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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내용에 앞서서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성도들이 가져야 할 성경관을 하나 소개하고자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자신을 보여주신 계시서입니다. 불신자가 아닌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소개하신 것입니다. 방법적으로는 역사를 통하여 언약과 성취로서 보게 하셨고 언약과 성취의 그 중심은 메시야(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성경을 통하여 드러내신 하나님의 계시적 의미와 그 내용이 무엇인가를 전체적으로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무조건 따른다는 것은 보이는 것만을 쫓고 따르는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된 하나님 말씀의 의미를 우선 깨닫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호4장6절). ‘안다’(히,‘야다’ידצ)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매’에서 동침과 같은 의미입니다. 즉 인격적으로 접촉하고 경험하여 모든 지각으로 깨닫고 영접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지고 믿어지면 자원하여 신령적으로 예수의 지체가 되어 믿음의 행위가 나타납니다. |
12장에서 36장까지의 의미분석 | ||
선민의 열조와의 언약 | ||
12~20장 아브라함과의 언약 | 21-26장 이삭의 언약 계승 | 27~36장 야곱의 언약 계승 |
12-14장 가나안 땅 언약 15-16장 자손 번창 언약 17-20장 열국 통치 언약 | 21-23장 언약 계승의 준비 24-26장 언약 계승의 실현 | 27-28장 야곱이 받은 복과 언약 29-36장 야곱의 복과 언약 성취 |
13장의 전반부는 아브람이 조카 롯과 헤어지는 내용으로서 1절부터 4절까지는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애굽에서 올라와 처음으로 단을 쌓았던 곳에 이르게 하시는 섭리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바로를 치시고 아브람을 애굽에서 가나안 땅의 네게브 지역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십니다(1절).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언약하신 가나안 땅을 반드시 주시며, 아브람은 가나안 땅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계시하시는 사건입니다. 아브람이 애굽에서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다시 약속의 땅으로 올라오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때문입니다. 여기서 ‘네게브’는 가나안의 남쪽에 있는 사막지역입니다.
애굽에서 올라올 때의 아브람은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습니다(2절). 애굽의 바로에게서 공짜로 받은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특별 은총을 입은 언약 백성들은 자격과 조건 상관없이 모든 것을 은혜로 그저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네게브에서 길을 떠나 가나안 땅 요단강 서편 중간 지역인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는데(3절), 이곳은 아브람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입니다(4절, 창12: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본문 2절의,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라는 것은 앞서 12장 말미에서 설명을 드렸으나(12:14~15)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은,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달아야 만이 하나님의 계시와 뜻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과 절대적 은총입니다.
즉 하나님께로부터 선택과 은총을 입은 백성들은 무조건적으로 은혜를 입어 복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혈연이나 조건이나 행위 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아브람처럼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선택을 받고 자녀가 된 자들은 인생의 모든 것이 합력되어 선이 이루어지며 복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선포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사55:8).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다고 언약하여 주시고도 그 땅에 어려움이 있게 하여 그를 애굽으로 내려가게 하시고, 그리고 애굽의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브람을 구출하고 부자가 되어 돌아오게 섭리를 하십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먼저 복을 주시고서 언약을 하셨기 때문입니다(12:2~3). 그래서 아브람은 실수를 하는데도 복을 받고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간을 연단시키지 아니하시면 죄인된 인간은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자기가 잘나고 똑똑하며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기 때문에, 아브람도 그냥 편안한 상태에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풍요롭게 살게 되면 여호와의 능력을 믿기가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어려운 시련을 주어서 여호와가 하나님, 곧 전능자 되심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렇게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 아브람은 그가 처음 단을 쌓은 곳에 이르러 언약을 이루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참으로 감격스러운 장면입니다. 아브람이 흉년이 들어서 살기 위하여 애굽으로 내려갈 때에는 가나안 땅을 주신다고 언약하신 여호와의 말씀이 의심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자신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부자가 되게 하셔서 다시 언약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하시니 어찌 언약을 이루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겠습니까?
아브람이 애굽에서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다시 약속의 땅으로 올라오게 되는 내용을 이해하셨다면 5절 이하의, 조카 롯과의 헤어지는 과정도 분명해집니다.
아브람과 함께 가나안 땅의 중부지역인 벧엘과 아이 사이로 올라온 롯에게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었습니다(5절). 하지만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가 없었습니다(6절). 좁은 땅에 동거하다보니 목자들끼리 싸우게 되고 또한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거주하고 있었습니다(7절).
이에 아브람이 조카 롯에게 제안을 하고 선택권을 롯에게 먼저 줍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8,9절).
이에 롯은 눈을 들어 사방으로 바라보다가 동쪽 소알 땅의 물의 넉넉함으로 여호와의 동산같고 애굽 땅과 같이 보이므로 그 땅을 선택하고 향합니다(10,11절). 롯이 동으로 소돔으로 옮기니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남게 됩니다(12절). 그리고 당시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습니다(13절).
이 내용의 보통 해석은, 아브람이 마음이 넓어 양보하고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어서 롯이 소알 땅으로 가고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과 무관한 해석입니다. 가나안 땅에 남게 되고 머물 사람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아브라함입니다.
롯은 물론이고 아브람과 그의 자손들 외에는 가나안 땅을 떠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그의 후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언약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절대적인 언약이요 무조건적인 언약입니다.
이를 확인시키기 위한 역사적인 사건이 바로 여호수아의 전쟁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하신다는 것을 전쟁을 통해 확인시켜 주십니다. 잠언 16장 9절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이 실수해서 혹은 내가 죄를 지어서 또는 내가 어떻게 하므로 퇴보하거나 무산되며 깨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렇다면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할 수가 없었고 이스라엘도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 성도들이 반드시 되짚으며 정리가 필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인간의 자유의지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과연 우리의 구원은 결코 확신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는 인격적 의지는 창조주시요 주권자이신 하나님 안에서의 자유의지 곧 종속의지입니다. 이것을 더 분명히 정리하면 ‘피조적 종속의지’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각자에게 하나님을 떠난 자유권을 주신 대상은 없습니다. 이것이 창조주와 피조된 모든 만물의 관계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절대적 의지를 가지고 있는 분이시며 그리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상대적 의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독으로 무엇 어떤 것 하나도 할 수가 없습니다. 모두 유기적 관계로 인해 살아가며 기동합니다. |
가나안 땅은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언약하신 땅입니다. 아브람의 후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기에 다른 어느 누구도 들어가서 거주하거나 자기 땅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서의 가나안 땅은, 성도들이 들어가서 영원히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모형입니다.
이브람을 통해 확인시키듯이, 이 나라는 인간의 의지나 노력 혹은 선행으로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은 벌써 죽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하나님에 의해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롯이 소알 땅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아니, 롯은 가나안 땅이 아닌 다른 땅을 선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가나안 땅은 아브람이 있어야 할 땅입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내려가고 블레셋으로 내려가도 하나님께서는 그들 왕을 꾸짖고 징벌하셔서 아브람으로 하여금 재물과 함께 다시 가나안으로 돌려보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람에게는 언제나 행위와는 상관없는 ‘무조건적인 복’이 동행합니다. 아브람에게는 항상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동행합니다. 이유는 하나님 사랑의 선택 때문입니다. 이 복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이 누리게 되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총칭합니다.
인간이 보기에 좋은 것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은 서로 다릅니다. 타락한 인생의 눈은 언제나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소경된 눈을 주께서 열어 주시지 아니하시면 모든 인생은 죽음의 길로 달려가듯이 갑니다. 악인이 부해지고 평탄한 것처럼 세상을 산다해도 그것을 부러워해서는 안됩니다. 그 길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하기로 예비된 곳으로 가는 길입니다.
14절부터 17절까지의 말씀은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땅과 자손을 약속해 주시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롯을 떠나보내고 홀로 남은 아브람에게 임하셨습니다(14절). 그리고 가나안 땅의 동서남북을 보게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15~17절)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신 언약의 연속적이고 반복적이며 확신을 주시는 약속입니다.
위의 본문에서 눈여겨 볼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네 자손에게 주리니’에서 ‘자손’입니다. 이 ‘자손’을 헬라어로 ‘제라(זרע)’인데 본문에서 단수입니다. 본문의 역사적 흐름에서 파악하면 복수이어야 하는데도 원문은 단수입니다. 이는 곧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만들어지는 그의 자손들 역시 하나의 교회이며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단수로 표현한 것이며 이는 장차 오시는 메시야 예수님에 대한 예표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메시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지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에게 ‘영원’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숫자를 ‘땅의 티끌’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이들의 나아감은 세상으로 어느 무엇도 막을 수가 없음을, 언약하시고 그 언약을 성취하심으로 나타내십니다. 비록 지금의 내 모습이 부족하고 어설프다 하더라도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 잠시뿐이며 성도들에게는 아버지의 나라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된 말씀을 듣고 난 아브람은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18절).
즉 아브람은 벧엘에서 롯과 헤어지고서 다시 내려왔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헤브론은 가나안 땅의 남단 지역에 위치해 있습니다. 헤브론은 꼭 기억해야 할 지명입니다.
좀 말씀이 보이시는지요?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에게 향한 사랑과 은혜를 아브람을 통해서 말씀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이같은 사실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성도와 교회가 가진 특별 은총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복된 자(히, ‘아쉬레’ר)입니다. 시공을 뛰어넘어서 영원히 변치 않기 때문에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으로서 예수님을 지칭하며 이것을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것입니다. 이 복이 아브람의 복이며 성도의 복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우리 성도와 교회가 받은 복에 대해서 설명합니다(롬4장).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나라를 세우시는데 이는 곧 장차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워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모형이며 이 나라의 정체성은, 인간의 행위나 인간의 의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의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그의 공로로 들어감을 설명합니다. 다시 한번 정리할 것은, 인간은 매일 매순간 ‘선택’을 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일반철학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합니다. 인본주의의 극치의 산물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의지에 대하여 ‘피조적 종속의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종속 의지는 창조주의 절대적인 자유의지 가운데 속해 있으며, 인간은 피조적 종속 의지에 의해 선택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사실은 성경 전체에서 확인이 됩니다. 분명한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나 인생의 계획은 모래 위에 쌓은 집처럼 모두 무너지는데 이는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교만하여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자리에 앉고 서려고 합니다. 그래서 끝까지 버리지 못하고 고수하는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입니다. 그렇다고 뜻대로 하며 되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음에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의지를 가지고서 무엇하나 온전히 세운 것이 있습니까? 내 몸도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세상을 어떻게 마음대로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유의지를 주장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동전의 앞뒷면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사와 만물을 통치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한다고 기도하며 고백을 하면서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내세우면 말이 되지를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내세우며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굽히지 않겠다는 인간의 교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