르는지 언양읍성 앞에 세워둔 팔랑개비의 모습은 평화롭기만 하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신라 충신 박제상 기념관.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 있던 눌지왕의 둘째 동생을 구해낸 후 일본으로 건너가 막내 동생까지 탈출시킨 다음 붙들려 왜왕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다 숨졌다는 박제상을 추모하는 사당이 있던 자리에 건립한 기념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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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 기념관. |
기념관 오른쪽에는 박제상을 기다리다 망부석이 되었다는 그의 아내를 함께 기리는 뜻에서 세운 치산서원이 있다. 조선 영조 때 건립했다는 치산서원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여성을 모시는 서원이 되었다. 지금도 울주군청은 매년 한 번씩 군수 부인이 제관이 되어 박제상 부인을 모시는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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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암각화 박물관. |
이를 두고 학계 일각에서는 "천 년도 더 지난 과거사를 들추어내어 민족 감정을 부추기는 행사를 연례적으로 치르는 것이 국익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반론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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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곡천 상류. |
미우나 고우나 함께 가야 하는 이웃 나라 일본. 8·15 광복절을 눈앞에 둔 시점에 국토의 동쪽 끝. 울산을 찾아간 여행. 진정한 극일은 실력을 기르는 노력에서 나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되새기는 여정이었다.
글·사진=정순형 선임기자 junsh@busan.com
여행 팁
■교통편
부산에서 울산으로 가는 열차가 오전 5시부터 밤 10시 20분까지 수시로 운행한다. 소요 시간 20분. 운임 8천400원(KTX 기준).
부산종합버스터미널에서 울산시외버스터미널로 가는 버스(소요 시간 1시간. 운임 4천 원)와 해운대시외버스터미널에서 울산시외버스터미널로 가는 버스(2시간 소요. 운임 6천400원)가 수시로 운행한다 .
■먹거리 언양읍성 근처에선 돌솥밥(사진)이 먹을 만하다. 걸쭉한 된장국에 배추쌈을 비롯한 고사리, 호박무침, 오이장아찌, 감자볶음을 포함한 밑반찬이 정갈하다. 나래돌솥밥. 1인분 9천 원. 052-263-7800. 정순형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