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뮤니즘, 김일성주의, 자유주의
최근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장은 "문재인 (전)대통령이 신영복 선생을 가장 존경하는 사상가라면 확실하게 김일성주의자입니다."라며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김문수의 발언은 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민주당과 노동단체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비판의 핵심은 김일성주의라는 과대 표현과 반공에 매몰되어 노동조합을 부정하는 극우 유튜버인 김문수가 사용자 측과 노동자 측의 주장을 중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2015년에도 김문수와 같은 논란이 국회에서 있었다. 공안검사 출신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은 국회 국정감사에서 “문재인 대표는 공산주의자”, “노무현 전 대통령은 변형된 공산주의자”라고 말했다. 이에 코뮤니스트 오세철 동지는 “문재인, 노무현은 공산주의자와 거리가 먼 사람들이며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개혁을 통해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자유주의자”로 규정한다.1)
자유주의는 반(反)봉건 부르주아 해방이념으로서 부르주아들이 쟁취한 사회‧경제적 권리를 천부 인권으로 선포하고 국가권력 질서로 부르주아 권리를 보장하기 적합하도록 개편한 정치이념이다. 이때 부르주아 권리의 핵심은 사유재산권과 시장경제 질서 속에서 부르주아적 개인들의 영리 추구의 자유다. 그리고 법치국가란 부르주아적 권리를 국가도 침범할 수 없는 국민 기본권으로 보호하는 국가체제로서, 오직 이러한 부르주아적 개인들의 대표기구가 합법적으로 위임하는 바에 따라 국가 행위가 이루어지는 국가이다. 법치국가의 전제로서 권력 분립, 국가 집행 기구에 대한 부르주아 개인들의 대표기구인 의회 통제력, 사법권이 존재해야 한다. 반봉건투쟁 속에서 부르주아들이 수립하려 한 정치질서란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 사회 전체 해방이 아니라 유산자들의 자유 공화국이었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는 1998년 만들어진 노사정위원회가 여러 번에 걸친 개명을 거쳐 지난 문재인 정권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노사정 3자주의를 통한 사회적 대화 원조는 국제노동기구(ILO)다.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과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투쟁 고조로 국제 부르주아에게는 위기감이 팽배하였다. ILO는 이러한 부르주아의 위기감을 반영하여 1차 제국주의 전쟁 직후인 1919년 출범하면서 세계 전쟁 억제와 코뮤니스트혁명을 예방하고자 하였다. 한국의 경사노위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경사노위 위원장은 극우 유튜버가 아니더라도 표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친자본적인 인물이 선임되었다. 가령 노동운동 출신 인사를 위원장에 인선하더라도 그는 친자본적인 성향에서 활동할 뿐이다. 계급사회에서 대화를 통해서 피지배계급의 최소 권리를 획득하고 유지한다는 것은 결국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이해관계를 관철하려면 김문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경사노위 자체를 부정하고 비판하며 계급투쟁의 역량을 증대시켜야 한다. 그런데도 경사노위 참가 전제 중 하나로 노동계급 의사를 국가기구에 반영하는 제도가 경사노위뿐이라서 참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계급사회에서 계급 간 대화는 대등한 힘이 바탕이 되었을 때 일시적인 순간은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계급 간 이해관계에서 절충이 없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역사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용어는 이데올로기
‘문재인은 김일성주의자’라는 주장에는 반공이데올로기를 배경으로 ‘김일성주의’는 ‘공산주의’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왜곡의 시작은 단어, 기호에서부터 비롯된다. ‘바이든이 아니고 날리면’이라는 해명은 처음에는 웃음거리였지만, 지배계급의 반복된 선전 진행으로 어느새 진실이 되고 역사가 된다. 간접제와 민주주의는 다른 개념이지만 19세기 미국에서 조합하고 조작한 간접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어느새 학교에서, 책에서 민주주의 인양 재생산되고 있다. 이처럼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왜곡된 용어는 수없이 많다. 스탈린주의, 김일성주의가 코뮤니즘과 등호 관계로 선전되고 이데올로기화되는 것 역시 노동계급에 혁명의 경로와 전망을 침탈하고 지배계급의 이익에 복무하게 된다.
그동안 한국 (수구기득권)지배세력은 공산주의와 김일성주의를 정적 제거와 노동자·인민에 대한 탄압 수단으로 사용해왔다. 그들의 주장에 반대하는 세력은 반공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공산주의, 좌경빨갱이, 김일성주의라 낙인찍으며 탄압해왔다. 심지어는 자유주의적 주장까지 좌경빨갱이로 몰아붙이고 있다. 이렇듯 그들의 마녀사냥과 거기에 더해 스탈린주의, 마오주의, 김일성주의에 대한 공산주의 낙인은 공산주의에 대한 엄청난 혼란과 왜곡을 낳고 있다. 탄압의 강도가 얼마나 혹독했으면 한국 사회에서는 ‘다르다’를 ‘틀리다’로 사용하는 언어적 습관과 사고까지 재생산되고 있다.
코뮤니즘과 코뮤니스트
코뮤니즘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기계적이고 맹목적이며, 스탈린주의와 김일성주의 영향으로 비민주적, 봉건적, 기본권 억압, 경제난이라는 이데올로기 공격이다.
“코뮤니즘은 … 구(舊)사회에 내재한 모순으로부터 그리고 그 사회 발전의 필수적인 귀결의 하나로서 출현한다. 그러나 코뮤니즘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비록 코뮤니스트 사회가 자본주의에 내재한 경제적, 사회적 모순의 결과이자 실재적이고 객관적인 조건의 산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실천적이고 집단적이며, 의식적인 창조물이다. 역사상 최초로 하나의 사회 계급이 그들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조직화하고 의식적인 방법으로만 가능하다. 이것이 코뮤니즘이 지적인 ‘계획’도 아니며, 맹목적이고 기계적인 필연성도 아닌 이유다. 코뮤니즘은 인류 공동체가 이전 사회관계의 폭력적 파괴에 뒤이어 구세계를 의식적이고 점진적으로 변혁시킨 결과가 될 것이다.“ (”코뮤니즘이란 무엇인가“ 「코뮤니스트」 9호)
즉, 코뮤니즘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철폐해 나가는 조직되고 의식적인 혁명을 통해서 가능하다. 자본과 노동 사이의 구별을 철폐하고 자본과 임금 체계, 상품 생산, 그리고 모든 민족적이며 계급적인 분리를 철폐해 나간다.
코뮤니즘은 계급,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 어떤 종류의 개인적, 집단적 소유도 없는 사회이다. 이러한 결과로 결핍 철폐와 필요에 의한 생산과 계급 철폐를 통해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 가능하다. 코뮤니스트는 이처럼 투쟁과 혁명으로 자본주의를 넘어선 사회를 건설하려는 노동자와 활동가들이다.
김일성주의와 코뮤니즘
결론부터 말한다면 김일성주의는 코뮤니즘과 아무 관련이 없다. 북한은 김정은이 3대 세습하면서 현시점에서 절대 권력이 혈족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봉건적 성격의 국가이다. 김일성주의는 맑스주의에 사람 중심의 사상, 이론, 방법을 부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맑스는 사람 중심의 세계관과 이른바 인간(의 속성)론은 맑스주의에 없던 어떤 것, 그리고 이후 ‘시대의 발전’에 수반하여 부각되는 새로운 합리적 요소가 아니라 맑스가 이미 1840년대에 포이에르바하에게서 배웠다가 그의 사상의 발전과 함께 비판하고 폐기해버린 ‘비합리적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즉, 북한의 절대권력 세습과 맞물린 통치 이데올로기이다.
"그럼 북한은 코뮤니즘 국가인가? 마오주의의 중국혁명이 부르주아 인민혁명인 것처럼 스탈린주의가 위로부터 강제한 북한의 “인민민주주의”는 노동계급의 혁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국가자본주의의 변형에 불과하다." (“북한, 스탈린주의와 마오주의가 종착된 봉건적 주체주의”, 「코뮤니스트」 창간호)
공산주의가 아닌 코뮤니즘
한국의 수구기득권 세력은 이념과 논리가 시시때때로 바뀌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이다. 그들의 이익을 유지하고 획득하기 위해서는 극우 이념도 갖다버리는 세력이다. 그럼 수구기득권은 왜 자기주장에 반대한 세력을 공산주의, 김일성주의로 낙인찍을까? 이것은 ILO 창립 배경과 비슷한 이유이다. 코뮤니스트혁명의 방지와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 지배계급 내 다른 분파에 대한 권력 독점에 있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도 김일성주의자로 낙인을 찍는 것이다.
스탈린주의와 김일성주의를 특징짓는 비참함, 결핍, 그리고 억압이 자본주의를 더욱더 높은 형태의 사회로 바꿀 수 없다는 불가능성과 공산주의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심어 주고 있다. 그러면서 자본주의 경쟁, 제한 없는 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욕망, 이런 것들이 인간 본성의 본질이라는 것으로 정당화되었다. 이러한 선전은 노동계급 일반에 심각한 혼란과 무질서를 가져왔으며, 왜곡과 편견은 노동계급이 자신의 투쟁을 정치화하고 자본주의 체제 전체에 맞설 수 있는 역량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이것이 부르주아가 취하는 이득이고 낙인찍는 이유이다
나오며
이처럼 공산주의라는 용어는 스탈린주의, 김일성주의와 혼동으로 국제 부르주아에 의한 악의적인 선전으로 이용된다. 전제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와 민주주의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그리고 지배계급이 열심히 유지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신비화의 근거이다. 따라서 이러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맑스주의 탈을 쓴 온갖 사이비(스탈린주의, 마오주의, 김일성주의)와 구별하기 위해, 공산주의가 아닌 코뮤니즘을 원어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기나긴 자본과의 투쟁에 첫걸음이다.
2022년 11월 10일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 ㅣ 윤태상
<주>
1. “진짜 공산주의자 오세철 교수가 본 문재인·노무현 공산주의자 논란”, 「경향신문」, 2015년 10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