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화투
마을은 꽃판이 가득 펼쳐진 운동장이다 지난 늦겨울부터 시작된
꽃들의 이어달리기가 거리마다 한창이다 선두주자로 나선 동백과 목련과 벚꽃은 이미 마을을 한 바퀴 돌았고 지금은 장미와 수국과 포후투카와가
이어받은 계절의 배턴을 흔들고 있다 우리 누구를 응원할까 사내와 함께 응원하러 나온 아내는 포후투카와 붉은 꽃을 가리킨다 곧 크리스마스고 또
여긴 그늘이 좋잖아요 포후투카와 꽃그늘 아래 자리를 깔고 사내와 아내는 도시락을 먹고 점심나절 마을이 조용해진 틈을 타서 화투판을 벌인다 사내는
꽃놀이패를 쥐고도 아내의 무념무상을 이기지 못해 열이 오른다 오늘은 어째 잃기만 하네 사내는 승부에 열중했던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다시
소란스러워진 마을을 바라본다 길 건너 담장 밖으로 목을 내밀며 오래 구경꾼이었던 해바라기가 보인다 종이로 만든 가짜꽃이라고 놀려댈까 봐 숨어
지냈던 부겐빌리아도 그 옆에 있다 선수등록도 안하고 뒤늦게 끼어든 이들 여름꽃들로 한 해를 넘어가는 꽃들의 트랙은 엉망진창이 된다 심판을
맡아보는 자카란다가 호각을 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 반기고 어깨동무를 하느라 꽃들은 야단법석이다 꽃들의 이어달리기는
승부를 가리지 않기에 속도를 다툴 이유가 없다 응원하러 나왔던 사내가 오히려 머쓱해져서 화투판으로 시선을 돌린다 손에 움켜쥔 사내의 꽃놀이패에서
붉은 꽃술이 떨어진다 포후투카와 붉은 꽃술을 쓸어 담는 아내의 손바닥이 넓고 따스하다
<시작 노트>
1. 뉴질랜드 자생종인 포후투카와(pohutukawa) 나무는
바닷가에서 잘 자라는데 주택가에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12월 초부터 피기 시작하여 크리스마스 무렵이면 붉은 꽃들이
나무를 뒤덮을 정도로 절정을 이루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트리' 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2. 꽃들은 모두 저마다
고유의 속도로 움직이는 시계태엽장치를 내장하고 있다. 봄꽃, 여름꽃, 가을꽃, 겨울꽃이라고 한묶음으로 묶은 꽃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저마다 자신만의 속도가 있어서 한 계절에도 피고 지는 때가 각각 다르다. 그렇게 해서 꽃들은 계절을 이어붙인다. 꽃들의 이어달리기가 계절을
만든다.
3. 그런 꽃들 아래서
화투를 친 적이 많다. 그러나 화투를 치면서 내가 불러낸 계절이 어떤 계절이었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오직
승부에 열중한 마음 때문에 내 눈은 까맣게 멀고는 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