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읽은 이향봉 스님의 수필에 나오는 말이다. 20년도 넘은 이 말을 기억하며 산다는 것은 이 말속에 담긴 의미가 결코 평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향봉 스님의 시집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미움은 타인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비롯된 일이라는 가르침. 얼핏 눈으로 읽으면 평범한 말인 듯하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 이해라는 단어 하나, 용서라는 단어 하나, 정말 우리가 실천하고 사는지 냉정하게 되묻는다면 누구도 자신 있게 ‘내가 그래요’ 할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미움은 나로부터 비롯된 일이라는 말속의 ‘나’는 모든 감정의 원인 제공자이며 문제 유발자라는 것을 깨우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그래도 여전히 사랑하는 것에, 이해하는 것에 대해 용서하는 것에 대해 얼마나 인색하게 살았는지 반성하게 된다.
삶은 우열을 따지거나 높고 낮음을 측량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낮아짐으로 인해 상대가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최고가 되는 것보다 더불어 사는 것의 가치를 인정하고 생각해 볼 때가 된 것이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입장이 되는 일이며 내가 아닌 상대방의 가치를 존중하는 일이다. 세상 모든 일은 타인을 인정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야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는 것이다. 이해라는 단어의 배후엔 종속된 모든 결과에 대해 수긍하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곡진함이 담겨 있어야 한다. 원인과 결과에 대해 ‘나’로부터 비롯된 이라는 생각으로 접근하며 세상에 이해 못 할 일이 없다. 종종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해 다툼이 발생하곤 한다. 그 근원을 따지고 보면 결국 내가 있다. 이해는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 때, 그것을 실천할 때 세상은 지금보다 조금 더 따뜻한 세상이 될 것이다.
용서한다는 말은 더 큰 말이며 무게 있는 말이다. 내가 당신을 용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나를 용서하는 것은 더 중요한 일이다. 세상에 허물없는 사람은 없고 완전한 사람은 없다. 그것조차 용서할 줄 안다면 그 용서의 가치는 우리 모두의 가치가 될 것이다. 공존한다는 말이다. 나와 네가 공존하고 나와 네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라는 궁극의 소풍 길은 잠시 쉬었다 가는 길이다. 한세상 잘 살았다고, 웃으며 되돌아가는 사람의 등은 고운 법이다.
삶에 정답은 없다. 완성형 정답도 없다. 모든 경우의 수가 다르기 때문에 변수가 존재하는 것이며 그 변수로 인해 우리는 정답을 만들며 사는 것이 정답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요한 것은 인정한다는 것이다. 존중한다는 것이다. 거기서 출발해야 살며, 사랑하며, 이해하며, 용서하며 살게 된다. 한없이 낮아질 수 있다면 질곡의 삶을 온화하게 살게 될 것이다. 그 평범한 진리를 가끔 잊고 산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새해에는 낮아지자. 낮아지는 방법을 찾아보자. 그래야 봄이 올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환한 봄이. (김부회 시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