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낯선 나라의 도시에 처음 방문하게 될때면 어디서부터 여행을 시작해야 할지 막막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땐 가장 먼저 '뮤지엄 패스' 등을 구매해서 그 도시를 대표하는 미술관·박물관들을 찾곤 했다. 도시에 산재한 미술관·박물관들을 찾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지역을 방문하게 되고, 또 그곳만의 남다른 분위기를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든 미술관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큰 활기를 띠었는데 덕분에 낯설고 두렵기만 하던 도시가 어느 순간 친밀하게 느껴질 만큼 내게 여행지에서 미술관의 존재감은 상당히 컸다.
한 나라에 그곳을 대표하는 국립미술관·박물관들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자랑스러운 문화·예술 자원을 품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젊고 활기찬 도시 분위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MMCA SEOUL)'이 개관하기 전까지 근·현대미술을 접할 기회가 많이 없었다. 물론 본관인 ‘과천관’이나 ‘덕수궁관’ 등이 있었지만, 내게 미술관 방문에 대한 즐거움을 가르쳐준 곳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시작이었다. 경복궁 옆 삼청로에 현대미술관 건립을 알리는 높은 가림막이 쳐졌을 때부터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더니 개관 이후에는 지금까지 꾸준히 찾게 될 만큼 좋아하는 장소가 되었다. 특별히 갈 일이 없었던 종로 일대를 꾸준하게 찾게 된 것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덕분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건립된 부지는 경복궁 옆에 자리한 큰 땅인 만큼 역사가 깊은데 조선 시대 때 조선 국왕의 친인척 사무 담당 기관인 ‘종친부’, 조선 문치주의를 대표하는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 국왕에 대한 간쟁과 논박을 담당한 관청인 ‘사간원’ 건물터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의학전문학교(경성의전) 부속병원’이 들어섰고, 70년대에는 2008년, 과천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 건물 등이 있었다. 이때만 해도 특별한 느낌이 없었던 경복궁 옆 고즈넉한 '삼청로'가 미술관을 가기 위한 설레는 길이 되어서 기쁜 마음이다. 그렇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2010년에 건축설계 아이디어를 공모하여 당선작 선정 후 공사에 착공, 2013년 11월에 개관해 10주년을 앞두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국립현대미술관(서울)을 방문해 보는 것을 권한다. 회화, 조각, 영상, 설치 등 동시대 작가들의 다채롭고 놀라운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사와 풍요로운 예술교육을 경험할 수 있다.
MMCA 현대차 시리즈 2022 : 최우람 [작은 방주]
MMCA Hyundai Motor Series 2022 : Choe U-Ram [Little Ark]
○ 장소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로 30 (소격동 165-10)]
○ 전시실 : 서울 5전시실, 서울박스 (MMCA Seoul Gallery 5, Seoul Box)
○ 전시 기간 : 2022.9.9.(금) - 2023.2.26.(일)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는 5가지 주요 전시가 진행 중이다. 그중 인상 깊었던 전시 한 가지를 소개해 본다. 'MMCA 현대차 시리즈'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하고 현대자동차가 후원하는 전시이다. '작은 방주'라는 제목으로 열린 최우람 작가(b.1970)의 작품들은 보는 내내 감탄과 놀라움을 자아냈다. 작가의 작품은 리움미술관(LEEUM)에서 '쿠스토스 카붐'이라는 작품으로 먼저 접한 바 있는데 아주 날카로운 금속들로 이루어진 독특한 기계 생명체가 치밀한 설계에 따라 섬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한참이나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이처럼 작가는 199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 정교한 설계를 바탕으로 움직임과 서사를 가진 '기계 생명체(anima-machine)'을 제작해 왔다고 한다.
<원탁> & <검은 새>
'작은 방주'를 포함한 대다수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서울 5전시실'로 가기 위해 '서울박스'를 지나게 되는데 이곳에서 '원탁'과 '검은 새'라는 작품을 먼저 만나게 된다. 천정에는 검은 새 세 마리가 매달려 있고, 그 아래에는 18개의 지푸라기 몸체가 작은 공 하나가 놓인 커다란 원탁을 짊어지고 있다.
<검은 새>, 2022
때마침 '원탁' 주변으로 관람객들이 모여들었는데 무언가가 일어날 시간인가 보다 하고 덩달아 옆에서 기다려봤다.
<원탁>, 2022
잠시 후, 작품 '원탁'은 천천히, 리드미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탁이 기울 때마다 공도 따라 기울었는데 한쪽으로 치우칠 때면 다른 한쪽이 힘을 가해 공을 끌어들이면서 팽팽한 균형이 이루어지는 모습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무거운 짐을 힘겹게 짊어지고 있는 모습이라고 하기엔 원탁 위로는 작고 가벼워 보이는 공 하나뿐이다.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걸까?
가만히 보고 있으면 지푸라기 몸체에 얼굴이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원탁 위에 있는 것은 머리라고 볼 수 있는데 결국 이 하나뿐인 머리를 서로 차지하기 위한 싸움인 것이다. 그 위로 천천히 회전하는 검은 새 세 마리는 마치 사냥이 끝나면 남은 것을 주워 먹는 까마귀들이 연상됐다. 어떻게 이런 발상과 표현을 할 수가 있을까? 처음에는 단순히 실제 사람과 같은 정교한 움직임에 그저 감탄하면서 보다가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깨닫고 나니 긴장감이 느껴지면서 작품이 무겁게 다가오기도 했다.
<하나> & <빨강>
서울 5전시실로 이동했다. 이곳에선 어떤 작품들을 만나게 될까? 다소 어두컴컴한 전시실로 입장하는 이때가 가장 설레는 순간이다. 이곳에서 처음 마주한 작품의 이름은 '하나'. 하얀색의 꽃잎이 천천히 피고 지기를 반복하는 작품이다. 작가는 작품들 대부분에 이런 동적인 움직임을 더해 생동감 있게 연출했다. 꽃잎의 소재는 '타이벡'을 사용했는데 이는 코로나 검사, 진료 현장에서 의료진들이 착용한 방호복과 같은 재질이라고 한다. 팬데믹 상황 속 작가가 이 시대에 바치는 헌화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나'와 마찬가지로 피고 지기를 반복하는, 벽부터 꽃잎 색까지 모두 붉은색인 이 작품의 이름은 '빨강'이다. '하나'와는 달리 직관적인 이름인데 매우 강렬한 컬러가 시선을 끈다. 이 작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 생명의 순환'을 의미한다고 한다.
<작은 방주>
드디어 타이틀에 쓰인 '작은 방주'를 만나게 되었다. 세로축은 12 m, 닫힌 상태에서의 높이가 2.1 m에 달하는 작품이다. 노의 장대한 군무는 항해의 추진력과 위엄을 보여주며, 주변에 설치된 두 선장, 등대, 무한공간, 닻, 천사, 출구 등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 이 작품들은 직접 방문해서 보는 것을 권한다.
<작은 방주>, 2022
<두 선장>, 2022
<등대>, 2022
<닻>, 2022
<천사>, 2022
<무한 공간>, 2022
<샤크라 램프>
'샤크라 램프'는 먼저 소개한 '하나'와 '빨강'처럼 유사한 움직임을 보이는 작품이다. 샤크라(또는 챠크라)는 산스크리트어로 '바퀴'라는 뜻으로 연꽃과 수레바퀴 형태로 상징된다고 한다. 주변에 '알라 아우레우스 나티비타스'라는 작품도 있는데 사진으로 담진 못했다. 나란히 자리한 두 개의 '샤크라 램프'는 속도를 달리하여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그 찬란한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URC-1> & <URC-2>
마지막으로 복도에 설치된 두 조각 작품까지 깊은 인상을 주었다. 이 작품은 폐차 직전 자동차에서 분해한 전조등과 후미등을 모아 '별'로 조립한 작품이다. 흰빛을 발하는 별은 전조등을, 붉은빛을 띠는 별은 후미등을 사용했다. 작품 이름에 사용된 약자는 작가의 영문명 U-Ram과 Catalog에서 따온 것이며, 숫자는 제작한 순서를 의미한다. 최우람 작가의 모든 작품들이 재료부터 표현까지 범상치가 않아서 감상하는 내내 즐거웠다. 또한,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 작품 속에 담긴 의미 등을 곰곰이 생각하게끔 만들기도 했다.
[참고]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MMCA 현대차 시리즈 2022 : 최우람 '작은 방주'> 전시 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