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롱박
조롱박은 연리지의 반대말
한 몸으로 태어난 두 개의 몸 미처 몰랐던 반쪽의 반쪽
생으로 쪼개질 때 당신에게 흘러드는 나를 보았다 내게서 등 돌리는 소리
한때 우리는 덩굴손에 매달린 요가 자세처럼 어느 수행자의 허리춤에서 물구나무로 서 있기도 했지
조롱이 조롱조롱 어떻게 매달려 살거니 어떻게 견딜 거니 받아 삼키면 아픈 말들
달을 퍼 담던 약수터에서 막걸리집까지 걸어 나간 표주박 엇갈린 길 우리임을 증명할 수 있을까
목이 탄 햇살의 눈총이 카톡 알람처럼 쏟아지는 약수터 당신은 평생 약수에 젖고 나는 어느 저잣거리에서 술에 절어 늙어 간다
우리는 헛 몸 언제 한 몸이었던가 텅 빈 속을 채우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위아래가 사라진 표주박, 맞닿으면 몸이 뚜껑일 수도 뚜껑이 몸일 수 있다
화살표
목소리가 두 손을 붙들고 간다 잠금장치에서 풀려나온 그녀가 방향제 한 모금 마신 듯 말이 없다 손바닥으로 차창 밖 공깃돌의 기류가 흐른다
인적이 말라버린 시간 속에 그녀의 목소리가 수상하다 믿었던 그녀의 입 속에서 불쑥불쑥 모르는 골목들이 튀어나온다
믿음을 놓치자 믿음이 저 혼자 귤밭을 찾아 나선다 710번지가 없고 사라진 목책을 넘는 달빛이 없다 처녀지에서 누구라도 잡고 말 걸고 싶은 간절함으로, 구관조처럼 금속성 목소리를 잘도 복창해도 눈밭이다
나를 먼저 발견한 것은 고라니, 헤드라이트 빛 속에 갇혀 있다 덫을 놓은 것도 아닌데 눈빛에 내가 걸려 있다 흔들리는 내비가 있다 탱자가시 같은 질 감, 막다른 골목의 생각 속으로 먼 나라의 눈이 내린다
사랑 그리고 헛몸이라는 역설 -한용국 (시인)
사랑이란 무엇인가? 진혜진 시인의 시 「조롱박」에 따르면 그것은 헛몸 인 동시에 한 몸이다. 흔히 연리지는 사랑에 비유된다. 뿌리가 다른 나뭇 가지가 한 데 엉켜 마치 한 나무처럼 자라는 모습만큼 사랑을 잘 정의할 수 있는 말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연리지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어쩌 면 엉뚱하기까지 한 이 질문은 역설적으로 ‘사랑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 을 다시 떠오르게 한다. 진혜진 시인은 그 질문에 단호하게 ‘조롱박’이라고 대답한다. 왜 조롱박일까. 조롱박은 물이나 술을 담는 그릇으로 쓰이거나, 반으로 잘라 바가지로 쓰인다. 속을 파내거나, 반으로 잘라져야만 기능을 가진다. 그것이 반대말인 이유는 시에 따르면 ‘한 몸으로 태어난 두 개의 몸’이며, ‘미처 몰랐던 반쪽의 반쪽’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의 조롱박에 는 두 개의 몸이 만날 때 사랑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이 쪼개질 때 사랑이 시작되는 역설이 숨겨져 있다.
“생으로 쪼개질 때 당신에게서 흘러드는 나를 보았다”는 것이 바로 그것 이다. “내게서 등 돌리는 소리”를 들을 때, 오히려 ‘당신에게 흘러들다’니, 이별 앞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사랑은 얼마나 비극적인 것인가. 사랑한다 는 일은 두 사람이 서로 견디는 일인지도 모른다. ‘요가 자세’로 ‘물구나무’ 서 있다는 것은 그 견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를 암시하는 것이기
도 하다. 오로지 견뎌야만 할 때 서로에게 쏟아내는 말들, 그 “받아 삼키면 아픈 말들”은 결국 이별의 선택으로 귀결되고 만다. 그러나 바로 그 때 사 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달을 퍼 담던 약수터’에서 ‘막걸리집’까지가 이별의 거리이자 사랑의 거리일 것이지만, 한 번 ‘엇갈린 길’은 영원히 엇갈린 길 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끝내 “우리임을 증명할 수”조차 없게 되어 버렸다. 그렇게 ‘저잣거리에서 술어 젖어 늙어가는’ 일은 그 온전한 사랑의 기억을 평생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삶이다.
이렇게 시를 읽어가다 보니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우리는 누 구인가’라는 질문으로 바뀌어 있다. 시인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헛몸’이다. 원래는 한 몸의 조롱박이었으나, 어느 사이에 “저잣거리에서 술에 젖어 늙 어가”는 반쪽을 잃어버린 ‘표주박’인 것이다. “텅 빈 속을 채우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이유는 ‘조롱박’의 기억, 즉 한 몸이었던 온전한 전체로서의 기 억 때문이다. ‘몸’은 사라지고 ‘헛몸’만 남아있다. 그것이 몸이든 뚜껑이든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아니 ‘뚜껑’으로 다시 만났을 때, 거기에는 몸의 ‘형상’만 남아있다. 그것이 바로 헛몸이다. 사랑이 사라진 자리에 사 랑의 텅 빈 형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렇게 사랑은 끝없는 부재증명으로 서만 존재한다.
다른 시 「화살표」는 그 헛몸이 살아가는 삶의 실존으로 읽힌다. 틀린 길 을 가리키는 내비를 어긋난 사랑의 은유라고 읽어도 될까. ‘헛몸’이 믿고 있는 ‘목소리’는 언제나 잘못된 방향을 가리킬 뿐이다. 그 믿음마저 온전한 것이 아니므로 떠도는 헛몸의 삶의 종착지는 언제나 ‘막다른 골목’일 뿐이 다.
표면적으로 이 시는 잘못된 내비의 방향지시로 인해 전혀 뜻하지 않은 장소에 이르게 된 체험을 서술하고 있다. 시의 화자가 찾아 나선 곳은 “사 라진 목책을 달빛이 넘어가는 710번지 귤밭”이다. 한 번 방향을 잃은 내비 는 끝없이 금속성 목소리를 간절하게 복창하지만, 결국 눈밭에 이르고 만 다. 얼핏 보면 별것 아닌 상황이지만, 어딘가 어긋남이 존재하고 있다. 첫 번째는 내비 그 자체의 분열된 목소리다. “믿음을 놓치자 믿음이 저 혼자 귤밭을 찾아”나선다. 앞의 ‘믿음’과 뒤의 ‘믿음’ 사이의 간극을 비약해서 ‘헛 몸’과 ‘몸’의 간극이라고 불러도 될까. 여기에 하나 더 생각해 볼 것은, 내비 의 목소리인 ‘믿음’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다. 시의 첫 행에서 “목소리 가 두 손을 붙들고 간다”고 썼다. 시적 화자는 잘못된 내비의 방향지시로 인해 우연히 겪은 사건으로 인해, 자신의 분열을 느닷없이 자각하게 된 것 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두 번째의 분열이 존재한다. 말하자면 중층적 분열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도착하게 된 눈밭에서 시의 화자가 발견한 것은 ‘고라니’ 한 마리 다. ‘고라니’는 헤드라이트 빛 속에 갇혀 있다. 하지만 갇힌 고라니의 눈빛 에 ‘나’와 ‘목소리’도 갇혀 있다. ‘고라니’는 아마도 어긋난 사랑의 기원을 상 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겠지만, 그 분열은 무한을 표상한다. 거울과 거울 사이에 앉아 거울을 바라보라, 무한히 반사되는 자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무한이야말로 우리가 삶에서 마주치는 막다른 골목이 아니면 무엇일 건가. 거기서 화자는 ‘먼 나라의 눈’을 맞고 있다. 어쩌면 그 시간만 이 ‘탱자나무 가시 같은 질감’으로 떠도는 헛몸이 잠시 헛몸이기를 멈추는 시간일 것이다
2017 시산맥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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