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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2년 일본에서 송환된 동래‧거제‧삼척 출신 표류민 조사 보고서>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이번 문건은 1692년도에 동래‧거제‧강원 삼척의 조선 표류인을 일본에서 일본 배편으로 돌아온(東萊巨濟漂人等 順付領來事)일에 대한 표류 경위를 기록한 사건보고서이다. ①1692년 4월 7일(壬申四月初七日) 동래(東萊)와 거제(巨濟) 지역 출신의 표류민들을 정암(酊菴, 일본 승려)의 배를 이용하여 인편이나 배편에 편승시켜(順付) 일본에서 데려온(領來) 일(東萊巨濟漂人等以酊菴船順付領來事)에 관한 기록물이다.
정암(酊菴, 데이안)은 조선 중기(선조~광해군 연간)에 조선과 일본 사이를 오가며 외교적 가교 역할을 했던 일본의 승려다. 그는 임진왜란 이후 조일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포로 송환 및 서계(書契) 전달 등에 깊이 관여했다. 당시 일본에 표류했던 조선인들을 일본 측 배(주로 사신선이나 정암과 같은 승려의 배)를 통해 조선으로 돌려보낸 외교적 조치를 의미한다. 이는 조선과 에도 막부 사이의 우호적인 관계와 표류민 보호 원칙을 보여주는 사례다.
또한 이번 문서는 「표인영래차왜등록(漂人領來差倭謄錄)」 책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 책은 여러 조선 표류민 송환에 관한 일을 적은 기록이다. 그리고 이 책은 1641년(인조 19)에서 1751년(영조 27)까지 조선(朝鮮) 표풍인(漂風人, 표류인)의 영래차왜(領來差倭, 표류인을 데리고 오는 일본 관리)에 관한 기록을 예조(禮曹) 전객사(典客司)에서 등록(謄錄)한 것이다. 즉, 17~18세기 조선인 표류 사건과 송환 과정을 정리한 일종의 실무 보고서 모음이다. 시마네 현립대학 자료에 따르면 이 책에는 표류민의 원인부터 송환 과정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고 밝혔다. 표풍인(漂風人, 표류인)의 성격이나 그들에 대한 처리 등의 경우가 풍부하여 당시 대외관계(對倭關係)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과 일본에 표류(漂流)한 일에 대해 파견된 일본의 외교 사절 ‘차왜(差倭)’들은 대부분 태풍으로 난파된 왜선(倭船)과 표류(漂流)하는 왜인(倭人)들을 조선에서 구조하고 송환해 준 일과, 일본에 표류한 조선인을 송환해 주고자 조선에 왔지만, 조선통신사 파견 문제와, 임금의 즉위 축하, 그리고 왜관 이건(移建)을 허락한 일에도 사례하고자 왔다. 조선에서는 역관이 그들을 문정(問情)한 후에, 접위관이 접대하였고, 그들이 귀국할 때 회례물목(回禮物目)을 주어 전송하였다.
덧붙여 「변례집요(邊例集要)」 및 「통문관지(通文館志)」는 대일 외교 및 표류민 처리에 관한 규례를 담은 서적들로, 정암과 관련된 구체적인 송환 기록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표인영래차왜등록(漂人領來差倭謄錄)」에는 차왜(외교 사절) 등에 순부(順付, 인편에 부치다)된 경우가 있으나, 순부(順付) 후에 다시 차왜(差倭)를 보내었다. 표류인(漂人)의 영래(領來, 데리고 옴)는 차왜(差倭)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며 간혹 세견선(歲遣船, 대마도 무역선)이 출래(出來)하면, 향접위관(鄕接慰官, 특별한 경우에는 京接慰官을 差送)을 차정(差定)하여 접대하였으며, 대체로 다례(茶禮)와 함께 상선연·하선연(下船宴·上船宴) 등의 삼도연(三度宴)이 베풀어졌다. 다례시(茶禮時)에 표풍인(漂風人)을 교부(交付)받았으며, 차왜(差倭)는 서계(書契)를 봉상(奉上)하였다. 왜(倭)의 서계(書契)에 대한 회답(回答)은 승정원(承文院)에서 마련했으며, 예조(禮曹)에서는 그 격식에 맞는 회례품(回禮品)을 마련 하송(下送)하였다.
● 이번 「표인영래차왜등록(漂人領來差倭謄錄)」 1692년 4월 7일(壬申四月初七日) 텍스트는 1679년(숙종 5년) 4월, 경상감사 민창도(閔昌道)가 동래부사 김홍복(金洪福)의 보고를 바탕으로 조정에 올린 장계(보고서)다. 이 기록은 대마도에 표류했던 조선인 6명의 송환 과정과 당시 조일 외교의 실무적인 모습을 아주 상세히 담고 있다.
*내용인즉, 1679년 1월 28일, 장사(興販)를 위해 지세포로 가던 동래 주민 1명과 거제 장목포 주민 5명(총 6명)이 광풍을 만나 2월 1일 대마도 사스나포(佐須柰浦)에 표류했다. 이에 조선 표류인을 송환하기 시작했다. 일본 승려 정암(酊菴)이 보낸 사신선(제1선)에 표류민 2명을 먼저 태워 보내고, 나머지 4명은 본인들의 배에 대마도 사공 2명을 태워 따로 출발했다. 동래 왜관에 도착한 일본 사신선 측을 통해 표류민 소식을 확인했으며, 따로 오던 표류민 배가 다대포 방면으로 표류 중이라는 첩보를 받고 수색 및 구조를 지시했다.
*문맥에서 "이정암송사선(以酊菴送使船)"이라는 표현을 통해, 일본 측 사절인 정암이 보낸 배가 표류민 송환의 공식 통로였음을 알 수 있다. 제1선에는 정관 등조충(藤朝忠) 등 왜인 40여 명과 조선 표류민 2명이 타고 있었다. 제2선인 등중계(藤重繼)의 배는 4선부터 17선까지의 외교 문서(서계)를 한꺼번에 가져왔으며, 도금도(都禁徒, 단속관)와 의사(醫倭) 등 실무진도 동행했다. 조선 표류민 6명 중 2명은 일본의 큰 배에 탔으나, 나머지 4명은 자신들이 탔던 배가 가볍고 작아 큰 배를 따라오지 못하고 다대포 쪽으로 밀려갔다. 이에 동래부 측은 왜관의 일본 관리(관수왜)와 협의하여 먼저 도착한 2명을 인도받기로 논의했다. 다대포 첨사에게 명령하여 밤중에 보이지 않게 된 표류민 배를 신속히 찾아 구조하고 인도할 것을 독촉하는 내용으로 끝났다. 이 사료는 임진왜란 이후 표류민 송환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했는지 보여주는 귀한 자료다. 특히 정암(酊菴)이라는 특정 인물이 조일 관계에서 지속적으로 매개체 역할을 했음을 증명한다. 또 표류민을 단순 구호하는 것을 넘어, 외교 문서(서계) 전달과 결부하여 공식적인 절차를 밟았음을 보여준다. 당시 부산 연안(동래, 다대포)의 방어 체계와 왜관과의 실시간 소통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구조와 표류 경위 조사에서, 다대포와 가덕도 사이에서 표류하던 나머지 4명이 '제포만호'와 '다대포 이선장'의 도움으로 무사히 구조되었고 또 이들은 소금 장수들이었으며, 낙동강으로 가려다 폭풍을 만나 대마도까지 갔음이 확인되었다. 기록의 정확성을 위해 일본 측 주장(1월 28일)과 조선 표류민의 주장(1월 30일)이 다른 점을 꼼꼼히 체크하는 조선 관리들의 실무적인 태도가 돋보인다. 구조 후에도 바람이 반대로 불어 왜관까지 이동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 다대포로 떠내려갔던 나머지 표류민 4명이 무사히 구조되어 왜관으로 인도되는 긴박한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이로써 가덕도에 머물던 표류민 4명이 무사히 왜관에 도착하여 앞서 도착한 2명과 합류했고, 이들에 대한 상세한 신문(추문)과 일본 측과의 인계 절차가 마무리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 이후 진술 불일치 부분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선 정부는 일본 측 기록과 우리 백성의 진술이 불일치하는 부분(날짜)을 그냥 넘기지 않고 끝까지 대조하여 확인했다. 대마도 측에서 조선 표류민들에게 옷, 담배, 약재(단목) 등을 주어 보낸 대목에서 당시 양국 간의 인도주의적 관례를 볼 수 있다. 동래와 거제 사람들이 소금 30석을 싣고 낙동강으로 가서 팔려 했다는 진술을 통해 당시 남해안의 소금 유통 경로를 짐작할 수 있다. 표류민 구호부터 신문, 일본 측 비용 정산, 외교 문서 수리까지 일련의 과정이 매우 체계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표류민 송환 사건에 대한 조정의 최종 결정(계목)과 일본 대마도주가 보내온 공식 서신(서계), 그리고 예물 목록(별폭)을 담고 있다.
○ 문건의 내용 분석 : 표류민들은 무사히 돌아왔으나, 당시 조선 정부의 '해금(海禁)' 정책을 어기고 먼바다로 나간 것을 관리의 태만으로 보았다. 따라서 사고가 날 경우 동래부사와 거제현령은 문책을 피할 수 없었다. 또한 대마도주가 조선의 중앙 관리(예조참의)와 지방 실무자(동래부사, 부산첨사)에게 각각 급에 맞는 편지와 선물을 보내는 정교한 외교 예법을 확인할 수 있다. 앞선 대화에서 1월 28일과 30일 사이의 혼선이 있었으나, 일본 측 서계에는 28일 지세포 도착, 30일(그믐) 출항으로 기록되어 있어 논란을 정리해 준다. 일본 승려 정암이라는 인물은 1679년뿐만 아니라 1692년 기록에도 등장하여, 수십 년간 조일 표류민 송환 업무를 전담했던 핵심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이 표류 사건은 ‘백성 구조(송환) - 신문 - 외교 문서 접수 - 담당 관리 문책’의 전 과정을 거쳐 공식 종료되었다.
● <1692년 일본에서 돌아온 강원도 삼척 출신 표류민과 시신 인도 사건보고>
다음은 1692년(숙종 18년, 강희 31년) 4월, 앞서 논의된 표류민 송환에 대한 답신(답례) 절차와 더불어, 강원도 삼척 출신 표류민과 시신을 인도받은 새로운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1) 표류민 송환에 대한 답례품 결정(예조 보고) : 표류민을 데려다준 일본 측에 보낼 답장(書契, 서계)과 선물(別幅)의 목록이다. 승문원에서 문장을 다듬고, 예조와 경상도에서 물품을 준비하도록 했다. ①조정(예조) 준비 물품 : 인삼 1근, 호랑이 가죽 1장, 표범 가죽 1장, 흰 면주(비단) 5필, 흰 모시 5필, 검은 모시 3필, 무명 10필, 황모필(붓) 30자루. ②경상도 준비 물품 : 화석(꽃무늬 돗자리) 3장, 기름을 먹인 천(유둔) 2부, 참먹(진묵) 30개. ③동래부·부산진 개별 답례 : 각 면주 3필, 모시, 붓, 먹 등.
*결정 : 1692년 4월 7일, 임금이 "윤허(依允)"하였다.
(2) 일본에서 돌아온 삼척 표류민 및 시신 인도(4월 22일 보고) 사건보고.
동래‧거제 표류인의 사건이 마무리될 즈음, 강원도 삼척에서 표류한 사람들과 사망자의 시신을 실은 일본 배 3척이 부산항으로 들어왔다. 1692년 4월 21일, 부산첨사 최위(崔瑋)가 왜선 3척이 나타났다는 봉수군의 보고를 받고 조사에 착수했다.
왜선 제1선에는 정관 귤항구(橘恒久) 등 40여 명이 탄 사신선이었고 예조와 동래부, 부산진에 보내는 서계와 선물을 지참했다. 왜선 제2선에는 표류민들이 탔던 배로, 길 안내 사공 왜인 2명과 통사 등이 타고 왔다. 제3선에는 무역선(세견선) 및 교대 인원들이 탄 배였다.
*조사 결과 : 대마도 정관의 말에 따르면, "조선 강원도 삼척의 어부 4명과 사망한 1명의 시신을 함께 싣고 왔다"고 하였다. 표류민 4명, 최남(崔男)의 시신, 그리고 부서진 배의 판자와 물건들을 모두 인수받았다.
(3) 다음날 고조된 삼척 표류민을 신문했다.(4월 22일 진술)
조선 표류민은 강원도 삼척 북평리 거주 사공 사노(私奴) 함동(㖙同), 격군 사노 돌이(乭伊), 역노(驛奴) 길산(吉山), 역노 호생(好生)이었다. 이들이 삼척에서 바다에 나갔다가 표류하여 대마도를 거쳐 다시 돌아왔음을 알 수 있다.
* 당시 조일 관계에서는 산 사람뿐만 아니라 표류 중 사망한 사람의 시신도 정중히 수습하여 고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관례였다. 이는 인도주의적 차원과 더불어 외교적 신뢰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특히 동래와 거제 표류민 사건의 답례품을 준비하는 와중에 곧바로 삼척 표류민 사건이 터지면서, 부산진과 동래부는 쉴 틈 없이 외교 및 구호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강원도 삼척의 어부들이 동해를 거쳐 대마도까지 흘러갔다는 사실은 당시 해류와 바람의 위력을 짐작게 한다.
○ 일본과의 표류민 송환 절차의 주요 내용 및 특징을 살펴보면, 조선은 표류민을 구해서 데려다준 일본 측에 인삼, 호피(호랑이 가죽), 표피(표범 가죽) 등 귀한 물품으로 정중히 사례했다. 또 1679년부터 이어진 표류민 송환 체계 속에, 이번에는 강원도 삼척에서 동해로 나갔던 어부들이 대마도까지 떠내려갔다. 특히 이 중 한 명인 최남(崔男)은 표류 중 사망하여 시신으로 돌아오게 된 안타까운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부서진 배의 나뭇조각(판목) 하나까지도 모두 회수하여 인도받는 꼼꼼한 행정 절차를 볼 수 있다.
②[1692년 4월22일(四月二十二日) 삼척 표류민 송환] 이 문건은 1692년(숙종 18년) 강원 삼척에서 표류하다 일본 이와미주(石見州, 現시마네현)까지 떠내려갔던 어부들의 구체적인 표류 경위와 사망자 발생, 그리고 송환 과정을 담고 있는 공초(供招)다.
이 기록의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면, 당시 삼척 어부들이 초겨울(11월 말)에 대구를 잡기 위해 원거리 어로 작업을 나갔음을 알 수 있는 귀한 자료다. 그리고 삼척에서 표류한 배가 동해를 가로질러 일본 본토인 이와미(시마네현)에 먼저 닿았고, 이후 ‘시모노세키-나가사키-대마도-부산 초량 왜관’이라는 일본 내 공식 표류민 이송 경로를 거쳐 부산으로 돌아왔음을 보여준다. 71세라는 고령의 나이에도 어업에 종사하다 표류하여 타국에서 병사한 최남의 사례는 당시 민초들의 고단한 삶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시신과 선박 파편의 송환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사람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사망자의 유해를 관에 담아 예우를 갖춰 보내고, 파손된 배의 자재(삼나무 판자)까지 챙겨 보낸 일본 측의 조치와 이를 인계받아 고향으로 끝까지 운구하는 조선 정부의 행정이 매우 체계적이다. 고로 이 사건은 당시 조일 양국이 표류민 처리에 있어 얼마나 정교한 매뉴얼을 가지고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삼척 북평리는 지금의 강원도 동해시 북평동 일대다.
* 덧붙여 이번 「1692년 동래‧거제 표류인을 일본 배편에 돌아온 일(東萊巨濟漂人等 順付領來事)」는 편저자가 예조(禮曺) 전객사(典客司)이고 판본은 필사본(筆寫本)이며 출전은 『규장각(奎章閣)』 소유,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1686~1733)까지 간행한 『표인영래차왜등록(漂人領來差倭謄錄)』 고문서이다. 여기서 전객사(典客司)는 조선시대 외국 사신과 지방(地方) 공물(貢物)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부서다.
**「1692년 동래‧거제 표류인 일본 배편에 데려온 일(東萊巨濟漂人等 順付領來事)」**
경상감사 민창도가 4월 초하루에 올린 장계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동래부사 김홍복이 보고해 온 첩정(보고서)에 이르기를, ‘어제 먼저 도착한 왜선 2척을 왜관(館所)으로 인도하여 정박시키게 하였습니다. 그 뒤를 이어 나오는 배 한 척은 우리나라의 표류선으로 다대포 쪽으로 떠내려갔다는 초탐장(정찰관) 김세위의 급보에 따라 조사하였습니다. 먼저 왜관에 도착한 왜선 2척 중 훈도 박재흥을 시켜 정황을 물어보고 보고한 수본(보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배는 올해의 임무를 띠고 일본 승려 정암(酊菴)이 보낸 사신선으로, 정관 등조충(藤朝忠)과 수행원 3명, 격왜(노 젓는 왜인) 40명이 타고 있으며, 여기에 우리나라 표류민 2명과 통사 왜인 1명이 함께 타고 왔습니다.
두 번째 배는 올해의 네 번째 세견선(해마다 보내는 무역선)으로, 정관 등중계(藤重繼)와 수행원 1명, 격왜 30명 등이 각각 서계를 소지하고 왔습니다. 또한 올해의 다섯 번째 선박부터 열일곱 번째 선박까지의 서계 역시 이 배에 함께 실려 왔으며, 교대 차 내려오는 도금도(단속관) 왜인 4인과 의원 왜인 1명 등도 함께 타고 왔습니다.
이들에게 대마도 내의 사정과 우리나라 표류민이 발생하게 된 근거를 물으니, 왜인들이 말하기를 "섬 안에는 별다른 일이 없으며, 올해 1월 28일 귀국의 경상도 동래 거주민 1명과 거제 장목포 거주민 5명 등 총 6명이 장사를 하기 위해 배 한 척에 타고 지세포로 가던 중, 갑자기 미친 바람을 만나 2월 초하루에 대마도 사스나포(佐須柰浦)에 표류해 왔습니다. 이에 이번에 이 표류민들을 배에 태워(順付, 데려와 넘겨줌) 데려온 것입니다. 다만 풍세가 좋지 않아 저희들은 어렵사리 왜관에 도착했으나, 표류민들이 탔던 배는 작고 가벼워 조종하기가 어려워 다대포 쪽으로 떠내려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희(동래부)가 관수왜(왜관 책임자)를 만나 위에서 언급한 표류민 2명을 우선 내어줄 것을 말하니, 관수왜가 말하기를 "다대포 쪽으로 떠내려간 표류민 배도 아마 곧 올 것이니, 표류민 송환에 관한 일본 측 서계를 열어본 뒤 한꺼번에 인원수를 맞추어 인계하는 것이 예법에 맞습니다. 하지만 만약 표류민의 배가 속히 오지 않는다면 마땅히 이곳에 있는 2명이라도 먼저 내어주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표류민들의 배에는 길 안내를 위한 대마도 사공 왜인 2명도 함께 타고 있다고 합니다. 위에서 말한 사신 왜인들의 서계는 다례(茶禮, 공식 접견) 날에 바치겠다고 합니다.’ 라는 내용의 보고를 받았습니다.
이에 위와 같은 사유를 먼저 보고드립니다. 또한 우리나라 표류민이 탄 배가 곧 도착할 것이므로, 먼저 도착한 표류민 2명에 대해서는 공초(진술)를 받아 보고하였으며, 해당 표류민의 배를 조속히 구조하여 인도하라고 다대포 첨사에게 특별히 신칙(엄히 명령)하고 보고를 올립니다. 나중에 도착한 다대포 첨사의 보고에 따르면, ‘우리나라 표류선 한 척이 어제 우도(右道) 지역에서 표류한 뒤, 점차 밤이 어두워진 데다 배가 작아 머물고 있는 곳을 상세히 탐색하기가 어렵다고 봉수군들이 보고해 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다대포 첨사에게)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보라고 각별히 엄명하였습니다. 한편 왜관 수문의 소통사(통역관) 김애생이 보고하기를 '우리나라 표류선에는 길 안내를 하는 대마도 사공 2명이 함께 타고 있는데, 왜관에 머물던 금도왜(단속 관리)가 작은 배 한 척을 타고 전례에 따라 다대포까지 나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소통사 김립용, 김돌금 등을 압송(동행)하게 하였고, (우리 측 표류민과 왜인들을) 잘 보호하여 경계를 넘지 못하게 하라고 다대포 첨사에게 신칙한 내용을 함께 통보하였습니다.
같은 날 유시(오후 5~7시)에 도착한 첨사의 보고에 따르면, 가덕첨사의 전언을 인용하여 다대포 첨사 황규가 보고하기를 '우리나라 표류선 한 척에 우리나라 사람 4명과 왜인 2명이 타고 본월(4월) 24일 가덕도 정거리 앞바다에 닻을 내리고 머물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속히 인계하라고 가덕진에 통보하고 명령하였습니다. 또한 왜관에서 온 금도왜의 소선 한 척이 전례에 따라 본진(다대포) 앞바다에 와서 머물고 있으므로, 본진의 이선장(二船將) 강석빈을 수호장으로 정하여 지키게 했다고 보고해 왔습니다. 이에 표류선을 신속히 압송하라고 거듭 명령하였습니다.
26일 신시(오후 3~5시)에 도착한 보고에 따르면, 다대포 첨사 황규가 보고하기를 '가덕도 정거리 앞바다에 머물던 우리나라 표류선 한 척을 호송장인 제포만호 잠시설이 이끌고 와서 본진에 인도하였습니다. 머물고 있던 금도왜의 소선 1척과 함께 왜관으로 인도하기 위해 이선장 강성빈을 차정하였으나, 맞바람(역풍)이 크게 불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본진 앞바다에 머물며 지키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리지 말고 신속히 왜관으로 인도하라고 다대포 첨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27일 자시(새벽 11~1시)에 도착한 보고에 따르면, 사정을 묻기 위해 보낸 별차 김알과 김관의 보고서에 이르기를 '다대포에 급히 도착했으나 갑자기 곽란(급체나 배탈) 증세가 심해져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치료받느라 고생했습니다. 어젯밤 배를 타고 가덕도로 향하던 중, 표류민의 배가 이미 닻을 올리고 돌아오고 있어 바다 위에서 만나 사정을 물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조사 결과, 우리나라 표류민 4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동래 거주 충찬위 김명철(金命哲), 거제 장목포 능로군(노 젓는 군인) 사노 김사룡(金士龍), 사노 이득남(李得男), 사노 김사신(金士信).
이들은 지난 1월 30일, 장사를 하기 위해 소금 30석을 싣고 낙강(낙동강)으로 향하다가 갑자기 광풍을 만나 배를 조종할 수 없게 되어, 2월 1일 대마도 사스나포에 표류했다가 이번에 돌아오게 된 것이라 하였습니다. 길 안내를 맡은 왜인 사공 2명도 함께 타고 왔습니다. 다만, 왜관에 있는 왜인들은 표류민들이 '1월 28일'에 출발했다고 말한 반면, 표류민들은 '1월 30일'에 출발했다고 하여 출발 날짜가 서로 다릅니다. 이 부분은 배가 왜관에 도착한 뒤에 왜인들에게 다시 물어보아 대조해 볼 계획입니다.
27일에 도착한 보고에 따르면, 호송장인 다대포 이선장 강성빈이 보고하기를 '본진 앞바다에 머물던 표류선 한 척과 금도왜의 소선 한 척을 모두 왜관에 인도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훈도 박재흥과 별차 김관 등을 시켜 왜관의 책임자(관수왜)에게 가서 표류민들에 대해 일본 측 서계를 열어본 뒤, 길 안내를 맡았던 왜인 사공 2명은 왜관에 머물게 하고, 우리나라 표류민 6명과 그들이 탔던 배를 모두 인도받았습니다. 부장(部將)이 이들을 압송하여 올리도록 하였습니다.
당초 표류 날짜에 대해 표류민들은 별차의 신문 때 '1월 30일'이라고 말했으나, 일본 측 서계에는 '1월 28일'로 적혀 있어 날짜가 서로 다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본진(부산진)에서 다시 추궁하여 물으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또한 이번에 일본 측이 가져온 서계는 전례에 따라 사본을 만들어 올립니다.
*표류민 김명철 등에 대한 신문 내용 (3월 27일). 동래 읍내에 거주하는 충찬위 소속 사노(私奴) 김명철(26세)에게 '어느 곳에 살며, 무슨 일로 바다에 나갔다가 표류했는지, 그리고 날짜가 왜 다른지'를 상세히 물었습니다.
<김명철의 진술> '본래 장사를 업으로 삼고 있으나 살기가 어려워, 지난 12월 28일 약간의 물건을 가지고 거제 지세포에 가서 소금 30석을 샀습니다. 배는 통영 포량창 소속인 김계상의 배를 빌렸으며, 격군(노 젓는 사람)으로는 거제 장목포의 사노 김사룡 등 5명과 함께 탔습니다. 1월 30일 지세포를 출발하여 낙동강으로 향하던 중, 삼도(森島) 앞바다에서 갑자기 광풍을 만났습니다. 배에 실었던 물건들을 모두 바다에 던져버리고 배가 떠내려가는 대로 내맡겼더니, 이튿날인 2월 1일 대마도 사스나포에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그곳 왜인들이 여러모로 구호해 주었고 대마도 주로 인도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식량과 술을 대접받았고, 이번 달 11일 일본 사신선이 출발할 때 저희도 함께 나오게 되었습니다. 떠날 때 일본 측에서 누비옷(襦衣) 한 벌, 띠 한 벌, 쌈지 담배 10상자, 단목(붉은 나무) 2근씩을 나누어 주었고 별도로 술과 음식을 대접받았습니다.
24일 사신선과 함께 나왔으나 또 불행히도 바다에서 역풍을 만나 가덕도로 떠내려갔다가 이제야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날짜가 다른 것은 일본인들과 대화할 때 말이 잘 통하지 않아 착오가 생긴 것입니다.‘
*<사후 조치> 거제 사람 김사룡 등 5명에게는 먹을 것을 주어 즉시 고향인 거제로 돌려보냈습니다. 표류민들의 이름과 나이를 적은 성책(명부)을 비변사에 올렸습니다. 표류민들을 데려온 일본 측에 전례에 따라 접대 물품과 비용을 계산하여 지급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 승려 정암(酊菴)이 보낸 서계와 그 외 5선부터 17선까지의 모든 외교 문서는 조만간 다례(공식 접견)를 열어 정식으로 접수하고 조정에 올릴 예정입니다. 현재 왜관에 머물고 있는 왜인은 총 607명이라고 동래부사 김홍복이 3월 28일 자로 보고하였습니다.“
○<조정의 결정 및 문책 (예조 보고 및 임금의 승인)>
"예조에서 올린 계목을 살펴보니, 우리나라 배 한 척이 대마도에 표류했는데, 동래와 거제 두 고을의 표류민들을 올해 정암(酊菴, 일본 승려)의 배에 편승시켜 데려왔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정암의 배로 보낼 답신 서계는 차후 다례를 지낸 뒤 준비하여 거행하되, 이번에 표류민을 데려오며 가져온 서계와 그에 따른 답례품은 전례에 따라 사본을 만들고 준비하여 보고합니다. 다만, 이전에 배가 먼바다로 나가지 못하도록 엄격히 금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지역 수령들이 평소 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아 이런 폐단이 발생했습니다. 그러니 해당 지방관인 동래부사와 거제현령 등을 법을 맡은 부서(유사)에서 엄중히 문책(추고)하여 훗날의 경계로 삼으심이 어떠하옵니까?"
임금의 답변 "윤허한다(依允)." (1692년 4월 7일, 우부승지 이진휴 보고)
○ <대마도주가 예조참의에게 보낸 편지(서계)>
일본국 대마주 태수 평의진(소 요시자네)이 조선 예조참의에게 올립니다. "봄날의 기운이 완연한 이때, 귀국이 평안하시기를 멀리서 생각합니다. 이곳 대마도 또한 무사합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귀국 경상도 동래 주민 1명과 거제 장목포 주민 5명이 1월 28일 장사를 위해 지세포에 도착했다가, 그달 그믐에 출항했으나 서풍이 너무 강해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2월 초하루에 이곳 사스나포에 표류해 왔습니다. 가련한 마음이 들어 각각 옷과 식량을 주었으며, 작은 배를 수리하여 이제 돌려보냅니다. 약소한 토산물을 별도로 적어 보내오니 미소로 받아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부디 몸 소중히 하시길 바랍니다." *예물 목록 옻칠한 원형 쟁반 10개, 수정 갓끈 1개, 채화 6촌 거울 1면.
○ <대마도주가 동래부사·부산첨사에게 보낸 편지>
"귀국 주민 6명이 이곳에 표류해와 가엾게 여겨 옷과 식량을 주고 배를 보수해 돌려보냅니다. 예조(남궁)에 보고하였으니 번거롭게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약소한 물건을 함에 담아 보내니 받아주십시오." *동래부사 앞 예물 : 채화 중형 쟁반 10개, 적동 세수대야 1개, 거울 1면. *부산첨사 앞 예물 : 황칠 연합 벼루함 1개, 담뱃대 20개.
○ <표류민 송환에 따른 답례 서계 작성과 예물 준비에 관한 건>
예조에서 올린 계목을 살펴보니, "지난번 표류민을 데려온 배에 보낼 답신 서계와 동래·부산에서 보낼 답장 초안을 승정원으로 하여금 문장을 다듬어 작성하게 하였습니다. 답례로 보낼 선물(별폭)은 전례에 따라 마련하여 계목 뒤에 기록하였으니, 해당 관청(예조)과 경상도에서 예법에 따라 준비하게 하고, 원래의 서계가 조정에 올라온 뒤에 다시 내려보내라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윤허한다"고 하였습니다.
○ 답례품 목록
*예조 준비 : 인삼 1근, 호랑이 가죽 1장, 표범 가죽 1장, 흰 면주(비단) 5필, 흰 모시 5필, 검은 모시 3필, 무명 10필, 황모필(붓) 30자루.
*경상도 준비 : 화석(꽃무늬 돗자리) 3장, 기름 먹인 천(유둔) 2부, 참먹 30개.
*동래 및 부산진 답례 : 각각 흰 면주 3필, 흰 모시 3필, 검은 모시 2필, 무명 5필, 황모필 20자루(예조 준비), 참먹 20개(경상도 준비). (1692년 4월 7일 우부승지 이진휴 보고)
○<1692년 4월 30일, 삼척 표류민과 시신을 실은 왜선 도착 보고>
경상좌수사 장□□가 4월 22일자로 올린 장계입니다. "본월 21일 오후, 부산첨사 최위가 보고하기를 '봉수군 이계선이 일본 배인지 알 수 없는 선박 3척이 나타났다고 보고하여, 이선장 김상은을 정찰관으로 보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왜관에 도착하는 대로 사정을 상세히 물어 보고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22일 오전, 부산첨사 최위가 다시 보고하기를 '정찰관 김상은의 보고에 따르면, 어제 도착한 왜선 3척을 왜관으로 인도하여 부치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즉시 역관들을 시켜 사정을 알아보게 한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배 : 우리나라 표류민을 데려온 정관 귤항구(橘恒久)와 수행원들이 타고 왔으며, 예조와 동래·부산에 보내는 서계와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두 번째 배 : 표류민들이 탔던 배로, 길 안내 사공 2명과 통사 등이 타고 왔습니다.
세 번째 배 : 무역 및 교대 인원들이 타고 왔습니다.
대마도 측 정관의 말에 따르면, 섬 안에 별다른 일은 없으나 귀국 강원도 삼척의 어부 4명과 시신 1구를 함께 싣고 왔다고 합니다. 이에 우리나라 표류민 4명과 사망자 최남(崔男)의 시신, 그리고 부서진 배의 판자와 물건들을 모두 인도받았습니다. 관련 서계와 문서들은 사본을 만들어 동래부로 보냈으며, 원본은 조정으로 올립니다.
*삼척 표류민 신문 내용(4월 22일) 강원도 삼척 북평리에 사는 사공 사노(私奴) 함동(㖙同), 격군인 사노 돌이(乭伊), 역노 길산(吉山), 역노 호생(好生) 등 별차가 묻기를, ”너희는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에 무슨 일로 어디를 가다가 풍랑을 만났느냐? 표류하게 된 근본 원인과 거주지, 신분, 성명을 사실대로 숨김없이 고하라.“
*삼척 어부 함동(㖙同) 등의 진술 : 저희들 5명은 강원도 삼척 북평리에 사는 어부들로, 대구(大口魚)를 잡기 위해 지난해(1691년) 11월 26일 묘시(오전 5~7시) 즈음 작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광풍을 만나 배를 조종할 수 없게 되었고, 4일 낮밤을 바람 부는 대로 떠돌다가 그달 29일 신시(오후 3~5시) 즈음 일본국 석견주(石見州, 이와미주) 당종포(唐鍾浦)에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여러모로 구호와 음식을 받았으며, 각각 누비옷(襦衣) 2령, 껴입는 바지(貼袴) 1개, 버선 1켤레씩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12월 27일 그곳에서 보내주어 올해(1692년) 1월 3일 하관(下關,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저희 표류민 5명 중 나이가 71세인 최남(崔男)이 왼쪽 어깨에 큰 종기가 갑자기 발병하더니, 1월 4일 문득 목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이에 그곳에서 관을 갖추어 배에 실어주었고, 1월 6일 하관을 출발하여 12일 장사기(長崎, 나가사키)에 도착했습니다. 3월 6일 나가사키를 떠나 17일 대마도에 도착하니, 매일 식량을 나누어 주고 때때로 술을 대접해 주었습니다.
4월 12일 대마도를 떠나올 때, 일본 측에서 각자에게 누비옷 1령, 띠 1부, 단목 2근, 쌈지 담배 10상자씩을 나누어 주었고, 별도로 술과 음식을 대접해 보내주어 이번 사신선과 함께 나오게 되었습니다. 당초 저희가 탔던 배는 한 조각 작은 배(일엽편주)일 뿐만 아니라, 표류하여 닿을 때 바위섬에 부딪쳐 부서졌으므로 바다를 건너올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배를 헐어버리고 그 삼나무 판자(杉板)들을 실어 왔습니다. 또한 사망한 최남의 시신은 관에 넣어 실어 왔으니 본국으로 운구해 가고자 합니다.‘
*조치 사항 : 이와 같은 진술을 바탕으로 동래부에서 다시 한번 신문(취초)한 뒤, 살아 돌아온 사노 함동 등 4명과 최남의 시신을 모두 연고지인 삼척(원적관)으로 호송하도록 엄히 명령하였으며, 이러한 연유를 조정에 보고합니다."
「표인영래차왜등록(漂人領來差倭謄錄)」 1692년 4월 7일(壬申四月初七日)
[慶尙監司閔昌道四月初一日成貼狀 啓節到付東萊府使金洪福牒呈內云云昨日先爲出來倭船二隻段領付館所爲有旀追後出來船段以我國漂風船漂向于多大浦是如哨探將金世瑋馳報據先到館所倭船二隻良中令訓導朴再興 問情手本內第一隻段今年條以酊菴送使船正官藤朝忠伴從三名格倭四十名良中我國漂人二名及通事倭一名同騎爲有旀第二隻段同年條歲遣第四船正官藤重繼伴從一名格倭三十名等各持書契而同年條歲遣第五船至十七船書契亦爲順付以來爲有旀交代次都禁徒倭四人醫倭一人等同騎出來爲有去乙探問島中事情及我國漂人根因則同倭等言內島中別無他事而今年正月二十八日貴國慶尙道東萊地居民一名巨濟長木浦居民五名合六名以興販事乘一隻船向往知世浦爲如可猝遇狂風去二月初一日漂泊于對馬島佐須柰浦爲有等以同漂人等今番順付領來爲如乎風勢不順 俺等段艱難到館所漂人所乘船段以小船之故風急舟輕不得制船漂向于多大浦是如爲去乙卑職等就見館守倭上項漂人二名爲先出送之意言及則同倭曰多大浦漂向爲有在漂人船想必速來漂人順付出送書契開見後一時照數出送事體當然是在果同漂人船若未速來是去等二名漂人當先出送是如云云爲乎旀我國漂人船良中指路沙工倭二名亦爲同騎是如爲齊上項送使倭等書契段茶禮日例呈云云爲乎等以緣由爲先手本爲臥乎味手本是置有亦上項我國漂人所乘船到迫爲良沙先爲出來是在漂人二名一樣捧招馳通是乎等以同漂人船作速領 付之意多大浦僉使處各別申飭爲乎旀緣由爲先馳通
爲臥乎事馳通是白齊追于到付同僉使馳通內我國漂風船一隻昨日右道了漂向之後漸至夜暗哛不喩以小船之故止泊處不得詳探是如烽軍等進告是乎等以 更良詳細看望之意各別申飭爲在果一時守門小通事金愛生進告內我國漂風船良中指路沙工倭二名同騎爲有等以留館禁徒倭乘小船一隻依前例多大浦至出往是如進告據小通事金立勇金乭金等押送爲乎旀善爲守護使不得越境之意多大浦僉使處申飭緣由竝以馳通爲臥乎事馳通是是齊同日酉時到付同僉使馳通內卽刻到付加德僉使傳通據多大浦僉使黃奎馳報內我國漂風船一隻良中我國人四名倭人二名同騎本月二十四日加德島碇巨里前洋止泊是如傳通是乎等以斯速領送之意加德鎭良中傳通申飭爲乎旀自館所禁徒倭乘小船一隻依例本鎭前洋來泊乙仍于守護將本鎭二船將姜碩賓差定是如馳通是乎等以同我國漂風船急速領送之意更良次次申飭爲臥乎事馳通是白齊二十六日申時到付同僉使馳通內卽刻到付多大浦僉使黃奎馳報爲乎矣今此加德島碇巨里前洋止泊我國漂船一隻護送將薺浦萬戶丁時說領來交付本鎭爲去乙留泊禁徒倭小船一隻竝以領付館所次以本鎭二船將姜聖賓差定爲如乎逆風大吹不得進前乙仍于本鎭前洋止泊守護是如馳報是乎等以不待風殘急速領付館所之意多大浦僉使處申飭緣由爲先馳通爲乎事馳通是白齊 二十六日亥時成貼二十七日子時到付同僉使馳通內問情次定送別差金捾 金琯 手本內馳到多大浦猝得癨亂症勢非輕末由前進艱難治療昨夜良中沙乘船向往加德島爲如可同漂人船旣已解攬回來乙仍于洋中逢着問情則我國漂人四名內東萊居忠贊衛金命哲長木浦能櫓軍私奴金士龍私奴李得男私奴金士信等去正月三十日以興販次載鹽三十石向往洛江爲如可狂風猝起無路成船二月初一日漂到對馬島佐須奈浦今得回來是如爲乎旀指路沙工倭二名亦爲同騎護來爲乎等以緣由手本爲在果同漂人發船日子在館倭人段正月二十八日爲言而漂人段去正月三十日自我國發船是如爲臥乎所彼此所言相左回泊館所後更問于館倭處計料云云事馳通是白齊二十七日到付同僉使馳通內卽刻到付護送將多大浦二船將姜聖賓馳報內本鎭前洋來泊我國漂風船一隻及禁徒倭小船一隻竝以領付館所是如馳報據更令訓導朴再興別差金琯等問情手本內就往館守倭處同漂人順 付書契開見後指路沙工倭二名段卸下館而漂人六名及船隻竝以交付爲去乙部將押領上送爲在果當初漂人等漂風時日子乙漂人等段別差問情時以正月三十日爲言爲有矣順付書契中則以正月二十八日書塡爲有臥乎 所日子之相左乙良自本鎭推問敎是齊上項順付爲有在書契依前例謄書上送爲臥乎味手本是乎等以同書契謄本輸送爲乎旀漂人等推考次壬申三月二十七日其中解事人東萊邑內居忠贊衛不喩私奴金命哲年二十六白等汝矣等何處居生之人以何年何月日因某事下海爲有如可致有漂風是旀漂風日子乙別差問情時段以今年正月三十日爲言而書契中則以同月二十八日書塡爲有臥乎所何如是相左是隱喩汝矣所居處及其間曲折竝以從實直告亦推問敎是臥乎在亦其中東萊人金命哲矣身本以商賈生理爲難上年十二月二十八日略持物貨進往巨濟知世浦貿鹽三十石賃船於統營砲糧倉屬金戒上船隻是白遣格軍段長木浦能櫓軍私奴金士龍等五名同騎去正月三十日自知世浦發向洛江爲白如乎行到森島前洋猝遇狂風所載卜物竝皆投海任船漂流翌日是白在二月初一日漂着于對馬島佐須奈浦則其處倭人等多般救護仍領府中初十日到泊則散料分給時饋酒爲白如可今月十一日送使倭一時出送而出來臨時每名襦衣一領帶子一部小匣草十樻丹木二斤式分給後別饋酒食爲白齊 本月二十四日送使倭一時出來爲白如可又爲不幸洋中逢逆 風漂到加德島今纔回泊爲白有旀日子相左事段彼此問答之
際語音未詳之致有此相左是白去乎竝以相考施行敎事招辭是白置有亦同漂人等居住役姓名年歲成冊輸送爲旀更良取招次以竝只依前例起送爲臥乎事爲等如馳通是白置有亦上項漂風人金命哲等六名自釜山鎭捧招後起送爲白有去乙 當初漂風根因及到彼事情更良發問目推問則各人等所供與釜山鎭納招無異是白乎等以同巨濟人私奴金士龍等五名段各給糧饌使卽發還原籍官爲白乎旀姓名成冊段上送備邊司爲白在果今此漂人等以酊菴送使倭順付領來爲白有等 以其所接待雜物依前例計授代官倭計料爲白乎旀漂人順付書契謄本監封該曹良中上送爲白乎旀送使倭等齎來書契及同年條兼帶歲遣第五船以十七船至順付書契等段追于設茶禮捧上上送計料爲白乎旀緣由竝以馳啓爲臥乎事狀 啓謄報書契傳書元狀 啓竝以直爲上使爲齊時留館倭人六百七名是如牒呈是白置有亦緣由謄書馳 啓事及東萊府使金洪䃼三月二十八日成貼狀 啓上同辭緣事據
回
曹 啓目粘連 啓下是白有亦觀此狀 啓則我國船一隻漂泊馬島而東萊巨濟兩邑漂人等今年條以酊菴送俠船順付領來是如爲白有臥乎所向前以酊菴等船回答書契段設茶禮上來後磨鍊擧行爲白乎矣今此漂風人順付齎來書契及回禮之物乙良依前例謄本良中磨鍊以入爲白在果曾前凡船隻不得遠出外洋明有禁令是白去乙上項漂人等所居官常時不能檢飭致有此弊當該地方官東萊巨濟等官守令竝令攸司從重推考以爲懲後之地何如康熙三十一年四月初七日右副承旨臣李震休次知 啓依允
我國漂人順付書契謄本
▬日本國對馬州太守拾遺平義眞 奉書 朝鮮國禮曹參議大人閤下春光平分遙想 貴國淸寧 本邦亦然于玆貴國慶尙道東萊之居民一口同道巨濟長木浦之居民伍口正月二十八日爲商到于知世浦同月晦日解纜浮海西風太急放蕩洋中今月朔日漂着弊邑佐須奈浦憐憫有餘各給衣糧且修扁舟方今送還菲薄土宜錄在別箋 笑留惟幸統冀順序 保嗇肅此不宣 元祿五年壬申二月 日.
▬別▼(巾+福)黑漆彩畫有趺大圓盆拾枚 水晶笠緖壹結 彩畫六寸奩鏡壹面
▬日本國對馬州太守拾遺平義眞 啓達 朝鮮國東萊釜山兩令公閤下 韶華已半緬懷 僉雅淸裕企望無窮爰 貴國慶尙道居民六口今月朔日流着弊州佐須奈浦哀恤不已仍給衣糧且補扁舟方今刷還 委報 南宮玆不煩贅菲品侑椷笑納幸甚統惟 氷照不宣 元祿五年壬申二月 日.
▬東萊別▼(巾+福)彩畫中圓盆拾枚 赤銅累五 盥盤壹部彩畫六寸奩璄壹面
▬釜山別幅黃漆累合硯匣壹備直竿烟器貳拾本事據
漂人順付書契撰出事
曹 啓目粘連 啓下是白有亦向前漂風人順付齎來書契回答及東萊釜山所答草稿令承文院措辭撰出爲白乎矣別▼(巾+福)回禮之物依前例磨鍊 啓目後錄爲白去乎 亦令該曹及本道依例措備原書契上來後下送事分付何如後別▼(巾+福)回禮人蔘一斤 虎皮一張 豹皮一張 白綿紬五匹 白苧布五匹 黑苧布三匹 白木綿十匹 黃毛筆三十柄 以上該曹措備 花席三張 四張付油芚二部 眞墨三十笏 以上本道題給 東萊釜山兩處回禮各白綿紬三匹 白苧布三匹 黑苧布二匹 白木綿五匹 黃毛筆二十柄 以上該
曹措備 眞墨二十笏 本道題給 康熙三十一年四月初七日. 右副承旨臣李震休次知 啓依允
▬壬申四月三十日.
○ 漂人領來差倭出來三陟人屍身載來事
▬慶尙左水使張□□四月二十二日成貼狀 啓本月二十一日未時成貼申時到付釜山僉使崔瑋馳報內卽刻石城烽軍李戒善進告內朝倭未辨船三隻出來是如進告據哨探將本鎭二船將金相殷定送是如馳報爲白有去乙到泊館所後詳細問情馳報之意題送爲白有如乎二十二日辰時成貼巳時到付同僉使崔瑋馳報內昨日酉時到付哨探將本鎭二船將金相殷馳報內當日出來倭船三隻領付館所是如馳報據登時問情之意譯官等處分付爲白有如乎當日子時到付訓導朴再興別差金琯等手本內昨日出來倭船三隻問情則第一隻段我國漂風人領來差倭正官橘恒久封進押物一人伴從三名格倭四十名等持禮曹了書契別▼(巾+福)各一度東萊釜山了書契一度別▼(巾+福)二度出來爲有旀第二隻段同漂人乘來船一隻指路沙工倭二名通事倭一人格倭四十名等持路引出來爲有旀第三隻段辛未條歲遣兼帶第十五船格倭二十名及交代次都都禁徒倭一人都禁徒倭一人等同騎亦爲持路引出來爲有去乙探問島中事情則正官等言內別無他事而 貴國江原道三陟漁夫四名復一名屍身竝以載來是如云云爲齊上項漂人四名及崔男屍體與毁破船板木汁物竝以交付爲去乙書契別▼(巾+福)謄本及路引二度捧上上送爲臥乎味手本是置有亦同書契謄本及路引二度捧上東萊府輸送而書契段傳書上使爲在果上項漂風人等推考次壬申四月二十二日江原道三陟北坪里居沙工私奴㖙同格軍私奴乭伊驛奴吉山驛奴好生白等汝矣等何年何月日因某事往何處爲有如可致有漂風是隱喩漂風根因及居住役姓名竝以從實直告亦推考敎是臥乎在亦矣徒等五名江原道三陟北坪里居生海夫以大口魚捉得次上年十一月二十六日卯時量乘小船下海爲有如可猝遇狂風不能制船四晝夜任風漂流同月二十九日申時量漂泊于日本國石見州唐鍾浦則自其處多般救護供饋各襦衣二領貼袴一件足襪一部式造給爲齊 十二月二十七日自本州領送當年正月初三日到下關島則矣徒等漂人五名中年至七十一歲是在崔男亦左肩甲大腫猝發同月初四日奄忽殞命乙仍于自其處具棺載船同月初六日自本島發船十二日到長崎三月初六日自本島離發十七日到泊對馬州則日日散料分給時時饋酒爲如可四月十二日出來臨時各襦衣一領帶子一部丹木二斤小匣草十樻式分給爲遣別饋酒食出送爲去乙節差倭一時出來爲有在果當初所乘船隻段非但一葉小船漂着之時爲嶼所傷不能駕海不得已毁破以杉板載來爲有旀屍身段置入棺載來輸往本土計料爲去乎相考施行敎事白侤音是乎等以更加取招次以竝只東萊府起送爲臥乎味馳報爲白有去乙東萊府取招後生還是白在私奴㖙同等四名及崔男屍身竝以護送原籍官之意申飭爲白乎旀緣由馳 啓事]
[주1] 정암(酊菴) : 당시 조일 외교의 실무를 담당했던 대마도의 외교 승려다.
[주2] 순부(順付) : 인편이나 가는 배편에 편의상 함께 실어 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주3] 다대포 : 부산의 요충지로, 표류민들이 대마도에서 거꾸로 부산 쪽으로 밀려 들어왔을 때 거제도와 가덕도와 함께 주로 닿는 곳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