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매미의 비밀
이재영
아빠가 삼촌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빨았어요. 아빠는 담배를 안 피워요.
“아버지! 좋아하시는 맥주 드시고, 담배도 한 대 피우십시오.”
아빠는 빨갛게 불이 붙은 담배를 할아버지 영정 앞에 놓인 술잔 옆에 올렸어요. 아빠와 삼촌이 잔디에 엎드려 큰절을 올렸어요. 뒤에 서 있던 엄마와 숙모는 한쪽 무릎만 꿇고 앉으며 다소곳이 절을 올렸고, 나도 엄마 옆에서 따라 했어요.
“원 없이 살다간 양반, 우리 자식, 며느리, 손녀에게 음덕이나 베풀어주소.”
할머니는 절은 안 하고 양손을 합장하고 서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어요.
어디선가 휭~ 바람이 불어와 떨어진 나뭇잎을 쓸고 지나갔어요. 대리석으로 만든 낮은 봉안묘 뒤에는 크지 않은 느티나무가 두 그루 서 있어요. 추석인데 가을이 깊어 가는지 나뭇잎들이 벌써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어요.
두 번 절을 올리고 나서, 이번엔 삼촌이 술잔을 비우고 다시 맥주를 따라서 올렸어요. 모두 아무 말 없이 다시 절을 두 번씩 올렸어요. 어디선가 산새 우는 소리가 “국구” 하고 들렸어요.
“규리야, 너도 할아버지께 한잔 올려드려라. 손자는 아니라도 좋아하실 게다.”
할머니가 나를 보고 씁쓸하게 웃으셨어요.
나는 앞으로 나가서 비워진 잔을 받았어요. 아빠가 따르다 쉬고 다시 따른 잔을, 할아버지 영정 앞에 공손히 올려놓았어요. 사진 속의 할아버지가 나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으셨어요.
우리 집에서 아빠 차로 한 시간 거리에 할머니와 살던 할아버지는 올봄에 돌아가셨어요. 그곳에서 장례식과 화장을 치르고, 다섯 시간 거리의 이곳 고향 산소에 모신 거예요. 바로 옆에 할아버지의 부모님 묘소가 있어요. 나한테는 증조부모님이 되는 분들의 무덤 두 개가 나란히 있어요.
“고향 선산에 가족묘지를 만들 거다. 나부터 화장해서 거기에 봉안할 거니까, 그리 알 거라.”
작년 추석 때, 막 결혼한 삼촌과 숙모도 함께 할아버지 댁에 모였어요. 그때 할아버지는 이곳에 봉안묘지를 만들고 우리 가족들은 모두 여기에 묻힐 거라고 했어요.
봄에 할아버지 모시러 왔을 때는 벚꽃과 매화꽃이 막 봉오리를 터뜨리고 있었어요. 따사로운 봄볕에 벌들도 날아다녀서 할아버지가 외롭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대여섯 살 적부터 할아버지와 놀던 기억이 나요. 아빠와 엄마는 나를 데리고 설날과 추석, 할아버지 할머니 생신날에 할아버지 댁에 갔어요.
“우리 규리 공주,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라거라! 허허.”
할아버지는 세뱃돈으로 포도 넝쿨과 할머니가 그려진 예쁜 돈을 주셨어요. 설이 아닌 날에도 그 예쁜 돈을 주셨어요. 나는 할아버지 집에 가는 게 무척 즐거웠어요.
1학년이던 재작년 여름방학에 놀러 갔을 때 나는 할아버지를 졸라서 아파트 놀이터에 갔어요. 그네도 올라서서 타고, 미끄럼대도 선 채로 내려오면서 잘 타는 걸 자랑했어요.
“에구, 그러다 우리 예쁜 공주 다치면 어쩌려고! 허허. 땀나겠다, 쉬었다 놀아라.”
할아버지는 잘 탄다며, 이제 다 컸다고 흐뭇해하면서도, 나무 그늘에 앉아서 쉬게 했어요.
매미 소리가 맴맴 거리는 느티나무 아래 벤치에 나란히 앉아 땀을 훔치고 더위를 식혔어요.
무심코 나무둥치 아래를 보는데, 개미 한 마리가 흙모래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어요. 다가가서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옴폭 파인 모래 속으로 개미가 빠져들고 있어요.
“히히, 할아버지! 이 개미가 왜 이래요?”
“응? 아하, 그거 개미귀신 집이다. 깔때기처럼 홈을 파놓고 한가운데 구멍 속에 숨어서 기다리다가, 지나가던 개미가 빠져들면 잡아먹는 거야.”
“개미귀신이요? 에구~ 개미가 불쌍해요, 할아버지!”
개미귀신을 들어본 적은 있는데 그렇게 직접 눈으로 보기는 처음이었어요.
나는 점점 구멍으로 빠지는 개미가 잡아먹힐까 봐, 얼른 손가락으로 훑어 올려 저만치 던져버렸어요. 살아난 개미는 비척거리며 앞다리로 더듬이를 비비더니 부리나케 도망을 쳤어요.
“할아버지! 내가 개미를 살려 보냈어요. 개미가 나한테 고맙다고 손을 비비고 인사했어요. 히히.”
“그랬어? 좋은 일 했구나. 그런데 규리야, 개미귀신은 밥을 굶어서 어떡하냐?”
할아버지가 잘했다고 칭찬해 주시고는, 개미귀신이 굶어 죽으면 어떡하느냐고 물었어요.
그림책에서 본 개미귀신은 징그러운 괴물처럼 집게 모양의 턱이 달려 아주 흉측하게 생겼어요.
“저런 못된 괴물은 굶어 죽어도 괜찮아요, 할아버지!”
나는 모기처럼 쓸모없는 해충이라도 한 마리 잡은 듯, 신이 나서 말했어요.
“규리야, 저기 날아다니는 잠자리 중에 날개가 비단같이 얇고 배가 홀쭉한 잠자리 보이지? 저게 명주잠자린데, 개미귀신이 바로 저 명주잠자리의 애벌레야.”
“정말요? 저 흉측한 개미귀신이 나중에 저렇게 예쁘고 가냘픈 명주잠자리가 되어요?”
나는 너무 신기해서 날아다니는 명주잠자리와 개미귀신 집을 번갈아 쳐다보았어요.
“왕잠자리 애벌레는 물속에서 올챙이나 송사리를 잡아먹고 살아. 애벌레가 크면 풀숲과 나뭇가지로 올라와서 번데기가 되고, 번데기가 허물을 벗으면 날개 달린 잠자리가 되는 거야.”
할아버지는 잠자리 유충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셨어요.
“저기 나무 위에서 우는 매미는 참매미 수컷이다. 배 밑에 달린 진동판으로 ‘나 여기 있어요, 나하고 놀아줘요’ 하면서 암컷을 부르는 거야. 그런데 울지 못하는 벙어리인 암컷은 소리도 못 듣는단다.”
“네? 암컷 매미는 귀머거리라고요? 그런데 어떻게 수컷이 부르는지 알아요?”
“암컷 매미는 수컷 울음을 공기의 진동으로 알아채고 그쪽으로 날아가게 돼.”
수컷은 5분 정도 울다가 암컷이 아무도 안 오면, 다른 나무로 옮겨가서 다시 운다고 했어요. 그렇게 7일 내지 길어야 한 달간 울어서 겨우 30% 정도 짝짓기에 성공한대요. 짝짓기에 성공한 암컷은 단단한 산란관으로 죽은 나뭇가지 껍질 속에 알을 낳는데, 한 번에 5~10개씩, 40여 곳에 낳고 죽는다고 했어요.
“에구, 그럼 한 마리가 알을 400개도 낳겠네요? 그러면 매미가 너무 많이 불어나서 어떡해요, 할아버지?”
나는 느티나무가 온통 매미로 덮여서 시끄럽게 맴맴 울어 대는 상상을 하면서 몸서리를 쳤어요.
“그러면 큰일 나겠지? 매미알은 나무껍질 속에서 1년간 있다가 이듬해 여름에 부화해. 그런데, 매미의 어린 유충은 다른 곤충이나 새들에게 거의 다 잡아먹혀. 안 먹히고 살아남은 애벌레만 땅속으로 들어가 숨어 사는 거야.”
“캄캄한 땅속에서 살아요?”
“응. 풀과 나무뿌리의 즙을 빨아 먹고 5년간이나 땅속에서 살아. 허물을 다섯 번 정도 벗으면서 크는데, 굼벵이가 되면 새벽에 까치 같은 천적을 피해서 몰래 땅속에서 기어 나와서 나무 위로 올라가.”
매미는 두세 시간 만에 굼벵이 껍질을 벗고 나와서 햇볕에 날개를 말리고 변태하여 우화를 마친 성충이 된대요.
“아휴~ 알 낳고 1년 뒤에 부화해서, 5년 동안 땅속에 살다가 밖으로 나와 6년 만에 매미가 되었는데, 기껏 한 달밖에 못살아요? 매미가 너무 불쌍해요, 할아버지. 매미를 잡으면 안 되겠어요.”
나는 매미가 우는 나무 위를 올려다봤어요. 나뭇가지에 가만히 붙어서 우는 매미를 전에는 손으로 잡아 보고 싶었는데, 이제는 너무 가여운 생각이 들었어요.
“규리야, 너도 할아버지 마신 술, 음복 조금 해볼래? 하하.”
삼촌이 퇴주잔에 모은 맥주를 들고 나한테 보이면서 놀렸어요.
나는 웃으며 잘래잘래 고개를 흔들었어요. 삼촌과 아빠는 남은 맥주와 음식을 증조부모님 묘소 주변 여기저기에 뿌리며 “고수레”하고 외쳤어요.
“너희 당숙이 벌초했는데도 풀이 제법 있구나. 손으로 좀 뜯어내고 가자!”
무덤 앞 돌 제단 주변에 민들레처럼 생긴 들풀이 무성하게 자라있어요. 엄마와 숙모가 손으로 풀을 뿌리째 뽑아내려는데, 잘 빠지지 않고 이파리만 뜯어졌어요.
“어디 봐, 손으로 그게 뽑히겠나? 이걸로 파내면 되겠네!”
마침 숙모가 국화꽃을 화분 채 사 와서 옮겨 심느라고 꽃삽을 가져왔어요. 아빠는 꽃삽으로 크게 자란 들풀을 파내고, 나머지 가족들은 작은 풀만 손으로 뽑았어요.
“동서는 언제 아들 낳을 거야? 아버님께는 죄송하지만, 우리는 포기했는데!”
엄마가 숙모에게 조그만 소리로 물었어요. 할아버지가 손자를 무척 바랐던 걸 알아요.
“글쎄요, 형님. 아버님이 주신 비방대로 된다면, 곧 가질 수 있을 거예요. 호호.”
나도 풀 뽑기를 거든다며 쪼그려 앉아 엄마와 숙모의 얘기를 엿들었는데, 개미 여러 마리가 발밑으로 지나다니고 있었어요.
‘혹시 여기도 개미귀신 집이 있으려나?’
나는 문득 할아버지랑 놀던 일이 생각나서 잔디가 듬성듬성한 봉안묘 근처로 가봤어요. 조금 전에 던져진 음식 부스러기에 개미만 모여 있고, 아무리 살펴봐도 개미귀신 집은 보이지 않았어요. 빨간 잠자리 몇 마리가 날아다니기는 했지만 가냘픈 명주잠자리는 아니었어요.
“매앰, 매앰, 매~앰.”
바로 그때, 머리 위에서 매미 울음소리가 들려왔어요. 올려다보니 봉안묘 위쪽 느티나무 가지에 큰 매미 한 마리가 달라붙어 울고 있어요. 게으른 수컷 매미가 여름도 다 지나갔는데 이제야 암컷 매미를 부르는가 봐요.
“어? 이 근처에는 매미가 없었던 것 같은데. 어디서 날아왔지?”
아빠가 쳐다보고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모두 ‘글쎄, 웬일이니?’ 하는 표정으로 느티나무 위를 올려다봤어요.
“할아버지가 보낸 거예요! 한 마리 더 올 거예요. 귀머거리 암컷 매미요!”
나는 분명히 할아버지가 나하고 얘기하려고 매미를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건 나하고 할아버지밖에 모르는 비밀이니까요.
“하하. 규리 너, 음복술도 안 마시고 취한 거니?”
삼촌이 나를 보고 웃으며 놀렸어요. 그렇지만 6년 뒤, 내가 중3일 때, 매미가 잔뜩 울면, 그때 가서 비밀을 다 얘기해 줄 거예요. 히히.
(6년 전 손녀가 초등 3학년일 때 (제가) 쓴 첫 동화입니다. 올해 중3이 되네요.)
첫댓글 와~! 손녀의 글솜씨가 참 대단합니다. 초등 3학년에 이런 동화를 쓰다니요! 어메이징~^^
매미는 어쩌면 손녀에게 세상 이치와 교훈을 물려주고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현신인지도!!
선생님 수필집 '꽃노을'을 우리동네 도서관에서 구입토록 하여 소중하게 비치하고 있답니다.
국민들에게 널리 읽혀지길 빕니다~!!^^
새해 만복+건강+웃음 가득하시구요~^^
네, 현광 회장님. 손녀가 3학년일 때 제가 쓴 첫 동화입니다. 하하.
아, 동네 도서관에 얘기해서 구입하도록 하셨군요. 널리 홍보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올해 현광님 댁에 만복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0^
초등학교 3학년의 글이라니 믿기지 않는군요.
아하, 이런! 손녀가 3학년일 때 (제가) 쓴 첫 동화입니다.
사려 깊지 못했습니다. 얼른 수정했습니다.
매미의 일생 6년이 금세 지나서 올해가 됐다는 뜻입니다.
그때 제가 죽는다는 가정하에 손녀와의 정을 남겨본 동화입니다.
어머님 공원묘지에
성묘 하러 갔던 모습도 떠올려보며
이 추위에
매미 이야기를 들으니
따뜻해지는 것 같아서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서림 유성자님. 말씀 감사합니다.
성묘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이어주는 좋은 풍습인 것 같습니다.
손녀사랑이 느껴지네요.
저도 손녀를 맞이한지 백일이 지났네요.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세상의 중심이 되어가네요.
네, 강순덕 국장님 말씀 감사하고, 손녀 백일 축하합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후손을 남기는 일이 제일 큰 사명이겠지요. ㅎ
재밌어요ㆍ과학동화로 보면 좋겠습니다
네, 신이비 작가님. 칭찬의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