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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각 정당에서는 대권후보들을 내세우는 데, 모든 초점을 모으고 있습니다. 또, 대권후보들은 제각기의 공약과 소신을 밝히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인들이나 경영인 등, 사회 고위 지도층들에게 요구되는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노블레스 오블리제”라고 합니다. “노블리스는, 닭의 벼슬을 의미하고, 오블리제는 달걀의 노른자”라는 의미로, “사회 지도층이 사회로부터 정당한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명예인 ‘노블리스’만큼, 의무인 ‘오블리제’를 다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각 후보들은, 국민들의 귀에 달콤한 소리만 들려줄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면에,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정신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하면, 떠오르는 동상이 있습니다. “칼레의 시민상”입니다. 이는, 몸소 실천한 프랑스 칼레 시민들의 영웅적 이야기입니다. 배경은, 영국과 프랑스 간의 100년 전쟁으로 올라갑니다. 이때, 영국은 프랑스의 크레시 전투에서 대승을 하고, 북부 프랑스 항구도시인 칼레를 포위하게 됩니다. 이 곳에서 프랑스인들은, 1년간 처절한 저항을 합니다. 하지만, 모든 양식이 떨어지자, 영국에게 항복하며, 칼레시와 시민에 대한 관용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전쟁으로 인한 손해와 고생한 것을 말하며, “칼레의 시민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죽이겠다!”라며, 거절합니다. 그러나, 프랑스는 계속해서 간청을 했고, 또, 에드워드 3세의 측근인 월테 머네이 경이 곁에서, 패자에 대한 관용을 간청함으로,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의 항복을 수용하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칼레시민들의 목숨은 보장하지만, 그동안, 영국에 피해를 준 것에 대한 책임으로, 칼레시의 대표 6인을 보내면, 칼레시민들을 대신하여 그들만 처형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때, 칼레에서 가장 부유했고, 지도자였던 “유스타슈 생 피에르”가 “칼레의 시민들이여, 내가 나서겠소!”라며, 죽음을 자처합니다. 그러자, 시장도, 상인도, 그리고, 그의 아들도 나섬으로, 칼레를 대표해서 죽음을 자처한 사람은 모두 일곱명이 되었습니다. 이중 한 사람이 제외되어야 했지만, 모두가 죽음을 자처하기에, 생 피에르는, “내일 아침, 장터에 가장 늦게 나오는 사람을 제외하기로 하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다음 날 아침이 밝자, 죽음을 자처한 대표들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가장 먼저, 죽음을 자처한 생 피에르가 빠졌습니다. 그는 빠질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의 자택으로 가보니, 혹시라도 살기를 바랄 마음이 그의 결단을 막을까봐 집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남은 사람들은 생 피에르의 희생을 생각하며, 칼레시의 열쇠를 들고, 에드워드 3세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 곳에는 6개의 교수대가 곁에 있었습니다. 이때, 왕비 “에노의 필리파”가 자신의 태중에 있는 아이의 안전한 출산을 위해, 6명에게 관대한 관용을 베풀어 줄 것을 왕에게 간청하였고, 또, 생 피에르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음으로, 6명의 교수형은 집행되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칼레시민들은 목숨을 건지고, 칼레시도 보존하게 됨으로, 칼레시는, 이들 7명의 영웅들을 기리고자 동상을 세웠고, 영국 역시, 비록 적이지만, 그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런던 국회의사당 정원에 세웠습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가 교회만을 다닌다고 해서, 또,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온전한 교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를 다니며, 예배를 드리는 것은, 성도의 기본자세입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성도로서의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그 마음은, 마치, 조각가가 아름다운 조각을 하기 위해 재료의 여러 부분을 제거하듯, 절박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우리에게 있는 불순물들을 제거하여, 정금같은 성도들이 됨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5 - 16절을 보시면,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라고 합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야 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 말씀을 받아,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메신저입니다. 그러기에,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전했으며, 사도 바울과 실라는 복음을 전함으로, 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말하는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비로움을 앞세워,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라며,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언뜻 성경적인 메시지와 같고, 그들의 모습에는, 성경에서 말하는 경건이 있기에, 그들의 말을 들으며, 그들의 모습을 보는 이들로서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성경과 신앙에 대한 욕심으로 인해, 그들의 거짓된 모습을 쉽게 발견하지 못합니다. 마치, 두 그림을 비교하며, 서로의 틀린 그림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합니다. 여기서, “삼가다”의 의미는, “옳은 길에서 결단코 미혹되어 실족하지 말 것”을 말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자신들을 철저하게 위장합니다. 그래서, 이들의 위장과 이들의 내면에 있는 탐욕은, 구별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그들을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 16절을 보시면,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라고 합니다. 여기를 보면, 거짓 선지자와 참된 선지자를, 가시나무와 포도나무, 엉겅퀴와 무화과나무에 비교합니다. 가시나무와 엉겅퀴는 그야말로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기에, 쓸모없는 나무로, 사람들이 잘못 만지면 찔리는 아픔을 주고, 그것들이 있는 곳에서는 곡식을 재배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은, 허술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관찰하며, 인내하는 가운데서 기다려야 합니다. 그들의 말, 그들의 행동, 그들의 삶에서 반드시, 열매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당장 들려오는 확신에 찬 말과 화려한 언변과 그들이 신령하게 보이는 능력과 명성에 이끌리지 말고, 그에게 어떤 열매들이 있는가를 보며, 분별해야 합니다. 교회사를 볼 때, 사람들을 가장 많이 현혹시켜 온 것에는, “종말”과 “에스겔, 다니엘, 요한 계시록”에 대한 것이 많습니다. 이것은, 종말에 대한 것으로, 모든 이단들은 사람들의 두려운 마음을 자극하여 자신들이 목적한 바를 얻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거짓 교사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 행동하는 것에 대해, 행 20: 29 - 30절에서,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고 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겉으론 예수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한 목적에 초점이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잘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아름다움 열매를 맺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7 - 20절을 보시면,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좋은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기에, 나무의 본질적 속성과 나무의 결과적 특성이 완전히 일치합니다. 이는, 나무의 속성과 특성에 반대되는 열매는 맺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겉으로만 아름답게 꾸민 위장된 삶은, 얼마동안만 보여 질 수 있을 뿐입니다. 눅 6: 45을 보시면,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고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아무리 말과 행동을 조심한다 할지라도 결국, 그들의 정체는 여실히 드러나게 됩니다. 여러분, 짝퉁과 진품의 차이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짝퉁과 명품의 차이는 자신감이라고 한다. 짝퉁 루이비통을 들고가다 비를 만나면 자연스럽게 옷 안에 감춰봐라. 입고 있는 옷이 짝퉁 조르지오 아르마니라도 좋다. 그 순간 가방도, 웃도리도, 신고 있던 짝퉁 페라가모 구두도 명품이 된다. 너무나 롤렉스 스포츠장이 갖고 싶어 어둠의 경로를 통해 짝퉁을 구입했다. 짝퉁 가격이 무려 110만원. 진품은 1,800만원. 어느 날 태엽 감는 용두가 빠져 사라졌다. 고치러 시계방에 가야되는데 짝퉁이라도 롤렉스 아닌가. 롤렉스 전문점으로 가서 시계를 풀었다. 시계방 사장님은 시계를 받아들고 10초쯤 눈빛이 흔들렸다. 뒷 뚜껑을 따더니 나즈막히 묻는다. ‘비싸게 주고 사셨겠습니다. 네. 최소 100만원은 주셨겠습니다. 110에 샀습니다.’ 사장님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라진 용두를 새 것으로 갈아주었다. 비용은 20만원. 시계를 건네며 사장님이 말했다. ‘시계를 건네는 손길이 너무나 당당해서 10초 동안 속았습니다. 뚜껑을 열기 전까지 진품인 줄 알았습니다. 제가 롤렉스만 30년을 했습니다.’”라고 합니다. 지금도, 많은 성도들과 목회자들이 그들에게 넘어가, 그들의 반열에서 그들과 똑같이, 성도들을 유혹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본명이 아닌, 코드네임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3일쯤은 천사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고 수년이 지나면, 그 본연의 모습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 20절을 보시면,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합니다. 이는, 외모나 학벌이나 신앙 연륜이나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보다, 그 사람 신앙인격의 열매 즉, 속사람의 열매를 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거짓선지자를 구분할 뿐만 아니라, 우리 또한 어디서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좋은 성도가 됨으로,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1절을 보시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합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주여, 주여”한다고 해서, 아름다운 성도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 곧, 하나님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겁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내면에는, 그 입술로 말하는 고백에 대해, 뒷받침을 할 수 있는 진실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일종의 형식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위선자이기에,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는 진정한 관계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이 찾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성도는, 영육이 일치되어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이지, 입술로만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본문 이하 23절을 보시면,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도무지”의 의미는, “내가 너희를 안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그들의 메시지와 행위가 하나님과 상관없이 행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70명의 제자들을 따로 세워서, 두 명씩 짝을 지어 전도 실습을 시켰습니다. 이들이 마치고 돌아와서는,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 이름의 능력, 곧 성령의 권능을 경험하고는 너무도 기뻤던 겁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욕심에 이끌려 하나님의 진리가 아닌 다른 것에, 우리의 관심을 빼앗김으로, 성도로서의 삶이 뒷전으로 물러서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 본문 21절을 보시면,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십니다. 성도된 우리의 신앙은, 입으로만, 그리고 지식으로만 믿는 신앙이 아닙니다. 여러분, 앵무새도 하나님께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입으로만 주를 섬기는 신앙으로는 결코, 하나님께 성도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여,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의 아름다운 삶인지를 생각하며, 매사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