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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증 23] 중국은 홍산문화를 전욱고양씨 문명으로 확정하였다
그렇다면 홍산문명은 고조선문명이 확실하다는 결론
이는 동북공정의 하부공정인 웅녀공정,고구려공정보다 진일보한 움직임이다.
그렇지만 전욱고양씨가 동이족이라면 어떻게 할것인가.
그가 만약 동이족이라면 연대연계상 고조선의 창건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것
이다.
그리고 주목할 점은 홍산문화 바로 위층에 있는 하가점 하층문화가 소위 황제족(한족)의 황하문명보다
앞선 홍산문화층 위에 중국 최초 국가인 하나라보다 앞선 청동기 유물이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고조선의 자취를 좇는 학자들은 이를 고조선 출범과 연계시킨다. 청동기를 개발한 3000여명 환웅세력이
웅족과 결합해 강력한 국가체제를 다진 것으로 추정하는 것.
고조선 건국연대인 기원전 2333년은 이 지역 청동기의 추정연대인 기원전 2400년 무렵과 거의 일치한다.
일단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곳이 고조선 초기 강역이었다는 점에선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다.
최근 홍산일대를 답사하고 돌아온 유임현 국학학술원 사무총장은 “일부 중국학자들은 ‘이곳 유적 중
일부를 대동강 일대에서도 봤다’고 증언했다”며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밝히진 않았지만 그들도 이곳이
기존 한족 문명권이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고 말했다.
또 “이곳은 중국 송대 이후에야 중국 양식의 무덤이 발견되는데 “과연 중국의 역사문화권인지 의심스
럽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예로부터 중국 사서들이 외국인으로 분류했던 동이족의 원형이 이곳에 묻혀 있다는 게 유 사무총장의
해석이다. 그는 “중국측 교수가 ‘모호한 유적이 발굴되면 이전에는 그냥 덮어버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고 전해 이와 같은 의혹을 부채질했다.
[실증 24]흑피옥 발견자도 한국인
김희용씨는 2012년 별세하였다. 아래 기사는 생존시 취제한 내용이다.
한국인 김희용씨는 《습유기》의 기록을 최초로 확인하는 흑피옥 발견자가 된것이다.
원래 홍산문화의 최초 발굴자는 에밀 리쌍이었고,중국인으로는 양사영이 본격발굴자로 알려졌다.
(필자 주)
"한국인으로서 세계적 발견한 게 자부심"
김희용 씨는 현재 중국 베이징에 체류 중이다.
그는 흑피옥에 ‘미친’ 이후 거의 중국에서 살다시피 해왔다.
지금도 내년 봄 개시될 공식발굴 작업을 앞두고 현지 관계자들과 의견조율 작업 등을 진행하고 있다.
김 씨는 흑피옥의 비밀을 풀기 위해 거의 전 재산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내가 돈 때문에 이런 일을 하겠는가.
단지 미지에 대한 도전 욕구 때문에 지금까지 온 것”이라고 말할 만큼 태연하다.
하지만 지난 17년의 여정은 ‘고독한 전쟁’이나 마찬가지였다.
고고학자나 역사학자들은 흑피옥을 잘 알지 못해 외면하기 일쑤였다.
워낙 자주 중국을 드나들다 보니 국정원 요원에게 조사를 받는 황당한 일도 있었단다.
이제는 그 동안의 고생을 보상 받을 수도 있다는 기대감에 다소 흥분돼 있다.
그가 가장 뿌듯하게 생각하는 것은 “한국인으로서 인류사를 새로 쓸 수도 있는 세계적 발견을 했다”는
점이다. 그 자부심 덕에 사는 게 재미있다고도 한다.
혹여 흑피옥 출토지 발굴조사 결과가 기대와 다르게 나오면 어떡할까.
하지만 그는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내가 큰소리 치는 이유가 있다. 직접 현장을 파헤쳐 흑피옥 조각상 30여 점을 발굴한 데다 인골도
발견했다. 확신이 없고서야 남들이 말하듯이 ‘미친 짓’을 하겠는가.”
사재를 털어 애써 모은 흑피옥을 중국 당국에 기증하려는 것은 “찾고 보니 내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문화유산이라는 생각에 이르렀기 때문에 중국에 반환하는 것”이라고 이유를 말했다.
그는 서울 인사동에서 화랑을 운영한 적도 있지만 이후로는 유물 수집에 전념했다.
“그럼, 직업이 유물 수집가인가”라고 물으니 “그저 유랑객이라고 써달라”고 답변한다.
그 낙천성 속에서 전설 같은 흑피옥을 찾아 다닐 수 있었던 이유를 알 듯도 하다.(주간 한국)
한편 2013년12월 19일 중국 베이징호텔에서 개최된 ‘유엔 새천년 개발 목표 공동 번영 활동 중국
문화사업 엑스포’ 중국정부 주관 중국민간 10대 국보 지정행사에서 한국의 박문원(52) 한국홍산문화
학술원 원장이 수집한 ‘홍산옥기’가 ‘2013 중국 민간 10대 국보’로 지정됐다.
이번 국보 지정은 중국 수장가협회 이사장 겸 옥기위원회 주임인 야오쩡씨가 박 원장이 수집한 홍산
옥기를 일괄 고증하고 그의 출품 제안으로 참가해 이뤄졌다.
특히 이번 행사에서 박 원장과 이금화 상임이사가 유물수집 공로를 인정받아 UN 제정 문물보호금상을
받기도 했다.
박 원장은 홍산문화의 실증적 학술연구와 옥기유물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고 후학 양성을
위해 최근 한국홍산문화학술원을 설립, 우리 상고사기의 유물 총 2천710여점을 기증했다.
내몽고 홍산문화에서 발견된
[출처] 전욱고양씨, 천년의 나라 발제국과 교류하다.|작성자 차한잔
[실증 25]웅상목(雄常木)의 진상(眞像)을 밝힌다.
웅상목(雄常木)은 바로 한웅상(桓雄像)을 닮은 신단수(神檀樹)다.
웅상목에 대해서 주석을 단 진나라의 곽박은 웅상목을 황제들이 등극하였을때 껍질을 벗겨 옷감으로
이용하던 나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해석임이 밝혀졌다.
그리고 웅상목(雄常木)은 웅상목(雄像木)으로 바꾸어야 옳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필자는 1999년 장도의 왕구(골)촌을 답사하고, 현재는 조종수(祖宗樹)로 불리고 있는 웅상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왕구(골)촌은 3000여년전의 유물인 고급수레가 발굴된곳이다.
《산해경》에 따르면 선 팔대제(先八代帝)가 이곳에서 인가를 받았다고 하니 그 팔대제란 삼황오제를
말하는것이다.
이곳은 하늘로 부터 제위의 취임을 인가받던 성스러운 장소로 추정되는곳이다.
웅상목을《삼국유사》의 《고기》는 신단수(神檀樹)라고 하였다.
《산해경》
肅愼之國在白民北 有樹名曰雄常 先八代 帝 于此取之
[ 숙신국이 백민의 북쪽에 있다. 나무가 있는데 웅상이라 부른다.
앞선 8대(先八代 )임금이 이 나무에서 자리를 취했다.
此(차)는 웅상이란 나무이고 之(지)는 팔대제(八代帝)이니 웅상아래서 제위를 취했다고 해석된다]
▶ 양곡(暘谷) 부상(扶桑)을 중심으로 소호희화국(少昊羲和國)이 있었으며,그곳에는 소호희화족
수령 신목(神木)을 보좌하는 관리 구망이 있다. 전욱이 이곳에 살았다.
*「산해경(山海經)」<해외서경>에 보면 웅상(雄常)이라는 나무 아래에서 성인이 대를 이어 즉위하는
숙신(肅愼)국에 대해 나온다.
정재서 역주에 정 인보 ,안 재홍 제 씨는 중국 고서에서 출현하는 주신(珠申), 식신(息愼), 직신(稷愼)과
마찬가지로 조선(朝鮮)을 음사(音寫)한 별종의 표기로 파악했다 하였다.
또한 이 숙신국이 바로 단군 조선임을 알 수 있는 기록이 바로 「환단고기」<단군세기>에 보인다.
즉, '경인 원년에 11세 단군 도해(道奚)가 5가에게 명하여 열두 명산 가운데 가장 훌륭한 곳을 골라 국선
수두(蘇塗)를 세우게 하였다.
수두에는 단수(檀樹)를 빽빽하게 둘러 심고 그 가운데 가장 큰 나무를 골라 환웅상(桓雄像)을 모셔
지내며 나무를 웅상(雄常)이라 이름하였다.' (안원전의 21세기 담론100)
* 환단고기에도 웅상이라는 말이 여러 곳에서 등장한다.
-화랑의 임관식에는 큰 나무를 세워 웅상(雄常)이라 했는데 이는 환웅의 신상이다.
상(常)은 항상 있다는 뜻이다.
-소도가 도처에 세워졌는데 산마루에 산상(山象)과 웅상(雄象)을 세웠다.
-국선소도에는 단수(檀樹)를 둘러 심고 가장 큰 나무를 환웅형상으로 삼아 웅상이라 불렀다.
-삼한에는 10월 상순에 제사를 지내는데 둥근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지내고 모난 언덕에서는 땅에
제사를 지내며 산에는 웅상을 세우고 조상제사는 나무를 다듬어 썼다.
이것도 이미 고대부터 나무와 연관지어 환웅을 뜻하는 웅자와 상자를 썼다는 것이 된다.
어쨌든 웅자는 진작부터 쓰여 진 것이다.
소도와 산상웅상(蘇塗와 山像雄常)의 정체가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우선 한단고기를 번역한 임승국님의 말을 들어보자 (한단고기 201쪽 참조)....전략 "안호상 박사는
다음과 같이 산해경의 기록을 잘라 말하였으니 참고할만 하다.
즉 '北有樹 名曰雄 常 先八代帝 於此取之' 라고 웅( 雄)과 상(常)을 갈라놓고 '북에 나무가 있는데 이를
웅(雄) 이라 한다.
늘 앞서는 8대의 임금들이 여기서 이를 취해갔다'로 한 것이다... 중략 .... '산 형상의 웅상을 보게
되었다'(可見山像雄常)는 좀체로 이해하기 힘든 구절이다.
언젠가는 웅상(雄常)의 참뜻이 한국학에서 밝혀질 날이 있을것으로 기대 한다" 라고 했다.(구길수 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웅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여러 나라에는 각기 특별한 읍이 하나 있는데, 이를 '소도'라고 한다.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메달고, 신을 부린다.
여럿이서 그 가운데로 도망하면 이에 돌아오지 못한다.
적이 이용하기에 좋다. '소도'의 뜻은 '부도'와 비슷한테 선악을 행하는 것에는 다름이 있다.
그 북방 군과 가까운 나라들은 예의 풍속이 조금 있고, 먼 곳은 죄인과 같이 노비들과 서로 섞여 산다.
다른 보배는 없고, 짐승들과 초목들도 중국과 같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환단고기》<단군세기>11세 도해단군 재위 57년 경인 원년(BC 1891) 단제께서는 오가에게 명을
내려 열두명산의 가장뛰어난 곳을 골라 국선의 소도를 설치케 하셨다.
많은 박달나무를 둘러 심은 후 가장 큰 나무를 골라 환웅의 상으로 모시고 여기에 제사지내며 웅상
이라 이름했다.
이 때 국자랑의 스승으로 있던 유위자가 계책을 올려 말하길, '생각하옵건대 우리의 신시는 실로
환웅천왕께옵서 개천하시고 무리를 거두심에 온전하게 하는 것으로 가르침을 세워서 백성들을 교화
하셨습니다.
이에 천경신고는 위에 조술하신바요 의관대일은 기꺼이 밑으로 본을 보이는 것이니, 백성들은 범하는
일없고 함께 다스려져 들에는 도적떼도 없이 스스로 평안하였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 병도 없이 장수하며 주리는 이 없이 풍요로우니, 산에 올라 노래 부르며 달을 맞아
춤추었습니다.
먼곳이라도 이르지 못하는 곳 없고 흥하지 않는 곳 없게 되었으니 덕이 넘치는 가르침은 만백성에게
주어지고, 칭송하는 소리가 사해에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에 뜨거운 정이 있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1]웅상목.[2]삼신산 표지석.[3]거북석 유적.[4]왕골촌 수원지
사서에 등장하는 웅상목(雄像木)으로 추정되는 나무, 나무의 공이들이 마치 사람의 얼굴같이 보인다.
이 나무도 왕골촌에 있다. 지금은 조종수(祖宗樹)라고 부른다.
웅상목(雄像木)
웅상목 앞에서 두연 이종호님 나무의 공이가 마치 코가 큰 얼굴처럼 보인다.
수천년을 대를 이어 내려온것인지 지금은 조종수로 부르고 있단다.
나무에는 금줄을 둘러놓았다.참으로 특이한 나무였다.
주변에는 접시꽃과 무궁화도 보였다. 그렇다면 옛날 소도가 있을만 한 근거가 충분하다.
조종수(祖宗樹)라고 불리우는 웅상수나무의 씨앗(열매)이다.
마치 봉황의 머리처럼 생겨 가져다가 배양을 시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장도박물관 소장품들이 다량 발굴된 왕골촌에는 웅상목 주변으로 낮익은 접시꽃과 무궁화=훈화(薰花)
가 만발하고 있었다
웅상목이 발견된 왕골촌의 전경이다. 안개가 자욱하여 사진이 흐리지만 마을의 앞쪽에는 상당한 규모의
수원지가 있었다.신단수와 웅상목은 어떠한 관계일까.
이 길에서 가까운 위치에 삼선산(삼신산)이란 표지석이 있었다.
해상 삼선산이라는 표지석에서 필자. 뒤에 보이는 나무는 조경수로 무궁화를 심었다.
현대중국은 삼신산을 삼선산(三僊山)으로 표시한다.
그러면서 옆에 작은 글씨로 옛 삼신산이라고 부기를 하고있다.
이유가 무엇일까.먼거리에서 보면 삼선산밖에는 안보인다.
《사기》에서 기록한 삼신산이란 이름을 왜 그들은 피하고 있는가.
[실증 26]삼신산은 15마리의 거북이 받들고 있다가 9마리만 남았다는 사연.
신구(神龜)로 부르는 자연바위다. 전설에 삼신산을 받들고있던...장수의 상징이요 각종 비석의 기단
으로 등장하던 시원문화의 원형으로 추정된다.
사진의 우측 높은곳에 보이는 삼층 누각이 있는곳에 삼신산의 표지석이 있다.
우강의 설화에 의하면 여섯마리의 거북은 거인들에게 낚여갔으니 지금은 아홉마리만 남아야만 한다.
이와같은 우강설화는 삼신산 지역에 지진이 있어 두개의 산이 바다로 윤몰되었음을 설화로 설명한것
이다.
고산도 절벽. 지진으로 무너져 내린 흔적이 아직까지 역역히 남아 있다
봉래, 방장, 영주 : 삼신산의 유래 (하늘과 땅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중국의 고대신화 중)
발해의 동쪽 수억만리 되는 곳에 거대한 계곡이 있다. 귀허(歸墟)라고 하는 이 계곡은 밑도 끝도 없이 크다.
세상의 모든 강물이 이곳으로 흘러 들어가지만 수면은 항상 일정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걱정을 하지 않았다. 물이 넘칠 우려가 없기 때문이었다.
귀허에는 대여(岱輿), 원교(員嶠), 방호(方壺) 지금의 방장, 영주(瀛州), 봉래(蓬萊)라고 하는 다섯 개의 신산
(神山)이 있는데 각기 그 높이와 둘레가 3만 리가 넘는다.
그리고 산과 산의 거리가 보통 7만리에다 정상에는 9천리나 되는 넓은 평원이 있다.
산 위에는 황금으로 축성한 궁전과 백옥으로 만든 난간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신선이 사는 곳이다.
그곳의 새나 짐승은 모두 흰 색을 하고 있으며 도처에 진주와 보석이 열리는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그 나무들은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그 열매가 바로 진주 또는 보석인데 먹으면 장생불사하는 효험을
지니고 있다.
한편 이곳에 사는 신선들은 대부분 흰 옷을 입고 있으며 등에는 조그마한 날개가 달려 있다.
그들은 하늘과 바다를 마치 새처럼 자유자래로 날아다니는데 다섯 개의 신산에 있는 친구들을 찾아가기도
한다. 그들은 모두 행복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 그들이지만 한 가지 걱정 거리가 있다.
다름이 아니라 바다에 떠 있는 이 신산은 뿌리가 없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아무 일도 없었지만 바람이 불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만다.
그렇게 되면 신선들의 나들이가 불편하였다. 친구를 찾아 집을 나섰지만 산이 밀려나 이리저리 찾아 헤맨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실로 힘들고 짜증나는 노릇이라 그들은 대표를 뽑아 하늘에 있는 황제에게
호소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사정을 전해 들은 천제는 바람이 너무 심해 신산이 북극으로 밀려난다든지 또는 대해에 침몰하여
그들이 살 곳을 잃게 되면 정말 큰일인지라 북해의 해신인 우강(遇强)에게 적당한 조치를 취하도록 명령
했다.
우강은 천제의 친손자인데 풍신(風神)까지 겸하고 있다.
해신인 우강은 급히 열 다섯 마리의 거대한 거북이를 귀허로 보내 다섯 개의 신산을 등에 지도록 했다.
한 마리는 지고 나머지 두 마리는 그 밑에서 교대하도록 했는데 6만 년에 한 번씩 차례가 돌아오도록 했다.
한편 이들 거북이들은 이 일에 그렇게 정성을 기울이지 않았다.
산을 지고 있다가도 갑자기 내려놓고는 한데 어울려 춤을 추기도 했다. 물론 이들의 놀음에 신선들은 약간
불만이 있었지만 그래도 바람에 시달여야 했던 옛날에 비하면 천만다행이었다.
이제 신선들도 종전처럼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었는데 몇 만년이 지난 어느날, 뜻하지도 않은 일이 발생
하고 밀있다. 용백국(龍伯國)의 거인이 장난을 하는 바람에 신선들은 엄청난 재앙에 시달리게 되었다.
용백국은 곤륜산에서 북쪽 수만 리에 위치하고 있는 거인국으로서 백성은 모두 용의 종족이라 하여 용백이
라고 불렀다.
그곳에 사는 한 거인이 하루는 심심하여 낚싯대를 메고 동방의 바다밖에 가서 낚시를 하게 되었다.
그날 몇 발자국만에 귀허의 신산에 닿았고 다시 몇 발자국을 가서야 다섯 개의 신산을 한바퀴 돌았다.
낚싯대를 몇 번 던져 오랫동안 굶주렸던 거북이 여섯 마리를 낚아 올렸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낚싯대를 메고 집으로 돌아왔다. 거북이 등을 발라 점이나 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이 일이 있고부터 대여산과 원교산은 북극으로 떠내려가 바닷속에 침몰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때 수많은 신선들은 급히 집을 뛰쳐나와 공중을 헤매면서 큰 홍역을 치루었다.
이 일을 알게 된 천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래서 위대한 신력을 발휘하여 용백국의 국토를
최대한 줄여 놓았고 사람들의 키도 작게 하여 더 이상 재앙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했다.
그 뒤 신농(神農)의 시대가 오면 그들의 키는 더 이상 줄일 수 없을 정도로 작아져 있다.
그러나 인류가 보기에는 그래도 수십 길은 되었다.
.....(전략).......
登州海市更奇幻, 須臾臺榭生虛空。 停鑾古岸列蘭錡, 華旟翠羽飜長虹。
三山靈境疑咫尺, 蜃樓縹緲將無同。百川朝宗會九野, 緬維大禹眞神功。宸遊扈從廣聞見, 蕩滌心地開塵蒙。
.....(후략)......
등주(登州)의 신기루(蜃氣樓) 더욱 기묘하게 변하더니 한순간 허공중에 누각과 정자 같은 것이 생겼
다네 황제수레 옛언덕에 멈추고 병기 틀에 놓아 좍 벌려놓고, 화려한 군기(軍旗) 빛고운 물총새 나래
치듯 펄럭이누나
삼신산(三神山)의 신령스런 풍경 지척인듯, 신기루 아스라이 모든 게 다 다르이 온갖 하천 구야(九野)
로 모여드니, 우임금 뛰어난 공적 참으로 생각나누나
황제 유람할 제 호종하여 견문 넓히니, 이내 마음 후련하고 속세의 어리석음 확 트이는듯 하다
[제2도]지도자료:<속산동고고록 첨부지도> 향고도 제공 편집:필자
봉래해상에 정자들이 늘어선 모양, 이를 수유대사(須臾臺木+射)라고 불렀다.
바다에 시장이 이루어졌다고 하여 해시(海市)라 불렀다.
상측에 표시된 등주수도(登州水道)를 <천교구 天橋口>라고 이름하였다.
즉 하늘다리 입구라는 말이다.
이곳을 왜 하늘다리 입구라고 하였을까? 답은 본문안에 있다.
좌측에 있는 창락은 기자일행 약 5천명이 바다를 건너기 위하여 경유한 장소이고 동이의 고문자가
출토된 지역이다.
고조선이 있던 사문도=장도와 출입하던 거점이기도 하다.
묘도에는 지금도 마고(麻姑)를 모시는 천후궁(天后宮)이 있다
봉래해상에서 벌어진 현대화된 신기루, 이러한 현상은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계속되고있다.
위 봉래해상의 신기루는 07/10/8일에 있었던 약 4시간동안의 장면이다.
이러한 장관이 벌어지고있는 바다위를 수유대사(須臾臺木+射)라고 부르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수유족(須臾族)이라 불렀다.
따라서 기자도 이곳에 들어와서 살았기 때문에 그를 수유(須臾)라 부른것이다.
수유란 본래 잠간(약 45분)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다.
그러니까 이러한 신기루가 망망한 바다위에 안개와 함께 나타나서 마치 연극 무대처럼 다른장면으로
바꿔가며 유지 되다가 수 시간만에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현상을 말한다.
이 장관은 바로 장도=봉래해상(삼신산)에서 펼쳐지고 있는 장면이다.
다음은 중국의 신경보(新京報)가 보도한 봉래각 신기루에 대해서 보도한 내용이다
"오전 9시 펑라이거 앞바다에 짙은안개가 내려앉아 주변의 작은 섬을 뒤덮었으며, 2시간40분이 지난 후
신기루 현상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거북과 같은 모양이더니 곧 군함과다리, 산 모양으로 바뀌었다.
이와 동시에 펑라이거의 동쪽 바다에서는 갑자기 대규모 도시 모습이 나타났다. 바다 신기루 현상이 나타
나자, 주민 7만여명이 해변으로 뛰어나와 약 3만명의 관광객과 함께 이를 지켜봤다.
이곳에서는 지난해 5월에도 2시간 동안 신기루 현상이 나타났었다."
전욱 고양씨 - 인간 세계의 질서 확립(산동반도 소호국 시절의 단제)전욱 고양씨에 대한 설명을 보면,
<남정(南正-관명)의 중(重)에게 명하여 하늘을 관장케 하고 그로써 신(神)을 속하게 했다.
또한 화정(火正-관명)의 여(黎)에게 명하여 땅을 관장케하고 그로써 민(民)을 속하게 하여서 서로 침범
하여 모독하지 못하게끔 했다>고 되어 있다.
그 신화적 연역은 다음과 같다.
그 옛날 하늘과 땅은 반고(盤古)에 의해서 상하로 떠밀려져 멀어지긴 했으나, 그 후에도 천지간의 교통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이때부터 신시인 장도와 내륙의 교통을 통제하고 질서유지를 강화했다는 비유로 보인다.
이때가 비록 공자시대는 아니었지만 세상의 도가 땅에 떨어져 하극상의 난세가 계속되자 전욱고양은
종자 800명을 이끌고 장도로 들어가 조선을 건국하여 새로운 도덕과 질서를 강조한것으로 비로서
동방예의지국이 탄생된것이다.
이후로 천여년이 흐른 뒤 같은 이유 즉 신하국이 상국을 배반하여 주(周)가 은(殷)을 치자 기자가 장도로
들어가 팔조금법을 만들어 한층 예의를 강화하였고, 그로부터 약 700여년뒤 다시 천하에 도가 떨어져
난세가 되자 공자가 뗏목을 타고라도 도가 살아있는 군자의 나라로 건너가기를 원하였다는 사실은 시공을
넘어도 같은 역사는 번복되었다는 교훈을 말하고 있다.
공자가 주제하던 곡부는 바로 소호의 본거지었고,전욱이 24년을 비왕으로 활동하던 본거지이기도 하였다.
고대해상무역시장(출전 신시본토기)
"대인시(大人市)란 생각건대 《대황동경(大荒東經)》에 이르기를, '파곡산(波谷山)이란 곳이 있고
대인국(大人國)도 있다.
대인시(大人市)가 있는데 그 이름을 대인당(大人堂)이라 한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를 말하는 것이다.
양신(楊愼) · 학의행(郝懿行) 등은 모두 해석하기를 등주(登州)의 해시신류(海市蜃樓)의 조화라고
하였고, 말하기를 '지금 등주(登州) 바닷속의 주도(州島)에서는 봄과 여름이 교차할 때 늘 성곽과
시전(市廛: 저자의 가게)이 보인다거나 인물(人物: 사람과 물건)들이 왔다갔다 하기도 한다거나 비선
(飛仙)들이 너울너울 춤을 추는 등 갑자기 조화를 이루는데 현지인들은 이를 해시(海市)라고 한다는데
이를 두고 하는 말인 듯 하다'운운하였는데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원가 역주, 《산해경전역(山海經全譯)》, 귀주인민출판사, 260쪽 참조)
*여기서 말하는 대인시(大人市)란 신시(神市)를 말함이요,대인국(大人國)이란 동이 즉 조선을 말함이다.
이곳이 등주 주변 바다에 있는 주도(州島)라고 하였으니 사문도(현 장도)라는 말이다.
이곳이 삼신산이다.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는듯한 후기는 진짜 사실이 아니다.
그러니까 앞의 기록들이 모두가 사실이라는 말이다.
다음은 동이,주도(州島), 대인국.불사국,군자국 등으로 부르던 당시의 조선을 공자가 건너기를 원하였
다는 기록이다.
《왕제(王制)》에 기록되어 이르기를 「어질고도 기르기를 좋아하니 만물이 그 땅에 뿌리를 두고서
나온다」 하였으며, 중니는 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한탄하여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 구이(九夷)의 땅에
머물고 싶다 하였으니, 이는 군자가 거처하는 곳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허신이《설문(說文)》에서 말하기를 「오직 동이만이 큰 것을 좇으니 대인이다.
동이의 풍속은 어질며 어진 자는 장수를 누리니 ‘군자의 나라’․‘불사의 나라’라는 명칭이 있게 되었다」
하였으니, 이로서 ‘공자가 뗏목을 타고 가고 싶어하다’라는 말이 있게 된 것이다.
顓頊南下 其道神農黃帝 其地北辰南溟 偃皇北遷 其法堯舜禹湯 其土蟠木流沙 姬發東侵 西戎稱周 沛項
渡江 南蠻爲漢 靑徐幽冀 中土之民 或東或北 唐虞夷也 夏殷胡也
顓頊(전욱)이 남하하니, 그 道(도)는 神農(신농)과 黃帝(황제)요, 그 地(지)는 北辰(북진)과 南溟(남명)
이었다.
偃皇(언황)이 북쪽으로 옮겨 가니, 그 法(법)은 堯(요), 舜(순), 禹(우), 湯(탕)이요,
그 地(지)는 蟠木(반목)과 流沙(유사)였다.
희발(姬發)은 東侵(동침)하였고, 西戎(서융)은 주(周)를 칭하였다.
沛公(패공)과 項羽(항우)는 강을 건넜고, 南蠻(남만)은 漢(한)나라가 되었다. 靑州(청주), 徐州(서주),
幽州(유주), 冀州(기주)의 中土(중토) 백성들은 혹은 東(동)쪽으로 가고, 혹은 北(북)쪽으로 가니,
唐虞(당우)시대의 夷(이)요, 夏殷(하은)시대의 胡(호)였다.
文生于紋 艮爲道宗 傳在渤海 震爲法本 連山歸藏 農工医藥禮樂射御書數之術 莫不備焉 召姜 姬旦之治得
於我而用於彼 久占肥溫之地 長爲安樂之計 安者怠而亡 勞者勤而興
文(문)은 紋(문)에서 생겨났다. 艮(간, 북동쪽)은 道(도)의 宗(종)이며, 傳(전)하여 渤海(발해)에 있었다.
震(진, 동쪽)은 法(법)의 本(본)이니, 連山(연산)과 歸藏(귀장)이다. 農(농), 工(공), 医(의), 藥(약), 禮(예),
樂(악), 射(사), 御(어), 書(서), 數(수)의 術(술)이 갖춰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姜(강, 姜太公)을 초빙한 姬旦(희단)의 다스림은 우리에게 얻어서 저들에게 쓴 것이다.
오래도록 비옥하고 따뜻한 땅을 占(점)하는 것을 오랫동안 安樂(안락)의 계책을 삼았으나,
안주하는 자는 게을러서 망하고, 애쓰는 자는 부지런하여 흥하노라.
以臣伐君 滅親爲義 周豈有道 分其父羹 解其妻袴 漢實無法 五伯尙淫 七雄嗜殺 書可以焚 儒可以坑 但知
築城 不知修德 蒙恬未死 秦已亡矣 徒事干戈 不事其親 病已未生 劉已絶矣
신하로써 임금을 치고, 친족을 멸하는 것을 義(의)로 삼았으니, 周(주)가 어찌 道(도)가 있으랴.
그 어버이의 羹(갱, 끊인 국)을 나누고, 그 처의 사타구니를 벗겼으니, 漢(한)은 실로 無法(무법)이였다.
五伯(오패)는 음란을 숭상하고, 七雄(칠웅)은 살육을 즐겼으니 서책은 불살라져도 될 것이고,
유생은 구덩이에 파묻혀도 될 것이다.
단지 城(성)을 쌓는 것만 알고, 德(덕)을 닦는 것은 몰랐으니, 蒙恬(몽염)이 아직 죽지도 않았건만,
秦(진)은 이미 망하였도다.
방패와 창을 헛되이 섬기고, 그 친족을 섬기지 않았으니, 病已(병이)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건만,
劉氏(유씨)는 이미 끊겼노라.
(보기)
《주역》에, “땅의 도는 지극히 고요하며 덕이 방정하다[坤道至靜而德方].” 했으므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설[天圓地方說]’이 생기게 된 것이다.
방(方)은 평(平)과 같으므로 네 면이 네모되어 있다면 한 면이 한 모가 되는 것인데, 사람이 땅을 밟고
하늘을 이고 보니, 지면은 평평하고 하늘은 둥글게 덮고 있는 듯하므로 이런 말이 있게 된 것이다.
전욱고양(서기전 2467년 즉위)은 중국의 금문학자 낙빈기(駱賓基 본명 張璞君 1917-1994)의 연구에
따르면, 유망(서기전 2517년 즉위)의 장자 희화와 유망의 이복동생 황제(서기전 2689년 즉위)의 딸
상아 사이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그는 유망의 나라 유백국이 황제의 유웅국에게 멸망한 후에, 황제의 아들 소호금천(서기전 2474년
즉위)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사람이다.
그와 그의 뒤를 이은 제곡고신(서기전 2420년 즉위)과의 싸움으로 개벽신화에 올랐다.
불주산신화가 그것이다.
불주산에는 하늘을 떠받치는 하늘기둥이 있었다.
제곡고신은 전욱고양을 이길 수 없게 되자 하늘기둥을 허물어버렸다.
이리하여 세상이 바뀌어 제곡고신의 천하가 되고 말았다.
이 신화의 근거가 되는 전쟁이 일어난 해를 <죽서기년竹書紀年>에서는 전욱고양 78년이라고 기록
하였다. <죽서>란 대나무를 얇게 쪼개어 만든 죽간에 기록한 역사서라는 뜻이다.
본문에 나오는 유망과 황제는 한웅천왕이 풍이족의 후예인 구려족을 통합하여 배달나라를 새웠을 때,
농관農官을 지낸 고시의 방계 후손이다.
고시에서 다의발한웅(서기전 3418-3321 년 전, 하화족이 복희로 조작한 분이다)으로, 신농으로, 소전
으로 이어져 오는 세계世系에서 출생하였다.(<神市本紀>)
소전에게서 유망은 장자요 적통 종자宗子로, 황제는 차자요 비적통 지자支子로 태어난 것이다.
전욱고양은 유망의 손자이다. (낙빈기 금문해석)
전욱고양은 동이의 신화와 그리스 신화에 그 행적을 남겼다.
그리고 고구려의 벽화에 역사상力士像으로 그려지기도 하였다.
★<동북공정>의 화두로 떠오른 전욱고양은 누구인가 ★
고구려 사람은 만주 집안현 통구평야 우산 기슭에 삼실총을 조영할 때, 벽의 네 군데에 하늘을 떠받
들고 있는 장사 네 사람을 그렸다.
이들은 네 귀퉁이의 하늘을 떠받치며 하늘기둥의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이다.
말하자면 전욱고양의 분신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전욱고양 신화는 그리스로 가서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신의 이야기 아틀라스신화를 탄생시켰다.
낙빈기는 전욱고양의 이름을 청동제 제기인 술두루미 중여존에서 해석해 내었다.
전욱고양 이외에도 우리 상고사에서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는 중여곤과 희화를 해석해 냄으로써 금문
해석이 우리 상고사 복원에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전욱고양은 신화적인 인물이 아닌 실존인물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중국이 전욱고양이 고구려의 조상이 된다고 한 점을 우리가 기피해야 할 이유가 아무데도 없다.
우리가 전욱고양에게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의 이름에 나타나는 태양의 의미인 고양高陽이다.
고양은 남중하는 해를 뜻한다. 전욱고양은 조선을 세운 단군왕검의 조상도 된다.
★일월마지를 행하여 전욱고양의 제위를 승계한 단군왕검★
단군왕검은 14세에 웅심국왕의 사위가 되었다가, 배달나라의 거불단한웅이자 단국의 홍제의 태자로
들어가 단국을 인수하면서, 웅심국과 단국을 통합하여 조선이라고 하였다.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와 이고선의 <조선기> 종합) 조선이라는 명칭은 전욱고양의 동생 대계의
아들 중여곤이 백부 전욱고양의 장자로 들어가면서 탄생되는 이름이다.
(중국의 낙빈기와 한국의 김재섭 두 분의 공동 해석) 사당에서 해와 달에게 제사지낸다는 뜻,
즉 오늘날도 무당들이 하고 있는 ‘일월마지’를 나타내는 문자가 조선이라는 문자이다.
조선의 일월마지(마지는 무교의식과 무교탱화를 의미하는 말이므로 맞이로 고쳐 써서는 아니 된다)는
전욱고양이 유백국(楡伯國, 유망 쪽에서 말하면 유백국이고, 황제 쪽에서 말하면 유웅국有熊國이다)의
제위帝位에 있을 때, 중여곤이 무당과 함께 올리던 제사였다.
이 무속행위가 조선이라는 이름에 그대로 반영되어 오늘 날에도 전해 오고 있다.
따라서 조선이라는 문자에는 전욱고양이 유백국에서 국가적인 행사로 해마지를 하던 나라제관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단군왕검의 단군이라는 문자에도 단군왕검이 해맞이를 하는 사람임이 나타나 있다.
따라서 전욱고양의 정통성을 단군왕검이 해맞이를 통하여 계승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추격하는 군사들을 피해 후희일이 도망하자, 군사들은 곧 회옥(정기)을 군수軍帥로 옹립하였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평로ㆍ치청절도관찰사ㆍ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海運押新羅渤海兩蕃使)ㆍ검교공부
상서(檢校工部尙書)ㆍ겸어사대부(兼御使大夫)ㆍ청주자사(靑州刺使)를 제수하면서, '이정기'라는 이름
을 하사하였다.
얼마 후 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를 추가하고 요양군왕(饒陽郡王)으로 봉했다."<이상 34쪽>
"이정기에서 이사도에 이르기까지 운주ㆍ조주 등 12개 주를 60여 년 동안 사사로이 점령하였다.
민심이 자신들로부터 등을 돌릴까봐 염려한 나머지, 혹독한 법을 동원하여 백성을 다스렸다."
<이상 459쪽>
【태백일사】의 《신시본기》에도 『대변경』을 인용하며 아래와 같이 나와 있습니다.
“신농(神農)은 열산(列山)에서 일어났는데 열산(列山)은 열수(列水)가 흘러 나오는 곳이다.
신농(神農)은 소전(少典)의 아들이다. 소전(少典)은 소호(少皥)와 함께 모두 고시씨(高矢氏)의 방계이다.
대저 당시의 백성들은 정착해서 생업을 이어갔으며, 차츰 크게 되자 곡마약석의 기술도 또한 점점 갖추
어졌고 낮에는 저자를 이루어 교역을 하고 되돌아갔다.
한웅천왕께서 처음 하늘에서 내려오시사 이미 이산에 계시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이산을 신주흥왕의 영지라 하니, 반드시 소도제천의 옛 풍속은 반드시 이 산에서 시작되고, 옛부터
한족의 숭경도 역시 이 산에서 시작된 일이니, 단순히 심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또 짐승들도 빠짐없이 신의 교화로 목욕하듯하여 안락하게 이산에 서식하며 일찌기 사람을 상처낸 적
없고, 사람도 감히 산위에 오르지 않고 오줌 누어 신을 모독하지도 않으며, 항상 끝없이 공경하고
보호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대저 우리 한족은 신시가 이끄는 삼천의 무리들의 장막에서 나왔다.
후세 이후로 여러 씨성의 구별의 있다 하지만 실은 한단 한줄기 후예 후손에서 벗어나는자 없으며,
신시예 처음으로 내리신 공덕은 당연히 반드시 전송하여 잊지 말아야할진저!
곧 선왕과 선민들이 그 삼신고제의 성지를 가리켜 삼신산이라 함도 역시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이다.
대저 선시 이래 신의 다스림과 성인은 교화는 점점 세월을 따라 오히려 더해 가며 점점 깊어간다.
나라를 세우고 세상을 다스리는 커다란 근본은 세상의 주변의 나라들과는 판이하게 달랐으니 그 신풍과
성속은 멀리 천하에 전파되었다.
천하만방의 사람들로서 신성이화를 흠모하는 자들은 반드시 삼산을 추모하고 숭상하여 동북쪽에 신며
사라 불리는 곳이 있게 되었다.
그 말류의 폐단에 이르러서는 차츰 허랑방탕한 일에 빠져들더니 더 나아가서는 차츰차츰 더 기괴하고
황당무계한 설이 쉴새없이 튀어나오게 되었다.
여기에서 이른바 연나라 제나라의 바다위에 괴상한 도사얘기도 나왔다.
뎌저 저들의 땅이 구한의 신시와 서로 접해있어 문물의 교류도 왕성했던 터라 저절로 풍문에 접할 수
있어 괴기하다느데 놀랐던 게 아닐까? 게다가 상상으로 늘리고 부연하는 자도 있어 가로대 '삼신산은
봉래 방장 영주산으로 발해 가운데 있다 운운'함으로써 세사을 미혹하는 주요 원은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당시의 사람은 동쪼으로 바다에 가보아도 아득하기만 할 뿐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발해 가운데 다른 바다가 있다는 말도 못 들었고,'삼신산도 역시 발해 가운데 있다 운운'
했으나, 실은 바로 삼신산이 아니고 각각 세개의 섬예 있는 산이니 봉래는 쑥이 무성하게 자란 내경
으로서 곧 천왕이 내려오신 곳이요, 방장은 사방 일장의 각으로서 곧 소도가 있는 곳이요, 영주의 영은
주도를 에워싸고 있는 모습으로서 곧 천지가 샘솓는 곳이다.
통틀어 말하자면 삼신산이라 하는 산이니 삼신은 곧 상제인 것이다.
그렇지만 더욱 그 황탄한 자는 삼신의 원 뜻을 알지 못하고 곧 금강을 봉래산이라 하고, 지리산을
방장산이라 하고, 한라를 영주산이라 함이 모두 그런 따위이다.
<사기>봉선서에서,'그것은 발해의 가운데 있다고 전한다.
아마도 일찌기 그곳에 갔다 온 자가 있는 듯, 모든 선인 및 죽지 않는 약은 고곳에 있다 하며,
그곳은 사물들과 짐승들까지 빠짐없이 흰색이요,황금과 백은으로 궁궐을 지었다.(....)라고 하였으며
또 <<선가서>>엔 가로대 '삼신산은 혼을 되살리고, 늙지 않게 하는 등의 약초가 있는데 일명 진단
이라 한다.'라고 했다.《신시본기》<삼한비기><위서 물길전>
복희는 신시에서 태어나 우사(雨師)의 자리를 세습하고 뒤에 청구(靑邱)와 낙랑(樂浪)을 거쳐 마침내
진(陳)에 옮겨 수인(燧人), 유소(有巢)와 나란히 그 이름을 서방에 빛내었다.
후예는 갈리어 풍산(風山)에 살았으니 역시 풍(風)을 성씨로 가졌다.
뒤엔 마침내 갈라져 패(佩)·관(觀)·임(任)·기(己)·포( )·이(理)·사( )·팽(彭)의 여덟 가지 성이 되었다.
지금 산서성의 제수(濟水)에 희족(羲族)의 옛 거처가 있다.
임(任)·숙(宿)·수(須)·구(句)·수유(須臾)의 여러 나라는 모두 여기에 모여 있다.」<한단고기 신시본기>
갑인 38년, 협야후 배반명을 보내서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다. 12월엔 삼도(일본)가 모두 평정
되었다.
무진 52년, 병력을 보내 수유(須臾)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케 하였다.
이에 연나라가 제나라와 연합하여 고죽헌에 처들어왔지만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다....
수유의 군대라는 기록이 이 때에 비로소 나오는 것으로 보아 기자의 후손들이 이 때부터 별도의 군사를
가졌든 것 같다.
수유(須臾)는 복희의 후손인 풍씨에서 다시 갈라져 나간 부족이라는 것이 환단고기에 나타나 있다.
그러니까 기자도 복희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복희는 신시(神市)에서 태어났다 했다.
1) 중국은 이미 동북공정에 앞서 다른 역사관련 공정들을 진행했었다.
동북공정은 이런 선행 공정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大工程→ 중국고대
문명탐원공정中國古代文明探源工程→ 동북공정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역사관련 공정은,
중국이 21세기‘대중화주의 건설’을 위해 오래 전부터 준비해 온 국가적 전략이다. (서문 중에서)
2) 황제족은 한족의 조상이 아니라,‘ 동이의 조상’이‘한족의 조상’으로 둔갑한 것이다. (본문 303쪽)
3) 2003년 10월 2일자〈북경만보〉에 최종 발표된 하상주 연표하 (기원전 2070∼기원전 1600년),
상 (기원전 1600∼기원전 1046년), 주 (기원전 1046∼기원전 771년)
4) 삼관교육:
① 조선족의 조국은 중국이다(조국관)
② 조선족은 중국 55개 소수민족의 하나로 중화민족의 일부이다(민족관)
③ 조선족 역사는 중국역사의 일부분이다(역사관)
5) 이 때 사용된 옥은 동쪽으로 450km나 떨어진 압록강에 인접한 요녕성 수암에서 나온‘수암옥’으로
밝혀졌다.
6) 삼성조 시대 환 국 (기원전 7197 ~ 기원전 3897년, 3301년간)
배달국 (기원전 3897 ~ 기원전 2333년, 1565년간)
고조선 (기원전 2333 ~ 기원전 238년, 2096년간)
前秦 王嘉《拾遺記》
溟海極北之地,是勃醍國,國中百姓都穿羽毛做的衣服,沒長翅膀也能飛翔,白天走在陽光下也沒有影子,
都能活一千歲。他們餓了就吃黑河裏的水藻,渴了就喝陰山上的桂脂。乘風飛翔,踏浪而來。但到了中原,
天氣炎熱,他們的羽毛衣服就會脫落,無法騰空了。他們來朝見顓頊,見他面南背北不怒自威,兩側都是
馴服的豹子,王旗上也是精美的豹紋,宮宇雄偉氣象萬千,所有人都為之傾倒。勃醍國使者獻上黑玉做的
玉環,色澤純黑熠熠閃光,又奉上黑馬一千匹,都神駿非常。顓頊很高興,賞賜無算。得知他們羽毛盡落
不能返鄉,就親自駕駛鐵輪船(天啊,太超前了吧?都有輪船了?),泛過黑水河,抵達極北絕域,當地
百姓歡呼雀躍呼之為神。闇河北岸,有紫桂成林,果實像棗一樣,是神仙種植的。韓終曾到此采藥,賦詩
一首:“闇河之桂,實大如棗,得而實之,後天而老。”也就是說,吃了紫桂的果實,可以長生不老
<중국고대지명대사전>의 요택에 대한 아래 설명을 보면 그 구체적인 위치를 알 수 있다.
(번역) 소택배수 : 광령 이동에서 요하까지 있는 큰 웅덩이 소택지로 옛날에 요택이라 불렀다.
비가 오면 진흙탕이 맑아지고, 요택 내에는 요양하와 유하 등 여러 지류가 있다.
수·당나라의 고구려 정벌 때 임시로 교량도로를 수축했다. 동쪽은 해성현에서 시작하여 서쪽은 광령
까지로 200여리이다. (이하 생략)
(원문) 沼泽排水 : 自广宁以东至辽河有大片低洼沼泽地,古称辽泽,遇雨泥泞,泽内有绕阳河及柳河等
多条支流。隋唐东征辽东都临时大力修筑桥梁道路。明代沿泽之南路开河名路河,东起海城县境,西至
广宁,长200余里,后缩短到170里,用以排泽水,运粮"287;,防边疆,堤岸作为陆路,至明末淤废。
清代屡次修沈阳至广宁道路百余里
위서를 쓴 위수의 해골이 무덤에서 꺼내어져 박살난 이유는?
위서는 북제의 위수가 북위의 1세기 기록을 남긴 책입니다. 위수는 동위(東魏)사람이었는데 어떤
영문이었는지 위수는 후대 명나라 사가들로부터 "더러운 역사"의 저자로 찍혀 그의 해골이 꺼내어져
박살나는 수모를 겪습니다. 위수는 동위 사람이었고 동위는 바로 선비족이 세운 나라였지요.
따라서 위수는 화하족과는 다른 사관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위서는 내내 지나 사관들로부터 냉대와 멸시를 받다가 송대에 이르러서는 대대적인 개보수가 있었습
니다. 웃기는 이야기지요. 책이 틀렸다면 그에 대한 비판서를 쓰면 될 것이지 그걸 뜯어 고치다니.
어쨌든 우리는 9살에 학문을 시작하고 22살에 승과에 장원급제한 뒤 78살에 국통으로 임명받은 일연
스님의 학문적 성실성에 의심을 가하기보다는 오히려 역사가 마음에 안 들어 그걸 뜯어 고치는 지나
왕실 사학자들을 의심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하우는 제전욱의 손자다
《사기(史記)》 본기는 《오제본기(五帝本紀)》로부터 시작해서 《삼대본기(三代本紀)》 즉 《하본기
(夏本紀)》·《은본기(殷本紀)》·《주본기(周本紀)》가 나오고 《진본기(秦本紀)》·《진시황본기(秦始
皇本紀)》로 이어지고 있는데, 그 중 중국고대사의 주축을 이루는 삼대의 본기를 대조하여 보면 재미
있는 표현 양식을 읽을 수 있다.
하·은·주 삼대가 모두 그 나라의 시조의 이름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하우(夏禹)·은설(殷契)·주후직(周后稷)이 그것이다. 그리고 본기는 정사인 만큼 상식으로 보아 더 비
과학적이고 더 신화적이어야야 할 고대로 올라갈수록 그 기록이 더 사실적이라는 것이다.
《하본기(夏本紀)》의 우(禹)에 대한 족보는 신화적 탄생설화도 없고 우(禹)의 직선적인 부계만 훑고
있는데, 그것은 《마태복음》 1장의 족보와 완전히 동일한 양식을 취하고 있다.
하(夏)의 시조는 우(禹)인데, 그 명을 문명(文命)이라고 한다.
우의 아버지는 곤(鯀)이라 하고, 곤의 아버지는 제전욱(帝顓頊)이라 하고, 전욱의 아버지는 창의(昌意)
라 하고 창의의 아버지는 황제(黃帝)라 하니, 우(禹)라 하는 자는 황제의 현손(玄孫)(우리의 보통
말로는 고손)에 해당되며 제전욱의 손자에 해당된다.
(九山님 글 일부 편집)
중국 산둥(山東)성 옌타이(煙臺) 펑라이거(蓬萊閣) 앞바다에 중국 사상 최대 규모의 바다 신기루가 나타났다. 펑라이거는 당나라 때 도교 여덟 신선을 모시기 위해 지어진 신선각으로, 과거부터 신기루 현상이 나타나 ‘지상의 선경’으로 불려왔다. 신기루는 7일 오전11시40분 시작돼 오후 4시까지 4시간여 동안 이어졌다.
《산해경(山海經)》을 역주한 원가(袁珂)는 이렇게 말하였다.
을 선포한 셈이다.그것은 전욱고양씨가 동이족의 후손
으로 고조선의 건국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