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3부 일통 천하 (60)
제11권 또 다른 난세
제 7장 방연, 마릉(馬陵)에 지다 (7)
손빈(孫賓)은 마릉에서 남정으로 이어지는 길 중 가장 험준한 곳을 골랐다.
그러고는 군사들을 시켜 주변 나무를 모조리 베고 아름이 넘는 커다란 나무 하나만을 남겨놓았다.
울창한 숲은 눈 깜짝할 사이 황량한 벌판으로 변했다.
손빈(孫賓)이 다시 군사들에게 명했다.
"베어버린 나무들을 모아다 위(魏)나라 군사들이 지나가지 못하도록 방책을 쌓아라.
그리고 저기 하나 남은 아름드리 나무의 가지를 쳐버리고 껍질을 벗겨라!"
군사들이 달려들어 그 나무의 껍질을 모두 벗겨냈다.
나무는 볼품없이 허옇게 변했다.
손빈(孫賓)은 친히 그 나무 앞으로 가 붓을 들어 여섯 글자를 써 넣었다.
방연사차수하(龐涓死此樹下).
- 방연, 이 나무 아래서 죽다. 라는 뜻이다.
그는 또 그 옆에다 넉 자를 더했다.
군사손빈(軍師孫賓)
군사 손빈이 썼다는 서명이었다.
나무에 글씨 쓰기를 마친 손빈(孫賓)은 수하 장수 원달과 독고진을 불러 지시했다.
- 그대들은 각기 궁노수 5천 명씩을 거느리고 길 좌우편에 매복하고 있으시오.
날이 어두워질 무렵 위군(魏軍)이 나타나도 결코 활을 쏘아서는 안되오.
- 다만, 저 껍질 벗겨진 나무 밑에서 불빛이 일거든 그 불빛을 향해 일제히 활을 쏘시오.
그는 또 부장 전영을 불러 하령했다.
- 그대는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이곳 마릉(馬陵)에서 3마장 떨어진 곳에 가서 매복해 있으시오.
- 위(魏)나라 군사가 당도하거든 일단 지나가게 내버려 두었다가 궁노수가 화살을 다 쏜 후에 일시에 달려나가 닥치는 대로 치고 베시오.
그러면 큰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오.
치밀하게 지시를 마친 손빈(孫賓)은 전기와 함께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멀리 떨어진 곳으로 나가 날이 어두워지기만을 기다렸다.
방연(龐涓)이 이끄는 병차대의 행군 속도는 어마어마하게 빨랐다.
마치 수레 경주를 방불케 했다.
그는 달리는 중에도 백성들을 만나면 병차를 세우고 물었다.
"제(齊)나라 군사가 언제 이곳을 지나갔느냐?“
"반나절 전에 지나갔습니다."
방연(龐涓)은 좀더 빨리 제군을 추격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연신 어자(御者)에게 더 빨리 병차를 몰라고 다그쳤다.
그러나 말들은 어찌나 지쳤는지 속력을 내기는커녕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했다.
이윽고 방연(龐涓)이 병차대를 거느리고 마릉에 당도했다.
해가 저물고 날이 어두워졌다.
손빈(孫賓)이 계산한 것과 일각의 착오도 없었다.
그러나 방연이 어찌 그것을 알랴.
마침 하늘이 흐려 달빛도, 별빛도 없어 천지 사방이 컴컴했다.
앞서 가던 척후가 돌아와 방연에게 보고했다.
"나무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어 더 이상 진군하기가 곤란합니다."
방연(龐涓)이 신경질적으로 지시했다.
"그것은 제(齊)나라 군사들이 우리의 추격을 막기 위해 일부러 쌓아놓은 것이다.
당장 나무들을 치우고 제군의 뒤를 쫓아라.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군사들이 나무들을 치우기 위해 병차에서 내렸다.
방연(龐涓)은 작업을 지휘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그가 방책 가까이 가려는데, 문득 허연 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어둠 속에서도 껍질이 벗겨져 보기가 흉했다.
'저 나무는 무엇일까?‘
그는 나무 가까이 다가갔다.
벗겨진 나무 줄기에 무엇인가 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그러나 사방이 워낙 어두워 무슨 글씨인지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다.
방연(龐涓)이 옆에 있는 군졸에게 지시했다.
"횃불을 켜라. 무슨 글이 쓰여 있나 보자.“
군졸이 횃불을 켰다.
횃불을 받아 나무를 비추는 순간 방연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이, 이것은......? 내가 그 다리 병신에게 속았구나!"
방연(龐涓)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두어 걸음 물러나더니 황급히 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후퇴하라. 서둘러 물러나라!"
방연의 외침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좌우에 매복해 있던 원달(袁達)과 독고진(獨孤陳)의 부하들이 동시에 횃불을 향해 활을 쏘았다.
좌우로 각기 5천 명의 궁노수가 있었으니, 모두 합해 1만 명의 궁노수가 일시에 활을 쏜 셈이었다.
1만 개의 화살은 어둠을 뚫고 방연을 향해 집중적으로 날아들었다.
서둘러 방패로 몸을 가렸으나 어찌 소낙비보다도 세찬 화살비를 막아낼 수 있으랴.
방연(龐涓)은 물론 그 부하들까지 눈 깜짝할 사이에 고슴도치가 되었다.
팔과 다리, 가슴 등 전신에 화살을 맞은 방연(龐涓)은 자신이 도저히 살아날 수 없음을 직감했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그는 숨을 거두기 전 비통한 음성으로 외쳤다.
"아아, 지난날 다리 병신을 살려준 것이 한이로다. 내가 어리석어 이제 그 다리 병신 놈의 명성을 천하에 떨치게 만들었구나!“
그는 마침내 땅바닥에 누운 채 숨을 거두었다.
지난날 방연(龐涓)이 귀곡을 떠날 때 그 스승 귀곡 선생은 방연을 위해 여덟글자의 예언을 일러 준 바 있다.
- 우양이영(遇羊而榮) 우마이췌(遇馬而悴).
양을 만나면 영화로울 것이요, 말을 만나면 탈이 난다는 뜻이었다.
방연(龐涓)은 위혜왕을 처음 만났을 때 양고기를 먹고 등용되어 영화를 누렸으며,
말 마(馬) 자가 들어 있는 마릉(馬陵)에 이르러 참패를 당하고 목숨마저 잃었다.
방연은 숨을 거두면서 귀곡 선생의 이 예언을 떠올렸을까?
천하제일의 병법가로 자부하던 방연(龐涓)은 그렇게 죽었다.
그의 아들 방영(龐英)도 화살에 맞아 죽었다.
그를 따라왔던 병차대 1만 명도 거의 전멸했다.
다만 방연의 뒤를 따라오던 세자 신(申)과 그 병사들만이 참화를 면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끝까지 온전했던 것은 아니다.
- 방연(龐涓) 장군이 전사했습니다.
이런 보고를 받은 세자 신은 오줌을 쌀 정도로 창황망조(蒼黃罔措)했다.
감히 앞으로 나갈 생각을 못하고 병차대를 돌렸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리오.
이미 그 주변으로 제군 장수 전영이 물샐 틈없이 포위하고 있었을 줄이야.
전영은 북소리와 함께 위군 후대를 향해 돌진해나갔다.
위나라 군사는 글자 그대로 혼비백산(魂飛魄散)했다.
감히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세자 신(申)도 그곳을 벗어나려했다.
하지만 손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끝내 그는 전영에게 사로잡혔다.
그날 밤의 전투 과정을 새삼스레 기술할 것도 없다.
제군(齊軍)은 군사 한명 상하지 않고 대승을 거두었다.
반면 위군의 시체는 산과 길과 계곡을 뒤덮다시피 했다.
다음날 날이 밝자 전영은 사로잡은 세자 신(申)을 손빈에게 바쳤다.
원달(袁達)과 독고진(獨孤陳)은 방연과 방영 부자의 시체를 바쳤다.
이에 손빈은 친히 방연의 목을 끊어 병차 위에 높이 매달았다.
이제 남은 것은 뒤에 처져 따라오는 위군 보병대였다.
전기(田忌)와 손빈(孫賓)은 군사를 돌려 그들을 치러 갔다.
사록산(沙鹿山)에 이르렀을 때 후속 부대를 거느리고 오는 위나라 장수 방총과 마주쳤다.
방총(龐蔥)은 병차 위에 높이 매달린 숙부 방연의 목을 보자 싸울 마음을 잃었다.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다가 스스로 결박지어 손빈 앞에 가 무릎을 꿇었다.
"항복합니다."
전기(田忌)가 방총의 목을 베려 하자 손빈(孫賓)이 만류했다.
"항복한 장수는 죽이지 않는 법입니다. 더욱이 방총에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교만한 마음에 천하를 어지럽힌 것은 방연입니다. 굳이 방총(龐蔥)을 죽일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이리하여 전기(田忌)는 세자 신과 방총을 포로로 삼아 임치성으로 개선했다.
그 후 세자 신(申)과 방총(龐蔥)은 제나라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끝내 굴욕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결하고 말았다.
- 천하 제일 병법.
손빈의 명성은 또 한 번 중원을 진동시켰다.
그러나 마릉에서 방연을 죽임으로써 복수를 마친 이후 손빈(孫賓)의 행적은 그 할아버지 손무( 孫武)처럼 어디에고 기록되어 있지 않다.
갑자기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다만 그의 저술인 <손자병법(孫子兵法)>만이 남아 후대까지 전해올 뿐이다.
한때 후대 사람들 사이에 손빈의 존재는 수수께끼였다.
가공의 인물이라는 설(說)도 있었다.
그의 저서인 <손자병법> 또한 오랫동안 그 할아버지 손무의 저작으로 알려져왔다.
그런데 1972년 산동성 임기현 은작산에 있는 전한(前漢)시대의 고분에서 손빈이 쓴 <손자병법>의 죽간(竹簡)이 발견되었다.
이 발견으로 인해 그간의 <손자병법>은 손무(孫武)의 저술임이 밝혀지고,
손빈(孫賓) 또한 가공인물이 아닐 뿐 아니라 <손자병법>까지 저술했음이 증명되었다.
이에 사람들은 손빈의 저서를 손무의 <손자병법>과 구분하기 위해 <손빈병법>이라고 불러오고 있다.
추측해보건대, 손빈(孫賓)은 그후 자신의 얼굴에 새겨진 먹자와 잘린 두 다리를 핑계로 은퇴하지 않았을까.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손빈(孫賓)은 벼슬을 반납하고 석려산(石閭山)이라는 곳으로 내려가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석려산은 오늘날의 산동성 태안에 위치해 있는 산이다.
손빈(孫賓)이 석려산으로 들어간 지 일 년이 지났을 때였다.
어느 날 저녁 손빈이 갑자기 사라졌다.
이에 세상 사람들은 말했다.
- 귀곡 선생이 와서 손빈을 데려갔다.
손빈은 귀곡 선생과 함께 신선(神仙)이 되었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
첫댓글 회장님,
오늘은 좀 쌀쌀했어요.
하루 종일 그랬던 것 같아요.
집안 마당에서 잔돌을 줍고 낙엽을 쓸고...
차갑다 여기었는데 일을 하다 보니 땀이 흘러 내리더라고요. ^^
회장님은 여전히 다녀 가시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회장님,
오늘은 좀 쌀쌀했어요.
하루 종일 그랬던 것 같아요.
집안 마당에서 잔돌을 줍고 낙엽을 쓸고...
차갑다 여기었는데 일을 하다 보니 땀이 흘러 내리더라고요. ^^
회장님은 여전히 다녀 가시었습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