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담마라찰은 중국말로 법호(法護)라 한다. 그의 선조는 월지국(月支國) 사람이다. 본래의 성은 지(支)씨이다. 대대로 돈황군(燉煌郡)에서 살았다. 나이 여덟 살에 출가하여 외국 사문 축고좌(竺高座)를 스승으로 섬겼다.
경을 매일 만 자씩 읽고, 한 번 보기만 하여도 이해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깨끗하고 아름다우며, 절조 있는 행동은 깨끗하고 엄격하였다. 뜻이 돈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만 리 밖에라도 스승을 찾아갔다. 이 때문에 6경(經)을 널리 보고 마음을 7적(籍)에 노닐었다. 아무리 세상에서 비방하거나 칭송하는 데 힘쓰더라도 일찍이 마음에 꺼린 적이 없었다.
이때는 진(晋)나라 무제(武帝, 265~290)의 치세이다. 비록 서울에서 절과 불화와 불상이 존숭되기는 하지만, 심오한 대승의 경전들은 총령(葱嶺: 파미르 고원) 밖에 모여 있었다. 법호(法護)는 이에 한탄하여 분발하고, 불도를 널리 펴는 일에 뜻을 두었다.
그래서 스승을 따라 서역에 가서 여러 나라를 차례로 돌아다녔다. 외국의 언어가 모두 서른여섯 가지이다. 글씨도 역시 그와 같다. 법호는 그것을 두루 배웠다. 훈고를 철저히 익히고, 음과 뜻과 글자의 체까지 두루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드디어 많은 『범경(梵經)』을 가지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돈황(燉煌)에서 장안으로 돌아오면서 연도에서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그가 얻은 것은 『현겁경(賢劫經)』ㆍ『정법화경(正法華經)』ㆍ『광찬경(光讚經)』 등 165부이다. 부지런히 애쓰면서 오직 세상에 크게 유통시키는 것[弘通]을 일삼았다. 평생토록 베끼고 번역하느라 힘이 들어도 싫증내지 않았다. 경법(經法)이 중국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은 법호의 힘이다.
법호는 진(晋)나라 무제(武帝) 말년, 깊은 산에 숨어살았다. 산에는 맑은 시내가 있어 항상 깨끗이 목욕하고 양치질하였다. 후에 장작을 캐는 나무꾼들이 물가를 더럽혔다. 얼마 가지 않아 물이 말라 버렸다. 이에 법호가 배회하며 탄식하였다.
“사람이 덕이 없어 마침내 맑은 샘이 그쳤구나. 물이 영원히 말라 버린다면 참으로 살아갈 수 없으리라. 당장 옮겨가야겠다.”
말을 마치자 샘물이 솟아올라 시냇물이 넘실댔다. 그의 깊은 정성에 감응하는 바가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지둔(支遁)은 그의 초상화에 다음과 같이 찬탄하였다.
님의 맑고 고요함이여,
도덕이 깊고도 아름다워라.
궁벽한 골짝 나직한 읊조림에
마른 샘 물 솟구쳐 응답했다네.
아득하여라, 님이여.
하늘이 내리신 크나큰 아름다움으로
고비 사막 건너
우리들 그윽한 경지로 이끄셨네.
뒤에 장안 청문(靑門) 밖에 절을 세우고 부지런히 도를 행하였다. 이에 덕스런 교화가 멀리까지 퍼지고, 명성이 사방 멀리까지 뒤덮였다. 승려 수천 명이 모두 그를 종사로 섬겼다.
진(晋)나라 혜제(惠帝, 290~306) 때에 이르러 서쪽으로 달아났다. 관중(關中) 지방이 어지러워 백성들이 이리저리로 흩어졌다. 법호는 문도들과 함께 피난하여 동쪽으로 내려와 민지(澠池)에 이르렀으나, 병이 들어 돌아가셨다. 이때의 나이가 78세이다.
뒤에 손작(孫綽)이 『도현론(道賢論)』을 지었다. 인도의 일곱 승려를 죽림칠현(竹林七賢)36)과 빗대었는데, 법호를 산거원(山巨源)과 짝하였다. 『도현론』에서 논(論)하였다.
“법호공의 덕은 만물의 근본에 머물고, 산거원[山濤]의 위치는 도를 논하는 자리에 올라섰다. 두 분은 덕스런 자태가 높고도 원대하여 비슷한 분들이라 할 만하다.”
그가 후대 사람에게 기려지는 바가 이와 같았다.
∙섭승원(聶承遠)ㆍ섭도진(聶道眞)
당시 청신사(淸信士) 섭승원은 밝게 이해하는 재주가 있었고, 뜻을 돈독히 하여 불법에 힘썼다. 법호공(法護公)이 경전을 번역할 때 대부분 문구(文句)를 바로잡았다. 『초일명경(超日明經)』을 처음 번역할 적에 자못 번다하고 중복되는 것이 많았다. 섭승원이 깎아 내기도 하고 바로잡기도 하여 지금 쓰이는 두 권으로 만들었다. 그가 상정(詳定)한 바가 대부분 이와 같다.
섭승원에게는 도진(道眞)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역시 범학(梵學)을 잘 하였다. 이들 부자는 말을 엮는 데 아름다우면서도 무리가 없어서 원래의 책 내용에 누를 끼치지 않았다. 또 축법수(竺法首)ㆍ진사륜(陳士倫)ㆍ손백호(孫伯虎)ㆍ우세아(虞世雅) 등은 모두 법호의 뜻을 이어받아 집필하고 상세하게 교정하였다.
도안(道安)은 말한다.
“법호공이 번역하신 바가 만일 세밀하게 이 분들의 손과 눈을 거쳤다면 강령(綱領)이 반드시 바로잡혔을 것이다. 비록 번역한 경의 말이 미묘하거나 아름답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기상이 드넓고 사리에 통달하여 시원하게 펼쳐 냈다. 특히 무생(無生)의 이치를 잘 알아 혜(慧)에 의존하고 수식을 하지 않았다. 그 표현이 질박하여 근본에 가깝다.”
칭찬함이 이와 같았다. 법호의 집안은 대대로 돈황에서 살았다. 그가 사람들을 교화하여 불법으로 두루 적셔주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모두 돈황 보살이라고 일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