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명사들
- 이 송 희
그들과 저들 사이 내 자리는 따로 없다
부여의 사출도四出道인가, 개돼지로 불리면서 때 되면 밥 먹여주니 웅크리고 입 다물라 떠도는 유언비어 속 현행범이 되었다가 천하디천한 우리는 말 한 마리 값도 안 되고 그녀가 읽어가는 수첩 속 문장에선 우리는 또 저것들과 이것들로 흥정되고
이름을 잃은 우리는 대명사로 불린다.
이송희 시인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가가 당선.
제 20회 고산문학대상을 수상했으며, 전남대학교 교수
시집『환절기의 판화』『아포리아의 숲』『이름의 숲』『대명사』외 다수
사설시조는 그 형태 때문에 더욱 독특함을 보이는 시조다.
음률요소가 의미요소를 지배하는 형식이 평시조라면,
사설시조는 의미요소가 음률요소를 지배한다.
흔히 사설시조를 일컬어 산문적인 시형이라고 한다.
자유로운 형식을 취하여 초·중·종장의 구법이나 자수가
평시조와 같은 제한이 없고 중장과 종장 중에 있어
어느 것이라도 마음대로 길어질 수 있다는 것인데
그 중에서도 대게 중장의 길이가 길어지는 수가 많다.
위 시에서 초장에서 주체는 자신의 자리 없음에 대해 노래한다.
여기서 “내 자리”는 주체의 자리를 의미하는데,
이것이 “대명사”로 교체된다.
주체는 이제 주체를 호명하는 누군가에 의해서 “개돼지”로 불린다.
“부여의 사출도”인 말, 소, 돼지, 개의 부족장인 제가와 같은
생사여탈권을가진 자를 의미한다.
이들의 호명으로 인해 주체는 어떤 자리로 점유하지 못한 채
추방된 타자가 된다. 이렇게 추방된 주체는
가볍게 대명사로 대체되고 흥정되며
생사 여탈권을 가진 자에 의해 마음대로 취급하는 싸구려 존재가 된다.
이 추방은 “때 되면 밥 먹여주니 웅크리고 입 다물라”는
명령에 굴복했기 때문에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